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1-22 19:33:29

철학은 신학의 시녀다

1. 개요2. 본문3. 의미
3.1. 현대적 변용
4. 여담5. 언어별 표기

[clearfix]

1. 개요

기독교신학을 기반으로 하였던 중세 스콜라 철학의 입장을 대변하는 문구 또는 격언.

중세 시대의 신학자이자 도미니코회 수도자인 성 토마스 아퀴나스명언이라 알려져 있는데, 그 이전에 성 베드로 다미아노[1], 가톨릭 교부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유다교 철학자인 '알렉산드리아의 필론'에게까지 거슬러올라가는 말이다. 실상 토마스 아퀴나스가 자신의 저술에서 이런 말을 인용한 건 딱 한 번뿐이었다.[2] 다만 이 문서에서는 스콜라학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뉘앙스에서 설명할 것이다.

2. 본문

널리 알려져 있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설명을 첨부한다.
거룩한 가르침은 철학적 학문들에서 어떤 것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필연성에서 철학적 학문들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가르침이 전달하는 것들을 더 명백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다. 사실 거룩한 가르침은 자기 원리들을 다른 학문들에서 받는 것이 아니라 직접 하느님으로부터 계시로 받는다. 그러므로 거룩한 가르침은 다른 학문들을 상위의 것으로 여겨 그들에게서 (자기 원리를) 받는 것이 아니라, 하위의 것으로, 즉 하녀로서 사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건축학이 그것 밑에서 종사하는 학문들을 사용하는 것과 같고 또 정치학이 군사학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3] 이렇게 다른 학문들을 사용하는 것도 거룩한 가르침의 결함과 부족성 때문이 아니라 우리 지성의 결함 때문이며, 자연적 이성으로 인식하는 것을 이용하여 이성을 넘어선 것들에 더 쉽게 다가가기 위함이다.
『신학대전』 제1권 제1문제 5절, 두 번째 해답 (Reply to Objection) 中

3. 의미

fidem, si poteris, rationemque conjunge
할 수 있는 한, 신앙을 이성과 결합시키십시오
보에티우스
42. QUAMVIS autem praedicta veritas FIDEI CHRISTIANAE humanae rationis capacitatem excedat, haec tamen quae ratio naturaliter indita habet, huic veritati contraria esse non possunt.
앞서 말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리가 인간 이성의 능력을 넘어선다 할지라도, 자연적으로 주어져 있는 이성이 지니는 [진리]는 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리와 상반될 수 없다.

...46. ...Non igitur contra cognitionem naturalem aliqua opinio vel fides homini a Deo immittitur.
결과적으로 신은 자연적 인식에 상반되는 어떤 견해나 신앙도 인간에게 주입하지 않는다.
-토마스 아퀴나스, 《대이교도대전》Summa Contra Gentiles I,7. n.42, n.46 신창석(역)
고등학교 윤리와 사상 교과서 서양철학사상 파트에 당당하게 중세에는 모든 것이 신학 중심으로 되었기 때문에, 철학은 신학보다 하등하다는 의미라고 해설하고 있고, '그래서 중세는 암흑기'라는 뉘앙스를 풍겨준다.

그러나 최소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맥락에선, 이 문장은 신학 하려면 철학적 소양을 갖추라는 말일 뿐이다. 그리고 철학의 독립성을 부정한 것도 아니며, 신학과 철학 사이에 서열 관계를 설정한 것도 아니다.

오해를 낳는 부분은 시녀(handmaid)라는 용어인데, 현대에 '시녀'라는 단어가 가지는 천한 어감이 이 문구 자체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 하지만 시녀는 당시 전혀 천한 직종이 아니며, 주인보다 한단계 낮을 뿐 충분히 고귀한 계급에서 맡는 직업이었다. 일반적으로 왕실의 시녀는 귀족 자제들이, 귀족 집안의 시녀는 기사 계급이 맡았다. 왕족의 '시녀'들은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하인이 아니라 여성 왕족들을 가까이서 보필하는 이들이었다.

애당초 "중세 유럽에서 시녀의 사회적 지위가 어떠했냐"는 역사학적 탐구를 논외로 하더라도,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는 말은 단지 신학이 철학에게서 도움을 받을 수 있고 또한 받아야 한다는 담백한 서술에 불과하다. 그리고 신학이랑은 분리된 철학의 독립성을 무시하는 발언도 아니다. 신학대전의 논법을 그대로 적용하자면, "수학은 물리학의 시녀", "통계학은 경제학의 시녀" 등 얼마든지 확장해나갈 수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수학의 존재의의가 물리학에 종속되는 것은 아니며, 통계학은 경제학과는 별개로 존중 받을만한 학문인 건 분명하다.

따라서 이 말의 원뜻은 철학은 신학의 '졸개'나 '하수인' 수준 밖에 안되는 무가치한 학문이라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신학의 여러 이론들을 정립해나가는 과정에서 필수불가결한 동반자 정도라는 의미로 봐야 한다. 현대적인 뉘앙스로 되살리자면 "제대로 신학을 공부하고 싶다면 철학적 소양을 갖춰라" 수준의 발언이므로 사실 다른 학문에 비해 철학을 상당히 띄워주는 발언이다.

그렇다고 해도 어쨌거나 시녀는 시녀이니, 결국 토마스는 철학의 독립성을 부정한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철학과 신학의 관계, 이성과 신앙의 관계에 대해서는 분명 중세에 다양한 견해가 있었으며, 이 중에서는 철학의 독립성을 위협하는 견해도 있었던 건 사실이다. 실제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시대에도 철학의 독립성을 위협하는 견해가 존재하였었다. 그러나 최소한 토마스는 이러한 견해를 단호히 반대하였으며, 결과적으로 토마스 아퀴나스가 가톨릭 스콜라학에서 교과서적 지위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4]
여기서 철학이란 토마스가 『대이교도대전』에서 규정하고 이는 바와 같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방식'secundum quod huisusmodi sunt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5] 즉, 불을 오직 불로서 볼 뿐, 하느님의 높으심을 위한 어떤 순수한 상징으로 보지 않는다.
-Josef Pieper[6], 『토마스 아퀴나스 그는 누구인가』THOMAS VON AQUIN: Leben und Werk, 신창석(역), 83쪽
예를 들어 신학이 철학과의 관계를 오해하고 있다거나, 어떤 잘못된 지배 요구를 선포하는 것 등을 쉽게 상상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상상할 수 있는 것만이 아니다. 토마스는 당시의 전환기에 신학의 이러한 부당한 요구에 대항하여 철학의 독립성을 방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예를 들면 당시에는 (지금도 늘 있지만) 철학의 주제는 신학적으로 중대한 것이나 또한 신학에 필요한 것으로 한정시켜야 하며, 신학자는 철학에 대한 자신의 고유한 이해를 최소한 이런 주제의 범위 내에 제한해야 한다는 견해가 있었다. 보나벤투라가 그의 유명한 저서 『신학에로의 기술적 환원에 대하여』De reductione artium ad theologiam에서 구사하고 있는 것도 이와 비슷한 견해다. 토마스는 바로 이러한 견해를 반대하며, 그것도 단순히 철학적 명분을 들어서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유롭고 독립적인 철학을 필요로 하는 신학 자체적 명분을 들어 이를 반대한다.
사람들은 실제적인 진행 방식 속에 말없이 내포되어 있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제를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어떤 신학자도 신학과 철학에 대한 단순한 정의를 근거로 하여, 어떤 철학자이거나 자연적 인식 일체를 신학자에게 중요하다거나 또는 중요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앞세울 수 없을 것이다. 신학자는 가능한 한 모든 것을 필요로 하며, 다른 한편 세계와 인간에 관한 모든 오류는 신학자를 방해할 가능성이 있으며, 나아가서 숙명적 불행을 초래할 수도 있다.[7] 토마스가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학이 현실적 학문 연구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도 이 때문에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진다.[8] 여기서 마지막 순간에 이르기까지 그 자체로 쓰임새가 있는 '성스런 무지無知'sancta rusticitas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예로니무스를 토마스는 바로 이런 관점에서 인용하고 있다.[9] 둘째로, 신학자 역시, 계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묻혀 있는, 결코 완전히 드러나지 않는 그리고 항상 더욱 깊이 파고들 수 있는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진리를 어떤 방법으로 그리고 어떤 방향에서 획득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아무도 미리 말할 수 없다. 이는 아마도 특정한 철학적 또는 학문적 인식에 근거하여 드디어 드러나게 될 것이며, 이러한 인식은 결코 신학에 의해 계획될 수 없을 것이다.
-Josef Pieper, 같은 책 245-246쪽.
애당초 토마스는 '신학'을 '계시'와 동일시하지도 않았다. 토마스에게 있어서 '계시'는 신에게서 온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은 인간의 언어로 하는 것이며, 계시를 해석하려는 인간의 노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신학은 당연히 인간적인 약함을 지닌 학문이었고, 마땅히 인간적인 또다른 학문인 철학과 연대해야 하는 것이며, 결국 신학 역시도 철학에 시중을 들게 된다. 토마스의 관점에서 철학과 신학은 서로를 노비처럼 부리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섬기는 진실한 우정의 관계였다.
그러므로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생각에 의하면, 계시에 대한 해석으로서의 신학은 사실 지혜 가운데서도 드높은 형태의 진혜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학은 신학 자신의 과제를 수행할 수 있기 위해서도 여러 학문과 철학의 시중을 필요로 한다. 신학자 역시 신학을 수행하는 가운데, '우리 이성이 가지고 있는 결함에'propter defectum intellectus nostri 부딪치게 마련이다. 이러한 약점 때문에 신학 역시 독자적으로 연구되고 있는 자연적 인식의 정보를 필요로 한다. 신학은 자연적 인식을 듣고 가르치면서 알게 되는 가운데, 자연적 인식에 시중들게 되며, 또한 그것을 전제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누가 누구에게 시중드는가라는 공격적인 물음은 무의미한 것이 아닌가?
-Josef Pieper, 같은 책 247쪽.

3.1. 현대적 변용

현대적 이념들도 사실 본질적인 형태는 이와 유사하다. 근본적으로 제도나 행동의 옳고 나쁨은 이념의 결정이지만 그 판단 근거는 거의 모든 이념이 나름의 이성적인 근거를 제공한다.

관련 사례를 보자면 우생학이 처음 발로했을 때는 제국주의가 만연하던 시대로, 서구는 비서구에 대한 경멸과 멸시를 가졌고 그에 따라 타 인종에 대한 차별을 과학을 통해 정당화하기 위해 우생학을 만들었다. 현대에는 우생학에 대해 반박하는 '인종적 우열을 가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과학적 해석 역시 우열이란 사회적 해석에 의존한다는 이념적 요인이 지적됨으로써 나올 수 있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도 '공산주의'에 대한 이론적 기초를 담고 있는데 그냥 자본가가 나쁘다는 식으로 감성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 회전', '생산의 무정부성', '노동가치론' 등 다양한 과학적 이론을 토대로 자신의 '이념'을 뒷받침하고 있다. 만약 마르크스가 초기 신학처럼 '감성'적으로 접근하려 했다면 자본가의 착취에 고통받는 노동자들의 일화나 사회 전역에서 벌어지는 노동 천대 현상 등을 열거하면서 자본주의의 나쁨을 비판하려 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당대 사회 문제를 비판한 '민중작가'로 취급을 받았을지는 모르겠으나 독립된 '이념'으로 인정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호주제의 근간이 되는 부계혈통주의의 정당성과 그에 따른 호주제도의 존폐에 관하여 과학자의 의견을 묻는 일은 대단히 이례적이지만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과학은 본질적으로 가치중립적이라서 호주제도와 같이 각종 이해관계로 인해 다분히 감정적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은 사회적 문제에 대해 보다 객관적인 견해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시인 오든(W. H. Auden)도 일찍이 “과학 없이는 평등이라는 개념을 갖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의견서에서 철저하게 과학적인 논리로 남녀평등의 당위성을 논의할 것입니다. 역사적, 사회적, 법률적 분석은 다른 참고인들이 충분히 제공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저는 오로지 과학적인 분석만을 제공하겠습니다. 개인적인 감흥에 치우친 분석이나 구호성 발언은 철저하게 자제할 것입니다. 사회정의가 반드시 투쟁과 선동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과학적 논리에 입각한 올바른 이해와 그에 따른 공정한 타협으로 구축한 평등이 투쟁으로 획득한 평등보다 훨씬 더 확고하다고 믿습니다.
헌법재판소에서 호주제 위헌을 결정한 '2001헌가9' 판결 당시 최재천 교수가 제출했던 의견서 서문
호주제를 비롯한 가부장적 시스템이 필요한 제도인지 아닌지를 논할 때도 생물학적인 근거가 판단에 있어 한축을 담당했다. 과학적 요소만을 가지고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니지만, 충분한 참고가 되었던 만큼 '과학은 이념의 시녀'라는 말은 여기에서도 다시금 증명된 셈이다.

4. 여담

베드로 다미아노는 당시 봇물 터지듯 밀려오던 철학의 물결이 신학의 영역을 무자비하게 침범할 것을 우려하여 이 말을 썼으며,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을 뒷받침하는 학문으로서의 철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 말을 응용했다.[10]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기독교 신학을 적절히 융합시켜 스콜라 철학의 기틀을 공고히 했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를 염두에 두고 신학은 철학[11]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나아갈 수 없다는 의도에서 말한 것이다. 아울러 토마스는 신학으로부터의 철학의 독립성을 강력하게 옹호하였다.

따라서 중세인들이 철학을 하찮게 생각했다고 이해하는 것은 금물이다. 토마스의 설명에서 보듯, 신학과 철학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정치학이 군사학을 사용하는 것과 같은 그런 관계이다. 군사학이 정치학의 시녀라고 해서, 정치학자들이 군사학을 하찮게 생각한 것은 아니듯이, 중세인들이 철학을 홀대한 것은 결코 아니다. 특히 신학과 철학의 관계에 대한 스콜라학의 여러 의견들 중에서도, 토마스는 특히 철학의 그 자체로서의 가치를 강력히 옹호한 학자에 속한다.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는 말을 현대적으로 치환해서 말하자면, 물리학 교수가 학생들에게 "수학적 소양을 갖추라"고 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그 누구도 이 발언을 하는 물리학 교수가 수학을 폄하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며, 수학의 독립성을 훼손핬다고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나중에 칸트가 '영구 평화론'에서 살짝 바꾸어서 사용하기도 하였다. 칸트는 여기에서 사람들은 철학이 신학과 의학, 법학[12]의 하인인 것은 알지만, 그 하인이 횃불을 들고 그 앞길을 달리고 있음을 보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철학이 더 높은 위치에 있음을 강조했다.

5. 언어별 표기

라틴어 Philosophia ancilla theologiae.
프랑스어 Philosophie servante de la théologie.
영어 Philosophy is the handmaid of theology.

[1] 라틴어 표기 Sanctus Petrus Damiani[2] 하단에 인용된 『신학대전』이 그 부분이다.[3] 중세 학문 구분법에 따르면, 건축학과 정치학은 상위 학문에 속한다.[4] 물론 이게 토미즘 외의 견해들을 모조리 이단으로 본다는 건 아니다. 토미즘 외에도 가톨릭에서는 스콜라학의 학문적 다원성을 인정한다. 다만 토미즘이 스콜라학의 '유일하게 강제된' 해석은 아니더라도 '교과서적' 해석인 건 분명하다.[5] (책 속 주석)『대이교도대전』 II,4(1).[6] 1904-1997. 독일의 철학자이자 스콜라학 연구자. 20세기에 토마스 아퀴나스 사상을 재조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7] (책 속 주석)『대이교도대전』 II,4. 참조.[8] (책 속 주석)Contra impugn. 3,4; Nr.400.[9] (책 속 주석) 같은 책, 3,4; Nr.399.[10] 이 설명에서 알 수 있듯 어디까지나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며, 신학에 앞선다는 의미는 아니다.[11] 이 당시의 주된 철학은 당연히 이븐 루시드가 전파한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이다.[12] 칸트 시대에는 철학을 교양학부에서 다루고, 이 세 학문이 상위학부에 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