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width=320><tablebordercolor=#e10510><tablebgcolor=#e10510> | 포뮬러 1 월드 챔피언십 역대 드라이버 챔피언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000,#fff | 1950 | 1951 | 1952 | 19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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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 | |||||
<rowcolor=#ffdf00>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시쿠 샤비에르 | 아우베르투 산토스뒤몽 | 브라질의 이자베우 황태녀 | 제툴리우 바르가스 | 주셀리누 쿠비체크 | |
<rowcolor=#ffdf00> 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아일톤 세나 | 오스카르 니에메예르 | 페르난두 카르도주 | 펠레 | 치라뎅치스 | |
11위~100위 | |||||
<rowcolor=#ffdf00> 11위 | 12위 | 13위 | 14위 | 15위 | |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 이르마 두우시 | 에지르 마세두 | 시쿠 아니지우 | 호나우두 | |
<rowcolor=#ffdf00> 16위 | 17위 | 18위 | 19위 | 20위 | |
데르시 곤사우베스 | 지우다 아른스 | 호베르투 카를루스 | 주제 알렝카르 | 네이마르 주니오르 | |
<rowcolor=#ffdf00> 21위 | 22위 | 23위 | 24위 | 25위 | |
에이키 바치스타 | 후이 바르보자 | 프레이 가우방 | 마누에우 자싱투 코엘류 | 오즈와우두 크루스 | |
<rowcolor=#ffdf00> 26위 | 27위 | 28위 | 29위 | 30위 | |
실라스 말라파이아 | 페드루 2세 | 치쿠 멘지스 | 루이스 곤자가 | 헤나투 후수 | |
<rowcolor=#ffdf00> 31위 | 32위 | 33위 | 34위 | 35위 | |
헤르베르트 지소자 | 파드리 시세루 | 지우마 호세프 | 탄크레두 네베스 | 루시아누 후키 | |
<rowcolor=#ffdf00> 36위 | 37위 | 38위 | 39위 | 40위 | |
바우데미르 산치아구 | 에우데르 카마라 | 헤나투 아라강 | 호드리구 파루 | 슈샤 | |
<rowcolor=#ffdf00> 41위 | 42위 | 43위 | 44위 | 45위 | |
마샤두 지 아시스 | 루앙 산타나 | 이베치 상갈루 | 엘리스 헤지나 | 마우아의 자작 | |
<rowcolor=#ffdf00> 46위 | 47위 | 48위 | 49위 | 50위 | |
하우 세이샤스 | 레오네우 브리조우라 | 치리리카 | 구구 리베라투 | 호제리우 세니 | |
<rowcolor=#ffdf00> 51위 | 52위 | 53위 | 54위 | 55위 | |
주제 지파이바 네투 | 카를루즈 드루몽 지안드라지 | 줌비 | 호미우두 히베이루 소아리스 | 파울루 프레이리 | |
<rowcolor=#ffdf00> 56위 | 57위 | 58위 | 59위 | 60위 | |
이비 카마르구 | 몬테이루 로바투 | 호베르투 마리뉴 | 마르쿠스 | 마르셀루 로시 | |
<rowcolor=#ffdf00> 61위 | 62위 | 63위 | 64위 | 65위 | |
지쿠 | 아마시우 마자로피 | 데데 | 울리시스 기마랑이스 | 헤이나우두 지아니키니 | |
<rowcolor=#ffdf00> 66위 | 67위 | 68위 | 69위 | 70위 | |
카를루스 샤가스 | 조나스 아비비 | 카시아스 공작 | 안토니우 에르미리우 지모라이스 | 칸지두 론돈 | |
<rowcolor=#ffdf00> 71위 | 72위 | 73위 | 74위 | 75위 | |
루아 블랑쿠 | 미셰우 텔로 | 가린샤 | 람피앙 | 클라우지아 레이치 | |
<rowcolor=#ffdf00> 76위 | 77위 | 78위 | 79위 | 80위 | |
루이스 카를루스 프레스치스 | 마르쿠스 폰치스 | 페르난두 콜로르 | 주제 세하 | 소크라치스 | |
<rowcolor=#ffdf00> 81위 | 82위 | 83위 | 84위 | 85위 | |
주제 루이스 다테나 | 호나우지뉴 | 조엘마 | 치쿠 부아르키 | 샤크리냐 | |
<rowcolor=#ffdf00> 86위 | 87위 | 88위 | 89위 | 90위 | |
아마두 바치스타 | 윌리암 보나르 | 카주자 | 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 | 앤더슨 실바 | |
<rowcolor=#ffdf00> 91위 | 92위 | 93위 | 94위 | 95위 | |
호베르투 랑데우 지모라 | 호마리우 | 조르지 아마두 | 호나우지 골리아스 | 이타마르 프랑쿠 | |
<rowcolor=#ffdf00> 96위 | 97위 | 98위 | 99위 | 100위 | |
호베르투 주스투스 | 아나 파울라 발라당 | 비탈 브라질 | 조 소아리스 | 마리아 다페냐 | |
출처 | |||||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브라질의 前 레이싱 드라이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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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 아일톤 세나 Ayrton Senna | ||||
본명 | 아이르통 세나 다시우바 Ayrton Senna da Silva | ||||
출생 | 1960년 3월 21일 브라질 합중국 상파울루주 상파울루 | ||||
사망 | 1994년 5월 1일 (향년 34세) 이탈리아 에밀리아로마냐 볼로냐 마조레 병원 | ||||
국적 | [[브라질| ]][[틀:국기| ]][[틀:국기| ]] | ||||
가족 | 아버지 미우통 다시우바 어머니 네이디 세나 다시우바 누나 비비안 세나 남동생 레오나르도 조카 브루노 세나 배우자 릴리안 데 바스콘셀로스 수자(1981-1982) | ||||
종교 | 가톨릭 | ||||
정보 더 보기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colbgcolor=#eeeeee,#191919> F1 | ||||
출전 횟수 | 162경기 | ||||
월드 챔피언 | 3회 (1988, 1990, 1991) | ||||
그랑프리 우승 | 41회 | ||||
포디움 | 80회 | ||||
폴 포지션 | 65회 | ||||
패스티스트 랩 | 19회 | ||||
첫 경기 | 1984 브라질 그랑프리 | ||||
첫 그랑프리 우승 | 1985 포르투갈 그랑프리 | ||||
마지막 그랑프리 우승 | 1993 호주 그랑프리 | ||||
마지막 경기 | 1994 산마리노 그랑프리 | ||||
소속 | 톨먼 그룹 모터스포트 (1984) 팀 로터스 (1985~1987) 말보로 맥라렌 (1988~1993) 로스만스 윌리엄스 르노 (1994)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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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If you no longer go for a gap that exists, you're no longer a racing driver, because we are competing. Competing to win."
"만약 당신이 틈새가 존재할 때 파고들지 않는다면, 당신은 더 이상 레이싱 드라이버가 아니에요. 우리는 경쟁하고 있기 때문이죠. 이기기 위해서요."
세나를 대표하는 어록(1990년 11월 3일, 재키 스튜어트 경과의 인터뷰 中)[2]
1984년부터, 1994년까지 활동한 브라질의 前 F1 드라이버. 요절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위상이 드높은 전설적인 선수이다.[3] 월드 챔피언을 3회 달성했으며, 레이싱 드라이버들이 어떤 열정과 철학을 가져야 하는지 직접 가치관을 제시하고 실천해 후대 레이싱 드라이버들과 모터스포츠 팬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4][5]"만약 당신이 틈새가 존재할 때 파고들지 않는다면, 당신은 더 이상 레이싱 드라이버가 아니에요. 우리는 경쟁하고 있기 때문이죠. 이기기 위해서요."
세나를 대표하는 어록(1990년 11월 3일, 재키 스튜어트 경과의 인터뷰 中)[2]
경기 외적으로는, 당시 경제 위기로 어려움을 겪던 고국 브라질의 가난한 국민들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는 모습을 보여 브라질 국민들의 큰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인물이다.[6][7] 세나가 사고로 사망했을 땐 국장을 치러줬을 정도.[8]
누가 더 인기 있나를 떠나 축구가 곧 종교인 브라질에서 펠레와 비교될수 있다는 자체가 그의 위대함을 방증하는 사례라 하겠다. 1994 미국 월드컵에서 브라질 축구대표팀이 4번째 우승을 차지한 뒤 세나를 추모하는 플래카드를 들고 세레머니할 정도였다. 또한 1980년대에 펠레와 세나가 같이 찍은 사진도 존재한다.#
2. 선수 경력
2.1. 그의 기록
- 역대 승률 TOP 5(162 레이스, 41승, 25.31%)[9]
- 역대 최다 모나코 그랑프리 우승자(6승)
- 역대 폴 포지션 획득 종합 3위(162 레이스, 65 폴 포지션)[10]
- 역대 최대 연속 폴 포지션(8연속, 1988 스페인 그랑프리~1989 미국 그랑프리)[11]
이 외에도 85~94년 동안 산마리노 그랑프리 폴 포지션을 모조리 쓸었던 기록들이 몇 가지 있다.
아마 요절하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은 세나가 90년대 후반까지 대략 1번에서 최대 3번의 월드 챔피언 자리를 차지하고, 20번이 넘는 추가 우승을 기록했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여러모로 성공적이었지만 동시에 요절로 안타까운 커리어를 산 사람이다.
3. 장례식
아이르통 세나 다 시우바
1960년 3월 21일 ~ 1994년 5월 1일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14]
(Nada pode me separar do amor de Deus.)
1960년 3월 21일 ~ 1994년 5월 1일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14]
(Nada pode me separar do amor de Deus.)
3.1. 그의 죽음이 남긴 영향
1년 뒤인 1995년에 이몰라에서 찍은 사진이다. 좌측부터 나이젤 만셀, 장 알레시, 하인츠하랄트 프렌첸[15], 미하엘 슈마허, 데이먼 힐, 스즈키 아구리.
라첸베르거와 세나의 죽음 이후 다시 한 번 포뮬러 원 레이스카의 안전성에 대해 심각한 우려가 제기되었다. 이에 FIA는 이후 포뮬러 원 레이스카의 안전 기준을 유례가 없는 정도로 끌어올렸고 레이스카 디자인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세나 사망의 간접적 원인으로도 추정되는 너무 낮은 차체로 인한 급격한 다운포스의 손실을 막기 위한 차량 지상고 규제 장치인 스키드 블록, 300톤이 넘는 충격에도 드라이버를 절대적으로 보호하는 서바이벌 쉘, 목 골절을 방지하기 위한 헤드레스트와 HANS의 도입, 사고가 나더라도 타이어가 이리저리 굴러다니지 않게 하는 타이어 테더가 추진된 것이다.
실제로 이런 노력 덕분에 서킷 위에서 사고로 즉사하거나 심각한 부상을 입는 드라이버는 20년간[16] 없었다.
한편 이 사고의 여파는 가족에게도 영향을 미쳤는데, 아일톤의 조카 브루노 세나는 아일톤의 사망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까지 오토바이 사고로 사망하면서, 가족[17]이 레이싱 커리어를 금지시키는 바람에 그의 실력 성장에 큰 차질이 빚어졌다. 현재처럼 심레이싱이 생기기 전의 일이었으니 상당히 큰 손해인 셈.
4. 드라이빙 스타일
세나의 차는 코너에 들어갈 때나 탈출할 때 리어가 흔들리는 움직임을 보여준다. 심지어 직선 주로에서도 세나의 차는 종종 리어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마치 삼바 댄스를 추는 것 같은 이 동작은 사실 그립을 잃고 주춤거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립을 붙잡고 있는 움직임이다. 세나는 평소에 이런 그립을 감지하거나 만들어내는데 재능이 있었고 그런 재능은 비가 오는 상황에 특히 빛을 발했다.
4.1. 특이한 쓰로틀 컨트롤
스즈카 서킷에서의 1세대 NSX 주행 영상 |
반면, 세나의 경우에는 점진적인 쓰로틀링이 아닌 밟았다 떼었다 하는 방식의 상당히 보기 힘든 방식으로 쓰로틀을 조절하였다.[18] 쉽게 말하자면 다른 드라이버들이 아날로그 방식으로 액셀러레이터를 조절하는 동안, 세나는 디지털 방식으로 조절했다고 할 수 있다. 디지털처럼 0과 1, 즉, 액셀을 떼든지 밟든지의 방식으로 쓰로틀을 조절했었다고 할 수 있는데, 세나의 이런 특이한 주행법에 관해서 많은 논의가 오갔다.[19] 코너를 도는 장면에서도 마치 탭댄스를 추는 것처럼 스로틀을 연타하는 것을 보면 이게 왜 세나의 트레이드마크처럼 여겨졌는지 알 수 있다.
이런 주행법에 대한 설명은 분분하다. 보통 대중적으로 알려진 설에 의하면 그가 터보 시대 때 F1에 데뷔하였기 때문에 당시 터보 엔진의 가장 고질적인 문제였던 터보랙을 해결하기 위하여 이러한 주행법을 썼다는 것인데, 엔진을 풀 쓰로틀로 밟았다 떼었다가 하는 것을 반복하여 코너 탈출 중 남들보다 빠르게 부스트압을 확보하고, 이를 통해 더욱 빠른 가속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가설은 최근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데, 세나는 애초에 카트 시절부터 스로틀을 수시로 뗐다 밟았다 하는 주행법을 고수했으며 터보가 금지된 89년 이후에도 이 주행법을 써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나는 자연흡기든 아니든 간에 상관없이 여전히 트랙에서 가장 빠른 드라이버였다.
최근 몇년 동안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진 설은 이러한 스로틀 조작이 코너에서의 최적 그립을 찾기 위해 체득한 방식이라는 것이다. 차량을 최대한 수평으로 유지하면서 동시에 타이어 그립을 얻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 세나가 가장 독보적인 레인마스터였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꽤 일리가 있는 설이다.
4.2. 역대 최강의 레인마스터
세나가 두각을 드러냈던 레이스는 비가 오는 경우였다. 세나는 레인 컨디션에서 최상의 실력을 발휘하는 드라이버였다. 최근엔 슈마허나 페텔, 그리고 베르스타펜를 향해 레인마스터라는 말이 언론에 의해 너무 자주 쓰여서 이 단어가 가지는 의미가 퇴색되었지만, 세나는 요즘 쓰이는 용례처럼 비가 올 때도 잘 하는 드라이버 정도가 아니라 비가 오는 날에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비가 올 때의 세나는 다른 드라이버보다 더 강력했으며, 불가능해보이는 레이싱을 선보였다. 비 내리는 궂은 날씨를 극복했던, 진정한 의미에서 레인마스터라고 불릴 수 있는 드라이버는 세나 외에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가 톨만의 하위권 차를 타고도 거의 우승할 뻔 했었던, 센세이셔널했던 모나코 레이스 역시 레인 컨디션이었다.4.3. 역대 최강의 숏런
아이르통 세나가 동시대 경쟁자들보다 단연 뛰어났던 영역은 퀄리파잉이었다. F1은 서킷을 최단시간에 일주하는 퀄리파잉 기록으로 예선을 치르기 때문에 드라이버들마다 퀄리파잉에 강하거나 레이스에 강한 특성이 있지만 세나는 이 부분에서 당대 최고의 기량을 발휘했다. 보통은 빠른 차를 타는 드라이버들이 퀄리파잉 기록이 좋은데,[20] 그러나 세나의 퀄리파잉 능력은 차를 뛰어넘는 것이어서 1986년 윌리엄스-혼다보다 현격히 느렸던 로터스를 타고 16개의 그랑프리에서 7번이나 폴 포지션을 차지했다. 또한 F1에서 다른 드라이버들과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은 같은 차를 타고 얼마나 차이를 보이느냐 인데, 1988년 맥라렌으로 이적한 첫 해 모나코에서 프로스트와 같은 차를 타고도 무려 1초가 훌쩍 넘어가는 랩타임 차이를 기록하면서[21] 그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증명했다. 밸런스가 매우 불안정했던 94년 윌리엄스를 타고도 폴 포지션은 놓치지 않았을 정도. 단순히 말해서 소위 말하는 원랩, 숏런에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던 드라이버였다. 이는 위에서 언급된 코너에서 그립이 어디에 있는지 직감적으로 감지하고 그립이 부족한 곳에서 그립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크게 발휘된 덕도 있다.세나의 통산 65회 폴 포지션은 미하엘 슈마허가 2000년대 들어서 갱신하기 전까진 차원이 다른 수준의 기록이었다. 심지어 루이스 해밀턴이 F1 통산 최다 폴 포지션을 갱신한 지금도 역대 3위를 기록하고 있다. 겨우 162경기만을 치렀고 25년이나 된 기록인데도. 그리고 이들의 폴 포지션 기록은 대부분 가장 숏런이 빠른 차로 기록한 것으로, 세나처럼 느린 차로 폴 포지션을 밥 먹듯 기록한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프로스트와의 경쟁 기간에도 다른 기록에선 프로스트가 앞서도 퀄리파잉만큼은 세나의 상대가 되질 못했다.
4.4. 카트 스타일
레이스에서도 세나는 자신만의 철학이 있었는데 바로 비타협적인 휠 투 휠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빠른 속도로 뒤섞여 달리는 모터스포츠에서 나란히 달리게 되는 휠 투 휠(Wheel to Wheel)은 가장 치열한 경쟁의 순간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위험한 순간이기도 하다. 나란히 달리는 와중에 휠끼리 맞닿아 접촉해서 사고가 날 수 있기 때문. 이런 기본적인 리스크가 큰 휠 투 휠에서 세나는 이전 세대의 드라이버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세나 이전 세대의 드라이버들은 서킷 환경이나 레이스카의 안전장치 같은 것이 상대적으로 열약했기 때문에 보통 이런 휠 투 휠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일은 드물었다.[22] 분위기 자체가 그런 방식의 경쟁이 지나치면 위험을 조장한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세나가 처음으로 고카트 방식의 레이스를 선보였던 것.[23] 물론 세나가 고카트에서 처럼 컨택도 불사하는 레이싱을 했다기 보단 그 기조를 포뮬러 원 레이싱에 가져왔다고 보는 것이 맞다.[24] 때문에 이런 세나의 성향에 완전히 반대되는 성향을 가진 프로스트와는 팀메이트 기간 내내 상극이었고 재키 스튜어트 같은 6,70년대 드라이버들과도 가치관에서 충돌이 있었다.5. 연도별 성적
5.1. 포뮬러 1
시즌 | 팀 | 경기 | 우승 | 폴 포지션 | 패스티스트 랩 | 포디움 | 포인트 | 순위 |
1984 | 톨만 모터스포트 | 14 | 0 | 0 | 1 | 3 | 13 | 9위 |
1985 | 팀 로터스 | 16 | 2 | 7 | 3 | 6 | 38 | 4위 |
1986 | 16 | 2 | 8 | 0 | 8 | 55 | 4위 | |
1987 | 16 | 2 | 1 | 3 | 8 | 57 | 3위 | |
1988 | 맥라렌 F1 팀 | 16 | 8 | 13 | 3 | 11 | 90 | 1위 |
1989 | 16 | 6 | 13 | 3 | 7 | 60 | 2위 | |
1990 | 16 | 6 | 10 | 2 | 11 | 78 | 1위 | |
1991 | 16 | 7 | 8 | 2 | 12 | 96 | 1위 | |
1992 | 16 | 3 | 1 | 1 | 7 | 50 | 4위 | |
1993 | 16 | 5 | 1 | 1 | 7 | 73 | 2위 | |
1994 | 로스만스 윌리엄스 르노 | 3 | 0 | 3 | 0 | 0 | 0 | - |
6. 여담
- 외래어 표기법대로 적은 이름은 '아이르통 세나 다시우바'지만 국내에선 '아일톤 세나'라고 훨씬 많이 알려져 있고[25], 네이버 인물사전과 본 문서의 표제어도 이를 따르고 있다. 참고로 로망스어와 게르만어권 인명 및 지명의 관사는 발음 변화를 반영하지 않고 뒤의 요소와 붙여 적기 때문에 '다'와 '시우바'는 붙여 적어야 한다.
- 포르투갈식 이름에 따라, 첫 번째 성인 '세나'는 외가쪽 성, 두 번째 성인 '다시우바'는 아버지의 성이다. 즉 흔히 알려진 '세나'는 외가쪽 성씨인 것.
- 한국 애니메이션 트랙시티의 등장인물 세나, 아이실드 21의 주인공 코바야카와 세나의 이름은 이 인물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특히 후자는 매우 빠른 스피드가 주무기인 러닝백 포지션이라는 연관성도 있으며, 그의 부모님의 이름은 각각 슈마, 미하루로 합치면 미하엘 슈마허가 된다.
- 사고가 일어나기 불과 1달 전인 1994년 4월에 출시된 신세기 GPX 사이버 포뮬러 ZERO에서 카자미 하야토에게 일어난 사고가 세나의 사고 상황과 비슷해서(좌회전 코너에서의 충돌, 같이 사고를 당한 사람이 오스트리아 출신인 점 등.) 제작진들에게 큰 충격을 주기도 하였다. 하야토 역의 카네마루 준이치와 카가 역의 세키 토시히코는 세나의 사고 소식을 듣고 '사이버 포뮬러 녹음 현장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라고 했다고. 하야토의 경우 세나의 행적을 많이 차용하기도 했다.
- 2010년, 그의 출생 50주년을 기리는 다큐멘터리 영화 세나 : F1의 신화가 전 세계적으로 공개되었으며 그 이전에 2010년 10월에 일본에서 먼저 공개되었다.[26] 한국에는 「세나 : F1의 신화」이라는 제목으로 2011년 10월 20일에 개봉했다.[27] 고급 시계 브랜드인 위블로에서 아이르통 세나 기념모델을 발매했을 정도.[28]
자동차 드라이버면서도 이륜차 브랜드인 두카티의 바이크를 좋아해서, 당시 연인과 함께 두카티 타고 시내를 달리던 그의 모습은 꽤나 유명했다. 그래서PPL 효과를 톡톡히 봤는지F1과는 별 관계 없는 두카티에서 세나를 기념하는 모델을 출시하기도 했다.
무선모형에도 관심이 많았던 걸로 보인다. 자신의 별장에서 RC비행기나 헬리콥터를 날리며 여가를 즐기는 모습도 구글에서 검색하면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포뮬러 1 브라질 그랑프리가 열리는 서킷인 인터라고스의 1~2번 코너는 세나의 이름을 딴 '세나 S'로 불린다.[29] 직선 주로 끝에 있는 급격한 내리막 시케인으로 서킷 내 최고의 추월 포인트인 동시에 상당한 고난도의 코너로 유명하다. 마지막 코너에서 메인 스트레이트까지 슬립스트림으로 붙은 뒤 세나 S에서 추월을 시도하는 방식. 모멘텀이 약간 모자라면 전부 탈출할 때까지 난타전이 벌어진다. 첫번째 apex와 두번때 apex까지 한계가 다르기 때문에 이 코너를 도는 동안에는 순식간의 차의 템포를 바꿔야 한다. 피트의 출구도 이 코너를 통과해야 나온다.
세가의 메가 드라이브 및 게임 기어용 레이싱 게임 '아이르통 세나의 수퍼 모나코 GP 2'에서 감수를 맡았다.[30] 그는 게임 내에서 얼굴마담 겸 플레이어에게 조언자이자 최고 클래스 레이싱 팀 MADONNA의 드라이버로 등장한다.[31]
- 또 다른 레이싱 게임 컨티넨탈 서커스에서 플레이어의 차량이 세나가 로터스에 있던 당시의 차량이며, 엔딩에서 보이는 플레이어의 모습은 영락없이 세나.
- 아이르통 세나 사후 20주기 년도이자 세나의 생일인 2014년 3월 21일에, 구글 에서 메인 화면에 세나의 탄생을 기념하는 로고를 올렸다.
(윌리엄스 FW17)
(윌리엄스 FW43B)
* 윌리엄스 레이싱은 세나의 사후 다음해 1995시즌부터 2021시즌까지 세나를 기념하는 로고를 차량 노즈 콘에 부착하는 전통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2022 시즌부터는 로고를 더 이상 부착하지 않게 되었는데, 윌리엄스의 감독인 요스트 카피토가 밝히길,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 2004년 산마리노 GP에서는 세나의 사후 10주기를 맞이하여, 미나르디가 PS04B 측면에 브라질 국기와 세나를 기리는 문구[32]와 팬들이 세나에 대한 추억과 생각을 남길수 있는 사이트 주소를 홍보하였다.[33]
아이르통 세나 사망 20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세나 재단에 관한 것으로 세나가 생전 빈민 아이들을 위해 세운 사회 구호 재단으로 그가 사망한 지 20년이 지난 지금도 브라질의 많은 아이들을 돕고 있다.
- 그란 투리스모 6에서는 그의 사후 20주년을 기념하여 그의 카트 시절부터 F1 입문까지를 돌아보는 아이르통 세나 트리뷰트가 특별 이벤트로 등장했으며, 몬차 서킷과 브랜즈 해치 서킷의 1980년대 레이아웃과 세나가 타고 우승했던 카트, F3, 로터스 F1 팀 등이 추가 컨텐츠로 수록되었다.
- 한국의 인디 포스트 락 밴드인 로로스가 2014년 가을에 발매한 2집에서 헌정곡을 만들어 수록하였다. 여담으로 리더인 도재명이 세나의 엄청난 팬이라고 한다.
일본의 퓨전 재즈 밴드인 티스퀘어의 92년 앨범 Impressive의 첫 곡인 'Faces'는 아이르통 세나에게 헌정하는 그의 테마곡이다. 티스퀘어는 이전부터 히트곡 Truth가 후지TV F1 그랑프리 오프닝 테마로 쓰였고 일본 그랑프리 전야제 공연에도 참가하는 등 여러모로 F1과 깊이 관련된 일본 밴드 중 하나였다.
티스퀘어는 또한 세나가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94년 동년 10월에 Solitude -Dedicated to SENNA-라는 추모 앨범을 발매했다. 여태까지의 티스퀘어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무겁고 진지한 곡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No End Run이나 Goodbye Hero 등, 제목을 통해 세나를 어느때보다도 더 기억하고자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위에서 소개한 Faces도 재수록됐는데, Impressive 버전과 비교해서 잔기교가 빠지고 좀 더 진중한 분위기로 변했다. 세나의 열정 그 자체를 상징하던 곡이 애석하게도 세나 사후 그의 추모곡이 된 셈.
- 브라질 국적자답게 축구에도 애정이 많았으며, 몇몇 대표팀 축구 선수들과도 친분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상파울루 FC의 팬이었다고 알려져있으며, 월드컵 경기와 본인의 레이스 일정과 겹치면 축구 경기를 못 본다며 아쉬워한 적도 많았다. 물론 그럼에도 프로답게 레이스에 임하고 항상 최고의 모습을 보여줬지만. 그리고 1994 FIFA 월드컵 미국에서 우승한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은 월드컵 우승 기념 사진 촬영 때 세나를 추모하는 플래카드와 함께 찍기도 했다. 여담으로 세나가 작고한 해에 당시 신인이던 호나우두랑 우연히 공항에서 찍은 사진이 있다.#
- 전성기를 함께했던 12번 맥라렌 MP4/4는 지금도 최고의 컨디션으로 정태보존중이다. 과거 탑기어에서 세나에 대한 추모 에피소드를 진행할 때 그의 광팬인 루이스 해밀턴이 촬영 차 세나의 MP4/4로 실버스톤 서킷을 주행하였다.
- 아일톤 세나의 아버지 '밀턴 다 시우바'가 노환으로 인한 자연사로 94세에 2021년 10월 28일 오전 5시 경 사망하였다.
- 아일톤 세나 사망 당일, 일본 경마에서 한 획을 그을 경주마가 태어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사일런스 스즈카이다.
- 2022년 4월 말, 이몰라 서킷에서 개최되는 에밀리아 로마냐 GP에서 맥라렌의 F1 쇼 카로 아일톤 세나를 기리는 아트 카를 공개하였다. 차의 한쪽 면은 아일톤이 거쳐간 팀들 중 세 가지 상징적인 리버리인 로터스 F1 팀, 로스만스 윌리엄스 및 말보로 맥라렌으로 각각 구성되어 있으며 반대 쪽은 세나의 삶과 F1 경력에서 영감을 얻은 프랑스 거리 예술가 지바(Jisbar)와 이탈리아 패션 디자이너 마테오 마키아벨리(Matteo Macchiavelli)가 디자인 하였다. 이 차는 이탈리아 수집가 지안루카 트라몬티(Gianluca Tramonti)가 기증했으며 다가오는 에밀리아 로마냐 GP 기간 중 아일톤 세나 박물관에 전시될 예정이고 또한 마이애미와 모나코 F1 레이스에 등장할 예정이며, 2022 시즌 후반에 베니스와 마이애미에서 열리는 아트 이벤트의 대표작이 될 예정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경매를 통해 아일톤 세나 재단으로 수익금 일부를 기증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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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MCL36 | 2023 MCL60 |
6.1. 세나와 혼다의 관계
현재에 이르러서는 위에서 설명한 맥라렌 세나의 예와 같이 맥라렌이 가장 세나 관련 마케팅에 열심이지만, 정작 세나의 커리어에서 가장 큰 영향을 주고받은 회사는 다름 아닌 혼다였다.세나의 맥라렌 커리어의 시작 자체가 자신이 운전하던 로터스에 혼다 엔진이 탑재 되면서 물꼬가 트인것이였으며, 이 때부터 혼다의 엔지니어들은 세나의 레이스에 대한 접근 방식에 반해 있었다고 한다.[34] 당시 맥라렌에서 일하던 관계자가 세나와 프로스트의 차이점의 대해 언급한 것에 따르면 "프로스트는 혼다 엔진을 사용하는 맥라렌의 드라이버였고, 세나는 맥라렌 섀시에 탑재된 혼다의 드라이버였다"고 하며, 이는 알랭 프로스트가 이후 당시를 회상하며 인터뷰한 내용에서도 등장하는 내용으로, 프로스트 역시 이러한 표현에 크게 동의하였다. 특히 당시 혼다 F1의 엔지니어로 활동하던 사람중에는 카와모토 노부히코가 있었는데, 이후 고위직을 거친 그가 90년에는 혼다의 회장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혼다로서도 세나를 노골적으로 편애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특히 카와모토는 프로스트와의 만찬에서 프로스트가 혼다가 세나를 편애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다고 전하자, 혼다 엔지니어들이 세나를 더 좋아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고 전해준 바도 있다.
이렇듯 프로스트와 세나가 맥라렌에서 경쟁하던 당시 혼다는 세나를 눈에 띌정도로 우선시 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고, 이는 프로스트가 89년을 끝으로 맥라렌을 떠나는데 아주 큰 영향을 미쳤다. 혼다가 세나를 사랑한만큼 세나에게 있어서도 혼다와의 관계는 중요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92년 당시 혼다가 몬자에서 열리는 이탈리아 그랑프리 동안 공식적인 철수를 발표하자, 이에 관해 질문하는 기자와의 인터뷰 직후 돌아서며 눈물을 흘린 바 있다.
이러한 혼다와의 관계 때문에 멕라렌 시절 혼다의 명차 NSX(NA1)의 개발에 참여해 매우 큰 도움을 주었다. 특히 그가 빨간색 NSX를 하얀 양말과 로퍼를 신고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영상은 아직도 매우 유명하며, 특히 해당 영상에서는 그의 뛰어난 풋워크와 특이한 쓰로틀 컨트롤 방식을 볼 수 있다. 본인도 마음에 들었는지, 개인적으로 한 대를 소유 했을 정도다. 이런 점에서 NSX는 세나의 헤리티지를 상징하는 명차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혼다에서도 세나 관련 마케팅을 안 하는 것은 아닌데, 가장 대표적으로 위의 브랜드 CM, "Sound of Honda"가 있다. 세나가 달렸던 스즈카 서킷을 빛과 소리로 재현한 영상일 뿐이지만 이 영상은 아직도 그를 기억하고 있는 수많은 F1 팬들을 울렸다.
6.2. 인간적인 면모
측근들의 말에 의하면 세나는 굉장히 사려깊고 정의감이 강했다고 한다. 도덕적으로 타격을 입는 것을 견딜 수 없어했다고. 그런데 이건 레이스 카 밖에서의 이야기이고 레이스 카에만 올라타면 굉장히 공격적이고 호전적인 사람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만약 피트에서 마샬들이 조금이라도 시간을 지체하면 아주 조급해하고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였다. 반면 레이스 카가 달려오는 목숨이 위험한 서킷 한가운데를 달려가 부상당한 드라이버를 구출하고, 후배 드라이버들을 위해 진심을 다해 조언하고 챙겨줄 만큼 자신의 신념이 강한 사람이었다.
개인적으로는 항상 하느님 이야기를 할 정도로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레이스에서 우승하면 꼭 하는 얘기 중 하나가 신에 대한 감사였다. 세나는 항상 레이스에 나서기 전에 차에 앉아서 기도를 하곤 했다.
조국 브라질에 대한 사랑도 남달라서 항상 브라질 국기를 들고 다니며 레이스마다 흔들곤 했다. 또한 세나는 당시 막장의 끝을 달리던 브라질의 국가 상태[35]와 거기에 고통받는 아이들을 항상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만든 것이 아일톤 세나 재단. 빈민층 아이들에게 교육과 지원을 베풀고 여러 꿈을 가진 아이들[36]을 뒷받침해주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세나는 항상 이 재단을 홍보하는 티셔츠를 입고 그리드를 돌아다녔으며, 틈만 나면 요트에 먹을 것과 생필품을 가득 실어서 시골의 아이들에게 가곤 했다. 또 세나는 자선 기금을 위해 F1 드라이버들을 불러모아 돔 구장 안에다 카팅 서킷을 만들어놓고 팬들을 불러다 친선 카팅 경기를 열기도 했다. 사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생전에 익명으로 사재[37]를 털어 빈민층 아이들을 위해 기부했다고 한다. 세나의 사후 세나 재단은 누나인 비비안느 세나가 맡아서 관리하고 있다.
때문에 세나의 죽음 이후 브라질 정부가 3일간 국가 애도 기간을 선포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 막장도 그런 막장이 없던 브라질의 나라 상태를 생각하면 세나의 인간적인 모습과 불안정한 조국을 아끼고 국제 무대에서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은 브라질 국민들에게 뜨거운 애정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세나는 팬들이나 드라이버들에게 레이싱 드라이버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써 매력적인 면들이 있었다. F1 특유의 정치적인 환경에 대해 불편함을 공개적으로 나타내고 최대한 정치색이 배제된 순수한 의미에서의 경쟁을 추구했다는 점, 모터스포츠가 가지는 태생적 위험을 인식하고 사고로 다친 드라이버들을 챙기는 등 직업 정신과 동업자 정신이 투철했다는 점, 당시 국제 무대에서 밝히기 꺼려지던 브라질이라는 국적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브라질의 가난한 아이들을 아꼈던 점, 자신 스스로가 F1 레이싱에 엄청난 열정을 보여줬다는 점이 있었다. 그리고 세나의 이런 점들은 후대 드라이버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6.3. 그의 헬멧
레이싱 드라이버들은 저마다 특유의 디자인으로 커스텀한 헬멧을 착용하는데, 빠르게 달리는 서킷 안에선 쉽게 드라이버의 신원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눈에 띄게 위함이기도 하고 그 자체로 자신의 상징으로 삼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세일즈 포인트. 아이르통 세나는 조국 브라질 국기의 색상인 초록색과 파란색 노란색을 혼합한 디자인으로 유명하다. 강렬한 노란색 바탕의 헬멧은 어딜가든 눈에 띄였으며 그의 사후엔 완전히 세나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2017년 캐나다 GP에서 세나와 같은 65번째 폴 포지션을 기록하고 세나가 착용했던 진짜 헬멧을 전달받고 놀라는 해밀턴)
때문에 모든 드라이버들의 존경을 받는 세나여서 그의 헬멧 디자인을 오마주하는 드라이버들이 매우 많다. 대표적으로 루이스 해밀턴. 그리고 그의 조카인 브루노 세나[38]. F1을 오랫동안 봐온 팬이라면 왠지 모를 애틋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세나 재단을 위해 세나의 헬멧과 사진을 찍은 미하엘 슈마허와 알랭 프로스트.
6.4. 모나코 마스터[39]
맥라렌에서의 마지막 해이자, 마지막 모나코 그랑프리 우승이 된 1993 시즌 맥라렌 MP4/8.
F1 드라이버들은 저마다 하나쯤 유난히 강한 면모를 보이는 서킷이 있는데 세나는 모나코 서킷이 그러했다. 키미 라이코넨이 스파프랑코샹 서킷에서, 그리고 루이스 해밀턴이 헝가로링과 실버스톤 서킷에서 유난히 빠른 스피드를 보이는 것과 비슷한 것. 그러나 비교가 힘든게 세나 현역 10 시즌 동안 모나코에서 통산 6승을 했을 정도로 모나코에서의 세나는 절대적이었다. 심지어 이는 차가 빨라서도 아닌 것이, 경쟁력 있는 차를 가지지 못했던 후기 로터스 시절이나 전성기 맥라렌 시절, 마찬가지로 느렸던 맥라렌 후기 시절에서도 세나는 우승을 놓치지 않았다.
여러 요인이 있지만 퀄리파잉에 목숨 거는 모나코 특성상 세나가 퀄리파잉에서 무적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이 맞아 떨어진 것이 가장 크다. 일례로 1988 시즌 모나코 예선에서 그는 같은 팀 메이트 알랭 프로스트와 1.427초 차이로 폴 포지션을 획득했다. 같은 차를 탔는데도 무려 1.5초 가까이 차이가 났던 것이다! 게다가 알랭 프로스트는 월드 챔피언 4회의 레전드 오브 레전드 드라이버다. 이 1.427초의 차이는 오늘날의 F1에서 최대 약 10위권 밖인 Q3 이전까지도 밀려날 수 있다. 이때 이후 30년이 지난 2018 시즌 모나코 그랑프리 예선에서의 폴 포지션(다니엘 리카도, 레드불 레이싱 RB14: 1:10.810)과 1.4초 정도 차이 나는 기록은 무려 10위(피에르 가슬리, 스쿠데리아 토로 로쏘 STR13: 1:12.221)이다. 간혹 숏런에 올인하고 롱런을 무시한 세팅 때문에 롱런을 중시한 프로스트와 이런 차이가 났다고 말하는 바보같은 팬들이 있는데, 모나코는 사실상 숏런이 전부인 서킷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냥 무지몽매한 사람의 헛소리에 불과하다. 위닝카를 가진 누구도 모나코의 원랩에서 밀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또한 단순히 퀄리파잉에서 앞섰기 때문에 우승을 많이 한 것이 아닌 것이, 1992년과 1993년에는 예선 3위에서 출발했음에도 기어이 제일 먼저 체커를 받아내고는 했었다.
우승을 놓친 1988년은 프로스트를 크게 앞서다가 스스로 사고를 내 리타이어한 경우였고 1992년에는 한참 닳은 타이어를 끼운 채로 새타이어를 끼운 만셀을 상대로 수십 랩 동안 막아내 만셀의 모나코 우승을 기어코 저지하기도 했다. 이렇게 세운 통산 6승은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기록으로 그레이엄 힐, 미하엘 슈마허 등이나 5회 우승을 기록했을 뿐이며, 최근에는 로즈버그 정도가 3회 우승을 했을 정도였다. 게다가 세나는 다른 드라이버들과 달리 딱 10시즌만 달렸기 때문에 이는 엄청난 승률이라 할 수 있다.
세나가 요절한 것 때문에 커리어 면에서는 최강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이버들이 항상 역대 가장 위대한 드라이버로 선정하는 이유가 바로 가장 어려운 드라이빙 스킬이 요구된다는 서킷인 모나코에서 역대 최강의 마스터 오브 마스터로 군림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다른 드라이버들과는 달리 빠른 차를 타서도 아니었으며 만약 같은 차를 탄다면 누구도 그를 이길 수 없었다. 심지어 1992년에는 아예 대놓고 피트인 안하고 버티기로 해 새 타이어 끼고 나온 만셀을 기어코 막고 우승하기도 했다. 그만큼 모나코에서 자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
7. 아일톤 세나에 대한 언사
Q: 본인이 최고로 생각하는 드라이버는 누군가요?
저는 세나요. 그를 넘버 1으로 두고 싶습니다.
I think senna. I'll put him a Number 1.
페르난도 알론소
제게는 세나가 넘버 1 입니다.
For me senna is a Number 1.
펠리페 마싸
저에게 그(세나)가 넘버 1 이었어요.
For me he was a Number 1.
루벤스 바리첼로
저는 아일톤 세나를 넘버 1으로 두고 싶네요.
I put Ayrton senna as a Number 1.
야르노 트룰리
저는 의심할 것 없이 아일톤 세나가 넘버 1 이었습니다.
For me Ayrton senna undoubtably was the Number 1.
데이빗 쿨싸드
저는 그(세나)를 넘버 1으로 두겠습니다. 당신도 알듯이 그는 분명히 최고의 드라이버였어요.
I'll put him Number 1. You know he was definetely the greatest driver.
미카 하키넨
"저에게 물어보신다면, 저도 세나를 넘버 1으로 놓겠습니다."
If you asked me, I'll put senna as well as number 1.
미하엘 슈마허
"당신이 생각하기에 그 위대한 시대의 모든 드라이버들 중 가장 빛나는 사람이... 세나가 꼭대기에 있군요."
You think that Shining out from all those drivers in that great era... Senna rose to the top.
"세나가 꼭대기에 있어요."
"Senna rose to the top."
루이스 해밀턴[40]
-탑기어에서 제레미 클락슨과의 세나 다큐멘터리 인터뷰 中-
저는 세나요. 그를 넘버 1으로 두고 싶습니다.
I think senna. I'll put him a Number 1.
페르난도 알론소
제게는 세나가 넘버 1 입니다.
For me senna is a Number 1.
펠리페 마싸
저에게 그(세나)가 넘버 1 이었어요.
For me he was a Number 1.
루벤스 바리첼로
저는 아일톤 세나를 넘버 1으로 두고 싶네요.
I put Ayrton senna as a Number 1.
야르노 트룰리
저는 의심할 것 없이 아일톤 세나가 넘버 1 이었습니다.
For me Ayrton senna undoubtably was the Number 1.
데이빗 쿨싸드
저는 그(세나)를 넘버 1으로 두겠습니다. 당신도 알듯이 그는 분명히 최고의 드라이버였어요.
I'll put him Number 1. You know he was definetely the greatest driver.
미카 하키넨
"저에게 물어보신다면, 저도 세나를 넘버 1으로 놓겠습니다."
If you asked me, I'll put senna as well as number 1.
미하엘 슈마허
"당신이 생각하기에 그 위대한 시대의 모든 드라이버들 중 가장 빛나는 사람이... 세나가 꼭대기에 있군요."
You think that Shining out from all those drivers in that great era... Senna rose to the top.
"세나가 꼭대기에 있어요."
"Senna rose to the top."
루이스 해밀턴[40]
-탑기어에서 제레미 클락슨과의 세나 다큐멘터리 인터뷰 中-
그는 아마도, 판지오만이 동급으로 취급받을 수 있는 경지까지 다다랐다.
He got to a position where he was only equalled probably, by Fangio.
스털링 모스
He got to a position where he was only equalled probably, by Fangio.
스털링 모스
세나가 올해 월드 챔피언이 될 것 같지는 않지만, 경력을 지속한다면 미래에 틀림없이 월드 챔피언이 될 것이라고 봅니다.[41]
He's not about to be World Champion this year, he will undoubtedly be World Champion in the future if his career continues.
그는 그랑프리 레이싱 뿐만 아니라, 영원한 세계 최고의 드라이버이다.
The best driver in Grand Prix racing, the best driver in the world by a long way.
제임스 헌트
He's not about to be World Champion this year, he will undoubtedly be World Champion in the future if his career continues.
그는 그랑프리 레이싱 뿐만 아니라, 영원한 세계 최고의 드라이버이다.
The best driver in Grand Prix racing, the best driver in the world by a long way.
제임스 헌트
아이르통은 생전에 다수의 챔피언 트로피를 획득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여러 관중분들에게는 무엇보다도 더욱 특별한 트로피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명예, 존경, 우상, 그리고 사랑으로 만들어진 트로피였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또 감사드립니다.[42]
비비안느 세나[43] -1994년 일본 그랑프리에서-
비비안느 세나[43] -1994년 일본 그랑프리에서-
여러분도 알듯이 솔직히 말해서, 전 절대 세나의 팬은 아니었어요. 전 항상 질 빌르너브가 세계 최고의 레이싱 드라이버들 중 하나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저는 이 세나 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해 몇 시간 분량의 영상물들을 여러번 봤는데요. 중요한 것은, 빌르너브는 여러 차례 엄청난 모습을 보여줬지만, 세나는 차에 오를 때마다 엄청났습니다.
”You know to be honest with you, I was never a Senna's fan. I always thought Gilles Villeneuve was the greatest racing driver of them all. But, to make this film I watched hours and hours and hours of footage. And the thing is, Villeneuve was spectacular on a number of occasions, Senna, he was spectacular every single time he got in a car.”
제레미 클락슨
-탑기어에서 세나 다큐멘터리를 마치며-
”You know to be honest with you, I was never a Senna's fan. I always thought Gilles Villeneuve was the greatest racing driver of them all. But, to make this film I watched hours and hours and hours of footage. And the thing is, Villeneuve was spectacular on a number of occasions, Senna, he was spectacular every single time he got in a car.”
제레미 클락슨
-탑기어에서 세나 다큐멘터리를 마치며-
토요일에 나는 내 친구를, 일요일에 나의 모터스포츠 신을 잃었다.
On Saturday I lost a friend, on Sunday my Motorsport God
하인츠하랄트 프렌첸[44]
On Saturday I lost a friend, on Sunday my Motorsport God
하인츠하랄트 프렌첸[44]
[1] 이 사진은 원본에 있던 왼쪽 가슴의 말보로 스폰서십이 모두 지워진 편집본이다.[2] 문맥을 따지자면 1990 시즌 마지막 두 경기가 남은 시점인 일본 그랑프리 때 프로스트가 월드 챔피언이 되는 확률을 없애려고 고의로(...) 충돌을 일으킨 직후의 인터뷰이다.[3] 미디어에서는 커리어 위주로 평가하기 때문에 세나를 약간 낮은 순위에 놓지만, 현장 드라이버들은 자존심이 센 인간들이고 자신들이 실력적으로 인정하는 사람이 아니면 대우해주지 않는다. 커리어만 보면 별볼 일 없는 짐 클락이나 질 빌뇌브 등을 가장 위대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커리어로 따지면 모터스포츠의 GOAT는 당연히 루이스 해밀턴 경과 미하엘 슈마허겠지만 프로의식, 명성, 서킷 밖에서의 모범된 삶을 합쳐 역사상 그 어떤 드라이버보다도 많은 공헌을 한 사람이기에 요절한지 오랜 세월이 지난 현재에도 여전히 드라이버들 사이에서 고평가된다.[4] 2009년경에 전현직 F1 드라이버 217명에게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세나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드라이버로 선정된 바 있다.#[5] 물론 그가 제시한 가치관에 대해선 지금도 호불호가 갈린다. 그러나 그가 당대 모터 레이싱이란 스포츠를 하는 이들 모두에게 혁명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대부분이 인정하는 사실이다.[6] 세계적으로 봤을 때 브라질 스포츠를 대표하는 이미지는 축구와 펠레지만 정작 브라질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스포츠 드라이버를 선정하면 세나가 펠레를 앞서기도 한다. 마라도나는 자국으로 한정해도 세나보다 뒤떨어지면서 어떻게 나보다 낫냐는 식으로 펠레를 자극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아이르통 세나가 특히나 사랑받는 '고향' 상 파울루에서만 실시한 것이며 이 투표 결과로만 아이르통 세나가 브라질 역대 최고의 스포츠 스타라고 하면 곤란하다. 왜냐하면 이는 여론조사의 변수를 고려하지 않은 결과이기 때문이다. 대부분 이 투표 결과가 한국에 기사가 나서 각종 커뮤니티, 카페, 블로그 등에 이 투표 결과가 가장 많이 보인다.[7] #[8] 상파울루와 동부의 외곽도시를 연결한 30마일 길이의 고속도로를 그를 기려 아일통 세나 고속도로(Rodovia Ayrton Senna)로 명명했다.[9] 한 시즌에 약 20경기 가까이씩이나 그랑프리가 개최되는 현재에 와서도 상당히 괴물같은 승률이다.[10] 그가 사망한 지 20년이 지났는데 그 위로 있는 사람은 슈마허와 해밀턴 둘 뿐이다... 무엇보다 세나가 한창 활동하던 시기에는 그랑프리가 약 12개 정도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승률과 마찬가지로 확률로 계산한다면 40.12%라는 괴물같은 확률이 나온다...[11] 2024년 막스 베르스타펜이 에밀리아 로마냐 그랑프리에서 동일한 기록을 달성하면서 공동 기록 보유자가 되었다.[12] 1994 미국 월드컵에서 이탈리아를 꺾고 결승전에서 우승한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은 월드컵 트로피를 손에 넣으며 세나를 추모했다.[13] 당초에는 이탈리아 공군이 직접 관을 옮겨주겠다고 했지만 유족 측에서 거부했다. 심지어 세나의 관을 운구한 바리그 여객기는 PP-VOQ로 이전에 대통령 전용기로 쓰이던 기체였다.[14] 로마서 8장 39절이며, 구절이 다소 생략되어 볼드체로 표시된 부분만 새겨졌다. 후술하겠지만 세나는 생전에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15] 롤란드 라첸베르거와 함께 1992년부터 1993년까지 전일 본 F3000 챔피언십에 참전한 드라이버였다. 그 역시 1994년 시즌이 F1 루키 시즌이었으나 친구와 신을 모두 떠나보내야했다.[16] 쥘 비앙키의 사망 이후로 안전장치인 헤일로의 도입이 가속화되었다.[17] 브루노 세나의 엄마가 아일톤 세나의 누나인 비비안느 세나였다.[18] 영상 15초부터. 세나의 쓰로틀 조절이 다른 드라이버들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것을 볼 수 있다.[19] 그래서 세나를 진정한 의미의 키보드 레이싱 게이머라고 칭하는 농담도 존재한다. 게임패드나 레이싱휠 페달과 달리 키보드로 레이싱게임을 할 때는 키를 눌렀다 뗐다 하는 방식으로 액셀을 구현해야하기 때문에 풀 쓰로틀과 쓰로틀 오프라는 두 가지 상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20] 그 때문에 F1이 차빨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21] F1에서 원랩이 0.3초 차이가 나면 그 차는 이길 수 없다고도 한다. 그런데 같은 차를 타고도 그것도 역대급으로 꼽히는 선배 레전드 드라이버와 1초 이상의 차이를 냈다는 것이다.[22] 실제로 82년 리카르도 팔레티의 사망 이후 F1 섀시에 카본 기술이 들어가고 안전장치 기술도 발전하면서 94년 산마리노까지 사망 사고는 없었다.[23] 고카트도 바퀴가 노출된 오픈 휠 방식이지만 차량간 컨택이 포뮬러 레이싱보다 훨씬 자유롭다. 속도도 느리고 무겁지도 않아 상대적으로 크게 다칠 위험이 적어서 이기도 하지만.[24] 세나는 카트를 굉장히 오랜 시간동안 탔다. 그리고 프로 레이서가 된 이후에도 카트 레이싱의 환경을 매우 이상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기도 했다.[25] 그의 고향 상파울루에선 아일ㄹ통 쎄나로 주로 발음한다.[26] 2010년 10월 7일 열린 F1 일본 그랑프리에 맞춰 일본 미에현 스즈카 서킷에서 월드 프리미어를 거행.[27] 참고로 일본 개봉이 먼저 이뤄진 것은 일본에서 세나의 인기가 상당했기 때문이다. 세 차례의 F1 월드 챔피언쉽 타이틀 중 두 차례를 일본 GP에서 확정지었다.[28] 위블로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기념 시계를 만들기도 했으며, 마라도나 아르헨티나 국대 감독이 양손에 하나씩 두 개 차는 시계로도 유명하다.[29] 세나가 현역이었을 당시 인터라고스는 대대적인 개보수를 하게 되었는데, 그때 세나가 직접 이 코너의 설계에 참여했다.[30] 사실상 그가 마지막으로 감수를 맡은 유작이다.[31] 그런데 이 팀 및 드라이버 가명들이 너무 센스가 없었던지라, 애초부터 실존하지 않았던 가상의 단 한 팀을 제외하고 이름, 사진 등을 모두 실제 팀명 및 드라이버 프로필로 바꾼 해킹 롬도 꾸준히 나왔다. 영상으로 올라온 것도 실제 로스터를 반영한 해킹 롬.[32] 사우다데는 영국 작곡가인 크리스 레아가 세나를 기리고자 쓴 노래의 제목이기도 하다. 사망 직후 주간에 한 브라질 팬이 Saudade라고 적힌 손수건을 흔드는 게 기억에 남아서 였다 한다.[33] 후에 책으로 정리되어 비비안느 세나에게 전달되었다고 한다. 웹사이트에는 1994년 산마리노 경주에서 세나가 사망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DVD의 정보가 있으며 DVD 판매를 통해 모인 금액의 일부는 교육과 스포츠를 통해 도움이 필요한 브라질 어린이를 돕기 위해 설립된 Ayrton Senna 재단으로 전달되기도 했다.[34] 세나에게 반한것은 혼다의 엔지니어들 뿐만이 아니었는데, 88년 이후로 일본에서 세나는 최고의 F1 스타였다. 세나가 일본을 방문했던 당시에는 일본 여성팬들을 몰고다니고는 했으며, 위에 나온 T-Square의 헌정곡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하다.[35] 1990년대 초반 브라질은 군사 독재 정권이 끝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고, 천 단위의 인플레이션 상승률로 경제가 막장이 되어 화폐 개혁까지 진행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인 고통을 받았다.[36] 가난한 아이들의 안정적 사회 진출을 돕는다.[37] 사망 당시 4억 달러에 달했다고 한다.[38] 누나인 비비안의 아들이다.[39] 일본에서는 실제로 쓰이는 말이다.[40] 참고로 해밀턴은 세나의 광팬이다. 세나의 노란 헬멧을 모티브로 데뷔 이전에 2005년 맥라렌에서 테스트 드라이버였을 때부터 썼을 정도.[41] 전설의 1984년 모나코 그랑프리에서 헌트가 해설을 하는 도중 세나를 극찬하며 한 말.[42] 세나의 전성기가 곧 혼다 엔진의 전성기였고 그의 커리어에서 결정적인 순간이 거의 모두 일본 GP, 스즈카 서킷에서 혼다 엔진의 레이스카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일본은 버블 경제 호황과 맞물려 포뮬러 원의 인기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라 세나을 향한 일본 팬들의 애착은 세나의 모국인 브라질 국민들 다음 가는 정도였다.[43] 아일톤 세나의 누나이자 아일톤 세나 재단과 아일톤 세나 학원가의 이사장이다.[44] 아일톤 세나와 롤란드 라첸베르거 사후 30년이 된 2024년 5월 1일 자신의 X에 쓴 글이다. 전자의 친구는 롤란드 라첸베르거를, 후자의 신은 아일톤 세나를 가리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