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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준혁 vs 이종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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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양준혁 & 이종범.png

1. 개요2. 상세3. 여담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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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양준혁이종범의 라이벌리를 다룬 문서.

2. 상세


일본 프로야구 기록을 무시한다면 통산은 양준혁이 뛰어나고[1], 전성기는 이종범[2]이 우위이다.

93~97 이종범이 유격수로써 신의 성적을 찍을 시절 그와 야수로서 유일하게 대항할수 있던 대항마가 양준혁 뿐 이었다.

파일:양준혁vs이종범_5년차까지.png

주로 외야와 1루, 지명타자로 나와서 수비지표가 낮은 양준혁에 비해, 이종범은 93~97시즌 유격수로 다섯 시즌을 뛰었다. 또한 주루 스탯의 차이도 있기에 이종범은 커리어하이 WAR(96양준혁 8.56 / 94이종범 11.77)에서든, 데뷔 후 5년차까지의[3] 합산 WAR(양준혁 34.48 / 이종범 42.16)에서든 양준혁보다 우위에 있다. 게다가 이종범은 95시즌에 방위 복무로 인해 규정상 홈 경기에만 출전이 가능하여 반 시즌을 손해보았는데도 WAR에서 상당한 우위를 점하고 있다.[4] 이뿐 아니라, WAR을 좀더 살펴보면, 양준혁의 개인 커리어 최고 WAR은 96년 기록한 8.56이며, 97년 8.17과 더불어 유이하게 8점을 넘겼다. 반면 이종범은 94년 기록한 11.77 및 97년 기록한 9.70과 96년의 9.52로 WAR 9.0을 3회 넘겼다. 당시 양준혁의 타석 수가 적어서 누적 스탯이 비율에 비해 나쁘다는 건 감안해야 겠지만, 이종범이 팀에 더 많은 승수를 가져오는 선수였다는 건 숫자로 입증되는 것이다. 특히, 이종범은 타격,주루가 뛰어나 그 당시 KBO보다 한참 수준이 높던 일본프로야구의 관심을 받았던 것이다. 이는 단지 포지션 차이에서만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

또한, 일본 프로야구에서 이종범이 WAR 5가 넘는 성적을 거두었음#에 비해, 양준혁은 상위 리그에 진출하지도 못했고, 신빙성이 상당히 의심되는 메츠 입단 제의서만을 공개했다는 점을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반면에 결국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KBO리그에서의 통산기록에서는 양준혁이 이종범보다 우위에 있다. 양준혁이 통산 WAR(87.22 vs 67.74), wRC+(160.0 vs 126.1)에서 모두 우위이며, 특히 이종범의 일본에서 KBO 복귀 후에서는 WAR에서 크게 앞선다.(37.83 vs 25.60) 특히 이종범이 2005 시즌을 마지막으로[5] 급격한 하락세에 처한 반면, 1살 더 늙은 양준혁이 2009년까지 좋은 비율스탯을 올린 점에서 꾸준함은 확실히 양준혁의 우위이다. 특히 이는 이종범이 도저히 선수로 써먹을 수 없는 기록을 남긴, wRC+ 8.0의 기록을 남긴 2007 시즌을 보면 두드러진다.

단, 주의해야 할 점은 이런 이분법적 평가 때문에 양준혁의 전성기 성적과[6] 이종범의 꾸준함을[7] 과소평가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종범 vs 양준혁 라이벌리가 워낙 관심을 가지다보니 한쪽의 비교열위를 폄하하는 쪽으로 논쟁이 탈선하는 경우가 자주 있는데, 스탯을 조금만 찾아봐도 알겠지만 상대에게 비교 열위에 있는 분야에서조차 두 선수 모두 굉장했음은 틀림없다.

결국, 통산 성적을 중시하는 사람은 양준혁을, 상위리그 진출 여부 및 활약, 그리고 더 뛰어난 전성기[8]를 중시하는 사람은 이종범을 우위로 평가한다고 보면 된다.

3. 여담

4. 관련 문서


[1] 양준혁 통산 KBO 타자 WAR 2위, 이종범 타자 6위[2] 144경기 환산 없이도 best1~7시즌까지 모두 역대 kbo WAR 1위. 144경기 환산 시 격차는 더 벌어진다[3] 6년차에 이종범이 일본 진출.[4] 참고로 95시즌 이종범은 63경기만 뛰고도 WAR를 무려 5.03이나 찍었다.[5] 이 시즌 후로 다시는 wRC+ 100을 넘지 못했다. 반면 양준혁은 은퇴 시즌을 제외하면 한 번도 100 밑으로 떨어지지 않았다.[6] 전성기에 야수로서의 종합적인 평가에선 이종범에 밀려도, 방망이만 놓고 보면 커리어하이 심정수(2003년 wRC+ 210.7)와 이승엽(2002년 wRC+ 198.5)을 가져와도 밀리지 않는 선수가 양준혁이다.(1993년 wRC+ 212 / 1996년 wRC+ 207) 다만 양준혁의 플레이스타일이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고 훗날 세이버메트릭스로 분석해보니 진가가 드러난 유형이라서, 당대의 스타성과 현장의 평가로는 타격에서마저 2인자 이미지가 강했다. 심지어 양준혁 본인조차 자신을 동시대 스타들보다 항상 저평가했으니 말 다한 셈.[7] 마흔 넘어서까지도 꾸준했던 양준혁에 묻힐 뿐, 이종범은 한국 복귀 후 은퇴 때까지 스탯티즈 기준 연평균 WAR 2.3을, 36세인 2005시즌 까지만으로 한정하면 연평균 WAR 4.79를 찍은 매우 꾸준한 타자이다. 대체적으로 36세 부근에서 노쇠화가 시작하는 것을 생각하면, 이종범은 36세 이후 너무 커리어에 비해 정말 추하게 못했을 뿐이지 결코 짧은 전성기만 아름답던 선수가 아니었다.[8] 간혹 김상현이나 이현곤 등의 플루크 사례를 가져오면서 전성기에 대한 평가를 폄하하는 케이스가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의 일부 커뮤니티 등에서만 오로지 통산 성적을 찬양해서 생긴 문제일 뿐, 어느 종목, 어느 나라를 가도 전성기의 지배력을 단순 통산보다 우위로 본다. 심지어 같은 야구인 MLB마저도. 임팩트가 뛰어난 선수들이 누적도 좋은 것일 뿐. 당장 본문의 이종범도 임팩트의 대명사지만 통산 누적 war도 kbo 역대 8위로 최상위권이다.[9] 사실 이 멘트는 이승엽에게 더 어울리는 멘트긴 하다. 8년을 나가있었는데도 지금의 통산이다.[10] 누적 기록은 몰라도 이종범이, 98~01의 타고투저때 30-30은 한두번쯤 더 했을 수도 있긴 했다.특히 팬들은 30-30을 3명이나 달성한 99년(제이 데이비스, 이병규, 홍현우)에는 40-40을 달성했을 거라는 드립을 치기도 했다. 99년에 30-30을 달성했다면 2루수였던 홍현우와 30-30 키스톤이 되었을 것이다. 추가로 99년은 양준혁이 유일하게 해태에서 뛰었던 해로, 이종범과 양준혁이 모두 해태에서 뛰는 걸 보게 되었을 수도 있었다.[11] 정확히는 외손자. 사위가 고우석이니, 실제로 임신한 사람은 이종범의 딸이 된다.[12] 게다가 1996년에 삼성은 6위에 그쳤다.[13] 양준혁의 상세한 답은 본 페이지 두번째 영상인 전설의 타이거즈 13편 2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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