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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18 12:17:38

잠피에로 보니페르티

잠피에로 보니페르티의 역임 직책
{{{#!folding ▼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카를로 안노바치니
(1951~1952)
잠피에로 보니페르티
(1952~1960)
로렌초 부폰
(1961~1962)

유벤투스 FC 역대 주장
카를로 파롤라
(1949~1954)
파일:유벤투스 FC 로고.svg 잠피에로 보니페르티
(1954~1961)
파일:유벤투스 FC 로고.svg 플라비오 에몰리
(1961~1963)

유벤투스 FC 역대 회장
비토레 카텔라
(1962~1971)
파일:유벤투스 FC 로고.svg 잠피에로 보니페르티
(1971~1990)
파일:유벤투스 FC 로고.svg 비토리오 키우사노
(1990~2003)

유벤투스 FC 명예 회장
프란초 그란데 스테벤스[1]
(2006~ )
파일:유벤투스 FC 로고.svg 잠피에로 보니페르티
(2006~2021)

}}} ||
잠피에로 보니페르티의 수상 이력
{{{#!foldi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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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수상
개인 수상
파일:세리에 A 로고.svg
베스트팀

}}} ||
이탈리아의 前 축구선수
파일:보니페르티옹.jpg
<colbgcolor=#eeeeee,#1f2023> 이름 잠피에로 보니페르티
Giampiero Boniperti
출생 1928년 7월 4일
이탈리아 왕국 피에몬테주 바렌고
사망 2021년 6월 18일 (향년 92세)
이탈리아 피에몬테주 토리노
국적
[[이탈리아|]][[틀:국기|]][[틀:국기|]]
신체 175cm|체중 76kg
직업 축구선수(센터 포워드[2] / 은퇴)
축구경영인
정치인
소속 <colbgcolor=#eeeeee,#1f2023> 선수 유벤투스 FC (1944~1946 / 유스)
유벤투스 FC (1946~1961)
경영 유벤투스 FC (1971~1990 / 회장)
정당 [[전진 이탈리아(1994년)|
전진 이탈리아
]] (1994~1999)
기타 유벤투스 FC (2006~2021 / 명예회장)
국가대표 38경기 8골(이탈리아 / 1947~1960)
가족 손자 필리포 보니페르티

1. 개요2. 생애3. 플레이 스타일&평가4. 어록5. 여담6. 수상
6.1. 클럽6.2. 개인

[clearfix]

1. 개요

이탈리아의 前 축구 선수로 유벤투스 FC에서 데뷔하여 1954년부터 1961년까지 7시즌 동안 주장을 역임하고 유벤투스에서 은퇴한 전설적인 원 클럽 플레이어이며, 유벤투스 FC의 유스 출신 중 크게 성공한 선수이다.[3] 또한 유벤투스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를 이끈 회장으로서 유벤투스 팬들에게 엄청난 존경을 받는 선수이기도 하다.[4]

20세기 유벤투스의 상징이자, 유벤투스 그 자체와도 같은 선수. 유벤투스 역대 출전 순위 8위, 역대 득점 순위 2위로 미셸 플라티니,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와 함께 유벤투스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는 존재이다.

2. 생애

2.1. 클럽 경력

보니페르티는 피에몬테 주의 바렝고에서 태어났다. 10대 시절에는 모모에서 보냈는데, 유벤투스의 레전드 스트라이커 출신이자 선수 겸 감독펠리체 보렐이 그를 주목했다. 그렇게 유벤투스 FC에서 입질이 오자 보니페르티는 바로 토리노로 이사하는 결단을 보였다고. 보니페르티는 토리노로 이사한지 얼마 되지 않은 1946년에 유벤투스와 첫 계약을 맺었는데 들어오자마자 파릇파릇한 싹을 보였다. 유소년 경기에서 혼자 7골을 넣는 등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이것을 본 유벤투스는 18살이 막 지난 그를 1군으로 승격시켰다. 그렇게 출전하게 된 첫 시즌에서 보니페르티는 센터 포워드로 AC 밀란과의 경기를 시작으로 6경기에 출전하였고 두 번째 출전인 제노아 CFC를 상대로 넣은 골을 시작으로 5골을 득점하는 활약을 보였다. 그리고 그 당시에 보니페르티는 마리사란 별명으로 불렸는데 그는 이 별명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당시 세리에 A의 판도를 보면 같은 도시의 라이벌 팀인 토리노 FC가 한참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반면 유벤투스는 1930년대 초반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선배들[5]이 은퇴한 이후로는 크게 빛을 못 보던 팀이었다.[6] 즉, 대략 3위권 정도는 찍어주지만 승점이 크게 벌어져서 우승전력이라고 칭하지는 못하는 정도였다.

다음 시즌인 1947-48시즌에는 실비오 피올라가 노쇠화를 보이며 팀을 떠나[7] 공격력이 약해질 것이라는 전망을 비웃기라도 하듯 27골을 넣어 세리에 A 득점왕에 오르는 기쁨을 맛보았다.[8] 이를 바탕으로 국가대표팀에도 선발되었다. 하지만 토리노와의 승점차이는 지난해에 비해 오히려 더 벌어졌고 팀은 이번에도 준우승에 머물렀다.

끝날 줄 몰랐던 토리노의 전성기는 예기치 못한 사고로 인해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고, 그 자리는 춘추전국시대가 되었다.[9] 첫 왕좌는 유벤투스 FC가 차지하였는데 1949-50 시즌에 AC 밀란을 승점 5점차로 따돌리고 15년 만에 다시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보니페르티의 기량은 더욱 물이 올랐고, 득점왕에는 오르지 못했지만[10] 다시 20골을 돌파하였다.

1951-52년에 소속팀 유벤투스가 9번째 세리에 A 우승을 차지하고 보니페르티도 통산 100골을 돌파하는 등, 당시의 이탈리아의 자국 공격수 중에서는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최고의 공격수가 소속된 팀의 명성과는 어울리지 않게 팀의 성적은 중위권에서 놀고 있었다. 밀란이 우승을 거의 가져가는 상황에 우승횟수도 턱 밑까지 추격을 허용하고 보니페르티의 득점력도 떨어져가자 유벤투스는 웨일스에서 존 찰스, 아르헨티나에서 오마르 시보리를 데려왔다. 이렇게 기존의 보니페르티와 함께 당대 최고의 공격진, 트리오 마지코(마법의 삼각편대)가 결성되었다.
파일:트리오마지코.jpg
트리오 마지코
유벤투스는 찰스와 시보리. 빅 앤 스몰 투톱의 가세로 시즌 팀 득점을 20골 넘게 늘렸고, 보니페르티도 아웃사이드 라이트로 완전히 포지션을 옮기며[11] 직접적인 득점보다는 찬스 메이킹에 주력했다. 그렇게 1957-58 시즌에 다시 우승을 차지하며 처음으로 세리에 A 10회 우승의 금자탑을 쌓게 되었다.

그리고 선수 생활의 막바지인 1959-60년 시즌에는 팀 역사상 최초로 더블을 이룩하기도 하였다. 33살이 되던 1960-61년 시즌. 보니페르티는 유벤투스에 12번째 세리에 A 우승을 선사했지만 자신의 이름이 이전처럼 자동으로 올라가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을 하게 된다. 그는 그렇게 깔끔하게 자신의 기량이 쇠했음을 인정하고 은퇴한다. 마지막까지 멋진 남자..오오..

2.2. 국가대표

당시 이탈리아수페르가의 비극으로 암흑기를 걷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런 탓에 유벤투스에서의 활약과는 다르게 보니페르티의 국가대표 커리어는 명성에 비해 단촐하기 짝이 없다. 통산 38경기 출전 8골. 월드컵에는 2번 출전하였지만 1950년 월드컵1954년 월드컵에서 모두 수페르가의 비극으로 인한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예선에서 광탈하였다. 그래도 사고 이후 암흑기를 걷던 1950년대 이탈리아의 유일한 월드클래스 공격수였다.

2.3. 구단 경영

축구 선수로서 은퇴한 바로 직후에 보니페르티를 매우 신임한 아넬리 가는 그에게 구단 프런트 직을 부탁한다. 이후 1971년에는 유벤투스 FC의 회장까지 역임하게 된다. 이후 20년간의 회장 임기에 대한 평가는 선수시절에 쌓은 평가를 뛰어넘을 정도로, 만약 이 시기에 보니페르티가 회장직에 앉지 않았다면 지금 같은 위치의 유벤투스는 없었을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빛나는 회장 임기를 수행하게 된다. 유벤투스 구단 측에서는 공식적으로 보니페르티의 20년간 회장 임기를 보니페르티 시대라고 부르고 있다.

당시 유럽 축구는 요한 크루이프프란츠 베켄바워 등이 이끈 토탈 풋볼이라는 거대한 전술적 흐름으로 이탈리아 전통의 카테나치오는 경쟁력이 없어지고 사장되어 가고 있었다. 또한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이탈리아 클럽은 유럽 대항전에서 좋은 성과를 못 내고 있었다. 이에 회장 보니페르티와 조반니 트라파토니는 토털 풋볼의 혁신성과 고전적인 카테나치오를 융합하는 장기적인 전술적 프로젝트와 이에 따라 대대적인 유망주 발굴과 유망주 중심으로 팀을 구성한다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계획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카테나치오와 토탈 풋볼의 혼합 전술이 바로 조나 미스타이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주세페 푸리노, 로베르토 베테가, 파올로 로시 등 유스 출신 플레이어들을 발굴했고, 타 팀으로부터 가에타노 시레아, 안토니오 카브리니, 클라우디오 젠틸레, 마르코 타르델리, 프랑코 카우시오 등 플레이어들을 영입하면서 탈바꿈에 성공했다. 그 결과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에도 크게 기여했는데, 발굴한 유망주들은 국가대표팀에서 볼로코-유베라는 별명을 가지고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며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의 이탈리아 우승 주역이 되었다. 결승전 선발의 8명이 유벤투스 선수였으니 이 프로젝트가 이탈리아 전반에 얼마나 거대한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있다.

이후 1980년대 들어 발롱도르 및 리그 득점왕 3연속 수상에 빛나는 미드필더 미셸 플라티니가 입단하면서 유벤투스는 세계 최고의 클럽 중 하나로 우뚝서게 된다. 1983-84 시즌 UEFA 컵위너스컵에 이어 1984-85 시즌 유러피언 컵 타이틀을 획득하면서, UEFA가 개최하는 모든 유럽 대항전 대회를 최초로 우승하는 위업을 달성하였고, 이를 기리기 위해 1988년 UEFA에서는 UEFA 플라크라는 기념패를 수여하였다.
파일:attachment/유벤투스 FC/Plaque.jpg
1988년 제네바에서 열린 유럽 대항전 조추첨 행사에서 UEFA 4대 회장인 자크 조르주(왼쪽)가 보니페르티에게 UEFA 플라크를 수여하는 장면.

단 하나 안타까운 점은 유러피언 컵 우승 당시 헤이젤 참사가 일어나 기쁨을 만끽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당시 유럽 축구계는 분데스리가의 강세가 사그라들며 이탈리아와 잉글랜드가 최강 리그의 자리를 놓고 경쟁하던 상황이었는데, 리버풀의 훌리건들이 일으킨 헤이젤 참사로 인해 잉글랜드가 UEFA로부터 5년간 유럽 대항전 출전 금지 처분을 받음으로써 이후 세리에 A의 위상이 급상승하는 효과가 발생하였다. 이는 세리에 A 전체로 보면 호재였으나 유벤투스 입장에서는 악재가 되었는데, 정점을 찍은 트라파토니 감독이 사임한 이후 유벤투스는 연이어 우승에 실패하였고, 그 사이 급성장한 밀란이 리그 및 유럽을 제패한 기세는 다시 데려온 트라파토니 감독도 막을 수 없었다.
파일:Boniperti_DelPiero.jpg
보니페르티와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
참고로 이 프로젝트의 끝물에 보니페르티가 이전부터 유심히 지켜본 세리에 B에서 유벤투스 팬인 한 유망주를 50억 리라(한화 약 20억원)에 유스팀으로 영입했는데 그 유망주는 후에 자신을 넘어서고 유벤투스 역사상 최고의 선수가 되어 자신이 세운 모든 기록을 갈아치운 바로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이다.

빛나는 회장 임기 이후에는 2006년 유벤투스의 명예 회장 직위도 수여받았으며, FIFA 100에도 선정되었다. 또한 정치인으로서 활동하기도 했는데 1994년부터 1999년까지 중도우파 연합전진 이탈리아 소속으로 유럽의회 의원도 지낸 적이 있다.

2021년 6월 18일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향년 92세.

3. 플레이 스타일&평가

유벤투스의 레전드 선수. 알레산드로 델피에로가 경신하기 전까지 유벤투스 클럽 최다 경기 출장인 444경기, 최다 골인 178골을 기록한 선수이자, 유벤투스에게 첫 별을 달아준 전성기의 주역이었다.

공격수로서 기술과 몸싸움, 그리고 스트라이커 출신이라 양발 사용에 능했다. 그리고 팀의 주장으로서 투지와 헌신이 있던 선수였다.
보니페르티는 루즈볼을 다시 찾기를 요구했고, 항상 그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득점했다. 나는 그의 오랜 친구였고 그것을 진심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내 생각에는 단지 게임을 끝내는 것이 다였기 때문이다.
잔니 브레라

4. 어록

유벤투스는 단순한 팀이 아닌 마음입니다. 내 마음이에요.
(La Juve non è soltanto la squadra del mio cuore. È il mio cuore)
이기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단지 숫자일 뿐이다.[12]
(Vincere non e’ importante. E’ l’unica cosa che conta)

5. 여담

6. 수상

6.1. 클럽[13]

6.2. 개인



[1] 나폴리 출신의 아넬리 가문 전속 변호사이자 고문. 2003년부터 2006년까지 유벤투스 회장을 역임했다.[2] 사실 스트라이커로 가장 많이 활약을 하긴 했지만 센터 포워드, 아웃사이드 라이트, 메짤라 등 모든 포지션에서 뛰었다. 또한 선수 생활 말년에는 수비수까지 소화하는 등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에서 뛸 수 있는 올라운더였다.[3] 1930년대 피에트로 라바, 1950년대 잠피에로 보니페르티, 1970년대 로베르토 베테가파올로 로시, 그리고 2000-2010년대 클라우디오 마르키시오가 크게 성공한 유스의 전부. 유벤투스라는 명문의 명성에 비해 적은 유스풀이다.[4]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알리안츠 스타디움의 꾸르바에는 언제나 보니페르티의 사진이 걸려 있다.[5] 움베르토 칼리가리스, 비르지니오 로세타, 라이문도 오르시, 루이스 몬티, 잔피에로 콤비 등이 활약하며 세리에 A 5연패를 달성하였다.[6] 특히 토리노의 전설적인 주장 발렌티노 마촐라의 영입 경쟁에서 패배한 것이 뼈아팠다[7] 피올라는 노바라 칼치오로 이적했는데, 피올라가 은퇴한 이후에는 아예 세리에 A에서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8] 발렌티노 마촐라를 2골 차로 제치고 득점왕에 올랐는데, 마촐라는 전년도 득점왕이기도 했다. 또한 보니페르티의 이 기록은 주세페 메아차에 이은 세리에 A 최연소 득점왕 3위 기록이다. 참고로 1위 기록 보유자는 보니페르티를 유벤투스로 데려온 펠리체 보렐이다.[9] AC 밀란에는 그레 트리오, 인테르나치오날레에는 렌나르트 스코글룬드, 피오렌티나에는 베르나르디니 등 에이스급이 즐비했다.[10] 이 시즌의 득점왕은 군나르 노르달이 차지했다.[11] 선수 생활 초기에는 스트라이커로 주로 활약하다 50년대에 들어와서는 아웃사이드 라이트에서의 활약 비중을 점차 늘려갔다. 그러다 찰스와 시보리의 가세 이후에는 완전히 아웃사이드 라이트에서 활약하게 된다.[12] 이 문장은 이탈리아에서 상당히 유명해 유벤투스의 12-13시즌 유니폼에 새겨지기도 했다.[13] 보니페르티는 유벤투스 원클럽맨이므로 클럽 기입은 생략한다.[14] Grand'Ufficiale dell'Ordine al merito della Repubblica Italia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