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 자안(子安) / 동암(東菴) |
본관 | 덕수 장씨[1] |
출생 | 1867년 6월 12일 |
한성부 북부 진장방 삼청동계 삼청동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2] | |
사망 | 1946년 4월 30일 |
경기도 고양군 지도면 행주내리 (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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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장효근은 1867년(고종 4) 6월 12일 한성부 북부 진장방 삼청동계 삼청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에서 아버지 장호(張浩)와 어머니 경주 김씨 김재진(金載振)의 딸 사이의 4남 4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경기도 경성부 운니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운니동)으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한학을 공부하며 유학자로 성장했다. 그러다 1885년(고종 22) 3월 16일 종6품 부사과(副司果)에 임명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1886년 4월 11일에는 종9품 선공감 가감역관(繕工監假監役官)#에 임명되었다.
1898년 32세 때 이종일 등과 함께 순한글신문인 '제국신문'을 발간한 후 개화 사상에 관심을 보였으며 애국과 민족계몽에도 관심을 보였다.
한편, 장효근은 1904년부터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기호흥학회 등 각종 계몽단체에도 참여하며 자주자강의 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았다. 대한자강회에서는 윤치호를 회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간사원을 맡았으며, 대한협회를 맡았을 때는 기관지인 '대한민보'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1905년(고종 42) 4월 28일에는 경무관(警務官)에 임명되고#, 1906년 9월 13일 평안북도관찰도 참서관(參書官)에 임명되어# 관직 생활을 하게 되면서 언론계를 떠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06년 무렵 이종일과 함께 천도교에 입교하여 그 뒤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인쇄, 출판사인 보성사에서 일했다.
이후 장효근은 이종일을 도와 천도교 비밀결사조직인 대한제국민력회에 참여해 이종일의 최측근으로서 활동했다. 그는 이종일과 함께 독립운동가들의 재정 지원을 위한 군자금 모금활동을 극비리에 펼쳤다. 또한 보성사 동지들과 함께 ‘천도구국단’이라는 비밀결사조직을 결성해 무장투쟁계획을 준비하기도 했다. 하지만 손병희를 비롯한 유력 인사들은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며 천도구국단의 활동을 지원하지 않았다. 또한 윤기호, 양기탁 등 국내 유력인사와 접촉해 민중봉기를 준비하려 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이에 그는 1916년 자신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한탄했다.
“일제의 압제가 날로 심해져 실로 가슴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천도교 동지들과 독립운동의 방향에 관해 의견을 나눴지만, 오세창·권동진 등은 속수무책 말이 없다. 아아, 정녕 운이 다하고 명이 다했단 말인가.”
그렇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일본식 장총 10여 정과 실탄 200발, 군자금 600원을 극비리에 모집했으며, 이종일과 함께 유력 인사들을 찾아가 “앉아만 있으면 되겠는가”라고 촉구하며 천도교가 장차 독립운동의 중심이 돼야 한다는 주장을 강력히 펼쳤다. 결국 천도교는 1918년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이라는 3대 독립운동의 방향을 내부적으로 정립했고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선언과 고종 황제의 붕어로 국내의 민심이 고조되자 비로소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장효근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할 것을 손병희로부터 권유받았지만 자질과 재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완곡히 거절했다고 한다.
거사일을 이틀 앞둔 1919년 2월 27일 밤, 장효근은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의 인쇄 조판을 전달받고 보성사에서 40여 명의 직원들과 함께 비밀리에 인쇄기를 돌려 독립선언서 21,000장을 찍어냈다. 그때 종로경찰서 소속의 친일 고등계 경사 [신철(경찰)|[신철]]이 주변을 지나다가, 기계 돌아가는 소리를 들었다. 신철은 즉각 내부로 침입해 수상한 인쇄물을 한 장 챙겨들었다. 인쇄물의 내용이 밝혀지는 날에는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이종일이 손병희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손병희는 신철에게 5,000원을 쥐어주며 눈감아 줄 것을 요청했고 신철은 이를 수락했다.
이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며 제작된 ‘독립선언서’는 다음날 아침 천도교와 기독교, 불교 조직을 통해 전국 각지로 배포됐다. 헌병대는 보성사에 들이닥쳐 장효근을 비롯한 동지들을 체포했다. 장효근은 5개월간 옥고를 치렀지만 손병희, 이종일 등이 장효근이 이 일과 무관하다는 주장을 끝까지 고집한 덕분에 그 해 8월 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면소로 방면 판결을 받고# 조기에 석방될 수 있었다. 그 후 그는 보성사를 지키면서 천도교 인사들의 옥바라지를 했다.
1920년 천도교 경성대교구 교구장에 임명된 장효근은 부인강습소를 설치해 한글 등을 가르치며 여성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1921년 1월 말 열린 부인강습소 개강식에서, 그는 100여 명의 부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개회사를 발표했다.
“수백 년 동안 우리 어머니들의 생활이 어땠습니까? 햇볕도 들지 않는 어두운 방에 갇혀 감옥생활 아닌 감옥생활로 평생을 마치곤 했습니다. 아무 자유 없이 살아오던 부인들께서 이제 밝은 광명 아래 나와 진리의 강담을 듣게 되었습니다.”
1922년, 장효근은 태평양군축회의가 워싱턴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이종일과 함께 제2의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심했다. 두 사람은 1922년 3월 1일에 제2의 만세운동을 열기로 하고, 대의를 천명한 ‘자주독립선언문’을 작성했다. ‘자주독립선언문’ 서두에는 대한이 당당한 자주독립국이며, 평화를 애호하는 세계 으뜸 국민임을 강조했다. 이어 기미년 3월 1일의 감격을 재현하기 위해 보성사 직원들이 앞장서니, 민중들도 희망을 잃지 말고 만세운동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했다. 또한 일제가 소위 유화정책을 쓰고 있지만 기만당해서는 안되며 오직 자주독립으로 민중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제2의 만세운동은 거사 이틀 전 발각되어 경찰에게 인쇄문이 전부 압수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그후 장효근은 천도교 구파와 신파 간의 내부 갈등이 심화되는 것에 깊이 낙심하고 1923년 1월에 천도교 직책을 사임하고 1924년 고양군 지도면 행주내리로 이주했다. 그는 고향에서 일제 형사들의 감시를 받으면서도 서당을 열어 학생들을 가르쳤고 지도강습소 기성회 회장을 맡으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1925년에는 지주들을 설득해 소작농민들의 소작료를 3할 이내로 인하하기도 했으며 1931년에는 권율의 사당인 행주기공사 수리보수사업에 힘을 보탰다. 1946년 4월 30일 고양군에서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장효근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3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장효근은 1916년부터 1945년까지 거의 매일 한문체로 일기를 작성했다. <장효근 일기>는 27권에 달하며 독립운동사와 천도교의 역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로 인정받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9년 5월 <장효근 일기>를 등록문화재 714호로 등록했다.
그러나 정작 생가는 방치된 것도 모자라 영상의 대사를 빌리면 고양시청 담당부서는 존재 조차도 모르는 분위기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