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료들의 인사를 받는 태양왕 루이 1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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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絶對王政 / Absolute Monarchy중세 후기부터 근세까지 약 3세기간 왕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현상을 일컫는 역사학계의 용어다.
본래는 프랑스 혁명 이후 부르주아 자본주의 체제에서 구제도를 가리키는 앙시앵 레짐과 같이 군주를 폭정의 핵심으로 지목하면서 사용한 용어이나, 후에 역사학계에서 단어를 차용해서 근세에 서구에서 진행된 중앙집권화 경향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전제군주제와 비슷하게 여겨지지만 같은 것은 아니다. 특히 전제군주제 하에서는 군주가 군림하는 것이 법적으로 명문화되어 있지만 절대왕정에서는 왕의 군림이 법적으로 명문화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왕권이 강대해지자 이를 옹호하는 정치 사상이 나오게 되었으며, 그 대표적인 것이 왕권신수설이었다. 이에 따르면, 왕권은 신으로부터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절대적이며, 신하나 국민은 이에 간섭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밖에, 프랑스의 보댕은 국왕을 가부장에 비하여 왕권의 절대성을 옹호하였고, 영국의 홉스는 인간의 자연 상태는 만인 대 만인의 투쟁 상태이며, 사람들은 이를 종식시키기 위하여 계약을 맺어 주권자에게 모든 권력을 맡겼으므로, 왕권이 절대적이라고 주장하였다. #
2. 상세
중세 유럽은 수많은 공동체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도시 공동체, 장원 공동체, 교회 공동체, 대학 공동체 등이 그것이었다. 이 공동체들은 저마다 외부에 간섭받지 않는 자기들만의 룰을 가지고 있었고, 각 공동체는 다른 공동체들과 상호 협력하기도 하고 경쟁, 혹은 적대하며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유럽의 경제가 발전하며 가장 두각을 나타낸 공동체는 도시 공동체였는데, 도시는 제조업과 상업을 주 수입원으로 삼는다는 측면에서 귀족들과, 세속에서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교회와 갈등관계에 있었다. 도시들은 상공업과 시장의 발달을 보장받기 위해 왕권과 결탁할 이유가 있었으며, 왕권은 정책 수행에 필요한 자금을 얻기 위해 도시들과 결탁할 이유가 있었다.
왕권을 견제할 수단 중 하나가 왕권과 결합하면서 다른 왕권 견제 수단의 상대적 약화로 이어지고, 그로 인해 기존의 공동체 간의 견제 상황에서 왕권과 시민 계급이 다른 공동체를 압도할 만큼 성장한 것이 바로 절대왕정이다.
따라서 사회 질서에 기반해서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는 절대왕정의 군주는 권력의 기반을 군주 스스로에게(Auto) 두고 있는 전제군주정(Autocracy)의 군주와는 성격을 달리한다. 전자는 후자와 달리 자의적으로 과세, 재산/토지 몰수, 제도 신설/개정 등을 할 수 없었고, 비록 막강한 권력을 보유했을지언정 그 행동은 교회법, 관습법, 도시 법률 등에 의해 제한받았다. 루이 16세가 삼부회를 소집해야만 했던 이유도 그것이다.
교황의 권위에서 각 국가들의 주권이 풀려나는 사태이기에 이것을 근대적 국가 이성의 시작이라고 보는 연구자가 많다.
3. 전개
3.1. 서유럽
그런데 다른 지역보다도 절대왕정이 꽃피우기 좋았던 곳은 백년전쟁 승리로 절대왕정이 바로 확립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었던 프랑스가 아니라 스페인, 특히 펠리페 2세의 스페인 제국을 가장 우선 순위로 들고 있다. 펠리페 2세는 아버지 카를로스 1세로부터 물려받은 스페인 영지를 바탕으로 막강한 부를 운영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무적함대라 일컬어지는 막강한 해군을 운영할 수 있었다. 또한 왕실위원회 제도 창설과 부왕령 제도의 확립 등을 통해 그의 뒤를 이은 군주들이 여러모로 능력이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무너지지 않는 국가를 구축했다. 한마디로 절대왕정 그 자체는 제대로 구축했다는 의미가 된다. 하지만 펠리페 2세의 경우 본인의 잦은 실책 그리고 네덜란드의 독립이나 영국과의 대립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무엇보다도 잦은 외정으로 인하여 스페인의 부가 파산 지경에 몰리게 되었다.다음은 장미 전쟁으로 인하여 튜더 왕조가 성립된 잉글랜드 왕국을 들 수 있다. 우선 헨리 8세는 원인이 어찌 되든 간에 수장령을 발표하며 잉글랜드 국왕의 교회 자산 운용과 성직자에 대한 형사 재판 권한을 선포했고, 백년전쟁 이후 꽤나 오랜만에 적극적으로 대외 정책을 시행하였다. 또한 해군 증강 정책을 통해 해양 강국으로 나아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의 딸인 엘리자베스 1세는 아버지의 정책을 바탕으로 행정 시스템 정리, 국방력 강화, 동인도회사 설립 등을 통한 재정 강화를 통해 영국 절대왕정의 완성을 이루었다. 다만 그의 치세 말년에 있던 여러 문제들이 반영되며 후에 잉글랜드 내전으로 가게 되었다.
서유럽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절대왕정을 이룬 나라는 프랑스다. 사실 가장 먼저 절대왕정의 체계를 잡았던 나라였으나 프랑수아 1세의 실책으로 인하여 나라가 흔들려갔고, 앙리 2세이후로 겉잡을 수 없이 퍼지고 있던 위그노의 득세로 인한 위그노 전쟁으로 나라가 한바탕 난리가 난 상황이었기에 전혀 왕권이 강할 수가 없었다. 부르봉 왕조를 성립한 앙리 4세 때에 이르러 종교 전쟁이 종료가 되고, 낭트 칙령 등을 통해 내부적 안정을 꾀하기 시작하면서 그나마 자리가 잡혀나갔다. 다만 앙리 4세가 암살당하고 그의 어린 아들 루이 13세가 왕위에 오르자 한동안 혼란에 빠져있다가 리슐리외 추기경의 섭정을 통해 프랑스 절대왕정의 토대가 마련되게 된다. 무엇보다도 루이 13세와 리슐리외는 당시 유럽 한복판에서 발생했던 30년 전쟁에 반 가톨릭파로 참전하며 국가이성이 무엇인가를 몸소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후 집권한 루이 14세는 이러한 프랑스의 강성함에 힘입어 절대왕정의 완성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그야말로 화려한 절대왕정을 구가하게 된다. 하지만 그 역시 잦은 외정의 문제와 위그노들에 대한 종교적 자유를 인정한 낭트 칙령의 폐지 등으로 인하여 프랑스 국가 내의 재정 문제를 안게 되면서 그의 사후 약 70년 뒤에 있을 프랑스 혁명의 단초를 마련하게 된다.
3.2. 동유럽
동유럽의 경우 서유럽의 경우보다 늦게 절대왕정이 등장한다. 그 이유는 기본적으로 동유럽이 서유럽과 달리 상공시민계층의 성장이 더뎠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절대왕정의 군주들도 모든 기반이 마련된 이후 전개된 서유럽의 절대왕정과는 달리 그 트렌드를 받아들이는 쪽으로 전개를 해나간다. 특히 계몽주의가 서유럽에서 인기를 끌게 되자 이것을 적극적으로 절대왕정에 이용하여 교과서적 설명으로는 계몽 전제군주가 등장했다고 표현하기도 한다.러시아 제국의 표트르 1세는 적극적인 외정과 더불어 서구화 정책을 기본 기치로 삼으며 러시아의 개혁에 나섰고 이를 바탕으로 그동안 전근대적으로 밀려 있었던 러시아를 확실한 강국의 지위에 올려놓게 된다. 그가 죽은 후 40년후에 즉위한 예카테리나 2세도 적극적으로 계몽주의를 받아들이고 산업과 외정을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러시아의 지위를 공고히 하게 한다.
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대왕이 계몽주의를 바탕으로 하여 내치를 다지고 군사력을 증강시켜 이를 바탕으로 프로이센을 앞으로 독일 통일을 주도하게 하는 주요 국가가 되게 하는데 성공한다. 그의 라이벌이 되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마리아 테레지아도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의 개혁을 이끌면서 오스트리아를 다시금 강국의 지위에 올려놓게 된다.
다만 이러한 동유럽 군주들에게는 약점이 뚜렷했는데 아무래도 이들 모두가 귀족계층의 지지를 바탕으로 절대왕정을 이끌어 나갔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다른 계층인 상공시민계층에 대한 지원이나 이런 점은 상대적으로 약했다. 그래서 이들 나라들은 하나같이 프랑스 혁명을 기점으로 서유럽 세계의 절대왕정이 사실상 무너진 상황에서도 절대적인 군주제를 꾸준히 유지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되리어 각종 개혁에 있어서 뒤쳐지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민주주의로의 이행도 이들 국가들은 1차대전을 기점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4. 결과
이러한 절대 왕정의 결과는 각 지역별로 다르게 나타나는 것도 특징이다.우선 귀족과 시민 계급 사이에서 성장한 서유럽의 절대 왕정은 왕권이 되리어 시민 계급의 성장에 무너지게 되는 혁명을 맞게 된다.
영국의 경우 엘리자베스 1세 사후 스코틀랜드의 전제 군주 왕조인 스튜어트 왕조가 들어서면서 잉글랜드 내전과 명예 혁명을 차례대로 맞게 되고 그 결과 입헌 군주제의 전형적인 국가를 수립하게 된다. 또한 영국은 이러한 혼란이 17세기에 마무리 되었기에 18세기 들어서 내부적 안정을 통해 외부로의 식민지 개척과 다양한 통상이 용이해진 측면이 있었고, 산업혁명이 처음 발생하게 되는 계기가 마련되기도 한다.
프랑스의 경우 루이 14세의 막강한 왕권으로 유럽 내 절대 왕정의 최고 선진국으로 자리 잡지만 되리어 이 점이 후대 무능한 군주들의 등장으로 인해 약점이 되었고, 지속적인 재정난으로 인해 결국 프랑스 혁명이라는 유럽을 뒤흔드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혁명 이후 프랑스는 공화정 - 제정 - 왕정복고 - 입헌군주정 - 공화정 - 제정이라는 혼란을 거쳐 최종적으로 공화정 국가로 남게 된다.
스페인의 경우 애초에 왕위 계보가 중간에 끊기면서 절대 왕정 구축의 의미가 사라져버렸고, 이후 프랑스 혁명에 휩쓸리면서 그 결과 라틴 아메리카 지역의 식민지를 죄다 상실하는 결과를 맞게 된다. 이후에는 왕권이 힘을 잃고 흔들리면서 유럽의 강국 자리에서는 완전히 내려오게 된다.
하지만 동유럽의 경우 애초에 시민 계급의 성장에 힘입어 발생한 점이 아니라서 되리어 혁명 이후에는 이른바 전제 군주제로 돌입하는 결과들이 많이 발생하게 된다.
대표적으로 프로이센은 이후 소독일주의를 중심으로 통일을 하게 되면서 독일 제국을 성립하는데 독일 제국은 대표적인 전제 군주제 국가로 군림하다가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이 되어서 결국 제정이 완전히 무너지며 바이마르 공화국을 수립하게 된다.
오스트리아의 경우는 프랑스 혁명 이후 빈 체제를 이끌어 나가지만 얼마 못가 프로이센에게 무너지면서 한번 휘청거리게 되고 이후 간신히 헝가리와 함께 국가를 유지하지만 발칸반도에서 러시아와의 대립 구도가 생기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이 발생하게 되는 원인을 만들어냈고 패전국이 되면서 제정이 완전히 끝장남과 동시에 국가가 완전히 쪼그라들게 되어 유럽의 소국이 되어버린다.
러시아의 경우 내부의 비근대적인 요소들을 전혀 치우지 못한 상태에서 지속적으로 전제 군주정을 강화하다가 세계 각지에서 여러 나라와 다툼을 하였고, 그 과정에서 모순이 강하게 발산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 도중에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인 러시아 혁명이 발생하면서 로마노프 왕조는 완전히 몰락하게 되고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이 성립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