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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6-05-09 09:59:59

이애


1. 개요2. 생애

1. 개요

고려 말 선비이자, 조선 초기의 문신. 초명은 이백경(李伯卿)·이저(李佇), 본관은 청주(淸州), 호(號)는 산남(山南)이다. 이거이(李居易)의 장남이자 태조(太祖)의 부마.

2. 생애

조선 개국 이전의 행적은 아직도 거의 전하지 않으며 1390년 음서로써 고려국 예문관 예하 강독관 직에 천거되었다. 그 후 1392년 조선국 창건을 목도하였고 1396년 3월 군자감승(軍資監丞)으로 재직 중 태조장녀와 결혼해 부마가 되었으며, 5월 상당군(上黨君)으로 봉해졌다. 1398년 8월 제1차 왕자의 난에 참여했으며, 9월 상당후(上黨候)로 고쳐 봉해지고 정사공신에 책록되었다.[1] 이 무렵 이름의 '경(卿)' 자가 정종의 휘(諱)[2]를 범하므로, 이저(李佇)로 개명했다.[3] 이듬해 대간의 건의로 종친과 훈신(勳臣)이 여러 도의 군사를 나누어 맡게 되었는데, 이때 경상도·전라도를 맡았다. 1400년 1월 제2차 왕자의 난에 참여했으며, 2월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좌군도절제사(左軍都節制使)로 임명되었다. 5월 영완산부윤(領完山府尹)으로 폄척(貶斥)되었다가 9월 소환되었다.[4] 태종이 즉위한 후인 이듬해 1월 15일 좌명공신 1등으로 책록되었으며, 1월 25일 공(公)·후(侯)·백(伯)의 봉작이 혁파되자 다시 상당군으로 고쳐 봉해졌다. 3월 문하부우정승(門下府右政丞) 하륜이 이저의 아버지인 문하부좌정승(門下府左政丞) 이거이를 면직시키기 위해 자신이 먼저 재이(災異)를 칭탁하고 사직을 간청했다. 이에 왕이 이거이를 계림부윤(雞林府尹)으로 내보냈는데, 이저 역시 이때 완산부윤(完山府尹)으로 내보내졌다. 1402년 7월 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로 임명되었으며, 11월 판승추부사(判承樞府事), 12월 좌군도총제(左軍都摠制)를 겸했다. 이듬해 6월 사직을 청했으나 윤허받지 못했으며, 10월 왕에게 자신의 조부인 형부상서(刑部尙書) 이정(李挺)의 시호를 청해 문간(文簡)이라는 시호를 받아냈다. 1404년 6월 천변지괴(天變地怪)로 하륜·성석린·이직과 함께 치사(致仕)를 청해 파직되었다. 10월 18일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이거이가 반역 혐의로 탄핵을 받자 그와 함께 고향인 진주로 돌아갈 것을 명받았으며, 10월 24일 자손이 금고(禁錮)형에 처해졌다. 11월 함주(咸州)로, 이듬해 2월 이천(利川)으로 옮겨서 안치되었다가 6월 소환되었다. 그러나 같은 달 스스로 진주로 돌아갔다.

이후 임강(臨江)으로 옮겨서 안치되었다가 1410년 7월 소환되어 다시 상당군으로 봉해졌으며, 9월 세자의 휘[5]를 피해 개명할 것을 청했으므로, 이애(李薆)라는 이름을 받았다. 1412년 이거이의 상을 당해 진주에 있다가 1414년 향년 52세로 졸했다. 시호는 경숙(景肅)이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