<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치숭(致崇, 穉崇) |
호 | 우헌(于軒) |
본관 | 재령 이씨[1] |
출생 | 1845년 |
경상도 영해도호부 오서면 오촌동 (現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오촌리 234번지) | |
사망 | 1927년 9월 29일[2] |
묘소 | 경상북도 청송군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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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숙종 때 이조 참판을 지낸 이현일의 형 존재(存齋) 이휘일(李徽逸)의 8대 주손(胄孫)이다.
2. 생애
1845년 경상도 영해도호부 오서면 오촌동(現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오촌리 234번지)에서 아버지 이담영(李聃榮, 1820 ~ 1848. 6. 8.)과 어머니 고성 이씨(1816 ~ 1868. 12. 26.)[3] 사이에서 1남 3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1878년(고종 15) 1월 25일 철폐된 서원을 복구해 설립하라는 명을 내려 주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리는 데에 참여했고, 1886년(고종 23) 흥선대원군의 유폐와 관련된 상소를 올렸다가 함경도 명천도호부(現 함경북도 명천군을 거쳐 길주목(現 길주군)에 유배되었고, 1890년(고종 27) 1월 29일 석방되었다.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여러 고을에 통문을 돌려 의병을 일으킬 것을 촉구하였다. 1896년 1월 22일에는 안동부 영해군(現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에서 집강소(執綱所)를 조직했고, 2월 11일 집강소를 의병부대로 전환해 의병장에 추대되고 이른바 영해의병진을 창설했다. 이후 영해군과 영덕군을 거쳐 안동군에 집결했으나 2월 18일 고종의 의병 해산 조령에 따라 의병진을 해산했다.
이후 은거하다가 1927년 9월 29일 별세했다.
199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