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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17 14:33:50

정춘실

1. 개요2. 생애3. 정춘실운동


파일:정춘실.jpg

1. 개요

북한의 여성노동자 및 사회주의 운동가이다.

2. 생애

1941년 12월 28일에 태어났다.

출생지는 불분명하나, 당시 정춘실운동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곳이 자강도 전천군이기에 그곳 출신으로 추정된다. 전천군 상업관리소 소장이라는 직책을 갖고 30년 동안 일을 하였다. 평소에 수첩에 꼼꼼하게 메모하는 습관을 지니고 있었고 세대별 물품공급 장부인 "우리 가정 수첩"을 만들면서 주민들에게 물자를 공급하는 일을 잘했기 때문에 지역내에서 평판이 좋은 인물이었다.

그러다가 1964년 4월, 전천공업풍상점을 현지지도하던 김일성이 그걸 보고 크게 감탄하면서 로력영웅 칭호를 하사하면서 북한 상업분야의 모범자로 칭송받게 되었으며, 1977년에 6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1982년 4월에는 김일성훈장을 받았으며, 1986년에 이중 로력영웅 칭호를 받는 영광을 누렸다. 그리고 1991년부터 본격적으로 악화되기 시작한 경제문제를 어떻게든 땜빵하려는 목적에서 김정일에 의해 정춘실 운동이 벌어지게 되었다. 같은해 정춘실을 모티브로 한 영화 '효녀'가 김정화를 정춘실 역할을 맡겨 보급되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성과가 크게 나타나지 않았고, 부정부패와 비리의혹 때문에 뒷 말도 많았다고 알려져 있다. 어쨌거나 정춘실 본인은 1992년 4월 1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김일성훈장을 수훈받아 이중수훈자가 되었다.

사실 시기 상으로봐도 성과가 나기 힘든 것이 아무리 꼼꼼하게 신경써서 배급하도록한다해봐야 이게 관료들의 업무능력과 태도에 달려있는 일인지라, 체계적인 관리가 필요한데다가 외부적인 요인도 살펴봐야하는데, 이미 외화도 부족하고 산업시설이 노후화되는 상황을 투자없이 그저 능력있는 인물로 땜빵하는 것이 한 지역 단위라면 모를까, 전국적으로는 한계가 뚜렷할 수밖에 없었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사회주의 체제에서 능력있는 노동자 한 명을 선발해서 모두가 그 사람을 본받으라고 선전하는 것은 소련의 스타하노프 운동 이후로 유구한 것이긴 하지만, 문제는 시스템 자체에 있으므로 언발에 오줌누기도 되기 어렵다.

김일성 사망 이후 김정일을 공개적으로 오라버니라고 불렀고,[1] 하지만 김정일이 저 여자가 뭔데 날 오빠라 부르냐?라고 성을 내고 김경희도 화를 내었는데, 나중에 고난의 행군 시기 자강도 책임비서 연형묵이 강냉이 농사, 오리, 뉴트리아 양식으로 많은 식량을 가지고 있던 정춘실에게 강냉이를 아사자 구제용으로 요구하자 김정일을 등에 업고 단칼에 거절할 정도로 위세를 부린 것이 화근이 되어 조사실에 끌려가 제대로 죽탕을 맞았다고 한다. 윤대일의 증언에 따르면, 1998년 1월, 김경희가 자강도에 료해를 갔을때 자강도 책임비서 연형묵은 꽃제비 7,8명을 거두어 자식처럼 키우고 있는데 반면 정춘실은 집에서 술을 퍼마시고 노느라 김경희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문전박대를 해버렸고 그게 걸려서 작살이 났다고 한다. 다만 1998년에 '효녀'의 후속작인 '둘째딸'이라는 영화에서 역시 정춘실 배역이 그대로 나오는것을 보면 크게 숙청되지는 않았다고 예상할수 있다.[2] 하지만 북한에선 김정일이 정춘실을 친혈육의 정으로 보살펴주었다고 이빨을 까고 있다. 이후 2008년 당시 태국으로 망명하였다는 설이 나돌아서 한동안 호사가들 사이에서 시끄러웠지만, 2009년 1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2014년 1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명단에도 정춘실이 있으며, 2015년 북한에서 부고가 발표되면서 탈북설은 낭설임이 밝혀졌다. 부고에서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보도되면서 죽을때까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음도 확인되었다. 애국렬사릉 묘비에 따르면 2015년 7월 7일에 사망하였다. 북한은 2016년 다큐멘터리 <어머니 당의 품> 제3부를 방영하여 정춘실을 혁명전사로 칭송하였다.사후 김정은의 지시로 애국렬사릉에 안치되었으며 김정은이 조화도 보내주었다.

3. 정춘실운동

90년대 이후 북한경제가 어려움을 겪자 김일성은 상업분야에서 획기적인 변환을 기대하였고 이러한 기대에 맞춰 나온 것이 바로 정춘실운동이었다.

[1] 주성하 기자가 북한에 있을때 텔레비전에서 그걸 보고 눈이 휘둥그레 졌다고 회고했다.[2] 기록말살형을 당할 정도로 크게 처벌받았다면 정춘실 이야기를 담은 '효녀'의 후속작을 내놓을리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