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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 다르크/의문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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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잔 다르크 관련 전설
2.1. 프랑스 지도부에서 만들어진 영웅설2.2. 예비설2.3. 생존설2.4. 공주2.5. 용병2.6. 강간설2.7. 뇌전증2.8. 외계인 접촉설2.9. 진짜 마녀2.10. 인터섹스
3. 잔 다르크 생애 논란
3.1. 포로 학살3.2. 민간인포로 처우3.3. 후스파 협박편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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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구국 영웅 잔 다르크 관련 의문점이다.

2. 잔 다르크 관련 전설

2.1. 프랑스 지도부에서 만들어진 영웅설

잔 다르크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갑툭튀한 성녀가 아니라, 친왕파 귀족들에 의해 프랑스의 구국 영웅으로 미리 엄선되어 준비과정을 거친 뒤에 역사에 모습을 드러낸 인물이라는 설.

이 주장을 따르자면 한낱 시골 처녀에 불과한 잔 다르크가 생전 얼굴조차 본 적이 없었던 왕세자를 쉽게 알아보았던 것, 프랑스 귀족들의 지지를 받았던 것,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녀로 손쉽게 인정받았던 것 등을 모두 설명할 수 있다. 비록 왕세자 본인은 몰랐을 수도 있겠지만, 쉽게 말해 그의 측근들이 짜고 친 고스톱이었다는 것. 어떻게 보면 가장 현실성이 있는 주장이기도 하다.

사실 이 주장도 역시 잔 다르크와 친밀한 귀족은 잔과 전장에서 함께 한 기사들 정도에만 해당되고, 그들을 제외하면 잔 다르크의 구출 시도에 전혀 도움을 주지 않았다는 점에서 반론이 제기된다. 샤를 7세의 최측근인 조르주 1세 드라트레무아유는 심지어 샤를 7세에게 잔 다르크에 대해 "미친 여자에게 나라의 운명을 맡길 순 없습니다!"라고 비난했을 정도다.

그러나 너무 편들어 주는 사람들이 많으면 자작극이 의심받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시대상을 고려하면 여성이 총사령관이라는 사실에 반발할 사람들이 많아서 공범들을 만들기 힘들다.

한편으로는 샤를 7세의 장모인 욜란다 데 아라곤이 잔 다르크를 카드로 써서 이용하고 조종했다가, 가치가 없어졌다고 판단하자 토사구팽으로 내쳤다는 주장이 있다.[1] 결국 이렇다 할 물증이 없어서 있을 법한 주장 정도로 여겨진다.

2.2. 예비설

진짜 잔 다르크가 등장했으나 전장에서 사망하거나 큰 부상으로 이탈하자 이를 다른 사람으로 메꾸었다는 설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당시 잔 다르크의 목격담이 다른 부분들이 상당수 존재했다. 덩치가 큰 여성이었다는 것과 덩치가 작은 여성이라는 목격담이 있으며, 잔 다르크의 성품에 대해서도 화려하게 치장하는 것을 좋아해 혼이 난 적이 있다거나 하는 등 알려진 잔 다르크와는 상당히 다른 기록들도 존재한다. 또한 위에는 기술되어 있지 않지만 처형 당시 본인은 잔 다르크가 아니라며 살려달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마지막으로 이것이 있을 법한 주장인 것을 뒷받침하는 것이 잔 다르크의 처형 이후 잔 다르크라 주장하는 여인들 중 하나가 샤를 7세를 만났고 진짜 잔 다르크라고 인정했다는 점이다. 후에 그 여자에게 후한 포상을 쥐어 돌려보냈기 때문에 생존설과 엮어지는 가설이다.

2.3. 생존설

당연히 이런 역사적이고 전설적인 인물에게는 생존설이 나오기 마련이지만, 특히 잔 다르크의 경우 화형 직후 잔 다르크를 자칭하는 인물들이 여럿 나타났으며, 최소 1명 이상은 잔 다르크의 가족조차 본인으로 인정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불과 1년도 되지 않아 잔 다르크의 가족들에게 가짜로 판명되어 재판에 넘겨져 처형당했다고 한다. 혹은 잔 다르크의 오빠들이 돈을 벌기 위해[2] 용병 여기사와 짜고 잔 다르크가 부활했다는 사기를 쳤다가 발각되어, 세간의 비웃음거리가 되었다고도 한다. 한편으로는 그 당시부터 잔의 생존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는 부분에 주목하여 잔을 사랑하고 존경하여 죽음을 인정하기 싫은 민중들이 많았다는 추측을 하는 데 쓰이기도 하는 설.

2.4. 공주

생존설에서 파생된 것으로, 잔 다르크는 샤를 6세의 왕비 이자보 드 바비에르[3]불륜으로 낳은 딸이라는 설이다. 이 경우 샤를 7세와 잔 다르크는 남매가 된다는 이야기인데… 아무튼 공주설을 더 파고 들어가면 잔 다르크가 공주임을 알아차린 잉글랜드 측에서 비밀리에 가짜를 내세워 화형에 처하고 잔 다르크는 풀어주었으며, 잔 다르크는 나중에 지방 영주와 결혼하여 잘 먹고 잘 살다가 늙어죽었다는 것이다. 이를 증명(?)하는 잔 다르크의 묘가 프랑스에 몇 개 존재한다고 한다. 그러나 근거가 부족한 내용이라 창작물과 유사역사 수준의 영역에 그치고 있다.

2.5. 용병

잔 다르크가 단순한 시골 소녀가 아니라 여성 용병대장이라는 설도 있다. 특히 백년전쟁 직후의 어떤 문서에 의하면 잔 다르크는 '포술에 능하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 기록 자체의 신빙성이 높지 않고 다른 기록과의 교차 검증에도 별다른 호응을 받지 못하고 있어 그다지 신빙성이 없는 주장이다. 무엇보다 대포가 전술적으로 의미있게 사용된 기록은 잔 다르크 사후인 포미니 전투(1450)에서부터 나타난다.

2.6. 강간설

통념상 잔 다르크가 포로로 잡힌 다음엔 당연히 강간을 당했을 거라는 설이 많으나 전혀 근거 없다. 왜냐면 재판 과정에서 공식적으로 처녀성을 검사받은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잔 다르크는 1431년 1월 9일부터 3월 29일까지 시작된 예비조사에서 베드퍼드 공작이 뽑은 귀부인들을 통해 처녀성을 검사받았고, 순결한 처녀임을 인정받았다. 왜 이런 것을 검사했느냐면 마녀는 악마와 통정한다고 믿어지는 중세 통념상, 잔이 만약 비처녀로 밝혀진다면 매우 불리한 증거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잔 본인 또한 5월 30일, 화형이 집행되는 날 다음과 같이 한탄한 것으로 보아 옥중에서 겁탈당했을 가능성은 극히 낮다.
아, 나를 잔인하게 대하다니. 화형당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7번 참수당하는 편이 나으리라. 나의 몸은 결코 더럽혀지지 않았는데 이제 타버려 재로 돌아가는구나.
일반인의 통념과는 다르게 당시의 중세적 세계관을 생각해보면 잔이 겁탈당했을 가능성은 더욱 낮다. 재판이 진행되면서 잔은 마녀가 아니면 성녀로 판명날 게 분명했는데, 당연히 둘 중 어느 쪽이든 겁탈하면 무조건 지옥행 익스프레스 티켓 발급이다. 성녀라면 '감히 하느님이 보내신 성녀를 겁탈'한 것이 되고, 마녀라면 '감히 악마의 사주를 받은 마녀와 교접'한 것이 되니까. 게다가 프랑스와 영국의 관심이 집중된 잔 다르크를 접선할 수 있던 사람들은 종교적 영향과 교육을 충분히 받을만큼 높은 지위의 인물이었을 텐데 그런 사람들 중에 감히 잔을 건드릴 수 있을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잔 다르크는 전장에서도 자신의 정조를 지키기 위해 바지를 입었다고 한다. 이것이 결과적으로 잔 다르크를 이단으로 꼬투리를 잡아서 죽이려는 잉글랜드군에게 유리한 점으로 작용했다.[4] 이것이 압축 와전되어 여자가 바지를 입어서 풍기문란 죄목을 구실로 화형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된 것이다. 다만 영국군은 어차피 몸값을 받지 못할 상황이었고, 아군의 명분과 사기를 높이고 프랑스군의 명분과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해 어떻게든 잔 다르크를 사형시키려 한 것이지, 단순히 바지를 입었다고 화형을 시킨 것은 아니었다.

창작물 중에는 일본의 역사만화인 소녀전쟁이 강간설을 채택하고 있다.

2.7. 뇌전증

잔 다르크의 언행을 연구한 학자들 중에는 '발작증상을 동반하지 않고, 환각 증상만을 일으키는 측두엽 이상에 의한 뇌전증'이라는 견해를 내놓은 경우도 있다. 잔 다르크는 지나칠 정도로 도덕적이며 율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으나, 때때로 공격적인 면을 드러냈다는 점이 전형적인 뇌전증의 증상이라는 것이며, 이 부분이 뇌전증설을 지지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1991년의 국제뇌전증협회 논문에서도, 당시의 증언 및 재판기록을 토대로 뇌전증 증상이었을 가능성에 대해 고찰한 바 있다.

2.8. 외계인 접촉설

20세기 들어 UFO와 외계인 연구가 시작되면서 나온 주장으로, 제니 렌들즈(Jenny Randles)의 <외계인 납치(Alien Abduction)>라는 책에서 언급되었다. 잔 다르크가 들었다는 하느님의 음성, 혹은 천사를 본 것이 사실은 외계인과 접촉한 것이라는 주장. 당연히 아무 근거는 없는 주장이다.

2.9. 진짜 마녀

현대에는 시대착오적이고 괴이한 주장이지만, 마가렛 머레이(Margaret Murray)라는 학자[5]는 실제로 그런 이론을 주장했다. 영어가 된다면 원문을 한번 읽어보자. 요정 숭배, 샤머니즘, 애니미즘 등의 토속신앙 의식, 재판정에서의 이상 행동과 발언, 질 드 레와 연관시켜서 주장하기도 했지만 논리와 설득력이 없어 묻혀버린 주장이다.[6]

물론 가톨릭과 프랑스에서 불만과 유감을 제기했을 가능성은 있었겠지만. 아무튼 토속신앙 문제는 푸아티에에서의 심사 통과와 명예회복 재판에서 고향 사람들의 증언 사실만 살펴봐도 논파되며, 재판정에서 '하늘의 왕' 등의 발언 문제는 잔 다르크가 분명히 예수를 믿고 있을 밝히고 있고, 주님의 기도를 외우는 것을 거부한 것은 잔이 문맹임을 노골적으로 노린 데다가, 부당하게 성립된 재판에 호락호락 승복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때 잔 다르크는 재판정을 향해 오히려 "당신이 주님의 기도를 외울 만큼 독실한 신자임을 증명하시오."라고 일갈하며 반격했을 정도다.

질 드 레와의 연관성은 질 드 레의 타락 자체가 창작물을 제외하면 잔 다르크와 얼마나 관련이 있는지 입증할 자료가 없으며, 그의 범죄 사실조차도 정치적으로 악용된 것 아니냐는 추측이 현대에 나오고 있어 얼마나 신뢰성 있을지가 의문. 결국 머레이의 의견을 항상 지지하던 사람들도 이 주장을 듣자 상당수가 지지를 철회했다고 한다.[7] 머레이가 활동하던 시기가 잔 다르크의 시성 시기와 겹치기 때문에 시성에 방해할 수 있는 이론일 수도 있었겠지만, 결국 영향을 주지 못했다.

이 외에도 재판 과정에서 지혜롭게 대처했다고 사이코패스라고 주장하는 논문까지 있으나 이것 역시 신뢰할 만한 주장은 아니다. <UFO 신드롬>이라는 책에서는 위에 언급된 잔 다르크의 UFO 접촉설을 머레이의 이론을 근거로 하여 주장했다. 다만 머레이는 잔 다르크를 비롯해서 마녀라고 불린 여성들을 부정적인 의미의 마녀로 본 건 아니고 일종의 토속종교나 여성 중심의 종교를 연구하면서 잔을 마녀라고 언급한 것이었다. 실제로 몇몇 학자들은 잔 다르크 마녀설을 포함한 주장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머레이의 잔 다르크 연구를 긍정적으로 언급한 책도 있다.[8]

허나 머레이의 잔 다르크를 포함한 마녀로 몰린 여인들이 정말로 마녀였다는 연구는 허점이 굉장히 많았다. 마녀사냥 당시 마녀로 몰린 여인들이 고문과 협박에 견디지 못하고 억지 자백을 받은 걸 유일한 근거로 하여 마녀가 진짜로 있다는 식으로 발표를 했으니[9] 결국 잠깐 동안만 반응이 있었을 뿐 시간이 지나자 묻혀버렸다. 결정적으로 머레이는 역사학자이긴 하지만 유럽사가 아니라 이집트사 전공을 한 사람이다. 개신교에서도 잔 다르크는 성녀는 아닐지언정 독실하고 참다운 신자로 인정되는 편이 강한 편. 하지만 반가톨릭 성향의 일부 근본주의적 개신교에서는 "잔 다르크가 사실은 악마나 악령과 접촉했다"고 망언을 한다.

2.10. 인터섹스

"잉글랜드에 잡혀있던 동안 월경을 안 하고 털이 없었다"는 기록에서, 인터섹스 사례의 하나인 안드로겐 무감응 증후군으로 의심하는 설이다. 다만 지속적인 강한 스트레스를 받는 환경에서 월경이 몇달씩 끊기는 사례는 너무나 흔하기 때문에, 별로 신경 쓸 만한 가치는 없는 설이라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녀가 살아생전 남성복을 입고 소녀 및 여성과 침대를 공유했기 때문에 레즈비언이었을 수 있다고 제시하기도 하지만 이것도 근거가 없고 가치없는 설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3. 잔 다르크 생애 논란

3.1. 포로 학살

파일:잔 다르크와 포로 학살_Louis-Maurice Boutet de Monvel.jpg
잔 다르크와 포로 학살
(<Jeanne d'Arc>, 루이 모리스 부테 드 몽벨(Louis-Maurice Boutet de Monvel) 작, 1896년, 책 삽화).
잔 다르크프랑스 원정군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프랑스군은 포로로 잡은 잉글랜드군 중에서 몸값을 지불하지 못한 포로들은 전부 몰살시켰다고 한다. 이 내용은 다른 것도 아니고 잔 다르크 위인전에 나오는 내용이다. 물론 잔 다르크 본인이 직접 학살 명령을 내린 건 아니어서 가능하면 학살을 자제시켰고, 오히려 전장에서 죽어가거나 부상당한 잉글랜드군을 직접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리며 위로하기도 했다. 보장 시 성에서는 패잔병들을 보자 각자 소지품을 챙기고 가도록 풀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여기서 포로 학살이라는 부분에서 잔 다르크가 개입했다고 해도 비판받을 부분이 아니다. 사람들이 '포로를 죽이는 건 잔인한 행위다!'라는 시각을 갖게 된 것은 불과 100년도 채 되지 않았다. 포로를 사람답게 대해야 한다는 제네바 협약이 처음 나온 것이 1864년이며, 현재의 인권 개념이 담긴 협약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인 1949년에 나온 4차 협약인데, 현대에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수두룩하다.[10] 대인의 표본이자 비기독교인임에도 당시 중세에서 인정받았던[11] 살라딘리처드 1세와의 교섭이 실패하자 기독교 포로들을 학살했으나, 당시에 이를 비난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포로는 승자의 소유이며 따라서 사로잡은 이들이 어떻게 처리하든 상관 없다는 개념이 퍼져있었기 때문이다.

3.2. 민간인포로 처우

파일:잔 다르크와 사람들_Louis-Maurice Boutet de Monvel.jpg
잔 다르크와 주민들
(<Jeanne d'Arc>, 루이 모리스 부테 드 몽벨(Louis-Maurice Boutet de Monvel) 작, 1896년, 책 삽화).
생피에르 르무티에를 함락시켰을 당시, 프랑스 병사들이 약탈하려고 하자 엄하게 이를 금지시키고 주민들을 지켜주었으며 (링크) 스코틀랜드인 병사가 약탈한 송아지 요리를 자신에게 내놓자(또는 그가 약탈한 식품을 먹은 걸 알게 되자) 먹지 않고 엄하게 꾸짖었다고 한다.(때렸다는 설도 있다.) (1 링크 2) 또한 휴전기간 동안 부르주에서 빈민들을 구제하는 선행을 베풀었다.

다만 잔 다르크가 약탈을 금지시켰고 포로를 보호했다고 하는 등 선행 사례 대부분은, 사후 명예회복 재판 당시 증언이나 그 이후 전설에서 미담으로 전해내려오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적당히 걸러들을 필요가 있다.

중세 군대, 그것도 적 점령지에 대한 탈환을 진행중인 군대가 약탈에서 완전히 자유롭기는 쉽지 않다. 잔 다르크가 참여한 전투에 민간인 약탈과 학살이 발생한 적이 있기는 하다. 잔 다르크가 자르조라는 마을을 함락시킨 다음에 포로와 민간인들이 학살당하고 마을과 성당까지 약탈당했다는 사례인데 (링크) 일부 경우는 심지어 잔 다르크의 위인전에도 내용이 실렸다. 물론 잔 다르크가 관여되지 않은 투로 말하지만 말이다.(링크)

일단은 잔 다르크가 이걸 지시했거나 직접 약탈에 참여했는지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 잔 다르크 스스로는 약탈 자체에는 찬성하지 않은 듯 하다. 다만 이게 사실일 경우라도, 잔 다르크의 군사들에 대한 영향력과 통제력이 생각보다 강하지 않았던 듯 보인다. 즉 약탈과 학살에 잔 다르크가 관여하지 않았을 경우, 잔 다르크의 지휘력 등 실질적인 능력이 있는지에 여부가 논란이 될 수밖에 없어 진퇴양난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민간인들이 죽은 경우 해당 웹사이트에도 간접적으로 표현되었듯이, 당연히 잔 다르크가 직접 학살하라고 명령을 내린 게 아니라 대포로 성을 공격하는 와중에 빚어진 참사로 보인다.

만약 잔 다르크가 직접 학살과 약탈에 관여했다면 훗날 잔이 재판을 받을 때 언급되었거나 피해자나 관련된 민간인 증인이 나왔을지도 모르는데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문제가 우선시되긴 하지만 재판하는 측에서 결정적인 도덕적인, 법적인 약점으로 물고 늘어졌을 찬스였는데도 거의 얘기가 나오지 않고 상리스 주교의 말을 훔쳤다는 정도의 내용으로만 추궁받은 정황을 보아 직접 관여했을 가능성은 적은 듯하다.

잔 다르크도 프랑스군의 간부에 속한 이상 군사들의 약탈과 학살 등 민간인과 포로들이 비극적인 운명을 맞은 일에 대한 책임이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물론 중세시대에 인권이 현대보다도 훨씬 부족할 수밖에 없고, 현지에서 보급을 충당한다는 명목으로 민간인에 대한 약탈이 당연시된 시대이긴 했지만 말이다. 재판에서 언급이 거의 없던 이유도 잉글랜드군조차도 약탈을 당연시해서일 수도 있다.

한편 이 웹사이트에 따르면 잔 다르크가 민간인 약탈에 관여한 사례는 없고, 약탈한 물건을 쓴 사례는 적이 쓰던 검을 빼앗아 쓴 거라고 하는데 이건 현대 전쟁에서도 당연히 여기는 전리품 획득이다. 역사가 스티븐 웨슬리 리치, 레진 페르노드, 낸시 골드스톤 등은 "잔 다르크가 약탈을 금지했다"고 자신의 저서에 밝히고 있다.(링크 1 링크 2 링크 3)

3.3. 후스파 협박편지 사건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해있던 보헤미아 왕국에는 존 위클리프의 사상에 따라 종교개혁을 주장하던, 잔 다르크가 3살 때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한 얀 후스가 있었다. 그의 사상을 따르는 후스파 신도들과 농민들이 귀족들과 가톨릭 세력에 맞서 1419년 반란을 일으켰는데, 후스 전쟁이라고 기록될 만큼 커다란 규모의 종교전쟁이었다. 이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430년 3월, 잔 다르크는 뜬금없이 이들의 본거지인 프라하 대학에 편지를 보낸다. 이 편지의 내용은 대략 '얼른 회개해서 이단 그만 믿고 전쟁 그만두고 가톨릭으로 돌아와라. 안 그러면 내가 십자군 끌고 와서 응징한다.'

하지만, 이 편지에 대한 의심의 목소리도 많이 있다. 먼저 잔 다르크는 문맹이라 장문의 편지를 쓸 수 있었을 리 없다.[12] 대필하는 사람이 잔 다르크가 불러주는 내용을 대신 썼을 수 있겠지만, 그 내용이 편지보다 더 심했는지 대필한 사람이 부풀려 썼을지는 알 수 없다. 또 당시 후스파는 결과적으로 가톨릭 교회를 파괴하고 실제로 약탈을 일삼았던 것이 사실이기에, 그런 소문을 듣고 잔 다르크가 편견을 가질 여지가 충분했다. 아무튼 이 편지는 잔 다르크가 이단이 아닌 정통 교회를 따른다는 명확한 증거인데, 종교 재판에서나 명예회복 재판에서나 이 편지의 언급은 전혀 없다. 가짜일 확률이 높겠지만.

[1] 참고로 조르주 1세 드라트레무아유도 욜란다와 불화를 빚다가 쫓겨났다. 그의 후손 중 한 명이 그 유명한 카트린 드 메디시스[2] 잔 다르크가 이단으로 몰려 파문당한 시점에서 가족들의 재산도 강제로 동결당했다.[3] 그런데 바로 위에 언급한 잔 다르크를 죽이라고 잉글랜드에다가 사주한 왕비다.[4] 잔은 재판이 진행되고 있던 중 갖은 협박과 회유에 시달리다가 결국 5월 24일 남장을 버리고 여자 옷을 입을 것을 승낙했다. 그 결과 종신형 판결이 내려졌다. 하지만 이틀후인 5월 26일 다시 남장을 하였다(잉글랜드 병사들이 추행하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이를 이유로 재차 재판을 연 후 '또다시 이단의 죄에 빠졌다'는 이유로 화형이 선고되었다.[5] 1863년에서 1963년까지 무려 100살까지 살았다.[6] 애초에 타당하고 납득이 가는 이론과 연구 결과였으면 잔 다르크를 설명하는데 지금도 자주 언급될 수 있는 이론 중 하나였을 것이다.[7] 다만 그 전에는 마녀에 대해 진지하고 깊숙하게 연구한 역사학자가 없었기에 대중들에게 어느 정도 흥미를 끌 수 있었고, 실제로 제랄드 가드너라는 사람이 머레이의 마녀 얘기를 듣고 빠져들어서 위카(Wicca)라는 마녀에 관련된 신흥종교를 창시했다고 한다.[8] 참고로 머레이의 연구를 인용한 이 책의 저자 메리 데일리(Mary Daly)는 잔 다르크에서 이름을 따온 페미니스트 가톨릭 단체인 성녀 잔 다르크의 동맹의 일원이기도 하다.[9] 머레이는 "그 당시에도 고문은 불법이었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21세기 선진국 사법기관이나 군경, 정보기관에서도 잊을만하면 고문 폭로가 나오는 실정이고, 법적인 문제가 없는 한도 내에서 심문 대상을 한계까지 몰아가기도 하는데, 당연히 실제 마녀사냥 시기에는 그런 거 잘 지켜지지도 않았다.[10] 과거 미군이 운용한 관타나모 포로수용소(잔혹한 테러범뿐 아니라 민간인들도 집어 넣었는데 처우가 너무나 부실해 논란이 되었다.)나 아프리카에서 지금도 벌어지는 군벌 세력 간의 내전만 봐도 알 수 있다.[11] 단테신곡에도 등장하는 몇 안되는 비 기독교인이 살라딘이다.[12] 대외 활동을 시작한 이후 글을 조금 배웠다고는 하나 자기 이름을 겨우 쓸 수 있는 정도였고, 실제로 현전하는 잔의 친필은 본인의 서명 두세 개 정도가 전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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