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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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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97664><colcolor=#FFF>
대월 쩐 왕조 초대 황제
태종 원황제 | 太宗 元皇帝
출생 1218년 4월 9일
대월 리 왕조 해읍 즉묵향
(現 베트남 남딘성 남딘시 록부언동)
사망 1277년 5월 5일 (향년 59세)
대월 쩐 왕조 탕롱 만수궁
(現 베트남 하노이시)
능묘 소릉(昭陵)
재위기간 초대 황제
1226년 1월 10일 ~ 1258년 3월 30일
대월 태상황
1258년 3월 30일 ~ 1277년 5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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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97664><colcolor=#FFF> 성씨 ([ruby(陳, ruby=진)])
보([ruby(蒲, ruby=포)]) → 까인([ruby(煚, ruby=경)])
부모 부황 태조 효황제
모후 국성황후
형제자매 5남 2녀 중 차남
배우자 소성황후 (초혼 및 이혼)
순천황후 (재혼)
자녀 10남 4녀
묘호 태종(太宗)
존호
1226년 헌상 [ 펼치기 · 접기 ]
계천입극지인창효황제
(啓天立極至仁彰孝皇帝)
1237년 헌상 [ 펼치기 · 접기 ]
통천어극융공후덕현공우순성문신무원효황제
(綂天御極隆功厚德顯功佑順聖文神武孝元皇帝)
1258년 헌상 [ 펼치기 · 접기 ]
현요성수태상황제
(顯堯聖壽太上皇帝)
시호 통천어극융공무덕현화우순신문성무원효황제
(統天御極隆功茂德顯和佑順神文聖武元孝皇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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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창업 전후
2.1.1. 집안 내력2.1.2. 목조 쩐낀(진경)의 안남 이주와 리 황실 외척으로의 득세 2.1.3. 여제의 국서가 되다2.1.4. 종숙부 진수도의 도움을 받아 즉위하다 2.1.5. 황후 폐위와 진류의 난
2.2. 용상에 올라 쩐 왕조의 기반을 다지다
2.2.1. 장적 제도(帳籍制度) 정책2.2.2. 징세2.2.3. 교육2.2.4. 관제2.2.5. 기타
2.3. 상황 정치2.4. 대외 관계2.5. 붕어
3. 가계도4. 대중 매체에서5. 참고 항목6. 관련 항목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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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월 제국 진(쩐) 왕조의 초대 황제, 묘호는 태종(太宗). 시호는 통천어극성무원효황제(統天御極聖武元孝皇帝). 휘는 진경(陳煚, Trần Cảnh/쩐까인)[1]이나, 황제로 즉위하기 전의 이름은 진포(陳蒲, Trần Bồ/쩐보)였다.

태조로 추존된 진승(쩐트어)의 아들로, 숙부인 태사 진수도(쩐투도)의 지지로 신생 왕조의 초대 황제에 오르고, 여러 정책을 펼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 이후 대륙을 평정하고 세계 정복의 야욕을 품은 몽골 제국의 침입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2. 생애

2.1. 창업 전후

2.1.1. 집안 내력

初,帝之先世閩人〈或曰桂林人〉有名京者,來居天長即墨鄕。그전에, 황제의 선조는 사람으로〈혹은 계림 사람이라고도 한다.〉경(京, Kinh, 낀)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천장(天長, Thiên Trường, 티엔쯔엉) 즉묵향(hương Tức Mặc, 흐엉뜩막)[2]에 와서 살았다.
- 《대월사기전서》 <본기> 5권 <진기> -태종황제- 조
본디 초대 황제 태종 쩐까인(진경)의 선조는 중국 민(閩, 지금의 푸젠성) 출신이라고 전해진다. 출신만 전해지지 자세한 내력은 전해지지 않는데, 중국의 야사에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2.1.2. 목조 쩐낀(진경)의 안남 이주와 리 황실 외척으로의 득세

그의 고조부 진경[3]은 중국에서 베트남의 묵향(墨鄕) 미록현(美祿縣)으로 이주해 대대로 어업에 종사하며 살았다고 전해진다. 증조부 영조(寧祖) 진흡(쩐헙)에 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조부인 원조 진리(쩐리)에 관해 전해지는 건 그의 대에 어업으로 부를 축적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의 밑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세력을 형성한 원조 쩐리는 노략질을 하기도 했으며 묵향에서 세력을 키웠다.

변방의 오랑캐에 불과했던 쩐씨 가문이 리(이)씨 조정과 가까워진 건 리 왕조 고종의 치세인 1208년, 범유(范猷)가 반란을 일으키자 당시 고종이 태자 리하오삼(이호참)(혜종)과 함께 도망가 원조(쩐리, 진리)의 집에서 잠시 몸을 숨긴 사건 때문이었다. 이때 태자 이호참과 진리의 딸이 맺어졌으며 이 일을 계기로 황제의 사돈이 된 쩐리와 그 가문은 외척이 되어 리씨 황실과 가까워졌다.

또한 태종 진경의 숙부 진사경(陳嗣慶, 쩐뜨카인)은 혜종과 맺어진 여동생이 담태후[4]에게 구박받는 것에 불만을 품고 1213년 군사를 일으켜 담태후를 도망가게 만든 후 태위에 임명되었고, 혜종이 병약하고 무능해 정세에 관여하지 않자 대권은 태위 진사경에게 넘어갔다.

진경의 아버지 태조 진승(쩐트어)은 1223년 진사경의 자리를 계승해 태위를 역임했고, 종숙부[5] 진수도(쩐투도)는 여러 반란을 진압하면서 성 내외의 군대 전체를 통솔했다. 진경은 이런 권신들의 자손으로 태어났고, 출생부터 든든했던 일명 금수저였다.

2.1.3. 여제의 국서가 되다

진경은 1218년 7월 10일 아버지 진승(쩐트어)과 여씨(黎氏) 소생 차남으로 태어났다. 사서에 따르면 진경은 제왕의 용모를 띠었으며 전한 태조 고황제 유방과 닮았다고 전해진다. 진경은 어릴 땐 하급 관직을 지내다가 8세 때, 종숙부 진수도의 도움으로 입궁하여 여제 소황을 모셨는데 소황이 매우 좋아했고, 곧 소황과 혼인했다.

이 혼인 이야기의 다른 상세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이야기에선 혼인을 시킨 명분도 정말 가관인데, 당시 베트남에는 여자가 남자 쪽에 빈랑 열매를 보내 그것을 남자가 받아들이면 혼인이 이뤄지는 풍습이 있었다. 어느 날 소황이 자신과 친구가 된 진경과 같이 놀다가 우연히 빈랑의 열매가 담긴 수건을 던졌는데, 진수도가 그것을 빌미로 둘의 혼인을 추진했다는 것이다.

어쨋든 일개 외척도 아닌 진경이 국서가 된건 진씨 일가의 제위 찬탈을 위한 중요한 첫 바둑돌이 되는 기점이 되었다.

2.1.4. 종숙부 진수도의 도움을 받아 즉위하다

쩐 왕조(이하 진조)의 《월사략》(越史略)에 따르면, 이소황이 남편 진경에게 양위한 건 그녀의 부황 혜종의 뜻이었다고 한다. 상황 혜종은 태위 진승의 아들 진경이 어린 나이에도 풍모를 갖추고 있어 '제세안민'할 것이라 여겨 어린 소황과 혼인시키려 했다.
"以一陰 而 御羣陽 衆所不與 必致悔亡 他見 太尉,陳承, 仲子 某,指陳煚, 年雖沖幼 相貌非常 必能濟世安民 欲以爲子 而 主神器." 仍以昭王配之.
홀로[6][7] 다뤘는데 반드시 뉘우침이 없도록 태위(진승)의 아들 경이 어리지만 용모가 아릅답고 반드시 제세안민을 할 수 있으니 아들삼아 신기[8]를 주관하고자 한다. 그래서 소왕(이소황)과 맺었다.

진승은 듣고 망설여 혜종의 말을 떠볼까 주저했으나 진수도는 혜종의 말을 기회라 여기고 받아들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今以無嗣 欲擇賢而付之 此乃 上王 遠法 堯舜之眞讓 又何疑哉?"
후사가 없어 현명한 이에게 제위를 물려주란 건데, 이는 요순이 행한 유서 깊은 행위인데, 무슨 의심이 있겠나이까?

《대월사기전서》엔 1225년 진경이 소황과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알고 진수도가 제위 찬탈의 쿠데타를 결심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소황은 자신이 여자라 역량이 부족하다는 등의 조칙을 내리고
"今 朕反獨算 惟得陳煚 文質彬彬 誠賢人君子之體 威儀抑抑 有聖神文武之資."
짐은 사리에 어두우나 진경을 얻었으니 (진경은) 자질과 바탕이 어우러지고 성인 및 현인과 군자의 몸이고 위의가 앙앙하고 거룩하고 신령한 문무의 자질이 있다.

남편 진경에게 제위를 양위했다. 이렇게 200여 년 동안 이어진 리 왕조가 멸망했으며, 진경이 황제로 즉위한 후, 개국 공신인 진수도를 '국상보'(國尙父)[9]에 임명하고, 생존해 있던 아버지 진승을 태상황에 봉했다.

2.1.5. 황후 폐위와 진류의 난

한편 폐위된 리조 여제 소황은 신왕조 초대 황제 진경의 황후가 되어 '소성황후'(昭聖皇后)가 되었다. 하지만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1237년 소황의 언니 순천공주(順天公主)를 황후로 삼고, 소황을 공주로 강등시키며 신하인 여보진(黎輔陳)에게 시집보냈다.

본래 태종 진경이 새로 맞이한 순천공주는 본래 태종의 형 진류(陳柳)의 아내였는데[10] 진류는 자신의 아내를 다른 사람도 아닌 동생에게 빼앗기자 격노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태종은 형 진류가 반란을 일으키자 수도를 떠나 안자산(安子山)에 잠시 머물렀다. 이후 난이 진압되자 진수도가 태종을 호위하며 다시 궁궐로 돌아왔다.

자세한 내막은, 결국 힘에 부친 진류가 어부로 가장한 뒤 배를 타고 동생인 태종 진경을 찾아 항복하자 형제가 서로 눈물을 흘렸고, 진수도가 칼을 빼 들어 진류를 죽이려 하자 태종이 진수도를 막고 진류와 화해한 다음 형에게 봉국을 주고, 그를 '안생왕'(安生王)으로 봉했다는 이야기이다.

2.2. 용상에 올라 쩐 왕조의 기반을 다지다

당시 진경은 8세의 어린 아이에 불과했기에 그의 정치에는 아버지 진승과 종숙부 진수도의 정치적 개입(섭정)이 잦았다. 《대월사기전서》에는 태종이 천하를 얻은 이유는 모두 진수도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정도였다.

2.2.1. 장적 제도(帳籍制度) 정책

진경은 선대 리 왕조 때의 장적 제도를 그대로 수용했다. 장적 제도는 나라의 모든 문•무관, 서리, 군사, 16세 이상의 남자, 노쇠한 자, 이주자 및 유랑자가 얼마나 되는지 현지의 관리들이 모두 장적(호적)에 적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장적 기록에 따르면 관직은 자손이 계승할 수 있고, 부유하나 관작이 없는 자는 군 복무를 해야 했다.

2.2.2. 징세

그 외에 생선, 새우, 채소, 과일에 이르기까지 모두 세무를 부여했다.

2.2.3. 교육

2.2.4. 관제

쩐 왕조의 관제는 다음과 같다.
<colbgcolor=#eaeaea,#191919> 무과 삼공 삼소 태위 사마 사도 사공 좌우상국 수상 참지(參知)
문과 안무사 지부 통판 첨판

문관 분야에는 중앙 각 부에 상서-시랑-낭중-원외-어사-지방 안무사(安撫使) 등을 두었다. 이외에도 중앙을 지키는 군대와 지방을 수비하는 군대를 두었다.

쩐 왕조의 관리는 10년을 채울 때마다 1급씩 승진했다.

2.2.5. 기타

법률에 대해선, 1244년 《형률》을 완성했고, 절도범일 경우 손, 발을 자르거나 코끼리를 이용해 압사시키는 엄혹한 형벌을 제정했다.

또한 태종 진경의 치세엔 많은 장정들이 군에 입대했고, 쩐씨 황족도 군대의 통솔령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많은 군 입대 기간 동안 황족인 진국준도 군에 입대했다.

2.3. 상황 정치

태종 진경은 1258년 3월 30일, 황태자 진황에게 양위하고 태상황이 되었다. 다만 정치엔 계속 관여했고 아들 성종을 보좌하며 국정을 이끌어 갔다. 이러한 양위는 쩐 왕조의 역대 군주가 다 행했던 방식인데, 진중김은 태종 진경이 통치 방법을 알려주고, 태상황인 자신이 버젓이 살아있기에 형제들의 다툼을 방지하는 좋은 방법이라 평가했다. 오사련 역시 이 양위 방식에 다음과 같이 글을 남겼다.
自夏禹傳子之後 父崩子繼 兄歿弟承 永爲常法. 陳氏家法 乃異於是 子旣長 卽使承正位 而父退居聖慈宮 以上皇稱 同聽政 其實但傳大器 以定後事 備倉卒爾 事 皆取決於上皇 嗣主 無異於皇太子也.
하나라우임금아들에게 세습한 뒤부터 아비가 죽으면 아들이 잇고 형이 죽으면 아우가 이음이 늘 지켜온 법이다. 진씨는 집안 법은 이것과 다르니 아들이 이미 어른이고 곧 정통성이 있게 제위(帝位)을 세습해도 아비가 성자궁으로[11] 물러나 머무르면서 상황으로 일컫고 (금상과) 같이 정사(政事)를 들으니[12] 그 실상은 다만 제위를 전해서 후사를 정하고 갑작스러움을 대비할 뿐이니[13] 일은 모두 상황이 맡아서 처리하고 금상은 황태자와 다를 바가 없다.
대월사기전서(大越史記全書) Vol 5.』, 「진기(陳紀)」, 오사련(吳士連)

2.4. 대외 관계

쩐 태종의 치세 동안 북쪽에서는 몽골 제국이 영웅 칭기즈 칸 이래의 꾸준한 정복 사업으로 운남의 대리국, 대륙 남부의 한족 제국인 남송까지 무너트렸으며 거리가 비교적 멀던 대월까지 공격하기 시작했다.

2.4.1. 남송

쩐 왕조는 남송에게 우호적인 입장을 취했고, 사신을 파견해 조공을 바치기도 했다. 당시 황제인 송 이종이 태종 진경을 '안남국왕'(安南國王)에 정식 책봉했고 명목상의 관직과 식읍을 하사했다. 또한 태종 진경은 아들에게 양위하겠다는 뜻을 남송에 전하기도 했으며, 몽골의 침입이 한창이자 남송은 대월에게 충분히 방비하라는 명을 내린다.

태종 진경이 아들 황(성종)에게 양위했을 때도 바로 성종을 안남국왕으로 봉했고, 명목상의 식읍을 더해주었다. 남송과 쩐 왕조의 관계는 우호적인 조공-책봉 관계였던 것이다.

2.4.2. 참파

남쪽의 참파에는 리 왕조가 쇠락할 때부터 그 연안을 약탈하는 세력들이 많았다. 태종 진경은 즉위하자 덕으로 그들을 가르치려 했으나 참파가 불복하고 이전에 뺏긴 영토를 수복하려 하자 진경은 우호적인 태도를 접고, 1252년 참파 국왕 자야 파라메스바라바르만 2세의 왕비와 그 신하들을 붙잡고 회군했다.

2.4.3. 몽골 제국의 침입

1253년 몽골 제국은 운남의 대리국을 멸망시키자 이제 그 근처의 대월까지 정복하려는 야욕을 드러냈다. 곧 1258년 몽골의 장수 올량합태(兀良合台)가 군사를 이끌고 대월을 침략했고, 수도 탕롱(현 하노이)이 손쉽게 몽골군에게 함락당했다. 태종 진경은 배를 타고 태위 진일교(陳日皎)에게 어찌하면 좋겠냐고 물어봤는데 일교는 그저 손가락에 물을 묻히고 배에다 '입송'(入宋)이라는 글만 쓸 뿐이었다.

다시 태사 진수도에게 물어보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臣首未至地,陛下無煩他慮」
소인의 머리가 아직 땅에 떨어지지 않았으니 폐하께서 번거롭게 근심할 것은 없사옵니다.

의지가 생긴 태종 진경은 황태자 진황과 직접 전함에 타 몽골 수군과 싸웠고 결국 그들을 패퇴시켰다. 몽골군은 패퇴할 때도 대월의 백성들로부터 공격받았기에 아예 대월땅 자체를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몽골군을 격퇴한 태종은 스스로 '소국'(小國)을 자칭하며 사신을 파견해 제후로써의 겸손함을 나타냈다. 또한 이름을 '광병'(光昺)으로 바꾸고, 그 이름으로 공물을 보내자 몽골 제국도 그를 인정해 태종 진경을 '안남왕'에 책봉했고, 3년마다 한 번씩 공물을 보내게 하는 조공 관계를 갖추도록 했다.

2.5. 붕어

쩐 왕조의 초대 황제였던 태종 진경은 1277년 5월 5일에 만수궁(萬壽宮)에서 60세의 나이로 붕어했다. 묘호는 태종 효황제로 정했고, 능호를 소릉(昭陵)이라 했다. 그가 확립한 몽골과의 조공 관계는 당분간 지켜졌지만 이후 몽골이 두 번째로 침략하자 화친은 깨지고, 쩐조 대월은 세계 제국 몽골과의 존망을 건 대전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3. 가계도

4. 대중 매체에서

징기스칸 4 시나리오 3에 대월의 국왕으로 등장한다. 능력치로 정치 66, 전투 57, 지모 53이며, 내정 특기로는 농업, 상업이 있다. 전투 특기는 없다.

5. 참고 항목

6. 관련 항목

7. 둘러보기

진조의 역대 황제
이조 9대 소황 이불금 초대 태종 진경 2대 성종 진황

[1] 중국의 역사서에는 이름이 진일경(陳日煚, Trần Nhật Cảnh/쩐냣까인) 혹은 진광병(陳光昺, Trần Quang Bính/쩐꽝빈)으로 기록되어 있다.[2] 현 남딘성 미록현(huyện Mỹ Lộc).[3] 陳京. 한국식 발음은 같지만 한자와 베트남어 표기/읽기(쩐낀)는 다르다. 진경이 황제로 즉위한 후, '목조'(穆祖)로 추존했다.[4] 譚太后, 시호는 '안전황후'(安全皇后). 외척 진씨 일족을 굉장히 싫어했고, 그들의 음식에 독을 타는 등 암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하고, 후일 진경이 초대 황제에 즉위하자 이씨 황족 대량 학살 때 같이 처형당했다.[5] 태조 쩐트어와는 사촌 관계였으며 영조 진흡의 손자이자 홍의왕(弘義王)의 아들이었다.[6] 원문은 하나의 그늘(一陰)인데 갓을 음에 비기니 하나의 갓이란 뜻이다.[7] 원문은 하나의 볕(一陽)인데 을 양에 비기니 뭇 신하를 이른다.[8] 삼종신기를 떠올리면 알기 쉽듯이 제위(帝位)의 대유다.[9] 미칭으로 父를 사용시 '부'가 아닌 '보'로 독음한다.[10] 즉 형수였다.[11] 성자는 임금이 베푸는 은혜# 또는 임금이나 후비(后妃)의 어짊을 강조하려고 높여 부르는 말#인데 성자궁은 맥락상 선동어소다.[12] 대리청정이니 수렴청정이니 하는 말에서 알겠지만 옛날에 정치에 쓰던 움직씨는 하다()가 아니라 듣다()였다.[13] 그러니까 황태자로 책봉하는 것만으로 후계 구도가 불안해서 아예 양휘해서 굳힌다는 것이니 인세이와 뜻이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