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 이름을 가진 동명이인에 대한 내용은 장태수 문서 참고하십시오.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 성안(聖安) / 일유재(一逌齋)·남강거사(南岡居士) |
본관 | 인동 장씨[1] |
출생 | 1841년 12월 24일 |
전라도 금구현 서도면 상신리 (현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서도리 상신마을)[2][3] | |
사망 | 1910년 11월 27일 (향년 68세) |
전라북도 금구군 서도면 상신리 남강정사 (현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서도리 상신마을 남강정사)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상훈 | 건국훈장 독립장 |
[clearfix]
1. 개요
조선 말기의 문신, 독립운동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독립유공자 장현식은 그의 사촌 형 장관수(張觀秀)의 증손자인데, 장관수는 본래 장태수의 아버지 장한두(張漢斗)의 장남으로 태어났다가 출생 이후 큰아버지 장한방(張漢房)에 입양된 것이므로, 장태수에게는 종증손자가 된다.
2. 생애
장태수는 1841년 12월 24일 전라도 금구현 서도면 상신리(현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서도리 상신마을)에서 1858년(철종 9) 생원시에 급제하여 정3품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아버지 장한두(張漢斗)와 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최항의 후손으로 최양록(崔陽祿)[4]의 딸인 어머니 삭녕 최씨 사이의 3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그는 1861년(철종 12) 식년시 문과에 병과 42위로 급제하였고#, 그 해 5월 2일 정7품 승정원가주서(假注書)에 임명되었으나 개인사정으로 출사하지 못했고#, 7월 22일 종9품 권지(權知:견습관원)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임명되어 외교문서를 작성, 보관하는 임무를 맡게 되면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1861년부터 1869년(고종 6)까지 종8품 장녕전별검(長寧殿別檢)·조경묘별검(肇慶廟別檢), 종7품 부사정(副司正), 정7품 승정원가주서, 종6품 부사과(副司果), 정6품 성균관전적(典籍)·사간원정언(正言), 종5품 부사직(副司直), 정5품 예조정랑(禮祖正郎)·사헌부지평(持平)·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정4품 사헌부장령(掌令), 정3품 장악원정(掌樂院正) 등 중앙의 청요직(淸要職)을 거쳤다. 그리고 1869년 10월 21일에는 목민관인 종4품 양산군수(梁山郡守)에 임명되어# 1년여간 재직하면서 민생안정에 힘쓰는 한편, 자신의 녹봉의 일부를 이용해 대포를 설치하는 등# 방어시설 및 군대를 정비하였다.#
군수 임기가 끝난 후 1871년 임진왜란 당시 순절한 조영규(趙英珪)의 제단을 고쳐 제향한 공로에 대해 당시 경상도관찰사 김세호(金世鎬)가 포상을 상신하였고, 이에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오른 장태수는 1872년에 고종을 수행하여 개성에 다녀왔고, 1894년 5월까지 종4품 부호군(副護軍) 정3품 병조참의(兵曹叅議)·사간원대사간(大司諫)·승정원동부승지(同副承旨)·병조참지(兵曹參知)·공조참의(工曹參議)·분승지(分承旨), 종2품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지내는 등 중앙의 여러 요직을 역임했다. 또한 1894년 동학 농민 혁명이 발발하자 다시 외직인 종6품 고산현감(高山縣監)으로 부임하여 민심을 안정시키는데 힘을 쏟았다.
1895년 8월 20일, 일제가 을미사변을 자행했다. 이후 정부는 일제의 압력에 따라 을미개혁을 진행했고 그해 11월에 단발령을 발표했다. 이에 장태수는 모든 관직을 사직하고 향리로 내려와 스스로 남강거사(南岡居士)를 칭하며 은거했다. 그러다가 1904년 2월 러일전쟁 직후 관직에 다시 나아간 그는 같은 해 11월 18일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에 임명된 후# 고종을 측근에서 모시는 시종원부경(侍從院副卿)이 되었다. 그러나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일제의 강압으로 체결되자, 그는 을사오적의 처단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이 선포되자, 그는 "개와 말까지도 능히 주인의 은덕을 생각하는데, 역적 신하들은 어찌 임금을 속이고 나라를 팔 수가 있는가"라고 하며 통곡했다. 그는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다시 은둔했고, 의관을 정제하지 않고 지냈으며 사람을 만나도 말하고 웃는 일이 없었다. 한편 일제는 작위와 은사금을 여러 지도층 인사들에게 내려 이들을 회유하고자 했다. 1910년 10월 7일 일제는 76명에 달하는 조선 귀족들에게 작위를 내리고 수만 엔에서 수십만 엔에 이르는 은사금을 수여했다.
이윽고 일본 헌병이 장태수에게 찾아와 은사금을 받으라고 권하자, 그는 "나라가 망하는 것도 차마 볼 수 없는데 하물며 원수의 돈을 어떻게 받겠는가. 나는 죽어도 받을 수 없다."며 거부하고 헌병을 내쫓았다. 그러나 헌병들이 연이어 찾아와 은사금을 받으라고 위협하며 세 아들을 잡아갔다. 이에 그는 조상의 사당에 통곡하며 자신의 뜻을 알린 뒤 12월 4일 단식에 들어갔고 '고대한동포문(告大韓同胞文)'이라는 유서를 남겼다.
내가 두 가지 죄를 지었다. 나라가 망하고 임금이 없는 데도 적을 토벌하여 원수를 갚지 못하니 하나의 불충이요, 이름이 적의 호적에 오르게 되는 데도 몸을 깨끗이 하지 못하고 선조를 욕되게 하였으니 또 하나의 불효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이 같은 두 가지의 죄를 지었으니 죽는 것이 이미 늦었다.
장태수는 곡기를 끊은 지 24일 만인 1910년 11월 27일에 숨을 거두었다. 향년 69세.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장태수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또한 그가 순국한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서도리 상신마을 소재 남강정사는 전라북도기념물(1983)이 되었고, 집 안에 '일유재 장태수 선생사적비'가 세워졌다. 집 부근의 사당 서강사(西崗祠)에는 그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2006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