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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VS 양준혁
자세한 내용은 양준혁 vs 이종범 문서 참고하십시오.2. 94 이종범 vs 14 강정호
강정호가 MLB로 진출하여 적응에 성공함으로서 포지션 불문 김하성과 함께 KBO 출신 야수들 중에서는 최고임이 증명되었으나[1] 다만 역대 KBO 기록으로 단일 시즌 최고의 유격수는 누구였는가라는 떡밥은 아직도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2]2014 시즌 강정호: 타 0.356 출 0.459 장타 0.739[3] 안타 137 홈런 40[4] 타점 117 득점 103 도루 3. ||
고전 스탯으로 보면 타율, 도루만 빼면 타격 부분에서 강정호가 확실히 좋아보인다. OPS도 1.198 vs 1.033으로 강정호가 앞선다.
파크팩터를 계산하고 리그 평균치를 100으로 해서 조정한 조정 OPS를 보면[5] 이종범이 OPS+가 195이고 강정호는 193으로 이종범이 크게 차이가 안 나는 이종범의 근소 우위. 자, 그럼 이제 공격 부분 세이버메트릭스 스탯상 가장 대표적인 wOBA(가중 출루율)을 보자. 강정호 0.504, 이종범 0.463으로 강정호가 좀 우위다.[6]
이 wOBA를 가지고 득점생산력을 계산한 wRC를 다시 리그 기준을 100으로 계산한[7] wRC+를 보면 이종범이 193, 강정호가 189으로 이종범이 근소 우위라는 걸 알 수 있다. 세이버메트릭스 지표상 94 이종범이 근소하게 우위이므로 이종범의 손을 들어주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순수하게 압도적인 출루율+장타율이 높은 강정호의 손을 들어줄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도루지표인 wSB가 이종범이 11.1으로 단순히 도루 갯수만 많은 게 아니라 득점으로도 연결을 많이 했다는 걸 보여주고 있으므로 도루지표 때문에 이종범에게 무게가 실릴 수도 있다.
수비는 당시 에러 산출 방식의 문제가 있었고, 90년대 보살 및 자살 기록이 전무한 상황이라 수비지표에 딱히 확답을 내리기 어렵다. 수비라는게 실책 갯수로만 판단하기 어려운 점이 많은 바[8], 정확한 수비에 대한 부분은 영원히 판단을 내릴 수 없다. 라고 적혀있으나 당시 이종범은 3시즌 동안 실책수 1위이자 일본 진출 후 유격수 불가 판정을 받았고, 이에 비해 강정호는 미국 진출 후에도 유격수 수비에서 합격 판정을 받은 것을 감안하면 수비는 강정호의 우위로 둘 수 있다.
그러나 WAR이 94 이종범이 역대 야수 WAR 1위[9]임을 생각하면 이종범이 유격수이자 야수로서 더 낫지 않은가라는 의견도 있을 수 있다.
복잡하게 설명했지만 딱 잘라 말해서 둘 다 KBO에서 1, 2등하는 역대 유격수임은 틀림 없다. 세이버메트릭스상 타격지표는 비슷하므로 취향대로 뽑으면 된다.
그래도 누적은 강정호가 위가 아니냐라고 할지도 모르는데 이종범 유격수 5년 누적 WAR이 강정호 유격수 누적 WAR보다 높다.
3. 야구
- 등번호 7번은 원래 김종모가 쓰던 번호였다. 1992년에 그가 은퇴하면서 물려준 것. 일본으로 갔을 때는 대형 유망주였던 외야수 장일현이 달았으나, 이후 장일현이 폭망하고 그가 돌아오면서 7번은 다시 원 위치로 돌아왔다.
- 우투우타이기에 오른손잡이일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왼손잡이다. 그 이유는 이야기 쇼 두드림에 출연해 당시 오른손 글러브밖에 없어 오른손으로 야구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아는형님에 출연했을때 우투우타인 이유에 대해 우투가 된 이유는 오른손 글러브밖에 없어서 우투가 되었고, 우타가 된 이유는 좌타자로 칠 때보다 우타자로 치는게 곧 잘 맞아서 우타자가 되었다고.[10] 그러나 아들 이정후에게는 좌타자를 하라는 조언을 했는데, 이유는 당시 좌타자가 흔치 않았고, 내야안타 확률이 우타자보다 좌타자가 높기 때문이었다.[11] 실제로 야구 이외의 생활은 왼손을 주로 사용한다. 필기를 하거나 싸인을 해줄 땐 오른손으로 하는 것으로 보인다.
- 한국시리즈 MVP를 2회 수상해 본 선수 중 하나다. 1993년 한국시리즈, 1997년 한국시리즈에서 각각 MVP에 올랐는데, 이종범 외 나머지는 김용수(90,94), 정민태(98,03), 오승환(05,11), 양의지(16,20)로 총 5명만 이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 해태 타이거즈에서 구타를 제거한 인물이다. 당시 프로구단에서 선배 선수가 후배 선수를 구타하는 일은 빈번했다.
당장 감독부터가 주먹질을 했으니...하지만 이종범이 하지 않으니 아래의 후배들(김종국 등)[12]도 안 하게 되니 저절로 사라지게 됐다는 듯. 다만, KIA 타이거즈 특유의 엄격한 선후배 문화는 유지되었다.[13]
- 이종범이 이러한 구타문화나 군기문화를 비교적 지양했던 점이 드러나는 일화가 있는데, 박명환 유튜브에 출연한 김진우의 말에 의하면, 이종범은 말년 시절에 신인들에게 자신에게는 선배님 대신 삼촌이라고 부르라고 하기도 했다. 관련 영상
- 사투리와 욕을 좀 사용하는 말투이다. 물론 진지하게 욕을 하는 것은 아니다. 무한도전 초창기[14]때 정준하가 전화를 걸자 방송인 줄 모르고 이야기 하다 무한도전 촬영 중이란 말에 그럼 진작 말하지, 새X야소리가 나오고, 박명수에게도 아아~ 그 닭장사 하시는 분?투로 이야기를 한다. 물론 유재석은 친분이 있어서. 아이고! 메뚜기 오랜만이쇼잉~이라며 넉살좋게 말하는 걸 보면, 정말 사투리 많이 쓰는 전라도 아재가 뭔지 보여주는 타입.
- 이종범 별명 중 가장 대중적인 '바람의 아들'이란 별명은 서수남과 함께 콤비를 이뤄 코미디를 했던 가수 하청일이 지어준 별명이라고 한다. 당시 하청일가 야구용품점을 운영했는데, 하청일 매장의 단골이었던 이종범에게 그러한 별명을 지어준 이유는 도루할 때 바람을 일으키면서 들어가기 때문이라고. 이종범 본인은 이 별명이 제일 마음에 드는 별명이라고 한다.
그리고 도루하고 나서 먼지를 많이 털면서 먼지가 되어를 좋아하게 됐다고 한다
- 과거 일본에 진출할 때 언론에서 한국의 스즈키 이치로라는 별명을 붙였으나 일본에서의 부진 후 일본 프로야구 팬들에겐 '발을 제외하면 비슷한 게 하나도 없지 않느냐’며 비아냥당하기도 했다.[15][16]
- 일본 진출 후, 1999년 일본시리즈에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창단 첫 우승했을 때 박제되었었다.
- 이종범은 몸 쪽으로 오는 공을 당겨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몸에 맞는 공으로 두 차례나 큰 부상을 당한 이후에는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다고. 2009시즌 타격폼을 바꾼 이후로는 몸 쪽 공 공략이 나아진 편.
- 온라인 야구게임 마구마구에서 은퇴 기념으로 레전드 카드를 출시하였다. 기본 우익수 카드에 유격수로 듀얼포지션 훈련이 가능하다. 헌데 후에 추가된 블랙카드는 반대로 기본 유격수에 우익수가 듀얼포지션으로 나왔다.
- 은퇴가 발표되자 각종 논란과 루머가 들끓을 때 나온 은퇴 기념 불암콩콩 코믹스 #
- 2015시즌 종료 후 뜬금없이 롯데 자이언츠 수석 코치로 들어간다는 꼴갤발 루머가 돌았다. 롯데 구단 측에서 이종운 감독을 성적 부진을 이유로 1년만에 경질하고 조원우 전 SK 와이번스 수석 코치를 감독으로 선임하면서 코치진도 개편한다는 이야기가 있어 뭔가 그럴싸했는지 이 루머가 엠팍에까지 퍼졌다. 이렇게 이종범의 롯데 행 떡밥이 잠깐이나마 달아올랐으나 곧 루머로 드러남에 따라 금방 사그라들었다.
- 2024년 7월22일 일본 에스콘필드에서 열린 일본 야구 레전드 팀과 한일 드림 플레이어즈 게임에서 3안타 2볼넷 1득점으로 무려 5출루 경기를 완성하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이날 경기 종료 후 한국 우수선수상을 수상하며 상금 50만엔을 수여 받았다. #
- 타이거즈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고의 임팩트를 남긴 야수답게 많은 타이거즈 팬들이 그리워하는 선수다. 이종범에 대한 향수는 모든 KIA 팬이 가지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워낙 위대한 선수였기에 그 후계자가 나오지 못할것이라 생각한 팬들이 많았다. 그리고 2024년, 이종범의 후계자가 리그를 압도하며 KIA의 정규시즌 우승을 이끌었다.
3.1. 투명드립
자세한 내용은 종범(인터넷 속어) 문서 참고하십시오.디시인사이드 국내야구 갤러리 등지에서 틈만 나면 까이고 있으며, 투명드립의 필수요소로 쓰이고 있다. 단, 선수 본인의 잘못은 전혀 없다. 게다가 세이버스텟이 국내에 보급되면서 고전스텟으로 "보이지 않는 스텟"을 세이버스텟이 증명하고 있다는 점이 재밌다.
본인도 안다는 듯. 이종범을 만나서 싸인받은 어떤 팬이 슬쩍 운을 떼 봤는데 현역 때부터 넉살 좋기로 유명했던 이종범답게 능글능글하게 웃으며 안다고 했다는 말이 있다.
3.2. 사구와의 악연
몸에 맞는 공으로 부상도 많고 헤드샷도 많이 당한 선수. 끝내기3.3. 지역드립의 최대 피해자
전성기 때는 화려한 성적으로, 전성기가 지난 후에는 KIA 타이거즈의 정신적 지주라는 점과 여러 가지 사건으로 유명한 이종범이지만, 특히 2009년부터는 야갤과 구 정사갤을 중심으로 퍼진 홍어드립을 비롯한 지역드립의 최대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다만 이 항목에서 나열한 여러 가지 이야깃거리를 살펴보면 이종범이 잘못한 부분은 거의 없다. 오히려 피해자인 경우도 있을 정도.
4. 가족
4.1. 7남매 중 막내아들
1997년 부모님(左 어머니 김귀남, 右 아버지 이계준)과 함께 |
- 이종범은 7남매 중 막내로, 그의 부모님은 광주서림초등학교 3학년때 야구를 시작한 막내아들에게 최대의 후원자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더이상 막내아들에게 야구를 시키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이유는 작은 체구로 운동을 하는 것도 안쓰러운데 매까지 맞는다고 하니(...) 야구를 하도록 허락한 자신이 원망스럽기까지 해서 속상한 마음에 훈련중이던 이종범을 강제로 야구부에서 빼내려했었다고. 그러나 이종범이 막무가내로 버티는 바람에 실패했다고 한다. 대신 귀가한 아들을 호되게 꾸짖은뒤 '야구를 그만둔다'는 각서를 쓰도록 했지만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던 어린 이종범이 쓴 각서의 내용은 ‘야구는 내 인생이니 절대 그만둘 수 없다’는 것이었고, 아버지는 어린 아들의 반발이 어이없기도 했지만 꿋꿋한 집념이 한없이 기특하게 여겨져 노여움이 눈녹듯 사라졌다고 한다. 특히 아버지가 일본전문서적을 번역해 이종범에게 읽어주었다고 한다. 어머니 김귀남 또한 저녁마다 이종범의 훈련을 도왔으며, 하루저녁 3백개에서 5백개의 스윙목표를 정해놓고 50번을 휘두를 때마다 돌멩이를 옮겨놓으며 아들의 훈련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고. 이외에도 당시 서림초등학교 감독을 집에서 기거케해 훈련이 끝난뒤에도 마당에서 개인지도를 받도록 해주기도 했다고 한다.
- 아버지 이계준은 2012년 5월 26일 광주 무등야구장에서 열린 막내아들 이종범의 은퇴식에 참석했다. 주니치 나고야돔의 흙은 아버지가 직접 이종범 은퇴 기념탑에 담았는데 “일본 갔을 때도 기뻤고, MVP가 됐을 때도, 한국시리즈 우승을 했을 때도 정말 기특했다. 그래도 양준혁처럼 은퇴경기를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언급했다. 아들의 별명이 바람의 아들이라 '바람'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2021년 10월 10일, 9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4.2. 결혼 및 야구집안
2001년 6월 20일 김포국제공항에서 가족들과 함께 |
- 아내 정연희는 1살 연하로 경기도 수원 출신으로 숭의여대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에 패션유학을 다녀왔다. 이종범과는 1994년말 첫 만남을 가진 후 3년간 열애했다. 1996년 시즌이 끝난 뒤 결혼을 결심했고, 12월 예비 신부가 있는 파리행 비행기에 올랐고 파리, 런던 등지에서 12박 13일 동안 둘만의 시간을 보낸 후 1997년 1월 5일에 약혼식을 올렸다. 그해 11월 16일 광주무등파크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부부가 되었다.
- 자녀는 연년생인 아들 이정후, 딸 이가현이 있다. 두 자녀 모두 주니치 드래곤즈 시절에 태어난 일본 나고야 태생이다. 딸 이가현은 연세대 음대를 졸업했다. 바이올린을 전공했다고. 딸 돌잔치 사회를 유재석이 봐주었다고 한다.
- 그런 이유로(!) 주니치 팬들이 아들 이정후에 KBO 리그에서 성공한 뒤에는 선수 뎁스가 부실한 주니치로 오라고 하고 있다.
드래곤즈의 푸른 피가 흐른다.주니치 팬 반응. 이종범보다는 주니치 레전드 아라키 마사히로를 닮았다는 말이 많다. 이정후는 초등학교때부터 아버지를 본받아 야구를 하고 있다. 좌타를 못한 게 아쉬워서인지 좌타로 가르치려고 하는 듯.근데 양현종 선수가 노리고 있다고 한다.유격수 하는데 롤모델은 앱등이란 건 함정.그리고 2017년 신인드래프트에서 넥센 히어로즈의 1차 지명을 받았다. 이정후는 아버지와 달리 우투좌타이며, 이종범이 '바람의 아들'이라는 별명이라는 점에서 따 '바람의 손자'라는 별명을 가졌다.평화왕, 평화왕자에 이은 평화왕 손자 등장이요!또 다른 별명은 반투명이다.이정후는 프로 입단 후 외야로 전향했다.
- 외삼촌 중에 광주의 유명한 축구 선수였던 전 광주축구협회 부회장 김화식이 있다. 김화식의 권유로 원래 축구를 하려 했으나 입부했던 초등학교 축구부가 사라지면서 야구를 시작하게 되었다고.[18]
- 조카 윤형준(개명 전 윤대영)도 야구선수다. 이종범의 큰누나의 아들로 생질이다. 2013년 신인드래프트때 NC 다이노스에 지명됐다가 2016년 10월 경찰 야구단에 합격해 군 복무를 시작하였고, 한 달 후인 11월 2016년 KBO 리그 2차 드래프트에서 LG 트윈스의 지명을 받아 팀을 옮겼다. 2018년 10월 이종범이 LG 트윈스 코치로 부임하면서 외삼촌과 조카가 한 팀에서 뛰게 되나 싶었지만 2019년 2월 윤대영이 음주운전을 저지르면서 임의탈퇴 처리되어 사실상 선수생명이 끝난 것으로 보였으나 반성을 거쳐 현재는 친정팀인 NC 다이노스로 복귀해 선수생활을 이어 나가고 있다.
- 딸 이가현이 LG 마무리 투수 고우석과 결혼을 전격 발표하면서 신인왕으로 시작해 2022시즌 KBO MVP를 차지한 아들에 이어 최고의 마무리 투수 반열에 오른 사위까지 가족으로 맞이해 ‘야구 패밀리’를 완성하게 됐다.[19]
- 사위 고우석이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딴 날, 딸 이가현이 임신 사실을 밝혔고 2023년 11월 22일 출산하여 외할아버지가 되었다.
- 아들 이정후와 사위 고우석이 2024 시즌을 앞두고 모두 미국으로 진출하면서 가족 모두가 미국에서 거주하고 있다. 이종범도 텍사스 레인저스 연수 코치를 겸하면서 아들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 미국에 체류 중에 있다.
5. 흑역사
5.1. 기쎈비타
기쎈비타는 1994년 9월부터 해태음료에서 판매하던 에너지 드링크 음료이다.
2016년 MBC 스포츠플러스의 엠스플 텔레비전 9화에 이종범이 출연하여 직접 이 CF의 제작비화를 설명했다. 시즌 중 CF촬영을 너무 싫어했던 김응용 당시 감독의 눈을 피해 올스타 브레이크 기간에 새벽 5시부터 24시간 동안 촬영했다고 한다. 출연료는 5,000만원이었고 구단이 절반인 2,500만원을 떼갔다고 한다. 김선신과의 깨알같은 재연은 덤.
2017년 MBC every1의 비디오스타에 출연해 김숙과 또 한 번 재연했다.1분 19초부터 나온다.뭐라구우우~기쎄에엔?
2017년 MBC every1의 비디오스타에 출연해 김숙과 또 한 번 재연했다.1분 19초부터 나온다.
2023년 2월 전설의 타이거즈에 출연한 前 해태 타이거즈의 문성록[20]과 김태완[21]이 출연하여 CF 촬영비화를 추가로 설명했다. 스튜디오 촬영버전과 목동 야구장 촬영버전 두 가지가 있는데 목동 야구장 촬영 시 문성록은 심판, 김태완은 포수, 박종하가 투수 역할을 맡았다. 이들은 출연료를 아끼기 위해 얼굴을 가리고 찍었고 이종범은 음료수를 마시는 척 하지 않고 촬영 당시 무려 50병 이상을 마셨으며 광고 촬영 후 2일이 지난 시점까지 얼굴이 누런 상태였다고 한다. 스튜디오 촬영 시에는 시청자들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와이어를 매달고 움직이는 장면을 찍었다.
5.2. 금종범
1995년 신년 특집 이벤트로 신문사에서 기획해서 촬영한 것. 금박 칠하는 데만 4시간 이상이 걸렸다고.
금종범 사진 중에서 다이빙 캐치하는 사진은 일간스포츠 해태 타이거즈 전담 기자였던 박승현[22]의 조력으로 탄생했다.
금종범은 불암콩콩코믹스에 소재로도 나왔다. 그것도 4번씩이나. 2009년 8월 20일, 2010년 6월 10일[23] 6월 16일, 이종범 은퇴만화(옷을 벗기는 남자 편), 마구마구 레전드 열전 은퇴 기념 레전드 카드 발매만화.
5.3. 음반 발매 : 투앤원
93년 우승 당시 모기업 해태는 우승을 해도 포상금을 두둑하게 챙겨주지 못했고 결국 이상국 단장이 김응용 감독 몰래 추진한 일이 음반 발매였다. 연습과 녹음을 병행하느라 서울-광주를 왕복했고 코피가 날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김응용 감독은 "쟤들이 나 몰래 특별훈련을 하나?" 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판매량은 딸랑 20장에 재고만 무려 3만장 넘게 쌓였고, 김응용 감독에게 앨범을 몰래 냈다는 사실을 들키자 당연히 노발대발하면서 두고두고 까였다고 한다. 결국, 선동열, 이종범이 부상을 당하거나 성적이 안 나올 때마다 "야, 이새끼들아! 나이트나 가!" (나이트 가서 노래나 불러!), "돈 벌려고 그거 한 애들이니 다쳐서 훈련 못 할거 그냥 밤무대 행사나 보내!" 라고 타박을 놨다고 한다. 그래놓고서 김응용 본인은 앨범을 10장을 사주는 츤데레 기질을 보이기도.... 그룹 이름은 'Two&One'이다. 당시 인기 가수였던 양수경이 같이 한 앨범이다. 앨범 보기.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6. 기타 이야깃거리
- 원래는 축구선수를 꿈꿨다고 한다. 근데 축구부가 해체돼서 여러 운동부를 전전하다 잘 나가던 동네 형인 김기태를 따라 야구로 바꾼다. 실제로도 축구를 꽤나 했다고 하는데, 해태에서 뛰던 시절 당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인 박종환은 이종범이 축구하는 걸 보더니 "1년만 빡시게 굴리면 국가대표 승선도 가능하겠는데?"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이순철도 본인이 축구를 제법 했는데 이종범만큼 축구 잘 하는 야구선수를 본 적이 없다며 준프로급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대학 시절에도 비슷한 일화가 있다. 평소 학내 축구부와 친분이 있었던 이종범은 야구부 연습이 없는 날 축구부 친구들과 주먹구구식으로 볼을 차곤 했는데, 이를 지켜보던 축구부 감독이 '쟤는 야구분데 왜 축구하고 있지?', '볼은 좀 차네', '입학 정원 할당 때문에 야구부에 가 있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어 야구부 감독에게 "이종범이 필요 없으면 우리 줘라"라고 했다. 그런데 그 말에 대한 야구부 감독님의 답변이 "그럼 우린 뭘로 야구하라고"였다고... 하일성 해설위원에 따르면, 실제로 축구계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다고 한다. 관련 기사 그리고 이 축구 실력을 검증이라도 받았는지, 축구 소재 예능인 뭉쳐야 찬다 - 전설들의 조기축구에 게스트로 나온 적이 있다.
- 달걀을 절대 먹지 않는다고 한다. 학창 시절에 간식은 무조건 달걀이었고, 하루에 30개씩 먹었기 때문에 달걀공포증(?)이 생겼다고 한다.[24] 다만, 이후에 예능 프로그램에 촬영하면서 이수근과 육전을 먹거나[25] 현역시절 식사 시에 계란국 등을 먹는 걸 보면, 그냥 삶은 달걀을 안 먹는 거지, 달걀 베이스의 음식은 어느 정도 먹는 듯하다.
- 1994년 8월 12일에 방송된 MBC 베스트극장 <이종범 아저씨께> 중에서 타이거즈를 좋아하는 영호가 자신의 짝꿍인 소영이의 생일파티에 초대를 받게된다. 하지만, 소영이의 생일파티에서 다른 친구들에게 멸시를 받자 격분한 영호가 소영이의 집을 뛰쳐나오는데, 이내 소영이도 영호 뒤를 졸졸 따라가면서 영호의 가던 길을 가로 막게 된다. 영호는 왜 자꾸 따라와? 하면서 궁금해 하자 소영이가 이거 뭐게? 하면서 자신이 준비한 깜짝 선물을 보여 주지만 영호는 무심해 하면서 돌아서는데, 이 때, 이종범 싸인이야 하면서 소영이는 리틀 타이거즈 출신이었던 오빠의 기념품인 이종범 싸인볼을 선물해 영호의 토라진 마음을 풀어주게 된다. 이종범 싸인볼을 선물해주었던 영호의 짝꿍 소영이의 역할을 맡았던 배우가 놀랍게도.... 90년대 최고의 아역배우였던 이정후였다. 야구선수 이정후는 1998년생으로 이 에피소드가 방송되었을 당시 부모님이 아직 미혼이고 어머니 뱃속에 잉태되지도 않았는데, 아마도 이종범 선수가 이 방송을 우연히 보면서, 소영이가 영호에게 선물을 주었던 기념품인 이종범 싸인볼에 깊은 감명을 느꼈는지, 아들의 이름을 정후라고 지은 결정적인 이유로 추측된다. 안타깝게도 이정후양은 2013년, 모 방송사의 아침 드라마 출연을 끝으로 결혼하면서 연예계를 떠났고 2016년 12월 10일, 지병인 암으로 별세하면서 그를 추억하는 많은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 2009년 11월 25일, 황금어장 무릎팍도사 이종범 편 1부가 방송되었다. 개인사와 프로야구 데뷔부터 일본 진출 직전까지의 이야기를 했으며 그의 흑역사인 음반 발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강호동을 팔씨름으로 가볍게 제압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27]
- 해태 입단 당시 계약금 7,000만원을 아버지께 드리고 본인은 버스를 타고 출퇴근했다고 한다. 관련 기사
- 현대 쏘나타와 두 차례나 연이 있다. 1993년 한국시리즈 MVP 부상으로 쏘나타 2 승용차를 받았고, 4년 뒤인 1997년 한국시리즈에서도 시리즈 MVP에 올라 쏘나타 3 승용차를 부상으로 받았기 때문이다.
- 2010년 10월 30일(천하무적 야구단 2010년 11월 20일 방영분), 당시 유일한 현역으로 일구회 멤버로서 천하무적 야구단과의 뇌경색으로 쓰러진 기아 타이거즈 김동재 코치 돕기 자선 경기에 출전해 희생 플라이로 1타점을 올렸다. 천무단 멤버들이 전원 경악했다. 일설에는 정말 작정하고 올려 보냈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재미있는 선발투수가 2이닝도 못 채우고 강판되었고, 계속되는 실점에 천하무적 야구단에게 5점이나 뒤져 있었으니. 여기서 볼 만했던 것이, 40년만에 투수로 등판한 그 분이었고, 포수가 김경문이었다. 당시 두 사람의 분위기가 상당히 험악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나름 재밌는 장면.
- 일본에서의 프로 생활과 대학 생활만 제외하면 전부 광주광역시서만 보낸 광주토박이[29]였으나[30], 2012년 봄, 딸의 교육 문제 등으로 인해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동 압구정 현대아파트로 이주하였다. 엠스플에서는 간혹 現 거주지를 응용하여 '압구정에 살고 있는 이종범(46) 위원' 드립을 간혹 치기도 한다(...).[31] 아들의 소속팀이 서울 연고의 키움이고, 딸이 연세대학교에 재학 중이라는 점, 이종범 본인이 역시 서울 연고팀인 LG의 타격코치인 점을 감안하면 앞으로도 계속 서울에 살 가능성이 크다.[32] 부동산 계약 시 작성해야 할 서류가 많자 '아따 뭔 서류가 이렇게 많다냐?'라고 투덜댄 것은 덤. 남편이 현역 선수 시절 집을 오래 비워야 하는 경우가 많아 부동산 계약 등 집안 살림은 부인이 다 해서 정작 세상 물정을 많이 모른 듯 하다[33].
- 한때 빵 사건의 유력 용의자로 지목되며 빵종범이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기아 구단이 당시 빵을 먹은 선수는 지금 팀에 없는 선수라고 기사를 냈으며, 마해영은 본인의 책 '야구본색' 출간 후 식사 자리에서 빵 사건 자체가 금시초문임을 밝혔다. KBS의 옐로우카드라는 프로그램 51회에서는 이재국 야구전문기자가 당시 빵 사건을 언급하면서 빵을 먹은 인물에 대해서 밝혔다. 당시 준플레이오프 엔트리에 들어있었던 사람인데 대패를 하고 난 뒤 "야, 빵없냐?" 라면서 빵을 먹은 선수는 FA로 영입되어 팀에 융화되지 못하던 선수로, 2009년에 현역이 아니고 은퇴한 선수라는 것을 암시한 것인데... 재밌는 건 같은 오해에 휘말린 박재홍의 경우엔 오히려 팬들이 더 "빵형", "빵신" 등으로 친근감 있게 부르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종범은 빵 먹을 수 있지 않냐면서 자신이 옆에서 그 장면을 목격했다면 물이라도 갖다주라고 했을 것이라 했다. 이후 2012년 이야기쇼 두드림에 출연하여 본인은 빵을 먹지 않았다고 직접 언급하였다. 그렇긴 한데, 빵 사건의 최초 발설자인 정철우 기자가 진범이 마해영임을 밝히면서 엉뚱한 사람을 범인으로 몰아갔다고 진범보다 더 욕을 먹었다.
- 프로야구매니저에서는 레전드 이종범 영입 재료로 8그룹에 박재홍과 기아 시절 마해영을 집어넣어 빵 사건을 기념하고 있다(...) 또한 이종범이 프로야구 매니저의 모델이 되었을 당시 한 GM이 공지사항에 이종범과 프야매 측이 모델 계약을 체결하는 사진을 올려놓고 거기다 보이십니다라는 드립을 쳐서 유저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 염경엽 LG 트윈스 감독과 김기태 전 KIA 타이거즈 감독[34]과는 충장중학교 - 광주제일고등학교 선후배 사이인데, 염경엽 감독은 인터뷰에서 1998년에 사망한 그의 아버지가 자신과 이종범을 많이 비교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 김기태 전 감독과는 어린 시절부터 친한 형-동생 사이었다고 하니, 김기태가 그를 KIA 타이거즈로 오라고 한 것도 어느 정도 이해 가는 수준.
- 이상하게도(?) 엠스플 해설위원으로 위촉된 이후에는 원형탈모(...)의 대명사로 밀어주려는 느낌이 강하다. 이석재 PD가 평하기를 '이종범의 활약은 원형탈모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드립을 칠 정도.
- 2016년 3월 20일 복면가왕에 날아라 병아리라는 가명으로 참가했다. 원래는 판정단으로 참가하려다가 녹화 하루 전에 마음을 바꿔 복면가수로 참가해서 사랑의 불시착과 같이 장현철의 '걸어서 하늘까지' 를 불렀으며 조용필의 '기다리는 아픔'을 부르면서 정체를 밝혔다. 참고로 그의 정체를 짐작한 시청자들은 방송에 나온 것을 반가워했고 가왕이 되길 바란 이들도 적지 않았으며 특히 국내야구 갤러리에서는 1분에 10페이지가 넘어갈 정도의 엄청난 화력을 선보였다. 그 뒤 4월 10일 KIA 타이거즈와 kt wiz의 경기 중계 때 오프닝으로 당시 썼던 가면을 착용하고 복면야왕으로 오프닝에 임해서 복면가왕처럼 음성변조를 했다.
- 일간스포츠 김유정 기자가 아내인 정연희와 한 인터뷰에서 알려진 사실인데 한때 이혼설이 있었지만, 현실은 아내인 정연희가 개명해서 생긴 헤프닝이였다고 한다.[35] 그 근거는 이 쪽이다. 인터뷰 2편.
- 아들이 친구와 장난 삼아서
라지만김치녀 발언을 SNS에 적었다가 삭제한 적이 있다. 이를 안 이종범은 매우 화를 내며 정말로 때리기 직전까지 분위기가 살벌했다고 이정후가 언급했다. 그렇지만 평소에는 굉장한 아들 바보라고 할 수 있다. 자신도 여러 구설수가 있던 적이 있으니 아들은 자기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를 바라는 부성애라고 보면 되겠다.
- 본인에 이어서 아들도 야구선수인 만큼 아버지가 이정후의 타격을 봐주었을 것 같지만, 의외로 많은 부분을 터치하지 않고, 아들이 다니던 학교의 지도자들에게 일임하고, 자신은 아들에게 몸 관리나 유명인으로서의 자세의 중요성 정도만 조언을 해줬다고 한다. 다만 유일하게 이종범이 이정후에게 개입한 것이라면, 아들을 좌타자가 되라고 말한 것 정도라고 한다고 기존엔 알려져 있었으나 2019년 12월 24일 자 이영미 기자 인터뷰에 따르면, 이정후가 먼저 물었을 때 한정해서는 세세한 자세교정은 조금씩 해주긴 한 것같다. 팔꿈치가 들리는 것 등에 대해 이야기해줬다고... 관련 기사
- 2017년 카스포인트 어워드에서 아들인 이정후의 노래에 춤을 췄다. 사실 이정후가 카스포인트 어워드에서 신인상을 수상하면 이종범이 춤을 추고 이정후가 남진의 둥지를 부른다는 공약을 했기 때문. 문제의 부자 공연 영상 여담이지만 이 동영상이 2017 카스포인트 어워드 동영상 중 조회수가 가장 많다.
- 부자 금메달리스트이다. 아들인 이정후가 자카르타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땄고 본인도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땄기 때문. 그것도 동일 종목이다.
- 선수들에게 무척 강요하는 정신은 검이불루 화이불치이다.
- 세계최초 부자 타격왕 및 MVP이기도 하다. 2021년 이정후가 타격왕을 수상하며 일본, 미국에서도 나오지 않은 기록을 써내렸다.
이정후는 또 자신 덕에 아버지 매스컴 나온다고 놀려댔고 다음 시즌은 홈런왕을 노린다고 한다...2022년에는 이정후가 타격 5관왕과 정규시즌 MVP까지 수상하면서 부자지간에 대기록을 달성해냈다.
- 경기도 이천시 대월면에 있는 건국대학교 야구부의 야구훈련장 이름을 동문인 이종범의 이름을 딴 '이종범 야구장'으로 지었다. 건국대학교 축구부 및 야구부는 원래 서울캠퍼스에서 운동하였으나 연습장 부지를 스타시티 건축으로 잃자 학교에서는 스포츠과학타운을 조성하여 황선홍 축구장, 이종범 야구장을 만들었고 축구부와 야구부는 그 곳에서 훈련을 받고 있다.
-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김성한이 술회하기를 이종범이 입단 초기에 너무 긴장하고 주눅이 들어있길래, '너가 하고 싶은대로 맘껏 플레이해라'고 조언한 뒤 펄펄 날라다니기 시작했다고 한다. 김종모가 술회하기를 이종범의 부친이 김종모를 찾아와서 당시 타격코치는 김봉연-김종모 2명이 맡고 있었는데 홈런으로 유명했던 김봉연보다 교타자로 잘 알려졌던 김종모에게 코칭을 부탁했다고 한다.
- 서경석 TV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종범을 코치로 데려온 사람은 차명석 단장이라고 한다. 해설자보다 수입이 적은 코치로 데려오는게 미안해서 이종범의 아내에게 전화를 했는데, 돈은 정후가 번다며 도리어 매우 환영했다고 한다(...). 제발 자기 눈앞에서 치워달라고 한건 덤(...).
- 타이거즈 레전드로 남은 현시점에서 보면 놀랍게도 이종범은 사실 2001년 일본리그에서 돌아올때 김응용감독님을 따라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일본리그로 완전영입될때 해태 타이거즈에서 임의탈퇴를 해놓은 덕에 어쩔수없이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었었다고 한다.[36] 그 이후 KIA 타이거즈는 선수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이종범을 삼성 라이온즈와 트레이드 하기 위해 카드까지 맞추었던 적이 있다.
- 선수 시절 커리어와 위상 그리고 나름대로 풍부한 지도자 경력에도 유독 감독과는 연이 없다. 친정팀인 KIA 타이거즈의 감독이 교체될 때마다 항상 언급되는 단골 후보이지만 감독 선임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없었다.[37] KIA 팬덤의 경우 선동열이라는 최악의 흑역사가 있다 보니 유이한 영구결번인 이종범마저도 자팀에서 지도자로서 욕먹는 건 못 보겠다는 여론이 상당한 편이다. 이에 대해 이종범은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감독 욕심이 있는지 우승팀 코치임에도 불구하고 아들인 이정후의 메이저리그 진출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지도자 연수를 받는다고 한다. 다만 LG 2군 감독 시절 이야기를 들으면 엄청난 올드스쿨이라는 소리가 나온 덕에 감독이 되지 못하는 이유를 알겠다는 말이 나올 정도라 감독이 되려면 갈 길이 멀어보인다.
- 건국대학교-해태-KIA 선배인 최해식이 은퇴 후 1998년 중국집 최고루를 광산구 운남동에 열면서 전단지에 '25,000원 이상 주문 시 이종범 친필 사인구 증정' 이벤트를 내걸었다. 최해식이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어떤 팬으로부터 전단지 질문을 받자 '종범이는 지금까지 나한테 이 전단지 가지고 아직도 나 닦달거려. 선배가 먹고 살겠다고 잠깐 써먹었는디. 그 당시 25000원이면 엄청 컸거든.'이라고 말했다. 이종범이 최해식한테 '아따 행님 내 사진 그만 좀 쓰쇼잉~' 따지자 '야! 전단지에 니 이름만 썼지 얼굴 사진은 안 썼어~'라고 재밌게 술회했다.
[1] 추신수는 곧바로 직행한 케이스므로 논외[2] 역대 KBO 기록으로 놓고 보는 것이므로 이종범의 일본리그 진출을 언급한는 건 부당하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최고의 타자였던 이종범조차 힘들어했을 정도로 리그 격차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 걸로 당시 최고의 야수였던 이종범을 폄하하면 당시 KBO 타자들 기록 역시 같이 폄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3] 역대 2위였으나 15 에릭 테임즈가 1위가 되며 2위를 헌납했다.[4] KBO 유격수 최초 40홈런[5] Baseball lab 기준.[6] 당연하다면 당연한 게 그냥 출루율만 봐도 강정호가 우위다.[7] 타고투저 시대와 타저투고 시대를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기 위해서.[8] 수비율로만 판단한다면 수비범위가 좁은 선수가 오히려 수비에서 고평가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오기 때문이다. 수비범위가 그 예로 자주 언급되는 것이 홍세완과 박진만.[9] KBO, Baseball Lab 및 구 스탯티즈 전부 포함 94 이종범이 단일 시즌 야수 WAR 1위인 건 똑같다.[10] 즉, 당시 왼손 글러브가 있었어도 좌투우타를 했을 가능성이 크다.[11] 이종범이 좌타보다 우타에 소질이 있었다지만, 우타자가 좌타자보다 1루에 멀기 때문에 내야안타가 될만 한 타구가 간발의 차로 땅볼아웃 되는 경우가 많아서 피해보는 일도 생겼다.[12] 김종국은 고교, 대학 시절 군기반장을 했지만, 선배인 이종범이 구타 문화를 없애면서 폭력을 쓰는 일은 없었다.[13] 코미디언 정준하는 2011년 무한도전 '타인의 삶' 기획에서 이숭용과 역할을 바꿔 넥센 히어로즈 선수로 뛰면서 마침 녹화 당일 경기 상대였던 KIA 측 식당을 방문했는데, 선후배가 뒤섞여 이야기를 나누며, 심지어는 팀 내 최고참(의 대역 정준하)에게 농담도 치며 식사하던 넥센 식당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대선배인 이종범이 혼자 독상을 하고 다른 선수들도 별 대화 없이 묵묵히 식사하는 모습을 보고 팀 간에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며 놀라워하기도 했다. 이후에 서재응이 이홍구를 불러다가 갈구는 장면이나 얼차려 장면이 기사로 나가면서 여전히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분위기에서 탈피하지 못했음을 보여주었다. 이런 보수적인 분위기는 2010년대 들어 최형우가 최고참이 되고 그 밑 고참라인으로 탈권위적 모습을 보이는 양현종, 김선빈, 나성범 등이 들어오게 되면서 완전히 사라졌다.[14] 거꾸로 말해요 아하~ 시절[15] 지금도 일본 넷상에선 1대 한국의 이치로라면서 2대 한국의 이치로라는 이병규와 함께 고통받고 있다(...) 그리고 현재는 아들이 한국의 스즈키 이치로 별명을 물려받았다[16] 사실 이종범의 플레이 유형은 이치로보다 마쓰이 가즈오의 타입에 가까운 편. 실력은 물론 일본에서 역대급 유격수라는 평을 들으며 메이저리그까지 진출한 카즈오 마쓰이와의 비교는 무리지만, 그 플레이 스타일과 행보는 제법 유사한 편이다. 자국 리그 내에서는 훌륭한 피지컬을 이용해 뛰어난 호타준족 유격수로 활동했으나, 상위 리그에 진출하자 똑딱이로 전락하고, 자국 리그에선 좋은 평을 들었던 강한 어깨와 넓은 범위의 수비가 진출 당해년도에 상당한 혹평을 들으며 포지션까지 변경당했던 모습, 그럼에도 어찌어찌 빠른 발을 살려, 주전으로서 플레이오프까지 경험한 후 자국 리그에 복귀했다는 행보까지 어느 정도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17] 오히려 몇 가지는 현역 선수들과 비교당해서 저평가되는 감이 없잖아 있다. 만화에서는 최훈이 90년대 이종범의 펀치력을 최진행급이라고 했는데, 데뷔 해인 93년을 제외하면, 90년대 이종범 장타율이 최진행보다 높다. 주력이 이대형급이라는데, 90년대 이종범은 방위로 풀타임 못 뛰었던 95년만 제외하면 wSB값이 거의 3~7까지 차이가 날 정도로 더 높다. 다만 주력의 경우, 만화를 그릴 당시에 가장 빠른 선수가 이대형이어서 그 쪽으로 비교했다고 할 수도 있다.[18] 기사 중간쯤에 나온다.[19] 특히 2022시즌에는 사위 고우석이 42세이브로 리그 세이브왕을 차지하고 아들 이정후가 타격 5관왕에 오르게 되면서 겹경사를 맞이하게 된 터.[20] 문선재-문진제 형제의 부친이자 문승훈 심판의 형이다. 선수 시절에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고 오랜 기간동안 해태-KIA 프런트로 활동했다.[21] 이강철과 입단 동기로 1991년 한국시리즈에서 활약했던 해태 선수다. 군복무 후 현역복귀 대신 프런트 전직을 제의받아 해태 프런트로 활동했다.[22] 이국적인 외모로 오바마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해태 타이거즈의 클럽하우스에 드나들 수 있었던 몇 안되는 기자였다. MBC 스포츠플러스의 메이저리그 중계에서 가끔 해설위원을 한다.[23] 안영명을 환영하는 선수들 사이에 끼어있다.[24] 운동 선수들이 단백질 섭취를 한다며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계란을 소금조차도 없이 그것도 흰자만 주구장창 먹는 경우가 많다. 심정수가 몸을 키우기 위해서 그랬던 것으로 유명하다.[25] 육전은 계란물에 고기를 담가 튀긴 음식이다.[26] 실력이 높은 선수에게 과거의 시합 기록에 기초하여 더해주는 것.[27] 다만, 이건 강호동이 방송계에서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일부러 져주는 기믹도 감안해야 한다. 강호동이 현역 은퇴를 한지 오래됐고, 전성기만큼 근육량을 갖고 있지 않기도 했지만, 50줄을 넘은 나이인 지금도 여전히 다부진 몸과 괴력을 소유하고 있다. 일부러 허당이나 당하는 역을 많이 맡아서 그렇지 현역 스포츠 선수들과 정말 제대로 힘대결을 할 때 그들조차도 놀라서 긴장할 정도다.[28] 비단 이종범 뿐만 아니라 김정수, 송유석, 정회열, 김종모, 김종국 등 해태 타이거즈 OB들이 대부분 연고지 출신이라 서남 방언을 구수하게 구사한다.[29] 광주동성고등학교 학생들의 증언으로 가정해 보아 남구 진월동 한국아델리움에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광주동성고 바로 맞은 편에 그 아파트가 있다.[30] 심지어 군복무도 고향에 있는 제31보병사단에서 방위병으로 복무하였다.[31] 현재는 강남구 논현동으로 이사했다. 아들 이정후와 동반출연한 예능에서 이사한 집을 공개하기도.[32] 다만, 이종범 본인은 2군 코치인지라 따로 이천시에서 선수단과 생활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33] 사실 비단 이종범 뿐만 아니라 운동선수들은 학창시절부터 오로지 운동만 해 오고 다른 것들은 배울 시간이 거의 없는지라 다른 분야로 진출하려고 하거나 맞닥뜨리게 될 시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흔하다.[34] 참고로 두 사람은 충장중 - 광주제일고 동기동창인 절친이다.[35] 참고로 개명 전의 이름은 정정민이었다.[36] 다만 김응용 감독이 따로 설득을 했던 것도 있었다고 한다.[37] 이종범을 은퇴시킨 선동열의 후임으로 선임된 김기태 감독이 KIA에서 함께하자고 제의했지만 고사했던 적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