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 호시야마 쥬쇼(星山重燮)[1] |
호 | 석정(昔丁) |
본관 | 성주 이씨[2] |
출생 | 1919년 8월 3일[3] |
경기도 강화군 선원면 냉정리 820번지 (現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냉정리) | |
사망 | 1996년 7월 11일 (향년 76세)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 세브란스병원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573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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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정치인.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훈받았다.2. 생애
1919년 8월 3일 경기도 강화군(現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냉정리 820번지에서 아버지 호은(虎隱) 이상린(李相麟, 1890. 10. 23 ~ 1957. 4. 2)[4]과 어머니 영암 박씨(靈岩 朴氏, 1889. 3. 25 ~ 1968. 12. 24)[5] 사이에서 1남 4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상경하여 경기도 경성부 제기정(現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제기동) 203번지에 거주했다.1926년 4월 선원공립보통학교(4년제)에 입학해 1929년 3월 졸업하고, 1929년 4월 강화공립보통학교(당시 6년제, 現 강화초등학교) 5학년에 편입해 1931년 졸업했다. 1936년 경성공립농업학교(現 서울시립대학교)에 입학했다.[6] 경성공립농업학교 재학 중이던 1936년부터 1937년 사이, 교내 일본인 교사 배척 운동을 주도해 광주학생항일운동을 잇는 제2의 대규모 학생운동을 전개할 것을 계획했으나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돼 경성부 동대문경찰서에 송치되었고, 3주 동안 가혹한 고문을 받은 뒤에야 석방되었다.
1937년 9월부터 아버지의 친구인 장연송과 알고 지내게 되었고, 이후 임호연(林豪淵) 또한 알게 되어 자주 역사에 대해 토론하곤 했다. 1938년 9월 어느 날 오후 6시 경성부 동숭정(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숭동) 130-5번지 장연송의 집 건넛방의 자신의 거실 온돌에서 장연송이 3.1 운동에 대해 "대정 8년(1919) 손병희 등의 조선독립운동은 이른 바 맹목적이고 하등의 목표가 없었기 때문에 결국 실패로 돌아갔으므로 우리들은 이 동방의 정서, 즉 단군 사상을 표방해 민족독립운동에 매진할 때에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라고 말했고, 또한 "조선국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타국을 침략한 적 없고, 다만 침략자를 방어하는 데 그치는 등 극히 낙천적인 민족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간사회는 상호부조적이었고 유혈투쟁을 하여 탈취당한 경우에는 반드시 필연적으로 피를 흘려서라도 그 탈취된 몫을 돌려받지 않을 수 없다"며 반전주의에 대해 가르쳐 주어 이 두 담론에 모두 찬성했다.
석방 이후 일본으로 유학해 1940년 도쿄도 니혼대학 경제과(3년제)에 입학했고, 재학 시절 일본 제국 경찰에 이른 바 불령선인으로 지목돼 여러 차례에 걸쳐 연행당했다. 한편, 이때 장연송과 함께 조선독립운동에 있어서 물자를 풍부하게 하기 위해 무연료 원동력 가동기를 제작하기도 했다.
1940년 겨울부터 장연송·임호연 등과 본격적으로 여러 사상운동에 대해 토론하기 시작했다. 1941년 겨울, 도쿄에서 임호연에게 "우리들은 감정에 지배당하기보다 동방의 정서 속에 사는 것이 얼마나 가치있는가" 등의 구절을 써서 동방 정서를 어디까지나 실행하도록 격려하고, 조선독립을 희망하며 모든 방면에 주의할 것을 당부하는 서신을 보냈다. 1942년 니혼대학 졸업 후 귀국했으며, 1942년 1월 중순 오전 11시에 경성부 혜화정(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동) 15-147호 임호연의 집 거실 온돌에서 임호연으로부터 《조선시조선(朝鮮詩調選)》을 빌려 격렬한 조선민족의식을 고취했다. 또한 1월 24일 오후 6~7시에 경성부 제기정 203번지 장연송의 집 안방 거실 온돌에서 장연송이 동방의 정서에 대한 진리와 그 선전 보급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주었고, "한복은 좋다", "현재의 교육은 왜인의 생활 상태를 배우는 것인데 옳지 않다", "각 도·부·정(町)에 인재를 선발하여 정서 교육을 선전한다" 등의 말을 듣고 이에 대해 토론했다.
그러나 이후 이러한 일제 식민통치에 반대하는 발언을 한 것으로 인해 경성부 용산경찰서에 체포되었고, 일본 제국 경찰에 의해 '비밀결사 조선독립운동협회'를 조직해 항일운동을 꾀한 것으로 조작되었다. 결국 1943년 2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1943년 5월 3일에는 대전형무소에 이감되어 옥고를 치렀다. 1945년 2월 24일 출옥한 뒤에는 은거하다가 8.15 광복을 맞았다.
1942년 10월 1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
8.15 광복 후 1945년 9월 28일 조선과학협회 위원회에서 장연송·이극로와 함께 위원에 선출되었고, 1946년 9월 18일 대한독립청년단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이성주·류성갑·문봉제 등과 함께 기획처 위원에 선임되었다.
그 뒤 중앙통신사 이사를 거쳐 1956년부터 강화산업조합장을 역임하면서 염색, 인견 등 섬유공업, 강화도 특산품인 화문석과 화방석, 화롱(花籠:꽃바구니) 제조, 각종 도자기 제조 등의 산업에 종사했다. 한편, 자유당에 입당해 강화군당 위원장을 역임했다. 1956년 지방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경기도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고, 1956년 8월 13일부터 1960년 12월 11일까지 초대 경기도의회 의원을 역임했다. 임기 기간동안 경기도의회 3기 의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경기도 강화군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현역 국회의원이던 무소속 윤재근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이후 정계를 은퇴했고, 고려인삼흥업주식회사 대표이사 회장을 역임하면서 강화도 특산물인 인삼의 해외수출판로를 개척했으며, 이 밖에 고려전산연구소 회장을 역임하며 기업인으로서 활동해 산업훈장을 수훈받기도 했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훈받았다.
1996년 7월 11일 오전 7시에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 세브란스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유해는 1996년 7월 13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안장되었다.
3. 여담
- 1942년 3월 30일 작성된 이중섭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검사 신문조서(제4회)에 따르면, 1941년 10월부터 친구 임호연의 중매로 임호연과 11촌 지간인 임마리아(林瑪利亞)[7]와 혼담이 오갔고, 1941년 12월 말 오후 6시에 경성부 혜화정 14-7번지 임마리아의 외방 온돌에서 임마리아의 부친 하야시 엔죠(林圓城)를 만났다. 이때 이중섭은 하야시 엔죠에게 "나의 처가 될 사람은 시골생활을 지극히 해 농부처럼 분뇨통을 머리에 일 각오가 없으면 불가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어 임마리아를 면회시켜 달라고 말하자, 하야시 엔죠는 약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면담은 불가능하다며 거절했다. 2, 3일 후에 임호연에게 전해 들으니, 하야시 엔죠가 "장래 신랑이 될 자가 너무나 건방지다", "처자를 양육할 남자로는 조금 부족한 점이 많다"며 혼담에 대해 반대했다고 한다.
1942년 3월 31일 작성된 증인 하야시 후지코 신문조서에도 이중섭과의 혼담이 부친의 반대로 '끝났고', 임마리아 자신 또한 "(결혼에 대해 이중섭 본인과) 합의한 적도 없고 하여튼 부모가 있으니 부모의 명에 따를 뿐이다. 아직은 자유 결혼을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단언해 혼담은 사실상 없던 것으로 된 듯하다.
그런데, 성주이씨대동보 6권 487쪽을 보면, 이중섭의 부인에 나주 임씨 임마리아(林馬利亞, 1921. 10. 19 ~ 1950. 11. 1)가 등재돼 있고, 슬하에 아들 1명을 두어 끝내 성혼했음을 알 수 있다.
4. 선거 이력
연도 | 선거종류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1956 | 1956년 지방선거 (경기도의회 의원) | [[자유당(1951년)|]] | - | 당선 (1위) | 초선 |
1960 | 제5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강화군) | 8,951표 (20.05%) | 낙선 (2위) |
[1] 1942년 5월 8일 치안유지법 위반 피체자 이감에 관한 건[2] 문열공파(文烈公派) 25세 섭(燮) 항렬. 성주이씨전국종친회 감사, 성주이씨 판윤공 종회장, 성주이씨 문경공파 종회장 등을 역임했다.[3] 성주이씨대동보 6권 487쪽에는 4월 3일생으로 등재돼 있다.[4] 창씨명은 호시야마 소린(星山相麟).[5] 박윤재(朴潤在)의 딸이다.[6] 1942년 3월 26일 작성된 이중섭 소행조서에는 1936년 동대문 밖 공과(工科) 광산과(鑛山科)학교에 입학했다고 기재돼 있다. 여기서 공과 광산과학교란, 경성광산전문학교를 말하는 듯 보이지만, 경성광산전문학교는 1939년에 설립되었기 때문에 경성광산전문학교는 아니다. 또 경성광산전문학교의 전신인 경성고등공업학교 광산학과는 동대문 밖이 아니라 한양도성 내인 경기도 경성부 동숭정(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숭동) 199번지 경성고등공업학교 구내에 있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당초 이중섭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기재돼 있는 대로 이중섭이 경성공립농업학교에 재학했던 것으로 보고 서술하겠다.[7] 창씨명은 하야시 후지코(林藤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