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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재(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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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재
李喜宰|Lee Heejae
파일:external/img.etnews.com/090129043219_2120156260_b.jpg
출생 1952년 11월 16일 ([age(1952-11-16)]세)
전라남도 완도군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직업 만화가
데뷔작 명인 (1981)

1. 개요2. 주요 작품3. 수상 경력

[clearfix]

1. 개요

한국의 만화작가. 1952년 전라남도 완도군 태생이며 1976년에 이미 <모래알>로 데뷔하였으나 필명을 '남제주'로 바꾸라는 합동출판사 이영래 회장의 횡포를 거부하다 쫓겨났다가 1981년 만화 '명인'을 통해서 실질적으로 데뷔했다.

의외로 만화를 처음 접한 시기는 늦은 편이다. 어렸을 때는 신지도라는 섬에 살다가 중학교 1학년 때 친척 형과 함께 읍내로 나갔는데 이 때 처음으로 만화를 접하였다고 한다.[1] 이 당시에 만화방이 블루오션 취급받았던 실절이라지만, 엄연히 음영지대가 있었다는것을 알수있었다. 네이버 웹툰에서 기획전 '한국만화거장전'을 열었을 때 이희재 선생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만화로 그려서 나 어릴 적에라는 제목으로 기고했는데, 이 작품에서 속칭 '범생이'였던 자신이 어떻게 만화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는지 잘 그려내고 있다.

1983년 만화잡지 보물섬과 소년중앙에 악동이를 연재하면서 이름을 알리게 되었으며 1988년 보물섬에 브라질 소설가 바스콘셀로스의 소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만화판을 연재하였다. 1980년대 말 잡지 '만화광장'을 통해 발표하였던 단편들을 모아 1996년 '간판스타'라는 단편집을 냈고, 이 책은 '만화평론가 선정 해방 이후 우리 좋은 만화' 1위에 선정되는 영예를 누린다.

파일:external/9023c2da8176f3fcae93542722ce84354e5efd34f72340ca4888b7bd128817f9.jpg

흔히 인터뷰나 기사 등지에서 이 작가를 수식하는 말로 '리얼리스트'란 말이 빠짐없이 등장한다. 80년대 말, 각종 검열과 현실적 어려움으로 인해 마법, SF, 꿈 등의 환상과 허구를 주로 다루던 한국 만화계에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거나 고발하는 리얼리즘을 최초로 도입한 선구자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본인의 스토리 창작 외에도 다른 작가들에게서 스토리를 받아 만화로 남기는 작업을 활발히 하였고, 가난한 한 소년의 어린 시절을 형상화한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 '저 하늘에도 슬픔이', '아홉살 인생'이 이 계열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화풍으로는 자글자글하게 떨리는 굵은 선과 잘린 호빵 단면같은 캐릭터의 입이 특징적이며 데뷔 초에는 다른 작가들처럼 다소 날카로운 터치도 사용했으나 중후반기로 접어들 수록 선끝이 부드러워지고 둥글어지는 경향을 보인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디지털 작업을 하는 등 끊임 없는 배움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2]

1988년에 진보 만화예술단체 '바른만화연구회'를 세워 그 후신인 우리만화연대에 이르기까지 회장을 지냈으며 2012년부터 5년 간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이사장으로 재직했다.

또한 1988년 13대 총선에서 당시 신인 정치인이었던 노무현의 홍보만화를 그려낸바 있었다.

옛날 만화가들이 다 그렇듯이 어렸을 때 만화를 접하고 만화가의 길을 가는 와중 집안에서 구박을 엄청 많이 받았다고 한다. 해님이네 집에서도 살짝 지나가듯이 다룬적이 있다.

여담으로 이희재 선생이 그린 이문열 삼국지 만화판에 나오는 장졸들의 옷차림은 1994년에 방영한 84부작 삼국연의에 나오는 장졸들 옷차림과 무척 닮았다.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육도삼략에 통달하신 하후무. 하후무/기타 창작물 문서 참고.

2. 주요 작품

3. 수상 경력



[1] 이 시기 이윤복이란 소년이 출판한 어린 시절 일기를 접하게 되었는데 20여 년 뒤 이를 '저 하늘에도 슬픔이' 라는 만화로 옮기게 된다.[2] 요즘처럼 선작업까지 다 디지털로 하지는 않고, 기본적인 선작업은 수작업으로 한 뒤 채색을 디지털로 한다. 아무래도 디지털 채색이 수작업 때와 달리 수정 및 편집이 편하기 때문이다.[3] 사실 이 당시에는 한국 대중문화 자체가, 저렇게 규제를 걸어도 미국, 일본, 홍콩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던 데다 저작권 의식도 부족해서 표절이 비일비재했던 시절이었다. 또한 게임과 만화도 일본 작품 해적판인 경우가 많았고, 애니메이션은 방송사에서 애니메이션 제작비가 비싸다는 이유로 외국작품을 수입하는 경우가 대다수였기 때문에, 아직도 표절이 판치는데 완전개방이 되면 한국 대중문화계가 외국에 잠식당해서 무너지는 것이 아니냐는 두려움이 강했던 시절이었다. 막상 대중문화 개방이 되고나서는 일본 아이돌 업계가 AKB 49과 쟈니스 독점의 영향으로 인해서 질적으로 침체기에 접어들었고, 애니메이션도 심야 애니메이션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매니악한 작품들이 늘어나면서 기우가 되었기는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