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width=320><tablebordercolor=#e10510><tablebgcolor=#e10510> | 포뮬러 1 월드 챔피언십 역대 드라이버 챔피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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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87bcd> 이름 | 알랭 프로스트 Alain Prost | |||
본명 | 알랭 마리 파스칼 프로스트 Alain Marie Pascal Prost, OBE[1] | |||
출생 | 1955년 2월 24일 ([age(1955-02-24)]세) | |||
프랑스 오베르뉴론알프 레지옹 루아르 주 로헤뜨 | ||||
국적 |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 | |||
소속 | <colbgcolor=#187bcd> 드라이버 | 말보로 팀 맥라렌 (1980) 에퀴페 르노 엘프 (1981~1983) 말보로 맥라렌 인터내셔널 (1984~1989) 스쿠데리아 페라리 (1990~1991) 캐논 윌리엄스-르노 (1993) | ||
스태프 | 프로스트 그랑프리 (1997~2001 / 소유주) 르노 F1 팀 (2019~2020 / 비상임 이사) 알핀 F1 팀[2] (2021 / 비상임 이사) | |||
정보 더 보기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colbgcolor=#187bcd> 출전 횟수 | 199경기 | ||
월드 챔피언 | 4회[3] (1985, 1986, 1989, 1993) | |||
그랑프리 우승 | 51회[4] | |||
포디움 | 106회[5] | |||
폴 포지션 | 33회[6] | |||
첫 경기 | 1980년 아르헨티나 그랑프리 | |||
첫 그랑프리 우승 | 1981년 프랑스 그랑프리 | |||
패스티스트 랩 | 41회[7] | |||
마지막 경기 | 1993년 호주 그랑프리 | |||
마지막 그랑프리 우승 | 1993년 독일 그랑프리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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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82 시즌 르노 시절의 모습 | 2020년의 모습 |
포뮬러 1에서 활약했던 프랑스 국적의 전 레이싱 드라이버. 아일톤 세나, 나이젤 만셀등과 함께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의 시대를 풍미했고, 4회의 월드 챔피언십 우승으로 동시기 활동했던 드라이버들 중 가장 많은 수상실적을 올린 드라이버이다. 현재는 특히 성장 배경, 성격, 드라이빙 스타일이 모두 정반대인 아일톤 세나와의 라이벌리로 유명하다.
2. 선수 경력
프랑스 루아르 생 샤몽에서 약 1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로레트에서 출생. 소년 시절부터 스포츠에 소질을 보였고, 장래희망은 축구 선수나 헬스 트레이너였다고 한다.하지만 14세에 가족들과 함께 카트레이싱 경기를 관람하러 간 것이 그의 인생을 바꿔 버린다. 경기를 보면서 모터스포츠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고, 레이서의 꿈을 꾸게 된 것이다. 결국 19세에 학교를 그만두었고 본격적으로 프로 레이서로서 활동을 시작했는데, 1974년 프랑스 시니어 카트 챔피언십과 포뮬러 르노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F3에 진출했고 F3에서도 맹활약하면서 맥라렌과 2년 계약, F1에 데뷔하게 된다.
2.1. 서킷 위의 교수
맥라렌 유니폼을 입고 치른 데뷔 시즌에서 5포인트를 획득하는 등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으나 자신의 팔목 부상을 불안정한 맥라렌의 차량 때문이라고 여긴 프로스트는, 계약을 파기하고 르노로 팀을 옮긴다.1981년 프로스트는 프랑스 그랑프리에서 데뷔 첫 승을 거두는 등 그 해에 3승을 따냈고, 3시즌 동안 9승을 따내면서 르노의 간판 드라이버로 활약했다.
그리고 프로스트는 1984년 맥라렌으로 복귀, 이후 6시즌 동안 30회의 그랑프리 우승, 3회의 월드 챔피언십 우승으로 최고의 레이서로 군림한다.
이런 프로스트에게는 '교수'라는 애칭이 붙었는데, 항상 철저한 분석과 연구로 경기에 임하는 그에게 잘 어울리는 별명이다. 맥라렌에서 1984 시즌을 보낼 때 파트너가 다름아닌 니키 라우다였는데 공교롭게도 라우다 역시 분석적이고 안정적인 레이스 스타일로 유명했다. 실제로 F1 오피셜 유튜브 채널 팟캐스트에서 진행한 인터뷰에 따르면, 알랭 프로스트가 니키라우다의 스타일과 닮게 된건, 1984년 매 라운드마다 1등만을 바라보고 100퍼센트 기량을 발휘하던 본인과 다르게, 포인트를 꾸준히 따내며 안정적으로 레이스를 끝내던 니키에게 챔피언십 선두 자리를 내어주게 된 것이 계기라고 한다.[8]
3. 애증의 라이벌 아일톤 세나
맥라렌 시절 아일톤 세나와 함께. |
1984 모나코 GP의 우천 중단부터 시작된 두 사람의 악연은 1988년에 맥라렌이 로터스 소속이었던 아일톤 세나를 영입하면서 본격적으로 점화됐다. 프로스트와 세나는 F1 역사상 최강의 듀오로서 매스컴의 주목을 받았고, 실제로도 둘은 대단한 활약을 펼쳤다.
철저한 분석과 전략을 선호하는 프로스트의 레이싱 스타일과 저돌적이고 공격적인 세나의 레이싱 스타일은 완전히 정반대였는데[9], 레이싱 스타일만큼 둘의 사이도 악연에 가까웠다. 보통은 뛰어난 1명을 메인 드라이버로 두고 그보다 떨어지는 드라이버가 세컨드 드라이버가 되어 메인 드라이버를 지원해주는 일이 많은데, 이 둘은 둘 다 메인을 맡아도 이상할 게 없는 기량을 가진데다 기량만큼이나 자존심도 강했다. 서로간의 불화가 커져갈 수밖에 없는 상황. 맥라렌 후기엔 팀내에서 파벌이 갈려 서로 제대로 말도 섞지 않는 상황이 됐다고 한다.
두 사람의 불화가 폭발해 대외적으로 드러난 경우가 바로 1989년 일본 그랑프리의 충돌 사고다. 앞서 달리던 프로스트의 인코스를 세나가 파고들었고 프로스트가 방어하며 충돌이 발생했다. 아직까지도 논란이 되는 충돌인데, 세나를 옹호하는 측에선 드론뷰 시점의 영상을 증거로 프로스트의 코스 방어가 이질적으로 느렸다고 주장하고, 프로스트 측은 프로스트의 행동은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세나가 무리하게 추월을 시도해 어쩔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10]
프로스트가 페라리로 이적한 90년 일본 GP에서도 레이스 개시 직후 앞서 달리던 프로스트를 세나가 들이받아 양자가 리타이어하는 사고가 벌어졌다. 포인트에서 세나가 앞서있는 상황에서 프로스트에게도 역전의 가능성이 있었으나 레이스 시작과 동시에 벌어진 리타이어로 인해 세나의 우승이 확정됐다. 충돌의 고의성에 대한 질문에 세나는 계속 당하고만 있진 않겠다며 사실상 고의 충돌을 시인했다. 레이스 전부터 세나는 자신이 폴 포지션을 차지했음에도 노면 상태가 불리하게(프로스트에게 유리하게) 배정됐다며 대놓고 분노를 드러냈다.[11][12]
이후 1991년, 프로스트는 데뷔 후 처음으로 시즌 중 1승도 올리지 못하는 부진 끝에 페라리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는 굴욕을 겪었고[13], 92년 TV 해설가로 데뷔하면서 은퇴 수순을 밟는 듯 했다. 하지만 1993년, 그는 윌리엄스 팀에 입단. 그 시즌에서 7승을 거두며 자신의 통산 네 번째 월드 챔피언에 오르면서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윌리엄스에서 마지막 챔피언이 된 1993년의 모습. |
하지만 윌리엄스가 세나의 영입에 관심을 보인다는 말이 돌자, 프로스트는 은퇴를 선언했다. 애초에 윌리엄스에 입단할 때 프로스트가 내세운 조건 중에 세나를 영입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세나를 영입할 거라면 차라리 이듬해 계약금까지 받고 은퇴하겠다고 한 것이다. 그 정도로 둘은 돌이킬 수 없는 관계였던 것이다.
하지만 승부의 세계에서 물러난 후엔 당시 윌리엄스 소속이던 세나와의 관계도 많이 누그러져서 평범하게 인사도 주고 받았다고 한다. 이몰라에서 롤란드 라첸베르거가 사망했을 때 GDPA의 재결성을 논의하기 위해 세나가 가장 먼저 찾아간 드라이버가 프로스트였다. 또 세나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식에서 관을 운구하며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 한 사람들 중 하나가 프로스트였다.
알랭 프로스트에 대해 자세한 분석이 들어가 있는 내용이다. 주관이 비교적 많이 들어가있는 편이긴 하지만 읽을만한 내용이다. 아일톤 세나가 정말 대단한 드라이버인것도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프로스트가 결코 평가절하당할만한, 그리고 굳이 악역으로서 역할을 떠맡아야할 선수는 아닌 것이 분명하다. 세나보다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도 꽤 있으며, 은근히 확고하게 정립된 F1의 빅5[14], 80년대 이후로 좁힌다면 빅3에도 거의 이견없이 들어가는 위대한 선수다.
세나 | vs | 프로스트 |
17 | 레이스 승리 | 13 |
28 | 퀄리파잉 승리 | 4 |
14 | 그랑프리 우승 | 11 |
26 | 폴 포지션 | 4 |
154 | 포인트 | 186 |
4. 연도별 성적
4.1. 포뮬러 1
시즌 | 팀 | 경기 | 우승 | 폴 포지션 | 패스티스트 랩 | 포디움 | 포인트 | 순위 |
1980 | 말보로 팀 맥라렌 | 13 | 0 | 0 | 0 | 0 | 5 | 16위 |
1981 | 에퀴페 르노 엘프 | 15 | 3 | 2 | 1 | 6 | 43 | 5위 |
1982 | 16 | 2 | 4 | 4 | 4 | 34 | 4위 | |
1983 | 16 | 4 | 2 | 3 | 7 | 57 | 2위 | |
1984 | 맥라렌 F1 팀 | 16 | 7 | 3 | 3 | 9 | 71.5 | 2위 |
1985 | 16 | 5 | 2 | 5 | 11 | 73 | 1위 | |
1986 | 16 | 3 | 1 | 2 | 11 | 72 | 1위 | |
1987 | 16 | 3 | 0 | 2 | 7 | 46 | 4위 | |
1988 | 16 | 7 | 2 | 7 | 14 | 87 | 2위 | |
1989 | 16 | 4 | 2 | 5 | 11 | 76 | 1위 | |
1990 | 스쿠데리아 페라리 | 16 | 5 | 0 | 2 | 9 | 71 | 2위 |
1991 | 14 | 0 | 0 | 1 | 5 | 34 | 5위 | |
1993 | 캐논 윌리엄스 르노 | 16 | 7 | 13 | 6 | 12 | 99 | 1위 |
5. 기타
- 신세기 GPX 사이버 포뮬러의 프란츠 하이넬은 바로 알랭 프로스트+니키 라우다를 모델로 만들어진 캐릭터다.[15]
- 영화 '세나 : F1의 신화'에서 확인된 자료에 의하면 현재 아일톤 세나 재단의 이사라고 한다.
- 1997년 에퀴페 리지에 팀을 인수하여 프로스트 F1 팀의 오너가 되었지만 팀은 이렇다 할 성적을 남기지 못하고 2001년을 끝으로 파산, F1에서 사라지게 된다.
- 1981년에 장남 니콜라를 득남, 1990년에 차남 사샤를 득남했다. 장남 니콜라 프로스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모터 스포츠 커리어를 밟았으나 성적은 영 시원찮은[16]. 니콜라는 현재 DA 레이싱 소속으로 안드로스 트로피에 출전 중이다. 둘째아들 사샤는 현재 패션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으며 8JS 라는 패션 브랜드를 런칭하였다.
- 한 때 알핀 F1 팀의 비상임 이사로 활동하였다. TV 중계를 보면 패독에 있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는데, 2019년 천 번째 그랑프리이기도 했던 중국 그랑프리에서는 마지막 랩에 체커기를 흔들기도 했다.
- 여담으로 현행 포인트 제도로 알랭 프로스트의 커리어를 계산하면 데뷔 시즌과 1991시즌 스쿠데리아 페라리를 제외하고 남은 11시즌은 모두 드라이버 챔피언쉽 순위 4위 이상이며 그 중 6번은 1위로 드라이버 챔피언이 되게 된다. 심지어 현행 포인트 제도대로면 활동한 13시즌 중 팀메이트 상대 전적 13전 13승, 그 중 드라이버 챔피언 팀메이트[17] 상대 전적 7전 7승이라는 놀라운 기록이 나오게 된다.
[1] 대영제국 훈장 4등급 수훈[2] 르노 F1 팀이 2021년부터 르노 자사의 스포츠카 브랜드인 알핀으로 참가함[3] 역대 공동 4위, 제바스티안 페텔과 동률[4] 역대 4위[5] 역대 4위[6] 역대 공동 5위, 짐 클락과 동률[7] 역대 4위[8] 프로스트-세나의 라이벌리는 호사가들에 의해 한 세대 앞의 니키 라우다-제임스 헌트의 관계와 종종 대응되곤 한다. 후술하겠지만 프로스트와 세나의 성격과 경기운영은 서로 정반대인데 이 구도가 라우다-헌트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9] 세나가 화려한 주행으로 가장 많은 폴 포지션과 우승을 차지했지만, 그랑프리 포인트는 차분하게 안정적인 주행을 했던 프로스트가 더 높았다.[10] 이는 또 다른 유명한 논란을 낳았다. 그대로 레이스를 포기한 프로스트와 달리 세나는 다시 레이스를 재개해 극적으로 1위를 차지했지만 레이스 복귀 규정 미준수를 이유로 실격 처리됐다. 세나는 그로 인해 레이스에서 이득을 본 게 없으며 전례를 봐도 실격은 과한 처사라 어필했으나 기각됐다. (재밌는 건 나중에 세나의 레이스 복귀는 문제가 없는 쪽으로 규정이 변경된다.)[11] 세나는 기존부터 프로스트와 국제 자동차 연맹의 수장 발레스트르의 유착 관계를 의심하며 그로 인해 자신이 부당한 처사를 받아왔다는 불만을 표출해왔다.[12] 안 그래도 위험한 드라이버로 낙인 찍혀 라이센스가 취소될뻔한 전적도 있었던 세나는 이 사건으로 인해 큰 비난에 직면하기도 했다.[13] 다른 드라이버도 아니고 프로스트 정도 되는 드라이버라면 드라이버의 기량보다도 차량의 성능 문제가 컸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결국 부진에 책임을 질 사람이 필요한 법이고, 팀과의 관계도 좋지 않고 팀의 차량을 대놓고 비난했던 프로스트가 해고된 것이다. (프로스트는 자신이 몰던 레이싱 카의 핸들링 성능을 무려 '트럭'에 비유했다...)[14] 판지오, 클락, 프로스트, 세나, 슈마허[15] 니키 라우다에 더 가깝다고 말하는 의견이 많다.[16] 니콜라는 2014년 포뮬러 E에서 닉 하이트펠트를 거의 죽일뻔하며 욕을 잔뜩 얻어먹었다.[17] vs 2:0 아일톤 세나, vs 2:0 니키 라우다, vs 1:0 케케 로즈버그, vs 1:0 나이젤 만셀, vs 1:0 데이먼 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