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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2-06 21:32:35

이유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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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찬성|{{{#f0ad73 조선 우찬성}}}]][br]효정공(孝貞公)[br]{{{+1 이유승}}}[br]李裕承'''
출생 1835년
사망 1905~1910년?[1]
시호 정헌(靖憲) → 효정(孝貞)
본관 경주 이씨
경선(景先)
조부 이정규 - 강원도 관찰사
부친 이계선 - 사간
배우자 전처: 동래 정씨 - 정순조[2]의 딸
자녀 이건영 - 독립유공자
이석영 - 독립유공자
이철영 - 독립유공자
이회영 - 독립유공자
이시영 - 독립유공자, 대한민국 부통령
이소영[3]
이호영 - 독립유공자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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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대한제국의 문신. 자는 경선(景先), 시호는 효정(孝貞). 선조조 영의정 오성부원군 문충공 백사 이항복의 9대손[4]이다.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6형제의 아버지.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이 다섯째 아들이다.
대한민국의 독립운동 명문가
우당 이회영 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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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000,#ddd> 성명 서훈 내역 비고
첫째
이건영
건국훈장 애족장 (1999)
이규룡 건국훈장 애국장 (1990) 이건영의 장남
둘째
이석영
건국훈장 애국장 (1991)
이규준 건국훈장 애족장 (2008) 이석영의 장남
셋째
이철영
건국훈장 애국장 (1991)
넷째
이회영
건국훈장 독립장 (1962)
이은숙 건국훈장 애족장 (2018) 이회영의 처
이규학 대통령표창 (1982)
건국훈장 애국장 (1990)
이회영의 차남
장해평 건국훈장 독립장 (1963) 이회영의 차녀
이규숙의 남편
이규창 건국훈장 독립장 (1968) 이회영의 3남
다섯째
이시영
(대한제국) 훈3등팔괘장 (1910)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1949)
초대 부통령
이규창 건국포장 (2008) 이시영의 장남
여섯째
이호영
건국훈장 애족장 (2012)
조정구 건국훈장 애족장 (2019) 이규학의 장인
정이형 건국훈장 독립장 (1963) 이규창의 장인
신익희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1962)
국민훈장 무궁화장 (1962)
매제 신재희의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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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1835년(헌종 1) 출생하였다.

1883년(고종 20) 이조참판, 1888년(고종 25) 한성부판윤, 1889년(고종 26) 영조대왕옥책문 서사관, 1890년(고종 27) 4월 국장도감 제조, 동년 6월 예조판서[5], 동년 10월 형조판서를 지냈다. 1891년(고종 28) 한성부판윤, 1892년(고종 29) 선조대왕옥책문 서사관, 1883년(고종 30) 공조판서, 1884년(고종 31) 4월 형조판서, 동년 6월 교정청 당상, 이조판서, 동년 7월 우찬성 등을 역임했다. 이후 1895년(고종 32) 중추원 1등의관(칙임관 4등), 1898년(고종 35) 궁내부 특진관(칙임관 2등), 1899년(고종 36) 장례원 경, 궁내부 특진관, 1900년(고종 37) 창덕궁선원전제1실상량문 서사관, 1904년(고종 41) 태의원경 등을 역임했다.

1905년(고종 42)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을 반대하는 소를 올리기도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금 일본과의 조약에 대한 말을 듣고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가슴이 떨려서 자리에 누워 눈물만 흘리는데 죽은 곳을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어쩌다 다행히도 해당 조약이 폐하의 재가를 거치지 않았고 여러 신하들의 상소가 연속 올라와 쌓여 아마도 폐하의 뜻이 확고해지고 분연히 결단하여 이미 가버린 천명을 도로 맞게 되고 망해가던 나라의 형세가 회복되게 되었는데 뜻밖에도 외부 대신(外部大臣) 박제순(朴齊純)을 의정 대신 대리로 임용하였습니다.

아! 저 박제순으로 말하면 얼이 빠져서 충성과 반역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나라를 팔아먹은 것을 달게 여기며 저들의 첫 앞잡이로 된 자인데 마치 공로를 세운 사람에게 표창이나 하는 것처럼 지금 외부의 사무를 그냥 보게 하고 정사의 으뜸이 되는 벼슬을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일 조인에서 '가(可)'라고 쓴 역적들도 장차 높은 벼슬에 등용될 것이니 영영 여러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거듭 큰일을 그르칠 것입니다. 폐하는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이 무리들의 독살스러운 손에 떠맡겨 제멋대로 끊어버리도록 하는 것을 어찌 차마 할 수 있겠습니까?

원컨대, 폐하는 여러 신하들의 의견을 따라 '가(可)' 자를 쓴 역적들을 나라의 법으로 다스리고 일을 해낼 만한 사람을 다시 선발하여 준엄한 말로 조약을 물리친다면 나라의 권위가 보존되고 나라의 법이 시행될 것입니다."
1905년(고종 42) 11월 25일, 이유승의 상소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1] 1910년 경술국치 직후 아들들인 이회영 6형제가 일가를 인솔하여 만주로 이주할 때 특별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을 보면 1905~1910년 사이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2] 고종 때 이조·예조·공조판서.[3] 요절.[4] 운손자(雲孫子)라고도 한다.[5] 동년 8월 의주(儀註)의 착오로 파직되었으나 산릉의 공사를 늦출 수 없다 하여 3일만에 특별히 용서받고 예조판서에 유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