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몽령(夢齡) → 학조(學祖) |
본관 | 덕수 이씨[1] |
출생 | 1890년 |
황해도 해주목 고산방 일리[2][3] (現 황해남도 벽성군 석담리) | |
사망 | 1918년 10월 15일 |
묘소 | 황해남도 벽성군 석담리 응봉산 선영 |
상훈 | 대통령표창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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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20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율곡 이이의 13대 종손이다. 독립유공자 이종문은 아버지, 이종성은 작은아버지이다.
2. 생애
1890년 황해도 해주목 고산방 일리(現 황해남도 벽성군 석담리)의 양반가에서 아버지 이종문과 어머니 고창 오씨(高敞 吳氏, ? ~ ?. 11. 24)[4] 사이에서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종문은 1885년(고종 22) 식년 진사시에 3등 132위로 입격하고 같은 해 치러진 증광 문과에서 병과 11위로 급제해 홍문관 교리(校理, 정5품)에 올랐으며, 경술국치 후 대한광복회, 대한독립단 등에 가입해 독립운동에 종사하다가 옥고를 치른 공적으로 독립유공자에 서훈된 인물이다.태어나기 전 아버지 이종문이 학이 나오는 태몽을 꾸어 장남의 이름을 이학희로 지었다고 하며, 어려서부터 풍채가 좋고 언변이 뛰어나며 의협심과 큰 뜻이 있어 신망이 두터웠다고 한다. 1901년 2월 관례가 치러질 당시에 아버지 이종문의 초청으로 의병장 유인석이 율곡 종가에 찾아왔고, 유인석의 주선하에 관례가 치러졌다. 이때 이종문은 학이 나오는 태몽을 꾸어 '학희(鶴熺)'로 작명한 것을 들어 자 또한 몽령(夢齡)으로 짓고자 했는데, 유인석의 권유로 학조(學祖)로 바꾸어 지어 주었다.
경술국치 이후 1914년 1월, 유인석의 문인이었던 이관구(李觀求)가 중화민국 항주부에서 군관학교 속성과를 졸업하고 귀국해 해주군에 잠입했고, 비밀결사를 조직하고자 동지를 포섭했다. 이때 이학희는 아버지 이종문과 함께 이관구의 포섭에 호응해 5개월간 해주군 미률면 부호 이종규(李宗奎)의 집에 드나들며 비밀결사 조직에 참여했으며, 이관구의 권유로 국권회복운동을 위해 하와이로 건너갈 것을 계획하기도 했으나 자금을 조달하지 못해 실행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일본 제국 경찰에 발각되어 이관구는 중화민국으로 도주했고, 이 과정에서 이학희는 체포돼 고초를 겪은 뒤에야 훈계 방면되었다.
이듬해인 1915년, 이관구가 재차 귀국해 박상진이 조직한 대한광복회에 가입한 뒤 황해도지부를 결성했다. 이때 이관구는 황해도지부장에 취임했고, 이학희는 아버지 이종문과 함께 황해도지부 결성에 동참했다. 또한 족형(族兄) 이석희(李錫熺)는 이관구에게 모금 서류에 필요한 '광복회', '신한국보', '재무총장' 등이 새겨진 인장을 조각해주었다. 이후 대한광복회 황해도지부는 후조(後凋) 고석로(高錫魯), 오찬근(吳讚根), 원춘(元春) 변동환(邊東煥) 등 이항로의 화서학파(華西學派) 문인들을 중심으로 해주군, 송화군, 장연군, 신천군, 옹진군을 넘어 평안도에까지 그 범위가 확대되어 동지 포섭 및 군자금 조달이 이뤄졌으며, 제2대 하세가와 요시미치 조선총독에 대한 암살 작전을 계획하는 데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1918년 6월 18일 해주군 미률면 석정리에 사는 조하동(趙夏東)이 해주경찰서장에게 오찬근 등 22명이 이관구와 함께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대한광복회에 가입했다며 밀고했고, 이 때문에 이관구와 함께 이학희 또한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고, 갖은 고초를 겪다가 같은 해 10월 15일 옥사, 순국했다.
사후 2020년 8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3. 여담
- 부인 고창 오씨(高敞 吳氏, 1885 ~ ?)[5]와 결혼해 슬하에 1남 3녀를 두었는데, 이 아들 한 명이 바로 율곡 이이의 14대 종손이 되는 이재능(李載能, 1916. 8. 5 ~ 1979. 11. 3)이다. 이학희의 부인이자 13대 종부인 고창 오씨는 1947년 일가족들이 월남할 당시에도 생존해 있었으나, 아들 이재능에게 "같이 가다가는 다 죽게 생겼으니 먼저 내려가라"고 하고 이북에 그대로 남았다고 한다.
- 이재능은 면천 박씨(沔川 朴氏) 박초덕(朴初德, 1911 ~ 1940. 12. 29)[6], 수원 이씨(水原 李氏) 이화봉(李花峰, 1922. 1. 15 ~ )[7] 등 2명의 부인과 결혼해 슬하에 모두 6남 2녀를 두었다.
- 이재능 슬하의 6남 2녀 중 셋째 아들 이천용(李天鏞, 1942. 8. 2 ~ )이 현재 율곡 종가의 15대 종손인데, 6살 되던 1947년 3월 아버지 이재능, 어머니 이화봉 등 가족들을 비롯해 가까운 일가 친척 10여 명과 함께 해주군 고산면 석담리에 모셔져 있던 율곡 이이와 율곡 이이의 부인 곡산 노씨(谷山 盧氏)의 신주를 안고 월남했다고 한다.
월남하던 도중 임진강 부근에서 내무서원 2명에 발각돼 체포되었고, 곧 해주시 시내로 끌려가 인민재판에 회부될 위기에 처했다. 그런데 그 내무서원 2명 중 한 사람이 한때 율곡 종가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하인 출신이었는데, 과거 14대 종손 이재능이 그 하인의 집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는 걸 보고 쌀 한 가마니를 보내는 등 선행을 베푼 바 있었다. 이 때문인지 그 내무서원은 이재능의 일행들에게 잠시 모닥불을 피우게 한 뒤 다른 내무서원을 따돌리고 편의를 봐 주었으며, 일행을 해주시내 여관에 3, 4일 묵게 한 뒤 무사히 월남할 수 있도록 끝까지 도와주었다고 한다.
월남 이후에는 서울특별시 마포구에 거주했으며, 6.25 전쟁 중에는 경기도 이천군으로 피난 가던 중 야간 공습으로 누이와 형제를 잃었고, 14대 종부인 이화봉 또한 오른쪽 어깨에 폭탄 파편이 튀어 큰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덕수이씨세보에는 장남 이해용(李海鏞, 1934. 11. 11 ~ ?)과 차남 이화용(李華鏞, 1937 ~ ?) 등이 등재돼 있는데, 장남 이해용은 6.25 전쟁 중에 실종됐다고 하며, 차남 이화용에 대해서는 특별히 기재된 사항이 없다. 아마도 6.25 전쟁 당시에 잃었다고 하는 형제들은 이 두 명의 형으로 보이며, 누이에 대해서는 세보에도 따로 언급이 없다.
2020년 현재 율곡 이이의 15대 종손 이천용은 경기도 고양시 일산신도시에 거주하고 있으며, 율곡 이이의 신주를 모신 감실을 집 안에 두고 있다. 율곡 이이의 묘소와 율곡의 위패가 봉안된 자운서원(紫雲書院) 등은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에 위치해 있다. 1979년 별세한 14대 종손 이재능의 유해 또한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선산에 안장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