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fff> 카가와 노부유키 香川伸行 | Nobuyuki Kagawa | |
출생 | 1961년 12월 19일 |
오사카부 오사카시 니시나리구 | |
사망 | 2014년 9월 26일 (향년 52세) |
국적 | 일본 |
포지션 | 포수, 내야수 |
투타 | 우투우타 |
신체조건 | 170cm / 96kg[1] |
프로입단 | 1980년 드래프트 2순위 난카이 호크스 지명 |
소속팀 | 난카이 -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1980~19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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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전 야구선수, 해설가. 뚱뚱한 체형으로 유명한 선수다.2. 경력
초등학생 때부터 이미 너무 뚱뚱해서 어머니가 살 좀 빼라고 야구를 시켰다고 한다. 여튼 그렇게 야구를 시작했는데 정작 살은 빠지지 않았고, 오히려 뚱뚱한 체격에서 나오는 파워로 고시엔 스타가 되었다. 나미쇼 고등학교 3학년이던 79년 우시지마 가즈히코와[2] 함께 배터리를 이루어 고시엔 봄여름 연속 진출을 달성했지만 우승은 못 했다. 개인통산 고시엔 5홈런을 기록했는데, 이후 기요하라 가즈히로가 경신하기 전까지 최고 기록.여담으로 고시엔이라는 큰 무대에서 긴장은 커녕 태평하게 이닝 사이사이마다 간식을 먹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혀서 소소한 재미를 주기도 했다. 여튼 이렇게 고교야구 최고의 파워히터로 인정을 받았고, 고교졸업후 드래프트 2위로 난카이 호크스에 입단한다. 기대의 신인답게 데뷔 1년차에 8홈런을 쳤으며, 뚱뚱한 체형으로 인해 만화 도카벤의 덩치큰 4번타자 주인공인 야마다 타로같다 하여 도카벤이라는 별명이 붙으며 사랑받았다.
1981년 시즌을 앞두고 외국인 돈 블레이저 감독이 부임했는데[3], 돈 감독은 카가와의 재능은 인정했으나 너무 살이 쪄서 이대로라면 오래 못 간다고 판단, 다이어트를 명령했다. 비만의 원인은 탄산음료 중독으로 콜라 때문이라는 것을 간파했고, 제로 콜라만을 마실 것을 명령했으나 80년대 일본에는 다이어트 콜라가 수입되지 않았고[4] 결국 카가와의 살은 빠지지 않았다. 당시 하루 10병이 넘게 콜라를 마셔댔다고 한다.
어쨌든 간에 1983년에는 인생 최고의 성적을 기록했다. 포수로서 .313의 타율에 15홈런 61타점으로 올스타, 베스트나인을 수상하며 커리어하이를 썼고, TV에도 자주 출연하며 인기가 많았다. 옛날 한국으로 치면 삼성의 찰스 스미스처럼 뚱뚱한 몸매로 뒤뚱뒤뚱 뛰어다니는 것이 컬트적인 인기를 얻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음 해부터 지나친 비만과 연습 부족으로 몰락하기 시작했다. 당시 난카이 호크스는 한신 타이거스, 긴테츠 버팔로즈, 한큐 브레이브스 등 구단이 포화 상태였던 오사카에 위치한 데다가 성적까지 나빠서 인기가 없는 구단이었는데, 카가와는 저 푸근한 체형으로 인해 난카이의 거의 유일한 인기 선수여서 덕분에 구단 행사나 광고, TV쇼에 불려다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연습에 할애할 시간도 부족했고, 구단 밖으로 자주 돌다 보니 식단을 관리해줄 사람도 없어 식단 관리가 전혀 되지 않아서 130~150㎏가까이까지 체중이 늘었다. 키는 고작 170cm인데 130kg의 엄청난 고도비만으로, 살이 쪄도 너무 쪄서 제대로 방망이를 돌리기조차 힘들었던 것. 이 신장과 체중은 김정은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며, 한국 신검 기준으로 170에 130킬로면 군대도 면제인 수준의 초고도비만이다.
결국 이후 부진을 거듭하다 10년차인 1989년, 28세에 현역에서 은퇴한다. 당시로서도 많이 이른 은퇴다.
이후로는 야구 해설과 이런저런 사업을 했는데, 사업은 다 말아먹었고 결국 오사카에서 이자카야를 경영하며 조용히 여생을 보내게 된다. 그렇게 지내다가 어느날 가게를 정리하다 쓰러지게 되었고, 급성 신부전증을 진단받게 된다. 이미 40대에 당뇨를 진단받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비만이 병을 불러온 셈. 이후 체력과 투병 문제로 가게를 정리하고 일주일에 3번 투석을 받는 절망적인 상황에도 포기하지 않았고 일자리를 찾으며, 정계 진출까지도 고민했을 정도로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살았지만 결국 투병 끝에 급성 심근경색으로 2014년 9월 26일 세상을 떠나게 된다. 향년 52세.[5]
3. 기타
저 뚱뚱한 체형에도 불구하고 여자에게 인기가 제법 있었는지, 결혼을 3번을 했다. 3번째 부인은 은퇴 후에 만났는데, 고교시절 첫사랑이었다고.별명은 도카벤 이외에도 무슨 인형탈 쓰고 있는 거 아니냐고 키구루미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여튼 뚱뚱한 체격으로 여러 사람에게 웃음을 줬던 덕에 방송에도 자주 나오고 인기가 많았던 선수. 도카벤이라는 별명이 가장 유명해서, 은퇴후에는 우동 사업을 할 때 라이센스를 얻어서 '도카벤 우동' 이라는 이름의 우동집을 차리기도 했다.
그는 생전에 야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인생 최고의 스승입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듯이,
겸손할 줄 알아야 한다고 이야기 해주는 것, 그것이 내게 '야구'입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듯이,
겸손할 줄 알아야 한다고 이야기 해주는 것, 그것이 내게 '야구'입니다.
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1] 프로 입단시의 체중. 하술하겠지만 130㎏까지 불어났다.[2] 前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감독. 부임 첫해인 2005년 팀을 3위로 이끌었지만(그리고 이것이 2015년까지의 마지막 A클래스였다!) 이듬해엔 도로 꼴찌로 처박으면서 해임당했다.[3] 일본에서 선수로 3년, 감독과 코치로 13년을 보냈을 정도로 일본 야구계와 연이 깊었던 사람이다.(다만 감독으로는 4-5-5-6위를 기록하며 실패했다.) 메이저리그에서도 통산 1300안타를 넘길 정도로 나름 수준급 선수였다. 2005년 작고.[4] 사족으로 돈 블레이저 감독은 1981년 기준 일본 생활을 무려 15년째 해 오고 있었다. 정작 그렇게나 오래 일본에 살면서도 일본에 제로 콜라가 없다는 것을 몰랐는지 제로 콜라를 마시라고 지시했다. 이 사실을 알면서도 콜라를 끊으란 의미로 한 것인지, 평소에 본인이 콜라에 관심이 없어서 정말로 몰랐는지는 의문이다.[5] 투석을 하게 되기 전까지는 아예 병원도 안 갈 정도로 당뇨 관리를 전혀 안 했다고 한다. 식단 관리도 잘 안 한 사람이 약도 안 먹으니 몸이 빨리 맛갈 수밖에 없다. 3번째 부인과 결혼한 후 집에서 식단 관리를 한 것이 유일한 관리였으니 수명을 한 10-20년 더 까먹은 셈. 그리고 급성 심근경색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 치명적인 합병증이 오거나 시한부 판정을 받은 것은 아녔다. 애초에 죽는 순간까지도 주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찾는 연락을 돌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