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의 前 F1 드라이버 | ||||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 질 빌르너브 Gilles Villeneuve | |||
본명 | 조세프 질 앙리 빌르너브 Joseph Gilles Henri Villeneuve | |||
국적 | [[캐나다| ]][[틀:국기| ]][[틀:국기| ]] | |||
출생 | 1950년 1월 18일 퀘벡주 생장쉬르리슐리에 | |||
사망 | 1982년 5월 8일 (향년 32세) [[벨기에| ]][[틀:국기| ]][[틀:국기| ]] 플란데런 플람스브라반트 주 뢰번 | |||
신체 | 168 cm | |||
소속 | 선수 | 말보로 팀 맥라렌 (1977) 스쿠데리아 페라리 (1977~1982) | ||
정보 더 보기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colbgcolor=#eeeeee,#191919> 출전 횟수 | 68경기 | ||
월드 챔피언 | 0회 | |||
그랑프리 우승 | 6회 | |||
포디움 | 13회 | |||
폴 포지션 | 2회 | |||
첫 경기 | 1977년 영국 그랑프리 | |||
첫 그랑프리 우승 | 1978년 캐나다 그랑프리 | |||
패스티스트 랩 | 8회 | |||
마지막 경기 | 1982년 벨기에 그랑프리 | |||
마지막 그랑프리 우승 | 1981년 스페인 그랑프리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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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캐나다의 전 F1 드라이버.2. 생애
캐나다 퀘벡 주 몬트리올 근교의 중소도시인 생장쉬르리슐리에에서 태어나 퀘벡 주 베르티에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모국 캐나다에서 열리는 스노 모빌 레이스를 통해 프로 레이싱에 입문했다. 이후 카레이싱에 도전해 짐 러셀의 레이싱 스쿨에서 레이싱 라이센스를 취득 1976년 미국과 캐나다에서 열리는 포뮬러 애틀랜틱에서 우승하며 재능을 꽃피우기 시작했다.레이싱 경력 초기에 빌르너브는 항상 자금이 부족했다고 한다. 그의 돈벌이는 대부분 젊을 때부터 해오던 스노 모빌 레이스에서 나왔고 스폰서도 이를 통해 구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이 도움이 된 것이 눈길을 달리는 스노 모빌 레이스 덕분에 다른 드라이버들보다 레인 컨디션과 같은 그립을 잡기 힘든 환경에 더욱 익숙했고 훗날 이것이 F1에서 빛을 발했다. 1970년에는 연인 조안과 결혼해 아들 자크 빌르너브와 멜라니를 낳았다.
3. 선수 경력
빌르너브가 1976년 포뮬러 애틀랜틱 레이스에서 승승장구할 때 제임스 헌트가 마침 그의 레이스를 보고 맥라렌에 그를 추천하였다. 그래서 맥라렌은 빌르너브에 계약을 제안하여 빌르너브는 꿈에 그리던 포뮬러 1에 입성하게 된다.[1] 그러나 맥라렌에서 압도적인 퀄리파잉으로 깊은 인상을 찍나 싶더니 피트 전략이 망해 성적은 11위에 그치고 말았다. 이후 빌르너브는 조디 셱터가 있는 페라리로 이적해버렸다. 당시 빌르너브와 페라리의 계약은 꽤 파격적인 소식이었다.3.1. 스쿠데리아 페라리
사실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남는 질 빌르너브는 페라리를 타고 있을 때의 모습이다. 페라리에서의 그의 드라이빙이 회자되는 이유는 특유의 전투적이고 무모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공격적인 드라이빙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드라이빙 스타일은 빛을 발하여 챔피언이 없는 커리어임에도 F1 역사에 남을 경기를 여러 남기게 했다. 페라리에서의 1979시즌과 1982시즌에는 많은 F1팬들이 회자하는 역사적인 장면이 그의 드라이빙을 통해 나왔다. 대표적으로 1979년 프랑스 그랑프리가 있는데,
이 당시 질 빌르너브와 르네 아르누는 2위를 다투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지금까지도 F1에서 가장 치열했던 휠투휠로 꼽히는 경기이다. 얼마나 유명하냐면 엔초 페라리의 전기 영화에서도 엔초옹이 자택에서 이 경기를 지켜보며 흥분하는 모습이 나온다.
또 그의 전투적이고 용감한 모습은 무모하다고 하는 사람이 많았다. 1980년 모나코 그랑프리의 경우 폭우 속에서 열렸는데 당시 상대적으로 성능이 떨어지는 페라리의 스피드를 만회하기 위해 남들 다 레인 타이어 끼우는 와중에 혼자 슬릭 타이어를 끼우는 미친 짓을 감행, 다른 드라이버보다 랩당 5초씩 앞서가는 비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나중에 아일톤 세나도 재연한 바 있다.
그 이외에도 1981년 모나코 그랑프리에서는 막바지에 앨런 존스를 추월하며 우승한 것도 두고두고 회자된다. 참고로 이 때 빌르너브의 스타팅 그리드는 16위였다.[2]
또한 그의 커리어 최대 명경기로 꼽히는 1981년 스페인 그랑프리는 무려 50랩동안 4대의 공격을 막으며 우승을 차지하는 진기명기를 보여주었다. 50랩 내내 빌르너브 뒤에 꼭 붙어서 추월을 시도했지만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고 파이널 랩에 5대가 줄줄이 체커를 받는 F1에서 보기 힘든 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이 모습을 지켜본 당대 최고의 엔지니어 고든 머레이는 자신이 본 최고의 드라이빙이라 하기도 했다.
이미 이때부터 빌르너브는 챔피언은 된 적 없지만 당시 필드에서 일하는 사람은 누구나 인정하는 탑클래스 드라이버였다.
3.2. 사망
그의 죽음을 얘기할 때 꼭 등장하는 인물이 있으니 당시 질 빌르너브의 팀메이트였던 디디에 피로니이다. 피로니는 빌르너브 만큼이나 빠른 드라이버로, 둘은 같은 페라리 126을 타고 경쟁하곤 했다. 사건의 도화선은 1982년 산 마리노 그랑프리인데, 빌르너브 - 피로니 순으로 원투피니쉬가 기정사실화되자 페라리에서 둘에게 팀오더를 내려 페이스를 낮추라 지시했다. 그러나 피로니가 팀오더를 무시하고 페이스를 낮춘 빌르너브를 추월, 우승을 차지했다. 당연히 빌르너브는 분노가 폭발해 피로니와 격한 말싸움을 했으며 이로 인해 둘의 관계는 완전히 파탄나게 된다.[3]2주 뒤에 열린 벨기에 그랑프리까지 그의 마음은 심란했을 것이다. 최종 예선에서 빌르너브는 피로니보다 0.1초 뒤진 6위에 랭크되어 있었다. 이후 그는 꽤 많이 쓰인 타이어를 끼우고 다시 플라잉랩을 돌았으나 느리게 주행하던 요헨 마스의 차와 충돌해 플립, 뒤집힌 차량이 펜스를 넘어 트랙 밖의 바위에 부딪히며 충격으로 시속 220km의 속도로 차에서 튕겨져[4] 날아가 안전펜스 앞에 내리꽂혔다. 동료 드라이버들이 차에서 내려 급하게 그를 구조했고 병원에 이송될 때까지만 해도 호흡하고 있었으나 결국 심각한 허리뼈 손상으로 그날 밤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러한 것을 볼 때 피로니와의 심한 갈등이 그 특유의 무모한 드라이빙을 더욱 더 극단으로 몰고간 것은 아닐까하고 많은 사람들은 추측한다.[5]
4. 평가
그의 죽음으로 인해 나는 내가 가장 사랑했고, 세계에서 가장 위대했던 챔피언을 잃었다.
- 엔초 페라리
당대 같이 활동했던 현역 드라이버 혹은 F1 전문가들이 항상 꼽는 무관의 레전드이다. 같은 부류의 선배로 스털링 모스가 있는데 이쪽은 최고의 차를 가졌지만 챔피언을 하지 못했던 반면 질 빌르너브는 커리어 내내 챔피언에 도전할 수 있을 정도로 빠른 차는 가져본 적이 없었다. 페라리는 그에게 니키 라우다가 타던 312를 수차례 개량해서 태웠고 5번째 개량형인 312 T5까지 타고 나서야 신형인 126을 탈 수 있었다. 그리고 126도 그리 빠른 차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혹자는 빌르너브의 재능을 두고 분노의 승리라고도 했다. 유명한 평가로 탑기어 MC였던 제레미 클락슨이 아일톤 세나 다큐를 만들 때 자기는 항상 질 빌르너브를 최고의 드라이버로 생각했다는 말이 있다.- 엔초 페라리
5. 여담
질을 추모하며 |
- 그의 사망이후 그의 아들 자크 빌르너브가 1997년 윌리엄스 소속으로 월드 챔피언에 올랐다. 아버지의 대의를 아들이 이룬 셈.
- 빌르너브의 차량인 페라리 312T4는 레고의 스피드 챔피언 시리즈에 페라리 250 GTO와 페라리 488 GTB에 재현되었다. 몇몇 스폰서가 빠진것만 빼면 디테일이 차 옆면에 세겨진 빌르너브의 이니셜까지 완벽하게 재현되어 티포시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 겁이 없는 편이였다. 마라넬로에서 모나코까지를 (435km) 두 시간 반 컷 냈다고 한다. 보통은 네 시간 반정도가 걸린다고. 한번은 랠리에 참가했는데 아들은 무릎에 앉히고 딸은 뒷좌석에서 낮잠을 자게 둔 채로 경기를 뛰었다. 또 친구들을 헬기에 태우고 장난치는걸 좋아했는데, 한번은 조디 셱터에게 헬리콥터를 태워줬는데 배터리가 과열이 되어서 말도 안 해주고 배터리를 식히기 위해 공중에서 엔진을 껐다 켰다 했다고.[6]
- 커리어 초반에는 실제 나이보다 2살 어리다고 말하고 다녔다.
- 2024년 10월 경 퀘벡주에 그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질 빌르너브 박물관에서 누군가 그의 동상을 훔쳤다. 이에 대해 그의 아들인 자크 빌르너브는 이 사건에 대해 크게 분노했으며 현재 박물관 측은 동상을 찾기 위해 12,000달러를 걸었다. 박물관 측은 청동으로 만들어진 동상이 녹여져 팔려질까 우려하고 있다.#[7]
6. 연도별 성적
6.1. 포뮬러 1
시즌 | 팀 | 경기 | 우승 | 폴 포지션 | 패스티스트 랩 | 포디움 | 포인트 | 순위 |
1977 | 말보로 팀 맥라렌 | 1 | 0 | 0 | 0 | 0 | 0 | - |
스쿠데리아 페라리 | 2 | 0 | 0 | 0 | 0 | |||
1978 | 16 | 1 | 0 | 1 | 2 | 17 | 9위 | |
1979 | 15 | 3 | 1 | 6 | 7 | 53 | 2위 | |
1980 | 14 | 0 | 0 | 0 | 0 | 6 | 12위 | |
1981 | 15 | 2 | 1 | 1 | 3 | 25 | 7위 | |
1982 | 5 | 0 | 0 | 0 | 1 | 6 | 15위 |
[1] 당시 질은 항상 자기가 52년 생이라고 말하고 다녔다고 한다.[2] 모나코는 F1 서킷중에서도 추월 난이도가 극악으로 소문난 곳이다.[3] 빌르너브는 1979 시즌에 퍼스트 드라이버인 조디 셱터의 우승을 위해 팀을 도왔고, 그때만큼이나 차가 받쳐주는 1982 시즌엔 자신의 차례가 왔다고 생각했다고 한다.[4] 말이 그냥 튕긴 것이지, 영상 기록을 보면 차에서 아예 발사되다시피 날아갔다. 단순히 안전벨트가 파손된 게 아니라 아예 시트째로 차에서 떨어져 나갔다.[5] 아이러니하게도 디디에 피로니는 1982년 독일 그랑프리에서 심한 다리 부상으로 은퇴를 했으며 이후 보트 레이싱을 하다 사고로 사망하고 말았다. 1982년 당시 포인트 1위로 챔피언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지만 두 다리가 골절되어 버려 시즌 아웃 해버렸고 윌리엄스의 케케 로즈버그가 챔피언을 따내며 시즌 1승으로 챔피언이 되는 진기록을 남겼다.[6] 땅에 닿기 직전이 돼서야 엔진을 다시 켰다. 셱터는 이딴 장난치면 목을 졸라버린다고 했고 빌르너브는 더이상 장난을 치지 않았다고. 이후 셱터는 질과 함께는 다시는 헬기를 타지 않겠다고 하였다.[7] 동상의 발목만 빼고 아예 다 훔쳐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