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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7 12:25:12

지리학/역사

1. 한국 지리학의 역사2. 서양 지리학의 역사
2.1. 고대 ~ 중세2.2. 근대2.3. 현대

1. 한국 지리학의 역사

반구대 암각화 등에서도 고대인의 지리관을 찾아볼 수 있다. 삼국시대에는 풍수지리가 중국에서 들어왔고, 이외에도 지리관을 살펴볼 수 있는 여러 기록이 남아있다. 고려 시대에는 삼국사기 지리지 등의 지리지, 지도 등이 확인된다. 조선 시대에는 국가에서 세종실록지리지 등 지리지를 편찬하기도 했고, 실학자들이 지리서를 펴내기도 했다. 지리서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 이중환택리지가 있는데, 현대 지리학의 생활권 개념, 생태학적 개념 등 과학적인 설명이 담겨 있다. 대동여지도는 그동안 편찬되었던 지도를 총망라한 김정호의 역작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전통 지리학은 거의 맥이 끊기다시피했다. 한 예로, 백두대간의 개념이 담긴 산경표가 다시 발견된 것이 1980년이다. 이를 발견한 이우형 씨도 지리학 전공자가 아닌 아마추어 지도 연구가였고, 80년대의 지리 교과서에서는 백두대간을 가르치지 않았다. 대신 국내에서는 미국, 일본, 독일 등지에서 들여온 서구식 지리학을 받아들였고, 오늘날도 그 영향이 남아있다. 한 예로, 국내에서 지리학을 배운 사람들이 쓴 지형학 관련 논문이나 서적을 보면 복와 구조, 구정선 고도, 단구애와 같이 일반인들은 잘 안쓰는 한자가 나온다. 복와는 기와가 쌓인 모양, 정선은 해안선을 가리킬 때 많이 쓰는 말이고, 단구[1]는 계단 모양의 지형이고, 애는 절벽이라는 뜻이다. 이런 생소한 한자들은 주로 일본에서 들여온 것이다.

2. 서양 지리학의 역사

팀 크레스웰 저, 박경환 외 역, 『지리사상사』 시그마프레스에서 요약 및 정리함.

2.1. 고대 ~ 중세

지리(학)(Geography)라는 용어는 스트라본(기원전 64~ 기원후 23)의 저술 『지리학(지리지)Geography』에서 최초로 기록되었다. 다만 스트라본은 이 『지리학』에서 더 과거의 지리 관련 저술들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지리'라는 용어는 그 이전부터 사용되어 왔던 것으로 보인다.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와 같은 국가나 지역들의 발전을 기술하는데에 있어 환경결정론적 관점을 견지했다. 에라토스테네스는 지구의 둘레를 처음으로 계산하고 위경도 좌표체계를 창안했다. 더 이전의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에는 장소에 대한 철학적 사유의 원형이 담겨있다고 평가된다. 스트라본이 지역의 개성을 기술하고 그 원인을 고찰하고자 했다면, 동시대의 프톨레마이오스(90~168)는 지구의 크기, 좌표체계, 지도 투영법 등 일반적 방법론에 관심을 가졌다. 그 결과물이 유명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세계지도이다. 고대의 지리학의 주요한 관심사는 지역의 환경과 문화에 대한 탐방과 기록, 그리고 그 원인으로서 환경결정론의 논리를 택했다는 점, 천문을 이용한 측량학과 깊은 연관이 있었다는 측면(즉 지구가 구형임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는 점)이 특기할 만 하다.

중세에는 종교와 신학이 위세를 떨치며 보다 객관적인 방법으로 지역을 고찰하고자 했던 고대 지리학적 사유의 맥이 크게 훼손되었다.(무려 16세기까지 서구세계의 지도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세계지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시기 지리학은 아랍 세계에서 뚜렷하게 발달하였다. 아랍의 사람들은 국제 무역을 바탕으로 항해, 측량, 지도학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고(알 이드리시), 이 과정에서 고대 서구권과 인도, 중국 등 동양에서 수집한 지리적, 철학적 지식이 큰 역할을 했다. 아랍인들은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세계 곳곳을 탐험하며 저술을 남겼다. 이븐 바투타, 이븐 할둔 등의 저작이 대표적이다.

고대로의 회귀를 추구한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서야 서구 세계에서 지리학은 다시금 주목받을 수 있었다. 르네상스기에 태동한 상업 자본주의는 지중해 무역을 발달시켰고, 이는 후발주자들에게 지중해 세계 외부로 시선을 돌리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새로운 세계의 발견(시장 및 노예 확보)을 위한 대양 항해의 유행은 중세 아랍 세계가 그랬듯 지도학과 항해술의 발전을 가져왔다(메르카토르). 착취 무역 경쟁의 폭발적 발전을 통해 지리학 지식이 대규모로 확보되었다. 세계지도, 지구본과 같은 지리지식의 결과물들은 권력과 자본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대항해시대는 지리학의 전성기이며 동시에 제국주의 착취무역의 최전선에 있던 지리학의 부끄러운 역사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학문으로서의 지리학은 대항해시대에 본격적으로 태동했으며, 여기에는 바레니우스의(1622~1650) 『일반지리학』이 큰 역할을 했다.

2.2. 근대

바레니우스의 『일반지리학』이 학문으로서의 지리학의 토대가 되었다면, 이 지리학에 철학적 사유의 깊이를 더한 것은 임마누엘 칸트이다. 칸트는 40여년 간 대학에서 지리학을 강의하며 그만의 독특한 '선험적 공간'(절대적이기보단 현상학적 관점에서)에 대한 논의를 발전시켰다. 칸트 뿐만 아니라 독일의 많은 지식인층이 지리학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이 시기에 활동한 알렉산더 폰 훔볼트와 카를 리터는 각각 현대 자연지리학(그리고 계통지리학)과 인문지리학(그리고 지역지리학)의 뿌리로 여겨진다. 훔볼트는 지질학과 생물학을 기반으로, 정확한 측량과 현장 답사를 통해 전 세계의 지역을 구분하고 그 원인을 알고자 했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자연지리학의 계통구분, 과학적 방법론의 시초가 되는 것이다. 반대로 리터는 인간 사회에 보다 관심을 두고 지역에 천착한 논의를 펼쳤다. 리터 역시 지역의 구분과 그 원인을 탐구했지만, 보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무게를 두었다. 이는 후대의 지역지리학자들이 '지역 간 차이'를 지리학의 핵심 주제로 다루게 되는 계기로 평가받는다.

19세기에 이르러 1859년 샤르네냐 왕국을 시작으로 하여 서구 각지의 대학에 지리학과가 창설되었다. 이 시기 지리학 전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토대는 진화론이었다. 훔볼트에게 큰 영향을 받은 다윈의 자연선택설은 당대의 모든 학문에 충격과 파급효과를 전달했다. 라마르크용불용설 역시 환경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는 지리학자에게 매우 매혹적인 논의였다. 진화론을 배경으로 지정학(매킨더의 심장지대이론, 라첼의 생활공간론)과 지형학(침식윤회설)이 19세기 말 지리학계의 주요 의제로 자리잡았다. 그 원인으로 환경결정론이 주목받으며 그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가 20세기 중반까지 이루어졌다. 이러한 학풍 속에서 형성된 시카고 학파의 생태적 접근은 후대에 환경결정론이 인종차별을 정당화하는 수단이라며 크게 비판받고 폐기 직전까지 몰렸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당시에는 르클뤼 정도만이 이러한 결정론적 접근에 반하는 저작들을 남겼다.

과학적 논의와 사고들이 지리학에 적극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20세기 전후의 또 다른 큰 흐름은 지역지리학의 발전이다. 프랑스의 폴 비달 델 라 블라쉬(1845~1918)은 라첼의 생활환경 개념을 발전시킨 '생활양식(genre de vie)'에 기반한 연구를 진행했다. 비달의 연구는 자연환경이 인간의 생활양식을 완전히 결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비달은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환경에 '문화'가 더해진, 오늘날의 '인문환경'을 구체적으로 정의하고 탐구했다. 미국의 칼 사우어는 지역의 물리적 표상인 '경관'에 주목하며 이를 문화적으로 해석해 문화지리학의 기틀을 놓았다. 하트숀은 지역을 만들어내는 일반 법칙을 찾아내는 것보다 개별 지역의 특수성에 대한 이해가 지리학의 본질에 가깝다고 주장했다.

2.3. 현대

20세기 초반 지역지리 연구의 성행은 학문으로서 지리학의 입지, 특히 보편적 방법론을 지닌 과학적 학문으로서 지리학의 입지가 공격받는 계기가 되었다. 1948년 하버드대 지리학과의 폐지는 이러한 비판의 정점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지리학계 내부에서 자성론이 일어났고, 그 해결책으로서 통계적 기법과 수리적 모델링과 같이 이론을 중시한 '공간과학'이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벙기, 하비 『지리학에서의 설명』)[2]

공간과학의 전성기였던 60~70년대에 이르러서는, 공간과 지역에 대한 일반화와 수리적 접근이 현실과 크게 동떨어졌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었다. 인간을 합리적 존재로 단순화하는 공간과학의 접근에 반기를 들고 보다 인간 그 자체를 중시하는 흐름이 생겨났다. 이-푸 투안의 『공간과 장소』, 에드워드 렐프의 『장소와 장소상실』같은 저술은 이러한 인본주의 지리학의 고전으로 평가받는다. 인본주의적 접근의 이론적 배경으로 심리학, 현상학, 실존주의 등이 사용되었다. 또한 인간의 창조활동 속 지리를 탐구하기 위해 문학, 미술 등의 분야에 대한 연구가 이어졌다.

일부 급진적 지리학자들은 공간과학과 인본주의적 반발 모두를 비판하고자 했다. 그들은 공간과학은 중립지향적이고, 인본주의적 접근은 엘리트만을 위한 학문이라고 비난했다. 또한 지리학이 지금까지 사회 문제 해결에 기여한 바가 없음을 지적하고, 그 대안으로서 마르크스주의적 사고를 지리학에 접목시켰다. 마르크스주의 지리학자들은 사회 상부의 생산양식과 구조 하에서 공간이 생산됨을 보여주는 저작을 다수 남겼다. 특히 데이비드 하비는 기존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맹점이었던 이윤률 수렴 오류를 '공간적 해결(Spatial fix)'의 개념으로 풀어내며 현대 마르크스주의의 거목으로 자리잡았다. 또한 기존 문화경관론을 비판하며 경관 이면에 숨겨진 불합리하고 부정의한 정치경제적 사회관계를 들여다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페미니즘, 정치생태학과 같은 신좌파 지리학이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급진지리학은 지리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지만, 공간과학과 인본주의적 지리학의 맥이 처참하게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각각의 연구방법론과 이론적 배경, 그리고 함의가 탄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의 포스트모더니티, 후기구조주의적 접근법은 기존 지리학 담론들의 이성적, 본질주의적 측면, 즉 내재된 구조주의를 비판했다. 푸코, 부르디외, 들뢰즈, 보드리야르 등의 저작에 담겨진 함의들이 지리학 연구에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텍스트'와 '재현'은 경관 연구의 핵심 주제가 되었다. 공간과 장소는 경계가 지어지고 특수한 속성을 지닌 고정체가 아닌 끊임없이 변화하는 수평적이고 동적인 네트워크로 해석되었다. 가장 최근에는 '재현'에서 벗어나 사물간 마주침의 순간에 발생하는 비물질적 정동(affect)을 강조하는 '비재현이론' 과 같은 사건중심적 담론도 등장하였다.

2000년대 이후의 지리학계는 특정 방법론이나 이론이 주류라는 설명이 불가능 할 정도로 다양한 연구방법과 배경사상을 활용하고 있다. 자연과학, 사회과학, 철학 등 타 학문의 이론을 대거 인용하고 그를 바탕으로 현대지리학이 발전해옴으로써 지리학 그 자체의 결속력은 매우 약해졌지만, 공간을 기반으로 하여 다양한 분야를 다룰 수 있다는 점에서 지리학계의 외연은 크게 넓어졌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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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어로 terrace, 중국어로 阶地(jiēdì)(한국식으로 읽으면 계지)라고 하는데, 이 둘은 테라스, 계단 모양의 땅이라는 뜻이다.[2] 지리학의 계량혁명이라고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