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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4 18:38:12

이종범/플레이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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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타격3. 주루4. 수비
4.1. 유격수 수비력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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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 마디로 요약하면 자신의 뛰어난 신체능력[1]을 십분발휘한 완전체형 리드오프이자 KBO 최고의 5툴 플레이어였다.[2] 전성기 이종범은 거의 모든 툴이 20-80 스케일에서 70-80을 받았다고 볼 수 있으며 특히 파워가 70, 컨택이 80이고, 주루가 80+[3]인 유격수 포지션에서 파워 70, 컨택 80, 주루가 80+를 찍는 선수는 한국 야구는 물론이요 메이저를 통틀어서도 매우 드문 유형의 선수다.

다만 기본적으로 툴과 운동능력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유형이었기에 부상과 노쇠화를 비교적 강하게 맞은 선수였다고 할 수 있다. 일본진출 전 이종범은 한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임팩트를 자랑하는 야수였으며, 2024년의 김도영 수준의 활약을 매시즌 보여주던 어마무시한 유격수였다.
타이거즈 전설들이 말하는 이종범

2. 타격

주루를 제외한 타격만 본다면, 전성기 시절 이종범은 최근의 야구팬들이 지닌 똑딱이 이미지와 달리[4] 뛰어난 컨택트 능력을 바탕으로 한 중장거리 타자였다. 당시 이종범은 몸 전체를 강하게 회전시키는 타격폼을 바탕으로 한 특유의 빠른 배트 스피드#와 타고난 손목 힘으로 인해 빠른 공 대처에도 능숙했으며,[5] 이를 바탕으로 한 당겨치기로 장타 역시 많이 생산해내는 타자였는데, KBO 데뷔 후 2004년까지 매 시즌마다 두 자릿수 홈런과 평균 5할의 장타율을 기록했다.[6] 특히 홈런의 경우 매년 10에서 20개 안팎을 기록해, 단순 수치만보면 장타 좀 있는 리드오프로 오해하기 쉬우나, 하필 그의 전성기가 KBO에서 손꼽히던 투고타저시즌이었기 때문에 저평가 되는 경우가 있다. 그는 1993년부터 데뷔 후 시즌 홈런 순위를 4위-4위-9위(홈경기만 출장)-3위-2위로 기록하면서 매 시즌마다 홈런 5위안에 드는 장타력을 과시한, 그야말로 호타준족이라는 명칭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선수였다.[7] 거기다 일본에 가기전 바로전 시즌인 1997년에는 장타력도 폭발해 거포의 정석인 30홈런을 찍었다. 이종범이 1번타자임에도 가만히 볼을 지켜보기보다 굉장히 적극적인 타격에 임했던 이유도 다름이 아닌 리그 최상위권의 타격실력을 가진 타자였기 때문이었다. 이는 이종범의 볼넷과 고의사구 비율에서 드러나는데, 이종범이 1993년부터 1997년까지 누적 볼넷 수가 265개로 같은 기간 리그 전체 4위를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특기할 점은 1번 타자임에도 고의사구가 65개로 김기태에 이어 2위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며, 더욱이 1997년에는 한 시즌 최다 고의4구 기록을 30개로 갱신하였고 현재까지도 이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다.[8]당시 투수들은 1루에 가면 득점을 만들어버리는 그의 뛰어난 주루능력을 감안하더라도 고의사구를 줄 정도로 타석에서 상대하기 매우 껄끄러웠음을 드러낸다.[9]

또한 실패했다고 여겨지는 일본시절에도 첫해인 1998시즌엔 물론 부상 이후의 모습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지만, 부상당하기 전까지의 활약은 썩 나쁘지 않았다. 잠시 슬럼프에 빠지기 전인 6월 2일 기준 팀내 홈런 1위를 기록하고 있었으며, 홈런 억제력이 뛰어난 나고야 돔을 홈으로 쓰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상 직전인 6월 21일 기준 센트럴리그에서 홈런 9개를 기록, 10위 안에 드는 뛰어난 장타력을 보이고 있었다.[10] 부상 이후까지 포함해서 그 시즌 출전한 67경기에서 10홈런과 18도루를 기록하며 풀타임 출전시 20-20의 가능성을 드러냈고, 볼삼비 역시 1을 넘기며 선구안에도 큰 문제는 없었다. 부상 직전 볼넷 3위, 출루율 5위를 기록하고 있었을 정도. 링크 wrc+도 141로 리그 상위권이었으며 이는 규정타석을 30%이상 넘긴 선수 중 15위의 기록이다. 외국인 선수로선 4위였으며, 내야수론 전체 6위, 유격수론 압도적인 1위였다. war도 67경기를 소화한 것 치고 준수한 3.3이었을 정도. 링크

다만 이렇게 타격 기술보다 자신의 신체능력에 기반을 두었던 타격스타일은 야구선수 치고 왜소한 덩치를 가졌던, 그리고 왼손잡이임에도 우투우타로 야구를 해왔던 이종범 자신의 신체적 변화에 굉장히 민감한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일본에서의 부상[11]과 KBO 복귀 후 2002년도의 광대뼈 함몰 부상[12] , 2010년의 손가락 부상, 그리고 프로야구 인생 전체를 봤을 때, 04년 부터 서서히 찾아오던 노쇠화 시기를 보면 상당히 두드러진다.[13] 2006 WBC 후 노쇠화가 찾아오고 그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그는 과거의 자신의 배트스피드를 이용한 당겨치는 스타일을 버리면서 철저하게 컨택트에 초점을 둔 교타자에 초점을 두게 된다. 2008년부터 이종범은 기존의 보폭을 줄이면서 배트를 짧게 잡아 간결하게 때리는 방식으로 변화시키고, 번트나 팀배팅 등 적극적으로 작전야구를 구사하면서 노쇠화와 슬럼프를 어느정도 극복하는데 성공한다. 즉 전성기 때 이종범과 말년 노쇠화 이후의 이종범의 타격 스타일은 완전히 다른 선수라고 봐야할 정도[14]
이종범의 현역시절 홈런 모음

3. 주루

이종범의 현역시절 도루 모음

압도적인 주력과 독보적 주루 센스를 겸비한 한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주자이다.

모든 툴이 다 최고 수준이었으나 주루는 마치 채프먼 직구, 스탠튼 파워처럼 사실상 20-80 스케일 내에서 표현이 불가능한 선수이다. 이종범의 도루기록은 새삼 살펴볼 필요도 없을 정도로, 데뷔 첫해인 1993년부터 73도루로 1위인 전준호와 단 2개 차이였고, 1994년은 84도루로 2위인 유지현과 33개 차이일 정도로 압도적인 도루왕을 차지했다. 1995년에는 방위병 복무 때문에 홈 경기만 나올 수 있었음에도 32도루로 시즌 6위를 기록했고, 1996년과 1997년에도 57도루와 64도루로 도루왕 2연패를 차지했다.[15] 해태 시절 4.5년 동안 도루 수는 310개로 매년 5~80개를 기록한, 매우 뛰어난 주자였다. 일본 복귀 후에는 90년대보다는 도루 수가 절반 이상 줄긴 했으나 그래도 매년 TOP 6[16] 안에 들어갈 정도로 도루 능력은 여전했고 4년 동안 155도루로 동기간 2위인 김종국(131도루)과도 차이가 꽤 벌어진다. 참고로 그 김종국도 2001년 21도루(공동 7위), 2002년 50도루(1위), 2003년 31도루(3위), 2004년 39도루(4위)로 도루에는 일가견이 있는 선수이고 01-04 도루 3위 전준호와도 꽤 차이가 나는 편인데 이종범은 더한 셈.[17]

또한 이러한 도루의 영양가가 없었느냐면 그것도 아닌것이 평균 대비 도루 득점기여를 나타내는 RAA도루 부분이 스탯티즈 기준 통산 58.03로 압도적 1위[18][19], 심지어 94년에는 11.08을 기록하면서 단일시즌 역대1위에 올라와 있어 당시 이종범의 도루가 팀의 득점력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이었음을 나타낸다. 당시 이종범이 1루로 나가면 1점을 낸다.[20]라는 말이 허언이 아니었던 것. 도루 성공률도 우수한 편이라서 통산 도루 성공률이 81.9%로 200도루 이상 기록한 선수 중에서 유일하게 도루 성공률이 80%를 넘긴다. 100도루로 넓혀도 2022년 기준 아직 현역인 김혜성과 박찬호를 빼면 조동찬(83.8%), 강명구(82.2%) 2명뿐일 정도인데 이종범은 무려 500도루를 넘긴 선수인지라 100개대인 조동찬이나 강명구와 직접적 비교가 어렵다.[21] 보통 나이가 먹을 수록 발이 느려져서 도루 성공률이 떨어지기 마련이고, 특히 이종범은 마흔 넘게 뛴 선수라서 당연히 말년에 도루 성공률이 많이 떨어졌는데도 80%를 넘긴 것. 당연히 이종범도 사람이라서 마지막 6년 동안 38도루 17도루자 성공률 69.1%를 기록했으나 나이를 생각하면 그렇게 까먹은 편도 아니며 1993년부터 2005년까지 472도루 96도루사 83.1%를 기록했기 때문에 80%를 유지한 것. 심지어 2009년에는 만 40살에 가까워졌음에도 11도루 1실패 91.7%라는 경이로운 성공률을 기록했다.

이러한 도루 능력은 그의 뛰어난 신체 능력에 기인한다. 그의 달리기 능력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박명환의 인터넷 방송 채널 박명환야구TV에 나온 정수근의 말에 따르면 마치 치타처럼 촥촥 나가는 듯할 정도로 몸의 탄성이 대단했다고 한다. 관련 영상 실제 전성기시절 영상의 슬라이딩을 보면 몸이 탄력을 주체 못하듯이 베이스를 타고 넘어 미끄러져 가는 모습이 자주 나온다. 전성기시절 도루장면. 이러한 신체능력을 이용해 리드폭을 길게 잡으면서 우선적으로 이점을 확보했으며, 단순히 빠르게 달릴 뿐 아니라 상대 배터리의 타이밍을 뺏어내는 능력 역시 탁월해, 신체능력이 저하된 2009년에도 도루 성공율 90%에 이르는 저력을 드러냈다. 한 시즌 연속 도루 기록을 괜히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 것.[22] 실제로 방송에서 도루는 신체능력만으로 할 수 없기에 철저하게 시합 중 투수와 포수의 루틴을 파악하기 위한 연구도 계속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관련 영상

다만 일본프로야구에서는 98년과 99년 리그 도루 2위를 기록하면서[23] 나름 주루능력만큼은 어느정도 인정을 받았으나[24] KBO시절에 비해서 도루수나 성공율이 상당히 떨어졌다. 98년의 경우 올스타전 전까지 도루 1위를 기록하고 있었으나 부상으로 인해 2위에 그쳤다. 99년에는 Spd 7.2를 기록하면서 주니치를 리그 1위로 올려놓은 치고 달리는 야구의 일익을 담당하기도 했지만, 당시 원체 타격이 좋지 않아 도루 시도의 기회 자체가 줄어 성공률이 98년에 비해 1할 가까이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도루수에서는 손해을 입었다. 또한 타석에서의 부진을 만회하려다 무리한 주루플레이로 인해 KBO시절에 보기 힘들었던 주루사나 견제사를 당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다만 전성기 시절 특유의 몸을 내던지는 주루플레이는 여전했던 덕에 그나마 근성있는 플레이를 한다는 의견도 있었고, 당시 같은 팀 동료들이었고 리드오프 요원으로 기용되던 오오니시(98년), 세키가와나 후쿠도메(99~00년) 역시 이종범 못지 않은 도루실패와 주루사를 기록하곤 한데다[25] 일단은 주니치가 당시 리그 우승을 했기 때문에 그나마 크게 책잡히는 일은 없었다.

한국에 돌아 온 후 06년 즈음 말년에 들어서 신체능력이 저하되자 도루시도 자체를 자제하는 모습을 보이고, 실제로 왕년에 비해서도 도루사가 급격하게 늘어났다.[26]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루능력에 있어서 특유의 감각적인 센스에 노련미를 더한 추가진루나 슬라이딩 기술을 이용해 07년과 11년을 제외하면 늘 평균 이상의 주자로서 역할을 수행했다. 이종범의주루플레이 그가 타격이 부진했을 때도 외야수비와 동시에 주전으로 기용된 이유이기도 하다.

4. 수비

파일:external/ec75749bd94c22b816853cc0f0f367d1ec6ff7242dce04c91ad5d806986c549d.jpg
1996년 5월 22일 삼성전에서 포수로 투입된 모습.[27]

데뷔 때부터 일본 진출 첫해까지는 유격수로 뛰었으며, 부상 이후론 주로 좌익수로 나왔고 KIA 타이거즈로 돌아온 직후인 2001년엔 정성훈의 부상으로 공백이 생긴 3루수를 보았다. 2002년엔 우익수를 보았고 2003년부터 2006년까지 중견수를 보았다. 2007년부터 은퇴할때까진 대부분 우익수로 뛰었다. 내야수로는 661경기[28]를 소화했으며, 외야수는 1034경기를 소화했고 포수로도 2경기 출전한 전천후 야수였다.

이종범의 천재성을 드러내는 일화 및 기록으로 투수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으로 출전한 기록이 있다. 3루수 77경기, 2루수로 3경기, 1루수로 32경기,[29] 포수로 2경기.[30] 참고로 일본프로야구에서도 전 포지션에서 활동한 선수는 딱 두 명이다. 이에 전 포지션 출장 달성을 위해 구단 측에서 이종범의 투수 등판을 고려하기도 했으나[31], 2009년 11월 한 포털사이트와의 인터뷰에서 '기회가 된다면 마운드에 서고 싶으나, 상대팀 감독 심기문제도 있고 하니 무제한 연장제가 아닌 이상 이젠 어려울 것.'이라고 이야기한 것을 보면 그리 쉽지만은 않은 상황. 결국 은퇴식 때 시구자로 등판하는 정도로 마무리되었다. 한편 이 진기록 달성을 놓고 투수 등판 경험이 있는 최정과 경쟁 아닌 경쟁을 하기도 했지만, 외야수 경험이 없는 최정이기에 역시 전 포지션 출장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한편 2020년대 들어 점수 차가 많이 벌어진 경기에 야수를 투수로 등판시키는 일이 종종 생기면서 투수를 포함한 '내야 전 포지션 출장' 기록을 달성한 선수는 있다. 주인공은 노시환.

이종범의 KBO시절 유격수 수비는 빠른 발과 반응속도 덕분에 좌우수비범위는 압도적으로 톱클래스였지만 투박한 풋워크나 글러브질과 같은 기본기에서 비롯된 한계가 있었다. 엄청난 운동능력을 바탕으로 판타스틱한 호수비를 펼치는 것에 반면에 정면타구에 약한 편이라 전진수비 능력이 부족했으며 바운드는 거의 무조건에 가까울 정도로 뒤로 물러나서 포구한 후 강한 어깨 힘에만 의지하여 송구하는 식의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수비 방식 탓에 강한 어깨에 비해서 송구미스가 제법 있었다. 허나 활약할 당시의 수비가 워낙에 퍼포먼스가 강하고 화려했던 탓에 당시의 이종범 관련 기사에는 그의 수비력을 칭찬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당시 이종범의유격수 수비

이종범의 수비는 1993년 갓 데뷔 당시 기존의 류중일이나 김민호에 비해 사이즈가 크면서도 상당한 우위의 스피드로 수비해서 강한 송구로 보살하는 장면을 통해 신기한 수비로 센세이션을 일으켰었다. 상단의 기록원들의 인터뷰도 그런 부분에서 나온 것. 좌/우의 수비범위가 엄청나 타 유격수보다 한 두 걸음 뒤에 대기하다가 특유의 운동신경으로 좌/우로 빠져나가는 타구를 잡아 빨랫줄 송구로 연결시키는 등, 동시대 다른 유격수와는 수비 범위에서만큼은 비교가 불가능한 압도적인 우위를 가졌다. 이를 나타내듯. 일본에서도 1998년 유격수 수비 세이버 스탯을 보면 RF4.57, rRng3.1를 기록하였다. 당시 한국 야구보다 몇 단계는 위로 평가 받던 일본리그의 유격수들과 비교하여도 상당히 넓은 수비 범위를 보이고 있을 정도. 반면 류지현에 비해 수비 스타트가 느린 점, 정면 타구의 처리와 글러브질, 그리고 글러브에서 볼을 빼는 속도, 부정확한 송구라는 약점이 분명히 있었다. 단지 실책을 하더라도 그 전에 안타성 타구를 캐치하는 장면이나 주자가 세이프 타이밍임에도 강한 어깨로 아웃시켜 버리는 등 워낙 화려한 수비를 보여주었으며 또한 실책수를 '따위'로 만들어버릴만큼의 압도적인 공격력에 묻혀서 나쁜 평가를 받지는 않았다.

물론 자신의 강점은 강견이라고 자신있게 이야기할 정도로 40대에 들어선 후에도 송구능력은 발군이었다. 일본 진출 때도 이것을 어필했다고...[32] 이종범의 송구능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해태시절의 독특한 수비 포메이션이다.
파일:이종범송구.jpg

타구가 좌중간으로 떨어졌을 때 일반적인 중계플레이는 좌익수나 중견수가 잡아 내야수에게 던지지만, 해태는 유격수 이종범이 좌익수, 중견수 근처까지 달려가서 코 앞에서 공을 받아 이종범이 내야로 다이렉트 송구를 하는, 다른 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수비방식을 쓰기도 했다.

일본프로야구에서 KBO로 복귀 후 주 포지션으로 뛰게 된 외야수로서의 수비능력은 매우 수준급으로 평가 받았다. 일본에서 외야수 전향을 한 첫해[33]에는 강제로 전향되어 익숙하지 않은 포지션인 탓에 외야수로 7개의 실책을 범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적응해가며 2000년에는 호시노 감독도 인정할 정도로 괜찮은 수비능력을 보였고, KBO 리그 복귀 이후로는 2002년부터 외야수로 본격적으로 컨버전해 타고난 강견과 빠른 주력을 이용한 수비 범위, 주니치에서 외야수로 뛴 경험 덕에 금세 적응하여 국가대표 외야수로도 활약했다. 특히 전매특허인 강견 덕에 보살을 자주 잡아내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이종범외야수비장면한국 복귀 첫 해에는 앞서 언급한 것 처럼 정성훈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3루수로 주로 뛰었지만, 정성훈이 자리를 잡은 2002년부터는 중견수와 우익수를 오가면서 주로 활약했다.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야구 국가대표팀에서는 박재홍에 밀려 주로 우익수로 뛰었으나, 2006년 WBC에서는 주전 중견수로 활약하며 좋은 활약을 보였다. 그 이후로 국내에선 타격에 심각한 부진을 보이며 사실상 2006~07년에는 외야백업으로 전락했지만 수비능력 만큼은 그대로였기에 외야 수비를 위해 스타팅 멤버로도 출전했으며. 타격에서 다시금 어느 정도 활약을 보인 2008~09년엔 중견에 이용규, 좌익의 김원섭과 함께 기아의 준 주전급 붙박이 외야수로 활약했다.[34] 그러나 2010년 이후 리그에서도 상위권이던 수비력이 점차 떨어지게 되었나, 당시 기아에서 이런 이종범보다 수비가 나은 외야수가 없어서 결국 쓸 수밖에 없었다. 여하간, 유격수로서의 수비는 말이 많지만 외야수로의 수비는 딱히 흠잡을 곳이 없는 수준.[35]

4.1. 유격수 수비력 논란

파일:attachment/1000000007.jpg

먼저 정리하면 클래식 스탯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이종범의 실책의 개수를 들어 유격수 수비력이 나빴다고 보고 있지만, 세이버매트릭스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이종범의 유격수 수비력이 최고수준은 아닐지언정 나름 수준급이었다고 보기에 이러한 논란이 일어나고 있다. 때문에 세이버매트릭스가 야구계에서 중요해지면 중요해질수록 이종범의 수비력에 대한 재평가가 일어나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그의 커리어에서 유격수로서 소화한 시즌은 그가 한국프로야구에서 활약한 15시즌 가운데 93~97년의 5시즌, 그것도 95년은 방위복무로 인해 반쪽만 뛰었으니 정확히 4.5시즌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종범 하면 외야수보다도 유격수로서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데, 그 4.5시즌 그가 공수양면으로 남긴 족적이 워낙에 화려한 탓이다.[36]

하지만 수비의 경우엔 평가가 꽤나 갈리는 편인데, 이종범의 수비력에 대해서 논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이 바로 실책 개수. 93, 94, 97년도에 실책 1위에 랭크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93년과 94년도의 경우에는 기록원의 재량에 의해 결정되는 실책 개수로 수비력을 논하기에는 무리가 있는데, 이는 당시 기록원들이 인터뷰 '93년 이종범이 혜성처럼 나타났을 때부터 문제였다. 기존 유격수의 수비 범위와 송구 능력을 뛰어 넘는 이종범 때문에 실책과 안타의 기준이 헷갈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시기에 김제원 기록원은 '당시 이종범이 능력이 출중해 손해보는 일이 생겨 우리 내부적으로 회의를 많이 했다. 그래서 객관적인 기준을 다시 마련했다.'라고 언급하였었다. 또한 양준혁이 신인시절 자신의 타구가 안타가 아닌 에러로 기록되자 기록원실을 박차고 (말 그대로 문을 발로 차버리며)[37] 들어갔던 사건도 생겼던 터라, 기록 선진화 차원에서 94년의 회의 및 조정 과정을 거쳐 95년부터 에러 규정을 기존의 '건드리기만 하면 에러'가 아닌 기록원 판단하에 불규칙바운드성이나 말 그대로 안타성을 건드려서 튕긴공들은 안타로 처리하기로 바꾸었다. 이로 인해 방위병 제대후 제대로 된 풀타임이었던 96년에는 에러 개수가 많이 줄었지만 97년은 변명의 여지가 없이 실책 1위를 기록했다.[38]

이종범 수비 논란이 불거져 나온 뒤 이종범과 자주 비교되는 선수가 유지현이다. 고교 시절에 항상 비교되었던 것은 물론이고 국가대표 키스톤 콤비기도 하였기 때문. 주전 유격수를 이종범이, 2루수를 유지현이 보았다. 이는 유격수에서 이종범이 나았기 때문이 아니라 비슷한 타격능력을 보이는 수준이란 조건하에서 국가대표 2루수로써 이종범보다 유지현이 더 적합했기 때문이다. 어깨의 문제도 있었으며 푸쉬번트의 대처능력이 전진수비에 약한 이종범보다 유지현쪽이 더 우월했기 때문이다. 유지현은 이종범보다는 좁지만 그 역시 빠른 발을 이용한 좌-우 수비범위가 넓은 편이었다. 하지만 어깨부상으로 3-유간의 깊은 공을 캐치한 후 송구하는 것에는 다소 약점이 있었다. 1루수 서용빈의 포구능력이 아주 좋았기 때문에 원바운드 송구에 의존하는 경향이 컸었다는 점에서 이종범에 묻힌 케이스. 사실 수비이론적으로는 매우 당연하고도 다이렉트 송구보다도 효과적인 플레이었지만, 그 당시 국내의 야구 수준은 그러한 송구를 대단히 나쁘게 봤다. 어쨌거나 90년대 유격수로 활약했던 이종범, 유지현, 류중일, 김민호 등의 수비논란은 안정성, 수비범위, 송구 등에서 그들 모두 뚜렷한 특징이 있고, 수비 실력 판단이 주관적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우열을 확정하지 못하는 단계에서 끝나는 경우가 많지만 커뮤니티에서 수비논란이 본격적으로 불거지는 경우는 이들 중 억지로 한쪽을 추켜세우거나 깎아내리려다가 터지는 경우가 대부분. 매직글러브[39]를 유지현은 이종범이 일본으로 간 뒤부터 수상 받기 시작했다는 것도 생각해 볼 부분. 그리고 유지현 본인 역시 아이 러브 베이스볼의 한 방송 인터뷰에서 이종범의 수비가 자기보다 나았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러나 국대에서 2루를 보며 늘 선배인 이종범을 서포트하는 입장이었던 후배로서 한 말이니 예의상 코멘트로 이해해도 되겠다.

국내 정상급 유격수로 평가받던 박진만인터뷰에서 이종범의 수비에 기본기가 부족했냐는 질문에 "종범이형은 누구보다 화려한 플레이를 했지만 누구보다 기본에 충실했다. 어떤 공이던 잡으려고 애썼다. 그게 기본기다. 따라가 잡고 던지고 정확히 던지는게 기본이다. 잡지 않고 던질거부터 생각하고... 그건 아니다. 내 기준에서 종범이형은 누구보다 기본에 충실하려했던 유격수다."고 언급한 전력이 있다. 다만, 던질거부터 생각하고 수비하는 유격수라는 개념 자체가 현실에선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주자를 잡을 수 있을지 판단하기 보다 우선 잡고 던져서 아웃시키겠다는 이종범의 플레이스타일을 옹호한 것으로 보인다. 이종범은 던지지 않으면 호수비도 없으며 에러를 두려워하지 말고 잡아서 던지는 것이 좋은 수비라고 생각했다. 이는 주자의 상황을 판단한 후 던질 것을 요구하는 정석적인 수비와는 거리가 있다. 이종범의 야구관을 엿볼 수 있는 부분. 이후 NPB에 등장한 비슷한 수비방식을 가진 현재 일본 프로야구 최고의 스타플레이어 유격수인 사카모토 하야토도 실책을 두려워하는 소극적인 수비가 무슨 가치가 있냐며 반박하기도 했다.

대체적으로 타이거즈vs비 타이거즈 팬들의 구도로 타이거즈팬들은 언제나 실책으로는 수비력을 나타낼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비 타이거즈계열의 팬들은 실책 개수를 토대로 주장하는 구도로 나아간다. 정작 이종범의 수비가 형편 없다면서 끌어오는 김민호유지현 역시 이종범과 마찬가지로 20개 이상 실책 시즌이 3번이나 있었지만 김민재, 김민호나 유지현의 경우엔 그 당시 수비로써는 하향곡선을 지나쳐 최저점에 가까웠던 공필성/안경현/송구홍을 3루수로 두고, 2루수에도 수비가 좋지 못했던 박정태/이명수/이종열,박종호를 둔 것에 비해 이종범은 홍현우, 김종국을 두고 신경식 이후로 엄청난 학다리 포구를 보인 최훈재 등을 두고 수비한 결과 환경적으로 매우 유리하긴 했다. 다만 이는 너무 편향적으로 본 결과라고도 볼 수 있는데, 박정태는 통산성적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 수비가 나쁜 선수는 아니었다. 또한 박종호나 이종열의 수비도 나쁜편은 아니었다. 그렇긴해도 상대적으로 홍현우와 김종국에게 밀리는 감이 없지않은 것은 사실.

하지만 확실히 실책 개수만 가지고는 유격수의 수비력을 나타내기 힘든건 사실이다. 박진만도 데뷔 후 몇 년간 20개 안팎 또는 그 이상의 실책을 기록했으며, 메이저리그같은 경우에도 유격수는 수비율보다는 필딩범위와 런세이브[40]를 훨씬 더 높게 쳐주는 풍토가 존재하는데 1990년대 메이저리그 3대 유격수로 꼽히던 노마 가르시아파라 알렉스 로드리게스 데릭 지터의 케이스를 비교해봐도 데릭지터가 필딩율에서 근소하게 앞서는 모습을 보여주나 평가에서는 데릭지터가 현저히 밀렸다. 이는 데릭지터가 워낙 풋워크와 송구가 나쁘기에 수비범위가 좁아서 그런 것 으로 보통 나이를 먹은 유격수의 경우 풋워크가 안 받쳐 주기에 수비범위를 좁히고 잡을 수 있는 타구를 안전하게 잡는 방법을 택하는데[41] 데릭 지터의 경우 이 방법을 택한 것 이지만 [42] 유격수 수비의 경우 포구빈도만으로 봐도 2루수에 이어서 두번째로 많으며 수비 난도도 높고 커버해야 할 범위도 넓은데다가 무엇보다 송구를 할 시간이 부족하기에 강견 그리고 빠른 발은 필수덕목이기에 풋워크가 느리고 송구가 안좋던 데릭지터가 필딩율을 제외한 기타 수비지표로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었고[43] 그렇기에 평가가 떨어졌던 것. 한 때 세이버메트리션들의 경우 수비범위와 송구능력으로 유격수를 평가하려고 하는 시도가 있었을정도로 수비범위와 송구 두 항목은 유격수에게 있어 뗄레야 뗄 수 없는 중요한 지표이다.[44] 그렇기에 이종범의 경우 유격수라는 포지션에 한정하여 평가를 내리면 국내 유격수 단일시즌 런세이브 부분 1위 기록을 가지고 있기에 실책이 많다고 하여[45] 결코 나쁜 수비수라고는 이야기 할 수는 없다. 당연하게도 야수 자신이 담당 가능한 수비 범위가 넓어지거나 포구 및 송구 기회가 늘어날수록 실책수가 그에 비례해 많아지는 것은 일반적이고 필연적인 결과이다.

하일성같은 경우엔 그냥 조금만 잘하면 무한 칭찬하던 경향이 이 때는 더 했기 때문에 닥치고 하악하악이었지만, 허구연같은 경우엔 소위 말하는 '잘난 척'해설이 더 했기 때문인지, 결과는 좋은 플레이었지만 그러면 안 된다는 등, 토를 꽤 달았던 게 사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논란이 아주 근거없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 전문가들 관점에서도 호시노가 이미 기본기 부족에 대해 폄하한 바 있으며, 나름 유격수로서 유의미한 실적을 거두었던 오대석도 박동희와의 인터뷰에서 후배 유격수 중 탑을 꼽으라면 류중일, 유지현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KBO에서 유격수로 활약한 시절엔 실책 수를 상쇄하는 뛰어난 공격력과 거칠지만 넓은 범위를 커버하는 화려한 수비를 자주 보여주면서 수비에 대한 평가가 좋은 편이었으나, 일본 진출 당시 주니치 드래곤즈 감독이었던 호시노 센이치는 이종범의 수비를 두고 '유격수의 기본조차 안 된 놈'이라는 혹평을 내렸으며 결국 부상까지 겹쳐 유격수로 한 시즌도 채 채우지 못하고 외야수로 강제 전향당하는 신세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원래 호시노가 말을 좀 막하는 스타일이며, 실책 수가 적은 안정적인 스타일의 유격수를 선호한다는 점[46][47]이나 처음부터 이종범을 외야로 전환시키려 했던 점을 감안하더라도 일본 진출 이후 얼마 안 가 98년 주니치 입단 동기이자 자신보다 타격이 좋지 못한 쿠지 테루요시[48]에게 유격수 자리를 내주고 외야수로 포지션 변경을 강요받을 정도로 수비에서 약점을 노출했다.

심지어 그해 주니치는 본래 주전 유격수였던 토리고에 유스케[49]가 프로야구 탈세사건[50]에 연루되어 4주간의 출장정지를 받게 되면서[51] 유격수 자리의 대체선수가 함께 이적해 와 2루를 보아야 했던 쿠지 테루요시만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이종범의 유격수로서 수비력이 당시 일본프로야구의 시선으로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52] 당시일본에서의수비장면. 굳이 일본까지 갈 것도 없이 동시대의 유격수들인 유지현, 김민호, 김민재, 류중일, 김태균[53]] 등이 전진수비를 해서 러닝스로로 연결하던 것들에 비해서도 분명히 투박했다. 결국 주니치는 이바타 히로카즈가 자리잡게 된 2001년까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54] 흔히 후쿠도메의 자리를 만들어주려고 이종범을 외야로 보냈다는 말이 있었으나 이종범외야수로 전향된 것은 98년 후반기이기 때문에 99년에 프로에 데뷔한 후쿠도메가 이종범을 밀어낸 것은 사실이 아니다. 다만, 허구연과의 유튜브 인터뷰에서 이종범은 후쿠도메가 입단이 확정된 후, 거물 신인이었던 후쿠도메를 키워줄 요량으로 구단에서 외야로 보냈다고 언급하였던 부분이 있다. 관련 영상 이를 바탕으로 보았을 때, 본래 이종범을 외야수로 운용하려고 했던 주니치는 토리고에 유스케의 이탈로 이종범을 유격수로 고정 출전시키게 되었고, 이어 이종범이 부상으로 이탈한 도중 후쿠도메와 어느 정도 입단계약이 체결됨으로서 유격수 자리의 대체재를 마련했기 때문에, 구단측에선 부담없이 본래 운용하려던 외야수로 기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과거 해당항목의 글 중 정확하지 않은 정보가 꽤 있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과도한 저평가가 이루어졌던 것도 사실이다. 우선, 쿠지 데루요시의 경우 백업으로 뛴 노장이라고 적혀 있었으나 실제론 이종범보다 겨우 1살이 더 많을 뿐이었고[55] 이적 바로 직전인 1997년까지 한신에서 매 시즌 120경기 이상을 뛰며 주전 유격수로 활동했다. 92년에 데뷔해서 그 해부터 97년도까지 풀타임 유격수를 소화한 선수에게 노장이라 칭하거나 풀타임 소화가 어려웠다고 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심지어 쿠지는 백업요원이 아닌 이종범 부상 전까지 주전 2루수로 같이 키스톤을 이루던 선수였으며 주니치에서도 입단 첫 해인 1998년에 122경기 482타석이나 소화했었기 때문에 백업요원 신세였다는 건 말도 안되는 이야기다. 쿠지는 정작 이종범이 외야로 간 99년부터 후쿠도메의 뒤를 받쳐주는 플래툰 백업요원으로 전락하게 되었고 그 후쿠도메도 유격수 수비에서 문제가 많이 터지자 결국 자신이 유격수 주전을 가져갔다. 또한 한신시절에는 뛰어난 수비능력을 보였으나, 오히려 98시즌 주니치로 이적한 쿠지는 좁은 수비 범위로 인해 실책 수는 적었으나 Def 0.9, FS(수비 득점)에 있어 -1.2, -1.0로 유격수와 2루수 모두 음수를 기록했다.[56] 이는 실책은 많았지만 넓은 수비범위로 이를 상쇄하여 Def 5.0, RF 4.57, rRng 3.1, rErr -0.4, rDP -1.4, FS 1.3 을 기록한 이종범보다 낮은 수치다.당시 이종범의수비 스탯[57]. 또한 앞서 각주에 서술된 바와 같이 전 시즌 주전 유격수였던 토리고에 유스케는 실책이 고작 1개로 클래식 스탯으로는 뛰어난 수비수였으나, 세이버 스탯으로 들어간다면 상당히 좁은 수비 범위로 Def 2.2, 수비 득점 -0.7을 기록했다. 오히려 98시즌 부상 전까지의 56경기만으로 이종범이 올린 Def나 수비득점이 훨씬 우세할 정도. 덧붙여 당해년도 센트럴리그 골드글러브를 수상한 요코하마의 이시이 타쿠로의 세이버 수비스탯[58]과 비교해도 나쁘지 않은 세이버 스탯을 기록하면서, 세이버 매트릭스 관점에서는 이종범의 일본에서의 유격수 수비는 팀의 플러스 요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세이버 스탯 뿐 아니라 클래식 스탯을 봤을 때에도 130경기로 환산하면[59] 이종범은 이후 유격수 주전으로 활동한 쿠지에 비해 단순 계산식으로 10개의 자살, 75개의 보살을 더 많이 기록하고, 18개의 실책을 더 기록했을 것으로 예측되는데, 이종범의 당시 유격수 수비를 결코 상위권이라고 평가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과거 기술 된 것처럼 정말 못 써먹을 정도의 최하위권이었다라고 폄하할 스탯으로 볼 수는 없다. 오히려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준수한 편이나 혹은 평균 정도는 했다라고 평가를 할 수 있는 정도. 오히려 이종범의 부상과 이에 따른 수비부담을 줄이겠다며 외야수로 포지션을 전환시킨 99시즌의 좌익수에서의 수비스탯이 리그 최하위를 기록했고,[60] 대신 유격수 자리를 꿰찼던 후쿠도메 고스케가 유격수에서 클래식으로나 세이버스탯으로나 리그 최하위의 유격수 수비[61]를 보여주면서 이는 결과론적으로 악수(惡手)였던 셈이 되었다. 이후 이종범은 이듬해인 00시즌이 되어서야 겨우 외야수 보직에 적응해 평균 이상의 외야수비를 보이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에서 실책갯수를 중시하던 이유도 조금은 살펴봐야하는데 일본 야구의 기반이 되는 것은 1960년대의 LA 다저스를 비롯하여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등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미국야구와의 교류로 배워왔던 스몰볼이 일본야구의 기반이 되는 야구라고 할 수 있다. 즉 무리하게 내주지 않을 점수는 내주지 않으며 안정적인 출루로 딸 수 있는 1점에 확실하게 집중하는 스타일의 야구로 V9이라는 금자탑을 세운 요미우리의 선례를 따라 80~00년대 일본야구의 이미지로 대표되는 스몰볼 스타일의 야구가 정립이 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호시노 센이치 감독이 이 스몰볼 야구의 대표주자라고 할 수 있기에 이종범과 같이 넓은 필딩범위를 가져가는 것 보다 잡을 수 있는 타구를 안전하게 잡아내는 것을 선호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2010년대 이후 메이저리그에 일본 야수들이 진출하는 경우가 늘어나며 교류가 이전보다 증가하였고 일본 역시 세이버 매트릭스에 대한 중요도가 증가하며 예전처럼 클래식 스탯과 스몰볼에만 집중하는 경우는 줄어들었고 2010년대를 기점으로 준족과 강견의 넓은 필딩범위의 선호도가 증가하였기에 정말로 일본 기준에서 이종범이 못 해서 라기 보다는 클래식스탯의 한계점 그리고 추구하는 방향성의 차이와 시대적인 차이 역시 분명히 있음을 생각해보아야한다.

이와같이 분명히 넓은 수비범위와 일본에서도 인정받은 강견, 몸을 던지는 화려한 수비를 강점으로 지녔으나, 매끄럽지 못한 스텝과 포구, 불안정한 송구 정확도 등의 문제로 인한 많은 실책 탓에 클래식 수비스탯으로는 좋은 유격수로 보이지 않다라는 이유로 세이버가 아직 국내에 정착하지 않았을무렵 이종범 수비가 뭐가 좋냐며 클래식 스탯을 기준으로 실책이 많다는 이유로 저평가가 되었으나 세이버가 발달하면서 오히려 내야수의 수비범위나 송구능력에 대한 고평가가 이루어지고 한때 실책갯수를 중시하던 일본 역시 이를 받아들여 사카모토 하야토, 키쿠치 료스케의 전성기 시절과 같이 넓은 필딩범위와 송구능력으로 잡아내는 내야수에 대한 선호도가 증가하고 있기에 현재에 와서는 좋은 수비수였다라고 이야기를 하는게 옳은 평가이겠으나 국내에서는 아직 수비나 주루관련 세이버의 정확성이 떨어지기에 클래식 스탯을 보는 경향이 있어 수비력에 논란이 있었다라고 하는 의견이 나오기도 하나 이런 이야기가 나오게 된 것이 벌써 10여년은 훌쩍 지난 과거에 투승타타 드립과 함께 나온 논란이기에 이러한 이야기가 있었다 정도로 생각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1] 현대 야구에서 요구하는 압도적인 근육량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근육의 탄력을 필요한 순간 최대한으로 활용할 줄 알았다.[2] 이 호칭이 과언이 아닌 것이, 96년 첫 한 달간 꼴찌였던 해태 타이거즈를 5월에 방위복무에서 복귀하자마자 리그 1위로 올려버리는 활약을 보여주었다. 그 뿐 아니라 한국시리즈나 국제대회와 같은 큰 경기에서 중요한 순간마다 뛰어난 활약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통산 4차례의 한국시리즈에서 통산 sWAR 3위, 2차례의 MVP를 기록했을 뿐더러 2006년 제1회 WBC에서는 4할과 최다안타를 기록해 대회 올스타로 선정되었다.[3] 즉 다른 80 선수들에 비해서도 우수한 툴을 가졌다고 평가되는데, 이건 스탠튼 파워, 채프먼 직구처럼 동시대 1위는 물론이요 역대를 통틀어서도 최고 수준이어야 받을 수 있는 점수이다.[4] 2017년부터는 아들인 이정후가 데뷔한 후 3시즌 연속 타율 0.320을 넘긴 뛰어난 교타자로서 리그에 자리잡으며 역시 이종범의 아들이라는 찬사를 듣고, 이종범 또한 은퇴한 지 오래 되었기 때문에 더욱 그런 선입견이 많이 생겼다. 물론 이정후 역시 시즌이 지날수록 장타력이 만개하며 아버지를 연상시키는 중장거리형 타자로 진화하면서 그런 선입견 또한 사그라드는 중.[5] 이를 바탕으로 노모 히데오에게 멀티히트를 뽑아내거나, NPB 데뷔 첫 해 용병이 없었던 KBO출신 선수이었음에도 요미우리 자이언츠발비노 갈베스에게 강한 면모를 종종 보였다. 예로 6.16 요미우리전갈베스 상대 멀티히트와 도루 그 덕에 헤드샷까지 얻어맞았지만(...)기사. 당시 영상[6] 93~97년의 전성기시절 이종범의 장타율은 .545로 왼손 거포로 유명했던 김기태의 장타율(.529)보다 장타율이 더 높으며 그보다 더욱 장타율이 높은 선수는 .573의 양준혁 뿐이었다. 2001~2003년도 4할 후반에서 5할대의 장타율을 기록했고 타율이 떨어진 2004년도 장타율은 4할이 넘었다.[7] 특히 1회 선두타자 홈런이 통산 44개로 역대 1위를 기록. 볼넷으로 나가든 홈런을 쳐버리든 시작부터 기선제압해버리면서 게임을 유리하게 가져가는 모습이 자주 드러났다.[8] 이러한 전성기의 영향으로 통산 고의4구도 82개로 6위를 기록하고 있다.[9] 의외로 통산 BB%는 9.2%로 생각보다는 낮은편이다. 그냥 중간 수준. 사실 96~97을 제외하면 이종범의 BB%은 대체로 9% 정도에 머물렀으며, 말년에는 9%보다도 아래를 찍은 적이 많았다.[10] 그 위로는 마쓰이 히데키(요미우리) 14개, 마에다 토모노리(히로시마)12개, 고메즈(주니치)-다니시게 모토노부(요코하마)-에토 아키라(히로시마)11개, 기요하라 가즈히로(요미우리)-이케야마 타카히로(야쿠르트)10개가 랭크 되어 있었다.[11] 빠르게 몸을 회전시켜 손목 힘을 이용한 몸쪽 공의 당겨치기를 승부수로 즐겨 사용했던 이종범은 팔꿈치 골절 이후로 사구에 대한 두려움과 부상으로 인한 반응속도 저하라는 후유증으로 인해 이전의 타격방식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했고 수 많은 유격수 쪽 땅볼과 애매한 플라이를 양산하곤 했다. 심지어 코칭스태프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타격방식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면서 이는 곧 이듬해인 99년 타율 .238 라는 처참한 타격성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12] 이 전까지 3할의 타율을 기록하고 있었으나 이때의 부상 이후로 타율이 2할대까지 떨어지면서 결국 .293로 시즌을 마감하게 된다.[13] 04년부터 배트스피드와 몸의 회전력이 현저하게 느려져 17홈런을 기록하는 등 장타력은 있었으나 타율이 2할대 중반까지 떨어지게 된다. 이 때문에 2005년에는 배트를 짧게 잡아 3할을 다시 쳐냈으나 그 반동으로 장타력을 잃고 말았다.[14] 실제 전성기의 이종범과 말년의 이종범의 타격폼 영상을 비교해보면 뚜렷하게 그 차이가 드러난다.[15] 참고로 두 해 도루 2위가 1998~2001년 4년 연속 도루왕을 차지한 정수근인데 그 정수근과도 10개 이상의 차이가 났다.[16] 2002년 35도루 3위(1위는 같은 팀의 김종국, 50개), 2003년 50도루 1위, 2004년 42도루 3위(1위는 현대 전준호, 53개), 2005년 28도루 6위(1위는 LG 박용택, 43개)[17] 그리고 이종범의 전성기 동안 타이거즈의 팀 도루 역시 늘 상위권에 위치했다. 90년대 이종범의 전성기 때 해태의 도루 순위는 2-2-3-1-1위였고, 당시 도루 지분은 이종범이 압도적이었다. 실제로 93년부터 97년까지 5년 동안 팀 내 도루 2, 3위인 이순철홍현우가 기록한 누적 도루수는 100개가 채 안 된다. 한 해에 84개를 기록해버린 이종범의 도루성적과 비교해보면 바로 그 위상을 실감할 수 있다. 그리고 이종범이 없던 98~01 동안에는 도루 2위인 타바레스를 앞세웠던 2000년을 빼면 매년 도루 최하위권을 기록했었다가, 이종범이 복귀한 후 재전성기였던 02~05에는 1-1-2-3위로 다시 최상위권으로 올라갔다. 이는 4년 동안 도루 1, 2위를 두고 다퉜던 이종범과 김종국의 공이 컸다.[18] 2위 정수근(31.63)과도 거의 2배 차이가 난다. 정수근도 통산 474도루 성공률 75.2%로 도루에 꽤 능했던 선수인데, 이종범과는 까마득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대졸에 일본 진출로 몇 년을 손해봤음에도(물론 그만큼 오래 뛰었지만) 이 정도.[19] 심지어 KBO 역대 RAA도루 수치를 보면 10위권 안에 무려 4번(93, 94, 96, 97)이나 들어가고, 30위권으로 확장하면 4번(02~05)이 추가된다(...).[20]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의 톱타자로 꼽히는 리키 헨더슨에게도 비슷한 평이 있다. 헨더슨의 전성기 시절에 그의 소속팀 오클랜드의 팬들은 중계를 켜면 1대0으로 앞서는 경기를 자주 봤다는 말이 있는데 헨더슨이 혼자 볼넷을 얻든 안타를 치든 1루로 나간 다음 도루를 한두번하고 후속 타자의 타격으로 홈에 들어오거나 혼자서 선두타자 홈런을 때리거나하는 식으로 1점을 내고 시작했기 때문이다.[21] 도루 성공률은 굉장히 중요한 지표다. 도루의 손익분기점은 72~73% 정도인데, 한국야구에서 '도루'하면 떠오르는 다른 선수들인 전준호, 이대형, 정수근 등의 선수들은 도루 개수는 많아도 성공률이 70~75% 부근에 머물러 손익분기점에서 약 10% 정도의 이득만 본 편이다. 이종범은 약 15%를 살짝 상회하는 이득을 보았으니 확실히 차이가 있다.[22] 1994년 24회 연속 도루를 성공한 이종범은 1997년 29회 연속도루를 기록하면서 자신의 기록을 스스로 갈아치우는 위엄을 보여준다.[23] 각각 18개, 24개. 90년대 후반 들어서 일본프로야구, 그 중에서도 센트럴리그는 도루를 많이 시도하는 편이 아니었다. 당시 도루 1위는 2년 연속 39도루를 기록한 요코하마의 이시이 타쿠로.[24] 대체로 이종범이 주니치시절 타격부진에 시달릴 때 나왔던 대표적인 비아냥이 '한국의 이치로라더니 비슷한건 발 뿐이다.' 였다(...)[25] 98년 이종범은 18도루 8실패를 기록했으나 팀내 2위였던 오오니시 타카유키가 16도루 6실패를 기록했다. 99년에는 이종범은 24도루 7실패를 기록했으며, 세키가와는 20도루 11실패, 후쿠도메는 4도루 7실패를 기록했다.[26] 하일성 해설위원의 발언으로는 한 시즌에 40개 도루 이상을 하면 몸이 엉망진창이 된다고 한다. 실제로도 부상의 위험이 커 현대야구에서는 도루를 자제시키고 있으며, 이종범 역시 그로인한 신체능력의 노쇠화가 빠르게 왔다고 분석된다. 뭐 근데 2006년이면 이종범이 만 36세였던 때라서 노쇠화가 와도 이상한 건 아니긴 하다. 단지 그게 좀 심하게 왔을 뿐(특히 2007년).[27] 김재걸을 잡았던 경기로 이대진과 호흡을 맞췄다.[28] 유격수는 549경기[29] 이종범 내야수비 영상 모음[30] 1996 시즌에 경기 중 교체 포수가 없어 포수로 두 경기 교체 출전한 적이 있다. 이때의 투수가 강속구로 유명하던 전성기의 이대진과 불펜의 핵심이 되가던 임창용. 포수로서 첫 경기이던 1996년 5월 22일 삼성전에서 2루로 도루하는 주자를 잡기도 했는데 그 주자가 바로 걸사마 김재걸. 그래서 이종범의 도루 저지율은 통산 100%다.(1회 시도/1회 저지)[31] 본인도 언제든지 투수로 등판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했다.[32] 정작 일본에서는 어깨는 좋으나 송구정확도에 문제를 드러내 종종 에러를 만드는 모습을 보였다.[33] 1999년.[34] 08년에는 주전들의 잦은 부상으로 꽤 다양한 포지션을 돌아다녔는데 1루수와 2루수로도 출전했다[35] 이종범이 은퇴하기 전 시점의 기아의 외야진을 살펴보면, 풀타임으로 출전할 수 있는 건 이용규 뿐. 김원섭은 만성 간염 환자라 풀타임을 뛸 수 없고, 나지완은 수비 범위가 심히 좁은데다 과도한 체중 탓에 무릎에 물이 차 있는 상태. 장성호 트레이드때 데려온 김다원은 수비력은 평균 수준이지만 타격이 안 되고, 신종길은 13년과 14년에 좋은 성적을 보였으나 그 외 시즌의 성적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들을 제외한 다른 외야수들의 수비력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수준이었기에 결국 당시 기아 외야진에 괄목할 만한 유망주가 전무했던 관계로 계속해서 이종범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36] 스탯티즈 기준으로 이종범의 4.5시즌간 유격수 WAR의 총합은 역대 유격수 1위다. 수 많은 한국의 유격수들이 평생 뛰어도 이종범의 저 4.5년을 넘지 못했으나, 2023년에 오지환이 넘어섰다.[37] 이렇게 알려져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당시 양준혁은 기록원실에 들어가 기록을 바꿔줄것을 요구했으나 그럴수 없다고 하자 나오면서 문을 차고 나왔을뿐이다. 물론 그게 잘했다는건 아니지만.[38] 기록된 실책은 총 27개. 다시봐도 상당한 수의 실책이다.[39] BEST9을 뽑는 것이 골든글러브라면 매직글러브는 수비를 잘하는 선수에게 수여하는 상. 수비 코치들의 투표로 정해진다. 다만 이도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이 부상 이후 수비가 그다지 좋지 못했던 박정태, 그리고 수비를 못하기로 유명한 공필성이 수상했단 점에선 생각을 해봐야 할 부분. 결국 수비를 위해 만든 상인 주제에 공격력의 네임밸류에 묻힌 평가를 한다는 점에서 비판받아 폐지됐다[40] 장타를 단타로 막고 단타를 아웃으로 막는 플레이. 이런게 런 세이브 플레이다.[41] 국내에서는 김상수가 대표적인 케이스.[42] 덕분에 A-로드가 왔을 때 밀려날 뻔 했는데 양키즈 프랜차이즈라는 이름값때문에 결국 A-로드가 밀려나게 되었고 양키즈 내야는 그대로 폭망했다.[43] 굳이 어려운 지표를 꺼내들지 않고 레인지팩터만 비교해봐도 지터는 3점대 후반에서 4점대 초반 그리고 가르시아파라와 로드리게스는 4점대 중후반이다[44] 그래서 유격수의 경우 운동능력 떨어지는 30대부터 가치가 떨어진다 물론 박진만 미야모토 신야같은 케이스가 있으나 흔치는 않다.[45] 참고로 메이저리그에서도 기타 수비지표가 상당한데도 불구하고 필딩율은 낮은 경우가 많이 있다. 물론 필딩율도 높고 기타 수비지표도 리그 최고를 찍은 오즈의 마법사같은 케이스도 있다.[46] 현역시절 팀 동료 유격수였던 실책왕 우노 마사루와 같은 선수의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47] 또한 당시 일본 야구의 경우, 정자세로 안정적으로 포구하는 능력, 그리고 원바운드가 되더라도 송구의 정확도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이종범은 포구의 안정성보다 넓은 수비범위를 바탕으로 한 런세이브 능력, 그리고 송구의 정확도보다 강한 송구에 중점을 둔, 사실상 대척점의 수비방식을 가지고 있던 것도 평가를 박하게 만든 요인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비슷한 수비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카모토 하야토의 수비력이 일본에서 굉장히 논란이 많았다.[48] 2021년 현재 한신 타이거스의 1군 수비 및 번트 담당 코치.[49]치바 롯데 마린즈 2군 감독.[50] 코쿠보 히로키, 미야모토 신야, 타네다 히토시 등 다수의 프로야구 선수들이 허위지출을 만들어 소득을 은폐함으로써 탈세를 저지르다 발각되어 논란을 일으켰다. 연루된 선수들은 전원 커미셔너 징계로 제제금+출장정지 처분을 받았고 탈세액이 많아서 죄질이 무거웠던 몇몇 선수들은 집행유예가 동반된 징역 선고를 받기까지 했다.[51] 조용히 반성하고 있었다면 금방 복귀가 가능한 상황이었으나, 재판 당시 토리고에가 "세간에 물의를 일으켜서 죄송합니다" 등의 발언으로 자신의 죄질을 가볍게 생각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고, 이에 판사가 "반성의 태도가 보이지 않는다. 피고인이 심문받는 것은 야구인으로써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의 한 사람으로써의 의무비열한 수단으로 회피한 것을 심문받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건가!"고 호통친 것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는 바람에 주니치는 사실상 유격수 시즌아웃이라는 뒷통수를 맞게 된다. 실제로 토리고에는 연맹징계+팀 자체 징계가 끝난 후에도 이종범과 쿠지 테루요시, 후쿠도메 코스케 등에게 밀려 1군에 콜업되지 못하고 2군에만 머무르다 1999년 시즌 도중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로 트레이드 된다.[52] 그 해 올스타 브레이크 전까지 주니치 팀 전체 에러는 23개 였는데, 그 중 절반에 가까운 11개의 에러를 이종범이 56경기 동안 기록했다. KBO에서도 다소 잔실수와 송구미스가 많았던 것이 상위리그에서 결국 터지게 된 것. 더해서 전년도 유격수 주전이었던 토리고에 유스케가 97년도 풀시즌을 뛰면서 기록한 실책수는 단 1개였다. 현재와 달리 세이버 매트릭스가 보편적이지 않던 시절, 단순 실책 개수로는 이토록 안정적인 수비를 보여준 유격수와 비교가 될 수 밖에 없으니 더더욱 평가가 나쁠 수 밖에 없었다. 다만 토리고에는 그 이전이나 다이에로 이적해간 이후나 상당히 좁은 수비범위와 함께 실책수도 상당히 기록해 세이버 스탯이 그렇게 좋지 못해서, 97년의 수비기록은 사실상 기적의 1년으로 취급받고 있다(...)토리고에 유스케의 수비득점[53] 별명 많은 누구[54] 주전 유격수 토리고에는 탈세로 시즌아웃되었으며, 토리고에의 자리를 메꾸기 위해 유격수로 기용한 이종범은 기대에 못 미치는 수비력을 보이며 외야로 컨버전, 많은 기대를 받았던 대형 신인 유격수 후쿠도메 코스케는 이종범보다 좋지 못한 유격수비로 인해 3루수를 거쳐 외야수로 뛰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겹쳐 주니치는 1990년대 후반을 고정된 유격수가 없는 채로 팀을 운영해야만 했으나 그럼에도 이 기간동안 리그 우승도 1차례 달성하고 센트럴리그 강호 요미우리 자이언츠와도 대등하게 겨루는 저력을 보여줬다.[55] 1969년생이지만 사회인야구에서 4년간 뛰다가 1991년 드래프트로 한신 타이거스에 입단했고, 데뷔시즌인 1992년부터 바로 주전 자리를 잡았다.[56] 수비득점에 대한 설명은 해당 사이트 참조[57] 2번째 출처의 페이지는 검색 필요[58] 135G FP% .974, RF 4.64, rRng 0.5, rErr -0.2, rDP -1.1, FS -0.8, Def 6.0[59] 당시는 교류전 없이 각자의 리그 안에서만 시합을 했다. 교류전은 2005년 신설.[60] RF 1.45, rRng -3.4, rErr -0.9, rArm -1.5, FS -5.9[61] FP% .968, RF 3.6, rRng 0.1, rErr -0.3, rDP -1.0, FS -3.9, Def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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