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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5 16:59:20

남북연석회의

남북연석회의
南北連席會議

Inter-Korean Conference in 1948
파일:남북연석회의.jpg
▲ 남북연석회의 도중 김일성의 발언 장면
<colbgcolor=#0084c9><colcolor=white> 공식 명칭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全朝鮮 諸政黨社會團體 代表者 連席會議
행사기간 1948년 4월 19일 ~ 4월 22일
참석자
북측
김일성, 김두봉, 최용건
남측
김구, 김규식, 조소앙
후속 행사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1]
1948년 4월 26일 ~ 4월 30일
개최장소

(평안남도 평양부 경상동)

1. 개요2. 배경3. 진행4. 평가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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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48년 4월 18일부터 4월 30일까지 북조선인민위원회(북한의 전신) 치하 평안남도 평양부에서 개최된 남북의 정치 지도자들의 회담. 남북협상,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라고도 한다.[2]

2. 배경

1945년 8.15 광복 직후 한반도미국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 및 통치를 받게 되었다. 그해 12월 열린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에서는 한반도에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시키고 이전까지 최장 5년간 신탁통치를 실시하도록 한다는 결정이 이루어졌다. 외상회의의 결정안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미국과 소련은 1946년 1월과 1947년 5월에 2차에 걸쳐 미소공동위원회를 열었으나 냉전이 심화되던 시기였으니 미국과 소련은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두 번 모두 결렬되었다.

1947년 9월 미국은 한국 문제를 유엔 총회에 상정해서 해결하려고 했고 소련은 1948년 초까지 미소 양국 군대를 철수시키고 정부 수립은 한국인들이 알아서 협의해서 하게 하자는 의견을 내세웠지만 미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유엔 총회에서 논의할 것을 추진했다. 결국 유엔 총회에서 논의가 이루어져 한반도 전역에서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 정부를 수립시킨다는 결정이 나왔으나 유엔이 총선거 감독을 위해 한반도에 보낸 임시 위원단이 북한으로 들어오는 것을 소련이 막으면서 유엔은 선거 감시가 가능한 남한에서만 선거를 열기로 입장을 바꾸었다. 소련은 유엔 감시하 선거 대신 미소양군 동시철수를 주장했다.

한편 국내에서는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의 결정에 대한 내용이 잘못 보도되면서 좌익과 우익이 극심한 대립과 갈등에 빠져들었고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막 휴회된 시점이던 1946년 6월에 이승만이 일찍이 남쪽만의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수립을 주장한 데다 결국 유엔 소총회에서도 남한만 선거를 열고 정부를 세우기로 결정하면서 분단은 현실화되고 있었다. 이승만의 단독 정부 수립 발언과 2차 미소공동위원회의 사이 시점에서 여운형김규식 등의 중도파는 좌우합작위원회를 조직하고 좌우익의 의견을 절충한 좌우합작 7원칙을 내놓는 등 좌우 화해 및 통일정부 수립 운동을 펼쳤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지지부진하게 되었고 여운형도 암살당하는 판국이었다.

3. 진행

1948년 2월 김규식이 위원장으로 있던 민족자주연맹은 삼청장에서 회담을 가진 후에 김일성김두봉 등에게 남북요인회담 개최를 요청하는 서한을 16일에 소련군을 통해서 보냈는데 김구의 동의를 얻고 김구와 김규식 두 사람이 보내는 것으로 한 채였다. 유엔의 임시위원단도 이에 작지 않은 관심을 보이며 북한 측으로부터 회답이 오면 유엔 소총회에 반영하겠다는 모습도 보였지만 회답은 오랫동안 오지 않아 26일에 소총회는 남한만의 선거를 결의했다. 한민당과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등은 소총회 결의안 통과에 대한 축하국민대회를 열고 선거를 준비해나가고 있었다.

북한의 9개 정당단체 대표자들은 3월 25일에 남측 17개 정당사회단체에게 서한을 보냈다. 김구와 김규식이 제의한 남북요인회담은 언급하지 않았으나 4월 14일에 평양에서 남측의 정당사회단체를 불러모아 민주 독립 국가 건설에 대한 연석회의를 열자는 답변이었다. 김구와 김규식은 4월 8일에 진의 확인을 위해 안경근과 권태양[3]을 먼저 평양에 파견했고 그들은 김일성의 긍정적인 회답을 전달해 주었다. 김구는 방북행을 결심했고 4월 19일 자신의 집을 둘러싸고 방북을 막으려는 청중을 피해 뒷문으로 차를 타고 나왔다. 비서와 아들을 대동하고 38선 팻말을 배경으로 찍은 그 유명한 사진도 이때 찍은 것이다. 망설이던 김규식은 자신이 이끌던 민족자주연맹 긴급간부회의를 소집하고 5개조 항의 조건을 내걸고 북측이 수락할 것을 요구했다.

4월 18일에 권태양과 배성룡이 이 조건을 받아들고 방북하여 김일성의 수락을 받아냈다. 김규식도 22일 16명을 대동하여 북행길에 올랐다.

파일:eh_n0740_p03.jpg

38선에 선 김구. 왼쪽은 김구의 비서 선우진, 오른쪽은 김구의 아들 김신이다.

파일:FB_IMG_1474744262899.jpg

4월 19일 평양모란봉극장에서 연석회의가 개최되었다. 남측은 41개, 북측은 15개의 정당ㆍ사회단체가 참석하였고 이로부터 선출된 대표자는 695명이었다. 남조선로동당, 근로인민당 등 좌익 정당과 한국독립당, 민족자주연맹 등 우익 정당이 총망라되어 참석한 것이었다.

먼저 참석자 중 가장 나이가 많은 김월송의 축사가 있었으며 이후 애국가[4]가 연주되었다.

뒤이어 김두봉, 허헌, 최용건, 백남운, 김달현, 김원봉 등 여러 당수 인사들의 연설이 있었다.

이후 김일성의 연설이 있었다.

<김일성 연설 전문 펼치기/접기>
>"해방된 이후에 남북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들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여 회합에 큰 의의가 있습니다. 또 한 방면으로는, 이번 우리 회합이 가지는 의의는, 우리 조국의 남쪽 반부를 미 제국주의자들이 자기네의 시도가 노골화되고 있는 조건 하에서 집합하게 되었으며, 사방으로 우리 조국에 닥쳐온 위기가 가장 엄중한 시기에 소집된 바 있습니다. 이러한 의의를 가지고 소집되는 우리는 남북조선의 정치적 문제를 정당하게 토의하고, 민족 분열의 위험을 타파할 기본 대책들을 강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우리 조국의 정치 정세는 아주 복잡하고 지극히 첨예합니다. 우리 조국의 정치 정세가 지극히 첨예한 일면은 미 제국주의자들이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의 지지 하에서 우리 삼천만 민족을 분열하고, 우리 조국의 강토를 자기네의 식민지로 만들려고 책동하는 데 있습니다. 미 제국주의자들은 자기들의 이 무모한 야망을 실현하기 위하여, 유엔 조선위원단이라는 명의로서 남조선에서 소위 전민족적 정부, 단독선거를 실시하려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 조국에는 위기가 닥쳐왔습니다. 우리 조국의 정치 정세가 특이한 것은,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기다려온 단일민족인 우리 삼천만 조선민족이, 38선을 경계로 인공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사실입니다. 조선 인민은 각각 남북이 분리된 조건 하에서, 조국의 영예와 자유와 민주독립을 위하여 투쟁하게 되었습니다. 북조선 인민들은 소련의 진정한 우의적 성원 하에서, 우리 조국을 민주주의적으로 재건하는 역사적 위업에 있어 거대한 성과들을 달성하였습니다. 북조선에서 우리가 전취한 이 위대한 성과들은 북조선 인민들을 자기 정권 기관인 인민위원회 주위에 철석같이 결속시키고, 통일시키는 튼튼한 물질적 토대로 되었습니다. 북조선 정치 정세에 대한 총화와 우리 조국의 정치 생활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특수 현황들은 간단히 이러합니다. 여러분이 보시는 바와 같이 우리 조국이 처하여있는 이러한 복잡 다난한 환경과, 극난한 각종 문제들을 내포한 조건 하에서 집합된 우리의 회의는 반드시 우리 조국에 조성된 정치 정세를 기탄없이 터쳐놓고 토의하며, 우리 조국의 분열과 유엔 조선위원단의 책동과 남조선 단독선거를 반대하여 투쟁할 유일한 공동 대책들을 반드시 강구하여야 하겠습니다. 지금 조국에 위기가 닥쳐온 엄중한 이 시기에 처한 우리가 통일되지 않고 또는 우리 조국을 분열할 위기를 배격하지 않고 우리 조국의 남쪽 반도를 미 제국주의자의 식민지로 만들려는 기도를 분쇄하며 일대 구국 대책을 강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전 조선 인민들과 후손들에게 대하여 천추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다는 것을 각오하여야 하겠습니다.''


박헌영도 연설에서 '남조선에서는 현재 미 제국주의자들에 의한 억압이 극을 달하고 있으며, 남조선 인민들은 비탄에 빠져있다'고 했다.
<박헌영 연설 전문 펼치기/접기>
>"대표 여러분! 우리 회의가 가지는 중대한 의의에 대해서는 먼저 보고하신 여러분이 충분히 지적하였습니다. 제가 더욱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 회의가, 조선 인민의 진정한 의사가 무엇이냐, 그의 참된 각오가, 의향이 무엇이라는 것을 전 세계에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 회의는 조선 전 애국 세력의 통일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미국인들은 조선 사람들이 통제능력이 없다고 말하길 좋아합니다. 그들은 지금도 우리 회의를 비난하면서, 이 회의가 기어코 실패하리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남조선에서는 민주 계획도, 경제 부흥도 볼 수 없으며, 인민은 빈궁과 기아의 비참한 굴레에서 살고 있습니다. 남조선에서는 민주 세력이 탄압되며 경찰의 포악과 테러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남조선은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미국에 예속되며, 그 식민지로 화(化)하는 길을 가고 말았습니다. 조선 모든 애국 세력의 전체 통일이 이때까지 없은 것은, 제국주의 침략자들은 자기 식민지화 정책에 이용하였다는 것은 분명 잊어선 안 됩니다. 우리 회의는 이 결점을 고치는 중요한 계기입니다. 우리는 이 방향으로 굳게 맹진(猛進)합시다.''

이후 김두봉의 폐회 선언과 함께 1차 회의는 막을 내렸다.

김구는 회의 3일차인 21일에 평양에 도착했고 홍명희조소앙도 3일차부터 참석했다. 김구도 회의에서 연설을 했다.



<김구 연설 전문 펼치기/접기>
>"친애하는 의장단과 각 정당, 단체 대표 여러분! 조국분열의 위기를 만구(挽救)하기 위하여 남북의 열렬한 애국자들이 일당(一堂)에 회집(會集)하여 민주 자주의 통일 독립을 전취(戰取)할 대계(大計)를 상토(商討)하게 된 것은 실로 우리 독립운동사의 위대한 발전이며, 이와 같은 성대한 회합에 본인이 참석하게 된 것은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조국이 없으면 민족이 없고, 민족이 없으면 무슨 당, 무슨 주의, 무슨 단체는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현 단계에 있어서 우리 전 민족의 유일 최대의 과업은 통일 독립의 전취인 것입니다. 그런데 목하(目下)에 있어서 통일 독립을 방해하는 최대의 장애는 소위 단선단정입니다. 그러므로 현하(現下)에 있어서 우리의 공동한 투쟁 목표는 단선단정을 분쇄하는 것이 되지 않으면 아니될 것입니다. 현하에 있어서만 조국을 분열하고 민족을 멸망하게 하는 단선단정을 반대할 뿐 아니라, 어느 시기 어느 지역에 있어서도 우리는 이것을 철저히 방지하지 않으면 아니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선단정 분쇄를 최대의 임무로 삼고 모인 이 회합은 반드시 전 민족의 승리를 우리의 승리로 하여야 할 것이니, 이 회의는 반드시 성공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단결적 정신으로써 백사에 개성포공(開誠佈公)한다면 반드시 성공하리라는 것도 확신합니다. 국제관계에 있어서도 복잡다단한 바 있으나, 우리의 민족적 단결로써 국제간의 친선과 양해와 내지(乃至) 투쟁에 노력한다면 모든 것을 호전시킬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만일 우리의 노력으로써 국제관계를 호전한다면 세계 평화에 대한 공헌이 또한 불소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조국의 통일 독립을 완성하며 세계 평화에 큰 공헌이 있기 위하여 이 회의의 성공을 절망(切望)하며 아울러 여러분의 건투를 축도합니다.''

이후 여러 단체의 인사들이 나와 연설과 열띤 토론을 했고 남한의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을 절대 배격한다는 '단선 단정 반대' 결론을 내렸다.

김구김규식을 비롯한 남한 우익 인사들이 기대를 건 쪽은 북한의 선전의도가 강했던 남북연석회의가 아닌 이후에 열린 남북요인회담이었다. 연석회의가 끝난 뒤 열린 요인회담에서는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 4인이 김두봉의 집에서 '4김회담'을 여는 등 다수의 인원이 참석해 실질적인 토론이 어려웠던 연석회의 때보다 구체적인 통일방안에 대한 실질적인 논의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아래와 같은 4가지 사항이 합의되었다.
1.소련이 제의한 바와 같이 우리 강토에서 외국군대가 즉시 철거하는 것은 조선문제를 해결하는 유리한 방법이다.

2. 남북정당사회단체지도자들은 우리 강토에서 외국군대가 철퇴한 뒤에 내전이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다.

3. 외국군대가 철퇴한 이후 다음 연석회의에 참가한 모든 정당사회단체들은 공동명의로써 전조선정치회의를 소집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통일적 조선입법기관을 선거하여 통일적 민주정부를 수립해야 한다.

4. 위의 사실에 의거하여 이 성명서에 서명한 모든 정당사회단체들은 남조선단독선거의 결과를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며 지지하지도 않을 것이다.[5]

이외에도 김일성은 김구에게 38선 이남 지역에 대한 전기송전과 농업용수 공급을 약속했다.[6] 하지만 조만식을 데리고 내려가게 해 달라는 김구의 부탁에는 소련군정의 허가가 있어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4. 평가

남북연석회의 자체가 김일성에 의한 북한의 프로파간다를 위한 회의였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이때 이미 남북한 단독정부 수립은 기정사실화되어 있었고 김일성과 김두봉, 박헌영 등의 북한 정치인들도 이 시점에서는 단독정부 수립을 진행 중인 상황이었다. 오히려 김일성이 통일정부를 주장하는 김구를 정치적으로 이용해 북한 정부 수립에 정당성을 부여했다는 것이다. 결국 남북연석회의는 오히려 북한의 남한 단독선거 배격을 확실히하는 결과만 낳았으며 이때 회의 참여 차 방북했던 김원봉, 김창준(목사), 백남운, 이극로, 허헌, 홍명희 등 다양한 인사들이 남한으로 내려오지 않고 그대로 월북하게 되었다.

남북의 정치인들이 마지막으로 분단을 막기 위해 모였다는 의의와 미소양군 철수 이후 내전 방지와 통일정부 수립, 남쪽으로의 전기, 농업용수 제공 문제 등에 합의했다는 점에는 성과가 있었다고 볼 수 있으나 결국 남북 양쪽에서 단독정부가 수립된 이후로는 이와 같은 합의들은 지켜지지 못했다. 의의 자체는 없지 않으나 1948년이라는 시점은 이미 분단을 막기에는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이승만크렘린 당국이 합리적으로 사태를 수습하려고 한다고 예상하는 것은 한낱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미 판단하고 있었다.[a] 가쓰라 태프트 사건을 기억하며 결국 강대국들이 또 자기들 뒷거래로 남한마저 소련에 던져주거나 할 것을 가장 우려했고 어차피 소련이 북한을 틀어쥐고 놔주지 않는다면 하루속히 남쪽만이라도 주권을 되찾아 한인들의 발언권을 정식으로 가져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유일하게 김일성은 당시 30대로 젊은 편이라 회담 이후 46년을 더 살았고 1994년 대한민국 대통령 김영삼과 역사상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평양에서 열기로 하면서 백범 이후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만나려고 하였지만 그 해 7월 8일 심장마비 발작으로 사망하면서 정상회담도 무산되었다.

5. 여담

주요인사 4명(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이 모두 김씨라서 일명 '4김회담'이라고도 불린다.

북한에서는 방북한 김구를 안신호[8]가 수행하도록 했는데 안신호는 젊은 시절 김구와 약혼까지 했던 적이 있었던 인물로 김구는 안신호를 50여년만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


당시 북한의 '북조선 국립영화촬영소'에서 촬영한 영상. 잘 보면 북한에서도 올드 랭 사인 곡조에 맞춘 애국가와 태극기를 사용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9][10]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사망함에 따라 그 해를 마지막으로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고 대면하였던 4인(백범 김구, 김규식,김두봉, 김일성)이 모두 세상을 떠나 고인이 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11]
우리 지도자는 운명을 달리했고 3대 주역의 하나였던 김일성 혼자 살아서 오늘 이 시각까지 북쪽만의 단독 정부 주석으로 앉아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 MBC 정치드라마 제1공화국 김구와 남북협상 후편 마무리 나레이션(성우 : 김종성)[12]


[1] 약칭 '15인 지도자 협의회'. 참가자는 '북측'의 김일성, 김두봉, 최용건, 주녕하 (이상, '좌익'), '남측'의 김구, 김규식, 조소앙, 조완구, 홍명희, 김붕준, 이극로, 엄항섭 (이상, '우익'), 허헌, 박헌영, 백남운 (이상, '좌익').[2] 남측인사 365명 포함 공식참가자 695명.[3] 김규식의 비서지만 사실은 남파간첩으로 이후 6.25 전쟁으로 피난가지 못한 김규식을 비롯한 임정인사, 정치인 납북에 큰 일조했다.[4] 올드 랭 사인 곡조의 애국가다.[5]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남북협상(南北協商))[6] 당시에는 수풍댐 등이 있었던 북한 지역에 전기가 더 풍부했지만 북한은 한 달만인 1948년 5월 14일에 전기요금 미납을 이유로 남측으로의 송전을 완전히 끊어 버렸다. 이후 남한은 한동안 전력부족에 시달렸다.[a] 許政. 《雩南 李承晩》, 1970, 太極出版社, p. 249-257, 292[8] 안창호의 여동생.[9] 31분 33초경 영상이 끊기는것을 알 수 있는데 이 인물은 북조선불교도련맹 위원장 김세률이며 1957년 숙청됐다. 다만 1953년 숙청되는 박헌영은 '선생'이라는 칭호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1948년 당시에 촬영된 원본인 듯 하다.[10] 다른 인물들이 '씨'나 '선생'으로 불리는 반면 김일성만 장군으로 불리고 '영명한 지도자', '절세의 애국자' 등의 수식어가 붙고 반드시 존대어를 붙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아직 수상 직위나 당 위원장 직위에 오르기 이전임에도 이미 북한에서 김일성 개인숭배가 시작되었고 김일성의 위치가 확고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수령이라는 호칭 대신 장군이라고 불렸으며 1960년대 이후보다는 개인숭배의 정도가 확실히 덜하다. 요즘 같으면 절대 사용하지 못할 '김 장군'과 같은 호칭까지 사용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즉, 아직 북한에 다양한 정파들이 공존하던 시절이라 김일성은 북한의 정치인들 중 가장 유력한 지도자 정도로 인식되었고 아직 신격화된 존재까지는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개인숭배가 있기는 했지만 이는 당시 소련의 스탈린 개인숭배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1949년 김일성의 소련 방문 기록영화에서는 심지어 '김일성 수상'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기도 했다. 영상[11] 1949년 백범, 1950년 김규식, 1960년 김두봉이 사망했으니 1948년에 30대의 젊은이였던 김일성만이 43년을 더 살았던 셈이다.[12] 이 드라마가 1981년에 방영했기 때문에 당시에는 유일하게 김일성만이 살아남았으며 그도 13년 후인 1994년에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는데 공교롭게도 그 해 대한민국 대통령 김영삼과 평양에서 열리는 역사상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앞둔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