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e30a17><colcolor=#fff> 파샤 이스마일 엔베르 اسماعیل انور پاشا | Ismail Enver | ||
출생 | 1881년 11월 22일 | |
오스만 제국 코스탄티니예 | ||
사망 | 1922년 8월 4일 (향년 40세) | |
부하라 인민 소비에트 공화국 БНСР | ||
국적 | [[오스만 제국| ]][[틀:국기| ]][[틀:국기| ]] | |
학력 | 오스만 제국 전쟁대학교 | |
직업 | 군인 | |
복무 | 오스만 제국군 (1903~1918) | |
최종 계급 | 준장 | |
참전 | 청년튀르크 혁명 발칸전쟁 이탈리아-튀르크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내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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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만 제국의 군관이자 정치인이다.2. 생애
1881년에 코스탄티니예에서 가가우즈인 부친과 알바니아인 모친 사이에서 태어났다. 청년 튀르크당 출신의 신진 세력으로 1908년 쿠데타에 참여했다. 그 이후엔 이탈리아-튀르크 전쟁, 발칸 전쟁에 참전했으며, 1913년 1월 23일 또 한번의 쿠데타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까지 국방장관을 역임하며 오스만 정국의 실세로 군림하였다.사실 전쟁 이전에는 꽤 유능했으나, 전쟁 이후 보여준 국방장관으로서의 행적은 무능 그 자체. 이 때 저지른 결정적인 실책들은 두고두고 튀르키예의 역사에 악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중립을 유지하고자 했던 정부 내 여론을 무시하고 친독파로서 동맹국 측으로 참전하는 독단을 저지르고는[1] 러시아 제국이 빼앗아간 영토를 되찾는다면서 한겨울에 캅카스 산맥을 넘어 러시아를 침공하려는 괴랄한 뻘짓을 하며 벌인 사르카므쉬 전투[2]에서 대참패하여 동아나톨리아를 러시아군에게 내주고, 수에즈 운하를 노린답시고 팔레스타인에서 시나이 반도 쪽으로 계속 공세를 하다가 말아먹고, 쿠트 전투에서의 승리로 잘 방어하고 있던 메소포타미아 전선 역시 말아먹으며 캅카스와 팔레스타인, 메소포타미아 삼면에서 다굴당하는 상황을 맞이했고, 결국 제국의 붕괴를 초래하였다. 갈리폴리에서 영국 해군성 장관 나으리의 뻘짓과 엔베르의 청년 튀르크당 동료이자 정치적으로 대립하던 무스타파 케말의 분전이 아니었으면 오스만은 원 역사보다 훨씬 빨리 무너졌을 것이었다. 그러자 엔베르는 이 모든 것이 아르메니아인과 그리스인, 아시리아인 등 소수민족들이 제대로 협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망상에 빠져 이들을 모두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오스만 제국이 제1차 세계 대전 때 패망하자, 그는 범투란주의에 빠져 여러 동기들[3]을 설득하여 카자흐, 우즈베크, 위구르 등 중앙아시아와 몽골까지 이르는 광활한 튀르크 제국 건국 운동에 박차를 가하려고 했으나, 반대파인 무스타파 케말 등과 갈등을 빚는다. 결국 반대파들은 그와의 관계를 끊었고 엔베르는 혼자 러시아 내전인 한창인 중앙아시아로 건너가 반 러시아 이슬람 운동인 바스마치 운동(Басмачество)에 가담했다. 하지만 거기서도 현지 세력들과 갈등을 빚던 와중 중앙아시아를 평정하러 남하한 적군에 의해 전사한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그를 죽인 적군 부대의 지휘관이 바로 그가 학살을 명령한 아르메니아인이라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사필귀정인 셈.
그리고 엔베르의 범투란주의 계획을 반대한 반대파들은 튀르키예 공화국 건국의 주역이 되었고 그들을 이끌던 엔베르의 동기 무스타파 케말은 튀르키예 공화국의 국부 아타튀르크가 된다.
3. 여담
- 제1차 세계 대전 마지막해에 조지아의 항구 바투미에서 열린 흑해 평화회담에 엔베르 파샤가 등장하는 희귀한 영상이 공개되었다.#
- 엔베르 파샤를 찬양하는 노래도 있다.#
- 군사 퍼레이드를 사열하는 영상이 유튜브에 있다.#
4.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4.1. 코르토 말테제
국내에서도 정식 번역되어 나온 바 있는 "사마르칸트의 황금궁전"에서 이 부분을 다룬다. 1921년 오스만 제국을 우연히 들르다가, 당시 연합군에게 지배당하던 이스탄불 및 여러 오스만 제국 상황에서 오스만 제국 장교들과 얽매이게 된 주인공 코르토 앞에서 오스만 장교들이 엔베르와 케말파로 나누어 갈등을 빚다가 그냥 엔베르 지지파가 케말 지지장교를 쏴 죽인다.
그리고 우즈베키스탄에까지 이르는 모험에서 엔베르가 다시 등장한다. 여러 지역에서 나름 노력을 했지만 이미 중앙아시아는 수백년 전부터 러시아에 지배 받는 상황이라 예전의 유목제국들처럼 강력한 힘을 보여주지 못했고 현실적으로 엔베르의 운동도 한계점에 다다르자 그의 부하들은 줄어간다. 결정적으로 아르메니아 공산당 군단의 공격을 받아 자신의 부대가 포위당하는 일이 발생한다.
당시 아르메니아 공산당은 붉은 군대의 도움을 받고 있었으며(소련이 성립되자 정식으로 아르메니아군은 붉은군대에 편입된다), 엔베르를 공격한 부대는 붉은군대의 명장인 미하일 프룬제가 이끄는 부대였다. 1922년 당시 붉은군대는 러시아 제국군의 유산을 거의 흡수하여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이후 독립했던 러시아 내 소수민족의 국가들을 다시 병탄하고 있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허황된, 하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꿈을 가슴에 담은 채 아르메니아군을 향해 말을 타고 돌격했고 기관총 세례를 받아 말에서 떨어져 사망한다(병사들이 그의 시체를 보고 멀리서 죽었다는 신호를 보낸다).
4.2. Payitaht: Abdülhamid
압뒬하미트 2세를 다룬 드라마에서는 귀싸대기를 맞는 장면이 있다.
[1] 다만 이것에는 영국의 뻘짓도 한 몫을 했는데 본디 오스만에 넘겨야 했던 군함을 처칠 주도하에 날치기 해버린 것... 이후 처칠은 갈리폴리에서 오스만의 군함을 빼앗은 대가를 제대로 치르게 된다.(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독일과 오스만이 비밀조약을 맺은 것이 있었고 영국이 그걸 눈치채고 군함을 압류조치 한 것이라는 설도 대두되고 있다.)이런 일을 당했음에도 술탄은 중립을 지키려 했지만(사실 오스만의 문어발적 행보가 이전부터 영국의 감정을 상하게 했던 것도 있었기에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독일이 그럼 자기 군함을 주겠다고 하면서 그걸 끌고 코스탄티니예까지 쳐들어와 함포를 눈앞에 대고 사실상 협박을 가했기에 동맹국 합류 건에 대해선 엔베르가 마냥 잘못했다 볼 순 없다. 눈앞에서 무기를 들이대고 있는데 거기서 상대 말 안듣는다고 했다가는 어떻게 되겠는가...[2] 1914년 12월부터 1915년 1월 사이에 있었던 사르카므쉬 전투(Sarıkamış Muharebesi)에서 험준한 캅카스의 지형과 혹한의 겨울철 날씨, 거의 없다시피한 오스만군의 보급과 부대 간의 연락 불통, 그리고 엔베르의 무작정 닥돌 전술 고집이라는 환장할 콤보로 오스만은 단 4일 만에 10만 명에 달하는 병력의 80%를 잃는 대패를 당한다. 그나마 비틀리스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러시아의 전진을 저지할 수 있었다.[3] 메흐메트 탈라트 파샤, 아흐메트 제말 파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