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width=320><tablebordercolor=#e10510><tablebgcolor=#e10510> | 포뮬러 1 월드 챔피언십 역대 드라이버 챔피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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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前 레이싱 드라이버 | ||||
▲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믿었던 파란 의상을 입고. | ||||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 알베르토 아스카리 Alberto Ascari | |||
출생 | 1918년 7월 13일 | |||
이탈리아 왕국 롬바르디아 주 밀라노 | ||||
사망 | 1955년 5월 26일 (향년 36세) | |||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주 몬차 국립 몬차 자동차 경주장 | ||||
국적 | [[이탈리아| ]][[틀:국기| ]][[틀:국기| ]] | |||
소속 | 선수 | 스쿠데리아 페라리 (1950~1953) 오피치네 알피에리 마세라티 (1953) 스쿠데리아 페라리 (1954) 스쿠데리아 란치아 (1954~1955) | ||
정보 더 보기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colbgcolor=#eeeeee,#191919> 출전 횟수 | 33경기 | ||
월드 챔피언 | 2회 (1952, 1953) | |||
그랑프리 우승 | 13회 | |||
포디움 | 17회 | |||
폴 포지션 | 14회 | |||
패스티스트 랩 | 12회 | |||
첫 경기 | 1950년 모나코 그랑프리 | |||
첫 그랑프리 우승 | 1951년 독일 그랑프리 | |||
마지막 그랑프리 우승 | 1953년 스위스 그랑프리 | |||
마지막 경기 | 1955년 모나코 그랑프리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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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 출신의 전 레이싱 드라이버.2. 생애
그의 아버지는 안토니오 아스카리로 역시 뛰어난 레이서였지만, 몽틀레리 서킷에서 알베르토가 단 7살일 적 사고로 사망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본인도 사고로 사망한 게 특이한 점.초반에 모터사이클 레이싱을 하다가, 1940년 밀레 밀리아[1]에 참여하면서 레이싱 씬에 등장한다. 2차대전 후 마세라티, 알파 로메오 등의 팀에서 레이싱을 하다가 1949년 페라리로 이적해 프랜차이즈 선수가 된다. 1950년에는 알파 로메오의 파리나, 1951년에는 후안 마누엘 판지오에 막혀 우승하지 못했지만, 1952년에 출전한 6전 전승, 전경기 패스티스트 랩, 5경기 폴 포지션을 기록하며 압도적인 우승을 차지한다.
1953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시즌 후반기부터 아스카리는 상당한 저항에 봉착하기 시작했다. 시즌 시작부터 3연속 우승(인디 500을 빼면)을 차지했지만 4전 프랑스 GP에서 호손에게 우승을 내준다. 이 경기는 사상 최고의 명경기로 추앙받는 경기로 호손, 판지오, 곤잘레스와 아스카리가 경기 내내 치열한 경쟁을 벌이다 마지막 랩에서야 우승이 결정된 경기.
1954년에는 더 좋은 연봉을 제시한 란치아로 이적했는데 란치아의 차가 시즌 마지막 경기에까지 준비되지 않아 아스카리는 마세라티와 페라리에서 한 두 번씩 경기를 뛰나 별다른 임팩트를 남기지는 못했다. 비토리오 야노가 디자인한 란치아 D50[2]은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야 준비되었는데 아스카리는 그 차를 이끌고 폴을 기록하나 본선에서는 클러치 문제로 리타이어.
1955년 아스카리는 첫 경기인 아르헨티나에서 리타이어하지만 논챔피언십 두 경기에서 우승하며 기세를 높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후 진행된 두번째 경기인 모나코 GP에서도 아스카리는 리타이어하는데, 시케인을 지나려다 실수로 벽을 들이받고 차를 모나코 앞 바다에 쳐박고도 코뼈만 부러진 채 기적적으로 살아나온다. 그리고, 이 경기는 아스카리의 마지막 경기가 되고 만다.
하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난지 4일 후 그는 페라리의 신차 테스팅을 구경하러 몬차에 나타났다가 몇 랩 운전하기 위해 행운의 푸른 헬멧이 아닌 다른 헬멧을 쓰고 차에 오르지만 3랩만에 사고가 났고 아스카리는 즉사한다. 이후 란치아는 F1 출전을 중지하고, 그를 마지막으로 이탈리아인 챔피언은 나오지 않고 있다. 이후 페라리는 이탈리아의 챔피언 드라이버를 찾으려 애타게 노력했지만 그렇게 발굴한 무소, 반디니, 스카피오티, 알보레토 등은 모두 레이싱 중 사망하는 최후를 맞았다.
3. 여담
- 알베르토와 그의 아버지의 죽음에 공통점이 너무나 많다. 아버지와 아들은 각각 13개의 그랑프리를 우승했으며, 1925, 1955년에 36살의 나이로 사망하고, 부상 4일 후 사망했으며, 왼쪽 커브를 돌다가 벽에 충돌했고, 부인과 두명의 자식들을 둔 채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