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a48252> 당나라의 대신 崔湜 | 최식 | |
성 | 최(崔) |
이름 | 식(湜) |
자 | 징란(澄瀾) |
부친 | 최읍(崔挹) |
조부 | 최인사(崔仁師) |
생몰 | 671년 ~ 713년 |
출신 | 정주(鄭州) 안희현(安喜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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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당나라의 인물로 중종 재위기의 재상이었으며, 최인사의 손자이다. 자는 징란(澄瀾).2. 생애
671년에 최읍의 아들로 태어났다. 최식은 문장으로 이름을 알렸고 진사에 급제하여 좌보궐이 되었고, 삼교주영의 편찬에 참여한 뒤 전중시어사가 되었다.705년 신룡정변 이후 고공원외랑이 되었다. 당시 환언범과 경휘를 비롯한 신룡정변의 공신들이 정권을 잡고 있었지만 도리어 무삼사에게 참소를 당할 것을 염려하여 최식에게 몰래 무삼사를 감시하도록 이야기했다. 하지만 중종이 환언범 일파를 멀리하고 무삼사를 점점 총애하자, 최식은 무삼사에게 붙어서 환언범 등 공신들의 계획을 무삼사에게 알렸으며, 이때부터 무삼사 파벌의 일원이 되었다.
706년, 최식은 환언범 일파를 조정에서 쫓아낸 뒤에 중서사인이 되었다. 환언범 일파가 영남으로 유배될 때 최식은 무삼사에게 환언범 일파를 제거하여 후환을 없애야 한다고 조언한다. 무삼사가 그에 적합한 인물을 묻자 최식은 주이정이 이전에 환언범 일파로부터 미움을 사서 시어사에서 가주(嘉州) 사마(司馬)로 좌천되었던 일을 언급하며 주이정을 적임자로 추천한다. 과연 주이정은 환언범 일파를 제거하고 어사중승으로 임명되었다.
708년, 최식은 병부시랑이 되었는데 당시 최식의 아버지인 최읍이 예부시랑으로 있었기에 부자가 모두 상서성의 시랑이 되었다. 또한 최식은 상관완아가 정권에 관여하기 시작하자 상관완아에게도 붙었고 중종의 신임을 얻어 이부시랑, 이윽고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로 전임되었다.
709년에는 정음(鄭愔)과 함께 관리의 선발과 임명을 맡았는데, 이때 뇌물을 받고 인재를 무질서하게 선발했다가 이상은으로부터 탄핵을 받아 강주(江州) 사마로 좌천되었다. 하지만 상관소용과 안락공주가 최식을 보호하면서 최식은 다시 양주(襄州) 자사가 되었고 뒤에 입조하여 상서좌승이 되었다.
710년, 중종이 사망하고 위황후가 섭정을 맡으면서 최식은 이부시랑, 동중서문하삼품이 되었다. 하지만 같은 해에 임치왕 이융기가 주도한 당륭정변으로 위황후 일파가 주벌되고 이융기의 아버지인 예종이 복위하면서 최식은 화주(華州) 자사로 전출되었다가 태자첨사로 제수되었다.
최식은 이전에 상주(商州)의 수륙 교통을 조정과 잇고자 남산(南山)에 새로운 도로를 깔고 옛 도로를 금지하였는데, 이때의 공을 인정받아 은청광록대부가 더해졌다. 이후 태평공주의 천거를 받아 다시 동중서문하삼품이 되면서 이번에는 태평공주 일파의 일원이 되었다.
712년, 예종이 이융기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태상황이 되면서 이융기가 황제로 즉위하니, 이가 제6대 황제인 현종이다. 최식은 현종에 의해 중서령으로 임명되었고 유유구와 권력을 다투었다. 최식은 유유구를 모함하여 영표(嶺表)로 유배보낸 뒤 주이정을 이용해 유유구를 제거하려고 했지만 계주 도독 왕준이 유유구를 보호하며 보내주지 않아서 유유구를 제거하지는 못한다. 이후 아버지인 최읍이 연로하여 벼슬에서 물러났는데, 최읍은 뇌물을 탐하는 성격으로 남의 청탁을 받아 여러 번 최식의 업무에 간섭했고 최식은 아버지의 간섭을 거절했다.
현종은 최식을 자신의 심복으로 삼으려고 했지만 최식은 이미 태평공주 일파의 일원이었다. 최식의 문객인 진진로(陳振鷺)가 해구부(海鷗賦)를 바치며 최식에게 충고를 할때 최식은 겉으로는 진진로를 칭찬했지만 속으로는 기뻐하지 않았다. 태평공주가 현종을 제거하려고 할 때 최식은 궁녀 원씨(元氏)와 함께 독을 태워서 현종을 독살하려고 했지만 실패로 끝났고, 선천정변 때 최식의 아우인 최척(崔滌)이 최식에게 만약 현종이 묻는 바가 있다면 숨기는 바가 없어야 한다고 충고했지만 최식은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