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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 총리 |
<colbgcolor=#e40000><colcolor=#fff> 본명 | 즈비아드 콘스탄티네스 제 감사후르디아 (ზვიად კონსტანტინეს ძე გამსახურდია)[1] | |
출생 | 1939년 3월 31일 | |
소련 그루지야 SSR 트빌리시 (現 조지아 트빌리시) | ||
사망 | 1993년 12월 31일 (향년 54세) | |
조지아 사메그렐로제모스바네티주 즈벨리히불라 | ||
국적 | [[소련| ]][[틀:국기| ]][[틀:국기| ]] → | |
학력 | 트빌리시 국립대학교 (졸업) | |
가족 | 달리 롤루아 (이혼) 마나나 아르치바제감사후르디아 (재혼) | |
콘스탄티네 감사후르디아 (장남) 초트네 감사후르디아 (차남) 기오르기 감사후르디아 (삼남) | ||
정당 | ''' [[자유 조지아 원탁회의| 자유 조지아 원탁회의 ]]'''(1990년 - 1993년)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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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지아의 초대 대통령.2. 생애
1939년 3월 31일 그루지야 SSR의 수도 트빌리시에서 태어났다.메그렐인 작가였던 아버지 콘스탄티네 감사후르디아의 영향을 받아 작가로 키워졌다. 조지아 문학에 대한 억압이 강해지자 1954년 메라브 코스타바(მერაბ კოსტავა) 등과 반소 지하조직 고르가슬리아니(გორგასლიანი)[2]를 조직했다. 1956년과 1958년에 각각 공산주의를 비판한 글을 쓴 혐의와 반공 문학작품을 유포한 혐의로 체포되었고 특히 1958년 체포 당시는 트빌리시의 정신병원에 구금되었다.[3] 풀려난 후에는 트빌리시 국립대학교에서 서구 언어와 문학을 공부하여 문헌학 학사학위를 취득했다.
트빌리시 국립대학교 영문학부에서 1963년부터 1977년까지 강사로, 1981년부터 1990년까지 교수로 재직했다. 1974년 중순 트빌리시에 인권옹호기구를 조직하고 1977년 조지아 헬싱키 그룹의 회장을 맡았다. 또한 사미즈다트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77년 헬싱키 그룹 활동으로 체포되었고 1979년 다시 석방되었다. 글라스노스트 중인 1987년부터 1990년까지 조지아 각지의 독립운동 시위를 조직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1988년 그루지야 SSR 최초의 야당인 중도우익 성향의 "전(全)조지아 의인 성 일리아회(სრულიად საქართველოს წმინდა ილია მართლის საზოგადოება)"를 창당했다. 이 정당은 후일 친독립 성향의 정당연합 자유 조지아 원탁회의에 참여했다.
소련이 말기에 이르면서 조지아는 독립으로 기울었다. 그루지야 SSR 최고 소비에트(Supreme Soviet)는 1990년 3월 특별회기에서 소비에트-조지아 전쟁을 러시아 SFSR에 의한 점령이자 병합이라고 비난하는 결의안을 가결했고 5월에는 주권선언(Declaration of state sovereignty)을 가결하여 사실상 독립을 공식화했다. 그루지야 SSR 정부 또한 소비에트-조지아 전쟁을 "불법적인 점령"이라고 공식 규탄하였고 1990년 10월에 공화국 최초의 다당제 선거를 치를 것이라고 선언했다. 11월 14일에는 공식적으로 국명이 그루지야 SSR에서 조지아 공화국(Republic of Georgia)으로 변경되었다. 이미 전국구 반체제인사였던 감사후르디아는 1990년 10월 28일 그루지야 SSR 최초이자 마지막 자유총선에서 압승을 거두었고 그 자신은 최고소비에트 의장이 되었다.[4] 1991년 3월 31일 조지아 공화국은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에 대한 국민투표를 하여 98.9%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4월 9일 조지아 최고회의가 공식적으로 독립을 선언하였으며, 5월 26일 대선에서는 조지아 최고회의 의장이었던 감사후르디아가 압도적인 지지율로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감사후르디아는 구소련 국가들이 결성한 독립국가연합(CIS)에 가입하지 않고 독립적인 노선을 선명히 하였다. 그는 자국의 소수민족인 아르메니아인, 아제르바이잔인, 오세트인, 아자르인, 압하스인, 러시아인 등을 전부 "불청객(ungrateful guests)"으로 취급하였고 소련 시절 조지아 중앙정부가 소수민족들에게 한 정치적 양보들을 비난했다. 압하지야, 남오세티야에서 분리주의 세력이 정권을 잡자 진압을 시도했고 러시아군에 철수를 요구했지만 러시아군 철수 요구는 기각되었으며 러시아군은 오히려 분리주의 세력들을 도왔다. 그의 종족종교적 쇼비니즘, 민족주의적이고 제노포비아적인 수사와 소수민족에 대한 부정적인 정책은 국내에 종족대립을 불러왔으며 소수민족 지도자들도 비슷한 수사를 되풀이하며 갈등에 기름을 부었다. 하지만 감사후르디아는 소수민족에게 자기 자치공화국에서 차지하는 비중 이상의 자치공화국 국회의석을 할당하겠다고 제안하는 등 실용주의적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1991년 12월 27일 미국에 소재한 헬싱키 워치(Helsinki Watch)는 감사후르디아 정부의 인권유린을 비판하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1992년 4월 휴먼라이츠워치는 감사후르디아가 "유사 독재정권(quasi-dictatorial powers)"을 수립했다고 밝혔다.
감사후르디아는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 자바 이오셀리아니, 텐기즈 키토바니 등 반대파들을 제어할 수 없었다. 결정적으로 감사후르디아가 조지아 방위군을 해산하기로 결정했다는 가짜뉴스 때문에 1991년 12월 22일 쿠데타가 일어나 몰락했다. 이후 아제르바이잔으로 잠시 피신했으나 망명이 거부되자 아르메니아로 옮겨갔고 1992년 1월 최종적으로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으로 이동했다. 압하지야 전쟁이 파국으로 치닫던 1993년 8월 다시 조지아 서부로 귀환하여 내전에 참여했지만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셰바르드나제 정권에 참패했다. 1993년 12월 31일 사메그렐로제모스바네티주 즈벨리히불라에서 총에 맞아 향년 54세로 생을 마감했다. 조지아 정부는 공식적으로 감사후르디아가 자살했다면서 그의 유언장까지 공개했으나 그가 암살되거나 총격전 중에 사살당했다는 추문이 끊이지 않았다.[5]
2003년 장미혁명으로 셰바르드나제가 축출된 후 당선된 대통령 미헤일 사카슈빌리에 의해 2004년 트빌리시로 이장되었다.
[1] Zviad Konstantines dze Gamsakhurdia[2] 조지아의 민족영웅이자 트빌리시의 건설자인 바흐탄그 1세의 별명에서 이름을 땄다.[3] 스탈린 시대라면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거나 시베리아의 굴라그로 끌려갔겠지만 흐루쇼프 시대는 반소 정치범에 대한 처우가 상대적으로 온화해져서 한직에 머물게 하거나 정신병원에 처박아버리는 것으로 끝냈다.[4] 감사후르디아의 의장 임기가 시작된 11월 14일부터 그루지야 SSR 최고소비에트는 최고회의(Supreme Council)로 승계된다.[5] 머리에 총상이 2개 발견되었는데 음모론이 안 나올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