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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09:26:28

찰스 허큘리스 그린

<colbgcolor=#000038><colcolor=#fff> 찰스 허큘리스 그린
Charles Hercules Green
DSO
파일:1000124966.jpg
출생 1919년 12월 26일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 호주 식민지 뉴사우스웨일스주 그래프턴
사망 1950년 11월 1일 (향년 30세)
대한민국 평안남도 안주시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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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군인
복무 호주군 (1936~1950)
병과 보병
최종 계급 중령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6.25 전쟁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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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주의 군인.

2. 생애

1919년 뉴사우스웨일스주 그래프턴에서 태어났고 스완 크릭에서 자랐다. 아버지의 농장에서 일하면서 크리캣, 승마선수로 활동했다. 1936년 16세때 시간제 지역 민병대 부대인 41대대에 입대했다. 1938년 병장으로 진급했고, 그 후 1939년 3월에 소위로 임관하였다.

2차대전이 발발하고 해외복무에 지원해 영연방 원정군 제6사단 2/2대대 소속으로 중동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사고로 인해 부상당해 1940년 12월부터 1941년 1월까지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발생한 6사단의 첫 번째 전투 작전에 참가하지 못했다. 3월에는 대위로 진급했고 그 다음 달에는 부대가 독일 침공을 격퇴하기 위해 그리스에 파견되었다. 하지만 독일군의 전투력에 압도당해 에게해, 튀르키에를 거쳐 중동으로 다시돌아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대대원들에게 보여준 리더십을 인정받아 빠르게 진급했다.

이후 시리아, 실론에 배치되었다가 장티푸스에 걸려 본국 퀸즐랜드의 교관으로 있었다. 1944년 뉴기니로 배치되었고 1945년 25세의 나이에 중령으로 진급했다. 웨와크, 보람 전투에 참가했다. 전투 초기에는 보급선이 끊임없이 일본군에 의해 습격 당해 식량배급이 어려웠다. 대대는 상당한 사상자를 냈지만 사기와 전투력을 유지하는데 성공하여 전투 기간 동안 모든 목표를 달성했다.

전후 전역해 고향인 그래프턴에서 조합에서 일했고 회계학을 공부했다. 1949년 현역으로 복귀해 참모대학에서 공부를 하던 중 6.25 전쟁이 발발했고 왕립 호주연대 제3대대장으로 참전했다. 이후 영연방 제27여단 소속이 되었고 청천강 전투 당시 영유, 구진, 정주 전투에서 탁월하게 대대를 지휘하며 조선인민군, 중공군과 교전했다.

하지만 1950년 10월 30일 전투임무를 마치고 복귀해 제3대대가 주둔한 정주의 텐트에서 잠시 쉬고 있었는데 중공군 포병이 쏜 포탄이 나무를 맞히고 파편이 숙영지 텐트를 뚫고 들어와 복부를 관통하는 중상을 입었다. 치료를 위해 다음날 안주에 있는 미군 이동외과병원으로 급히 후송되었지만 사망했다.

유해는 재한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되었고 은성훈장을 수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