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의 시가지
내전 당시 국경 너머 터키에서 바라본 카미실리
1. 개요
아랍어 ٱلْقَامِشْلِي쿠르드어 قامشلۆ
시리아어 ܒܝܬ ܙܠܝ̈ܢ (베트 잘린)
튀르키예어 Kamışlı (카므시을르)
영어 Qamishli
시리아 동북부의 도시. 지명은 터키어와 이 지역에 살았던 튀르크멘인의 방언으로 갈대(kamış, qamış)가 있는 땅을 의미한다. 쿠르드어 발음인 카미쉴로, 카미실로 등으로도 표기된다. 하사카에서 동북쪽으로 60km 떨어진 카부르 강의 지류 자그자그 강 양안에 자리한다. 터키와의 국경도시로, 건너편의 누사이빈 (니시비스)와 마주하고 있다. 시리아 내전 이전 인구는 25만으로, 시리아에서 8번째로 큰 도시였다. 20세기 초엽 이스탄불 ~ 바그다드 철도 건설과 함께 성장한 도시로, 터키-이라크 노선의 중간 거점이자 시리아 철도의 동북쪽 종착지이다. 시가지 서남쪽에는 카미실리 국제 공항이 자리한다. 도심 대부분은 쿠르드 주도 로자바 연방의 수중에 있으나 공항과 외곽 지역 및 농경지는 시리아 정부군의 수중에 있어 복잡한 형국이나, IS 및 튀르키예라는 공통의 적 하에 양측이 협력하고 있다.
본래 아시리아 인이 주도하여 개발되었고, 현재까지도 여러 성당이 있다. 비록 60년대 이후 시리아 정부의 탄압으로 다수가 해외로 이주했으나 21세기 전까지는 아시리아/아르메니아 기독교도들의 크리스마스 행사, 쿠르드계의 노루즈 & 카브 니산 축제가 성대하게 열리는 등 다민족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도시였다. 다만 2004년 카미실리 봉기 후 쿠르드 / 아랍계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내전 발발 후 2012년 인민방위대와 정부군이 시가지를 양분하였다. 카미실리는 북부 시리아도시들 중 다에시 세력권에서 가장 멀어 그의 침공을 당하지 않았기에 2014년 설립된 로자바 연방의 중심지가 되었다. 다만 2019년 터키 쿠르드 침공 이후 로자바의 중심지는 터키와의 국경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진 아인 이사로 이전되었다.
2. 역사
1960년대의 카미실리
본래 누사이빈의 외곽 지역이었으나 1920년경 오스만 제국의 학살을 피해 이주한 아시리아인들이 정착하며 도시가 형성되었다. 그들은 시리아어로 '갈대 집'이란 뜻인 베트 잘린이라 불렀으나, 얼마후 유입된 쿠르드인들이 인구상 우위를 차지한 후 쿠르드어로 같은 의미를 지닌 카미실로가 보편화되었다. 오스만-독일 당국의 노력에도 1918년 기준 누사이빈에서 멈춰 있던 바그다드 철도는 프랑스 당국의 관할 하에 공사가 재개되어 1926년 카미실로 역이 세워졌고, 이로써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1940년, 이라크 키르쿠크 부분을 마지막으로 바그다드 철도가 완공되자 카미실리는 그 중간 기착지로써 중시되었다. 한편 도시 개발을 주도한 것은 디야르바크르 출신의 아시리아인 난민 마수드 아스파르와 이복형제가 세운 아스파르 & 나지르 회사로, 밀 판매로 축적한 자금으로 학교 / 병원 / 교회 등의 기간 시설을 세웠다. 또한 비슷한 처지이던 아르메니아인과 유대인 역시 정착하였다.
이후로도 카미실리 주민의 대부분은 아시리아 인이었다. 1939년 프랑스 당국에 의하면 3만이 좀 넘는 인구는 아시리아인 1만 4천, 아랍인 8천, 쿠르드인 6천, 아르메니아인 3천 5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50년대 들어 아시리아계는 주민의 2/3을 이루었다. 하지만 60-70년대 바트당 정권은 사회주의 경제란 명목 하에 아시리아인 소유의 농장, 토지, 건물 등의 부동 자산을 압수하였다. 이로써 많은 아시리아 인이 해외로 망명하였고, 80년대 들어서는 쿠르드계가 다수가 되었다. 다만 시리아 정부는 인구 집계에 있어 쿠르드인을 다수 제외시켜 시민권이 없이 '비국민' 취급받는 주민이 늘었고, 이로써 반정부 기류가 팽배해졌다. 또한 아사드 정권은 카미실리 등 국경 도시들에 아랍인들을 이주시켰고, 이로써 민족 갈등은 점차 첨예해졌다.
2.1. 반정부 도시
2011년 반정부 시위에 나선 쿠르드 / 아시리아 / 아랍 주민들
한편 이라크 전쟁 이후 이라크 쿠르디스탄이 미국으로부터 자치정부로 인정을 받자 시리아의 쿠르드인 역시 고무되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2004년 3월, 현지 쿠르드 팀과 데이르에조르의 아랍 팀간의 축구 경기가 카미실리 구장에서 열렸다. 아랍계 팬들이 버스를 타고 시내를 달리며 이라크의 쿠르드 지도자들을 모욕하고 쿠르드 인 18만을 학살한 전범 사담 후세인의 사진을 내걸자, 분노한 쿠르드계 주민들은 '부시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연호하며 응수하였다. 이에
이에 군대가 투입되어 진압하는 과정에서 30여명이 사망하고 백여명이 부상당했으며 2천여명이 체포되었다. 얼마 후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이 '국가 통합'차 방문하여 312명을 석방했지만 수천명의 쿠르드 인들이 이라크 쿠르디스탄으로 망명하였고, 다후크에 세워진 난민촌에 수용되었다. 이들은 내전기에 군사 집단화되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2004년 봉기일은 쿠르드 순교자의 날로 지정되어 기념되었고, 매년 긴장감이 흘렀다. 2005년 6월 셰이크 카즈나위 암살에 항거하는 시위가 있었고, 2008년 3월에는 노루즈 행사 중 정부군이 발포해 쿠르드인 3명이 죽었다. 2011년 시리아 민주화 운동과 함께 반정부 기류는 폭발하여 그해 3월 순교자의 날에 수천명이 시위에 나섰고, 점차 쿠르드 민병대가 조직되었다.
2.2. 시리아 내전
2019년 7월, 성모 마리아 성당에 대한 다에시의 차량 폭탄 테러. 12명이 부상을 입었다.
2021년 공세로 쿠르드 측이 얻은 영토 (보라색)
2012년 내전의 발발과 함께 정부군이 철수하며 다른 시리아 동북부와 마찬가지로 일대는 쿠르드 인민방위대의 영토가 되었고, 2014년 로자바 연방의 설립 후 그 최대 도시이자 중심지가 되었다. 다만 시가지 중부 ~ 남부와 공항 일대에는 여전히 정부군이 주둔하였고, 2015년 말부터 소규모 충돌이 벌어졌다. 2016년 1월, 친정부 세력인 아시리아계 수토로 민병대와 인민방위대가 전투를 벌여 20여명이 사망하였다. 그해 4월에는 전투 규모가 확대되어 정부군과 쿠르드군 양측 합쳐 40여명이 사망하였고, 후자는 동남쪽의 알라야 감옥을 점령하였다.
도중 다에시의 테러로 20여 민간인이 사망하였고, 7월에는 재차 테러가 터져 민간인과 군인 합쳐 60여명이 사망하였다. 2018년 9월에는 정부군 검문소를 쿠르드 군이 공격해 양측 합쳐 20여명이 전사하였다. 2019년 터키 쿠르드 침공 시에 하사카와 함께 카미실리에도 러시아-미군이 주둔하며 양측의 충돌이 억제되는 하였으나 2021년 1월 하사카와 함께 쿠르드 군이 정부군 구역을 포위했다가 협상으로 철수하였다. 그해 4월에는 쿠르드 아사이쉬 군이 남부 타이 구의 친정부 민병대를 축출하며 도시 대부분이 쿠르드 지배 하에 놓였다.
3. 교통
카미실리에서 교차하는 시리아, 터키, 이라크 3방면 철도
카미실리 역은 터키에서 이어진 바그다드 철도가 이라크의 모술로 향하며 수십 키로 가량 지나는 시리아 동북부의 첫 역으로써 1926년에 세워졌다. 시리아 독립 후 카미실리 일대에서 유전이 발견되자 1976년 라타키아 ~ 알레포 ~ 라카 ~ 데이르에조르 ~ 하사카 ~ 카미실리까지 이어지는 철도가 개통하였다. 이로써 카미실리는 시리아 주요부, 터키, 이라크의 철도가 모이는 교통의 요지가 되어 발전하였다. 카미실리에는 시가지 북쪽과 동쪽에 역이 2개 있는데, 북역이 터키-이라크 국제 철도역이고 동역이 시리아 국내 철도역이다. 시리아 내전 이후 철도 운송은 중단된 상태이나 2022년 들어 로자바와 악화된 터키 방면 대신 이라크 방면의 열차 운행 재개가 논의되고 있다. 2011년에는 카미실리 국제 공항이 개항했으나 하필이면 이듬해 시리아 내전이 터지고 2015년 들어 카미실리에서도 전투가 벌어지며 민간 항공기 운영은 중단된 상태이다.
4. 갤러리
시가지 전경
시내에 주둔하는 시리아 정부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