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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6년 6월 7일 |
헝가리 왕국 쇼모지주 커포슈바르 | |
사망 | 1958년 6월 16일 (향년 62세) |
헝가리 인민 공화국 부다페스트 | |
가족 | 배우자 에게퇴 마리어(Égető Mária)[2] 딸 너지 에르제베트(Nagy Erzsébet) |
복무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1914 ~ 1916년) |
노농적군 (1918년) | |
최종 계급 | 상병 |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내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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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헝가리의 공산주의 정치인. 헝가리를 공산화시킨 스탈린주의자 라코시 마차시(Rákosi Mátyás)의 후임으로 헝가리 인민 공화국 수상이 된 후, 강제수용소 폐지 등 여러 개혁 정책을 실행하지만, 결국 소련이 침공해 너지는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피신한다.(헝가리 혁명). 하지만 대사관을 잠시 나온 사이 소련에게 체포당하게 되고 루마니아로 압송당해 헝가리 인민 공화국에서 비밀 처형당한다.오늘날 헝가리 공산 지도자 중에는 가장 호평받는 인물이자 민주화 인사로 대우받고 있다. 후에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프라하의 봄'에 기여한 알렉산데르 둡체크의 선배격 인물.
2. 생애
1896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방 소도시였던 커포슈바르(Kaposvár)에서 태어나 대장장이로 교육받았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소속으로 동부전선에서 싸웠으나 공산주의에 심취한 나머지 러시아 혁명 이후 붉은 군대에 입대했다. 너지는 1921년 헝가리로 귀국했으나 호르티 미클로시 정권 하에서 탄압받은 후 다시 소련으로 건너가 소련 시민권을 취득하여 공산당에 입당한다. 이후 공산주의 교육을 받던 너지는 1946년 헝가리가 이오시프 스탈린의 지원을 받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공산화되자 재귀국하여 농업부 장관과 의회 대변인 등을 역임한다. 이 과정에서 너지는 공산주의 신념을 유지하긴 했으나 스탈린주의에 갈수록 염증을 느껴 개혁적 성향을 보이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당 내에서 불이익을 받는다.그러나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고 니키타 흐루쇼프가 소련의 권력을 장악하자 소련의 위성국이었던 헝가리에서도 해빙 바람이 불어 너지는 다시 당 내에서 힘을 회복하고 제한적이나마 자유화 정책을 펴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공산당 내에서 어느 정도 영향력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던 라코시 일파에 의해 일련의 개혁들은 계속 방해받게 된다.[3] 이러한 라코시 파의 훼방은 1956년에 들어서면서 라코시의 스탈린주의 정책에 큰 불만을 품고 있던 헝가리인들의 분노를 사게 되었으며 이후의 전개는 1956년 헝가리 혁명 참조.
어쨌든 혁명이 소련에 의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게 되자 너지는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피신했으나 목숨은 보장해주겠다는 소련의 거짓 약속에 속아[4] 같은 해 11월 22일 대사관을 나오던 중 소련군에 의해 기습적으로 체포되어 루마니아로 압송되었다가 이듬해인 1957년 4월 14일에 헝가리로 송환되었다. 이렇게 송환된 너지는 헝가리 공산정부를 전복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아 1958년 2월 5일에 비밀재판이 시작되었고, 1958년 6월 15일에 반역죄로 사형선고를 받아 바로 다음날인 6월 16일 오전 5시 9분에 교수형으로 세상을 떠난다. 향년 62세. 임레와 함께 헝가리 혁명을 지지한 유대인 언론인 기메시 미클로시(Gimes Miklós, 1917–1958)와 전직 대령 멀레테르 팔(Maléter Pál, 1917–1958)[5]도 임레와 같이 사형을 선고받고 임레와 같이 처형당했다. 이들에 대한 사형 선고와 처형 소식은 처형 다음날에야 공개되었다.[6]
이는 동유럽 위성국의 지도자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겠다는 흐루쇼프의 보복성 의도 때문이기도 했다. 이후 30여년간 너지 임레는 가매장되어 반역자로 매도당하다가 80년대 말 헝가리의 민주화 과정에서 비밀 재판이 불법이었다는 정부 선언을 통해 정식으로 복권되어 세상을 떠난지 정확히 31년만인 1989년 6월 16일 부다페스트에서 공식적인 장례식을 치른다. 이때 약 30만명의 헝가리인들이 너지의 장례식에 운집했다.
3. 기타
- 공산 헝가리 당시 학생 운동의 주도자로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1989년 너지 임레의 장례식에서 선언문[7]을 낭독하며 전국적으로 인지도를 얻은 학생이 있었다. 이 학생은 민주화 이후 헝가리의 지도자가 되었고, 독재자로 장기 집권을 하다 너지의 동상을 철거하라는 명령을 내리며 자신의 타락을 보여주게 된다. 이 학생이 현 헝가리의 총리이자 현 유럽의 몇 안 되는 독재자인 오르반 빅토르이다. # 2018년 너지 동상 철거에 대한 기사
- 한동안 마오쩌둥 정권을 비롯한 급진 공산주의 정권에서는 정적을 공격할때 인용되곤 했다. 티토주의자라 욕하듯이 임레주의자라 욕하는 것.
- 반면 개혁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순교자, 성인으로 추앙받았다. 헝가리는 말할 것도 없으며 동독, 폴란드의 반정부 시위에서는 으레 '임레 너지 만세!'의 구호가 나왔으며 이 때문에 개혁정책이 자신의 나라로 스미는 것에 경기를 했던 동독의 발터 울브리히트, 루마니아의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 알바니아의 엔베르 호자, 체코슬로바키아의 안토닌 노보트니 등은 너지를 욕하면서 자국의 개혁운동을 때려잡느라 정신이 없었다.
- 너지의 재판 당시 재판장으로 근무한 판사 비더 페렌츠(Vida Ferenc, 1911–1990)는 정치 지도부 앞에서 타협하지 않는 가혹함과 1956년 헝가리 혁명에 가담한 20명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것으로 유명했고, 나치 독일의 롤란트 프라이슬러처럼 피고들에게 '종종 통제되지 않은 분노와 고함의 폭발'을 질러대는 모습을 보였다. 카다르 야노시 정권은 이러한 그의 '공로'를 인정해 그에게 헝가리 자유 메달을 수여했다. 이후 비더는 죽을 때까지 공산당 지도층과 카다르 야노시가 자신에게 너지에 대한 사형 선고를 내리라고 명령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비더는 헝가리가 민주화되고 너지가 재매장된 1989년에 대중의 분노를 두려워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다. 같은 해에 인터뷰를 하면서도 너지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것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고 1990년 11월 7일 향년 79세로 사망했다.
[1] '성-이름' 방식을 사용하는 헝가리어식 이름이기 때문에 '너지(Nagy)'가 성이고, '임레(Imre)'가 이름이다.[2] 1925년 혼인[3] 라코시는 서기장직함을 유지하고 있었다.[4] 다만 일설에 의하면 거짓인 줄 알면서도 더 이상의 희생을 보고 싶지 않아서 찾아갔다는 얘기도 있다.[5] 원래 정부군 측이었으나 시위대에 가담했고, 혁명 기간 동안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되고 소장으로 승진했다.[6] 헝가리 공산정권은 너지의 재판에 대한 선전 영화를 만들 목적으로 재판 광경을 녹화하기도 했으나, 영상을 편집해도 '혁명에 대한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임레의 발언을 왜곡하고 교묘한 선전 내레이션을 추가한 단편적인 뉴스 보도만 공개했으며, 재판 영상 전체는 2008년에야 공개되었다.[7] 너지 임레에 대한 추도사, 공산 독재에 대한 비판, 소련군의 헝가리 철수 요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