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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30 22:50:39

컴퍼니 교회 화재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컴퍼니 성당 화재
Church of the Company Fire
Incendio de la Iglesia de la Compañía
파일:350px-Incendio_de_la_Iglesia_de_la_Compañía_(cropped).jpg
<colbgcolor=#bc002d> 발생일 1863년 12월 8일 오후 7시
사고일로부터 [dday(1863-12-08)]일
발생위치 칠레 산티아고
유형 화재
원인 기름 램프 발화
인명피해 <colbgcolor=#bc002d> 사망 2500~3000
1. 개요2. 상세
2.1. 발단2.2. 화재 발생2.3. 구출 시도2.4. 피해 규모
3. 사고이후
3.1. 사후수습3.2. 원인 규명3.3. 논란3.4. 의용소방대 창설
4. 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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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63년 12월 8일 칠레 산티아고시의 컴퍼니 성당에서 발생한 화재 사고.

칠레 근현대사 사상최악의 사고로 꼽히는 사고로, 추정 사망자 수만 2500명 이상으로 단일 건물화재 사고 중에서는 인류역사상 가장 피해자 수가 많은 사고다.

2. 상세

2.1. 발단

컴퍼니 성당(Iglesia de la Compañía de Jesús)는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시의 아르마스 광장에 있었던 예수회 교회다. 19세기 산티아고에서 가장 사람이 많은 성당 중 하나였으며, 주로 귀족 같은 상류층들이 다니는 곳이었다.1855년 사제 후안 우가르테는 "마리아의 딸들"이라는 엘리트 귀족여성들의 모임을 조직해서 여성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했다.

이들은 매년 12월 8일에 성모 마리아 대축일[1]마다 크게 기념하는 관례가 있었다. 성당는 이전을 뛰어넘는 축일을 만들기 위해 전례 없는 규모의 장식을 동원했고, 수백 개의 화려한 태피스트리와 화환, 풍선, 리본, 거대 동상, 그리고 수천 개의 촛불과 파라핀 기름 램프가 장식되었다. 대주교가 지나칠 정도의 장식들에 우려를 표명할 정도였다.

12월 8일 당일 성당은 온종일 수천 명의 신도들로 가득했다. 모든 좌석과 통로가 꽉 차 있었고 해 질 무렵에는 더 많은 신도들이 성당로 찾아왔다. 여성 신도들을 위한 미사였기 때문에 남성은 거의 없었고 거의 대부분이 여성 신도와 어린아이들이었다. 당시 성당에는 의자나 벤치가 없었고 여성들은 모두 양탄자에 앉아 기도를 드렸다.

2.2. 화재 발생

저녁 7시 45분경, 해가 저물면서 조수들은 교회에 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이때 주 제단 꼭대기에 있던 기름 램프 하나가 떨어지면서 불이 베일에 옮겨 붙었다. 조수들은 판초로 불을 끄려고 했지만 인화성 액체가 천에 스며들어서 오히려 더 위험해졌을 뿐이었고 불길은 화환을 타고 나무로 된 천장까지 순식간에 번지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강풍 때문에 문이 열리면서 연단에서 촛불이 떨어져 불이 더 거세지고, 천장이 불타면서 기름 램프들을 매달아둔 줄이 타버려 램프가 신도들에게 떨어져 폭발하는 아수라장이 벌어졌다.

신도들은 탈출하려고 했으나 더 많은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해 사이드 도어가 닫혀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유일하게 남은 출입구인 교회 정문을 향해 뛰어갔다. 수천 명이 한꺼번에 도망치는 아수라장 속에 천장에서는 불타는 목재와 램프들이 떨어지고 교회 안은 연기로 가득 차 앞이 안 보일 지경이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질식사하거나 불타 죽었다. 이런 최악의 상황을 결정적으로 악화시킨 요인은 다름 아닌 드레스였다. 당시 칠레 여성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옷은 후프를 여러 개 달아 치맛단을 부풀린 후프 스커트였는데, 당연히 달리기에는 굉장히 불편한 옷이라 달리다 쓰러지고 다른 사람이 거기에 또 걸려서 넘어지고.... 하는 상황이 반복된 것이다.

무엇보다 약 3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탈출구 하나에 몰려들었기 때문에 정문 쪽은 지옥도 그 자체였다. 점점 탈출하려다 질식사했거나 압사당한 사람들의 시체가 쌓이기 시작했고 생존자들은 시체들 위로 기어올라 탈출하려고 애써야 했다. 결국 200여 구가 넘는 시체더미에 정문 쪽이 완전히 막혀버리는 끔찍한 상황이 일어났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아치 문 아래에 1~2m 높이의 시체가 쌓여있었으며 그 더미 사이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2] 이후에 정문 양 옆의 사이드 도어를 모두 여는데 성공했지만 마찬가지 이유로 막히게 되었다.[3]

2.3. 구출 시도

몇 안 되는 남성들은 다른 공간에 있었고 탈출에 성공했지만, 그 중 대부분은 돌아와 탈출구를 만들고 옆문을 열기 위해 애를 썼다. 또한 수도의 많은 시민들이 화재를 보고 달려와 구조에 동참했다. 당시 구조를 도운 사람들 가운데는 유명 사업가나 미국장관 등의 유명인사들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구원의 손을 내뻗으면 수십 명이 동시에 매달리는 아수라장 안에서 구출은 절대 쉽지 않았다.

당시 기사에는 열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한 명이라도 더 구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수많은 시민들의 사례가 실려있다. 한 농부는 말을 타고 올가미를 교회 안으로 던져 몇 명을 끌어냈지만 안타깝게도 3번째 시도만에 줄이 끊어져 중단되었다. 또 어떤 시민은 오른쪽 문의 벽화를 파괴해 좁은 더미 안에서 4~5명의 여성을 구해냈다. 다른 시민들은 성벽을 부수고 구멍을 뚫어 몇 명의 사람들을 구해냈다.

하지만 개인적인 노력에는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었고 불은 더 이상 아무도 접근할 수 없을 정도로 타올랐다. 많은 구조대원이 현장에서 사망했다. 교회 근처에는 국립도서관 등 주요 건물이 많았는데 다른 건물까지 번지지 않은 거의 기적적인 일이었다고 한다.

결국 오후 8시경 종탑과 시계탑이 무너졌고, 오후 10시경 교회 안쪽은 완전히 무너졌다.

당시 16살의 소년이 어머니의 시체를 가져오기 위해 자루를 들고 아직 불길이 남아있는 교회에 몰래 들어갔다가 걸렸다는 안타까운 기록도 남아있다.

2.4. 피해 규모

광장은 불타는 교회를 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사람들로 가득했으며, 수백 명의 남편과 아버지들은 생존자를 확인하러 병원으로 달려갔다. 인근 병원은 만원이였고 구조된 사람들마저 대부분은 심각한 화상 때문에 사망했다.

약 10만 명의 주민이 살고 있던 수도는 이날 인구의 2~3%가 화재로 사망했다. 교회에 있던 인원 약 3000명 중 생존자는 500명 정도 뿐이었다.

이 사고로 산티아고에 거주 중인 여성 중 1/27이 사망했고, 15~20세 사이의 젊은층의 수가 가장 많았다. 주로 상류층들이 다니던 교회였기 때문에 산티아고에서 이름 있는 귀족 가문의 이름은 거의 예외 없이 사망자 명단에 있었다. 또한 사망자의 3분의 2는 하인이었는데, 이들은 예배드릴 시간이 저녁밖에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참사를 당했다. 일가족이 모두 사망해 텅 빈 집이 된 곳도 여럿 있었다.

3. 사고이후

3.1. 사후수습

시신 수습은 열흘 정도 걸렸는데, 시신 대부분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불에 타 단 7명만이 정확한 신원확인이 되었다고 한다. 결국 피해자들의 시신은 집단으로 산티아고 공동묘지에 묻혔다. 산티아고 광장에서 묘지까지 시체들을 옮기는데 164개의 수레가 동원되었다.

산티아고 대주교는 교회를 재건하려고 했지만, 대다수의 여론은 부정적이였다. 당시 사람들은 이 무시무시한 사건을 신의 저주로 해석했고 바벨탑의 사건처럼 하늘에서 내린 재앙이라고 받아들였다. 희생자 대부분이 젊은 여성이었고, 당일 성모 마리아 대축일 기념식이 있었으며, 교회에 보관된 첫 성물이 쾰른의 11명의 순교자들[4] 중 한 명의 머리였다는 사실을 서로 엮어 종교적인 관점으로 재해석한 소문이 칠레 여기저기서 떠돌았다. 여기에 교회가 있던 폐허에서 유령들을 봤다는 사람들이 여럿 나오면서 두려움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 때문에 여론은 끔찍한 재앙을 상기시키는 교회를 완전히 허물어버리고 다시 교회를 세워서는 안된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교회 재건축에 반대하는 시위에 2천 명이 참여했을 정도였다. 결국 정부는 이 요청을 받아들여 12월 14일 교회를 철거했다.

교회가 있던 자리에는 정원이 생겼고 사고 10년 후인 1873년 12월 8일 피해자 추모비와 동상이 세워졌다. 이 동상은 나중에 피해자들이 묻힌 산티아고 공동묘지 앞으로 옮겨졌다. 다른 동상은 전 칠레 국회의사당 앞에 세워져있다.

당시 무너진 종탑의 종 하나는 예수회에 반환되었고, 이 종은 녹였다가 다시 종으로 만들어진 후 산 이그나시오 교회로 갔다. 다른 4개의 종들은 영국 웨일스의 한 상인에게 고철로 팔렸는데, 상인의 형이 이 종의 가치를 알아보고는 고향의 교회에 두자고 제안해 잠시 영국으로 넘어가 예배를 알리는 용도로 쓰였다. 이후 이 종들은 2010년 9월 18일 칠레로 다시 반환되었다. 그 중 하나는 산티아고의 콘스티투시온 광장에 설치되었고, 원래 대포를 쏴 정오를 알리던 관습이 산사태가 일어날 위험 때문에 중지된 후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이후 종 옆에 희생자 추모관이 세워졌다.

3.2. 원인 규명

당시 교회에 있던 사람들 대다수가 사망하거나 중상을 입었기 때문에 사고원인을 규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수소 가스 라인이 폭발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고, 사고 전 우가르테가 수소 공급업체에게서 대량 구매를 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수소 공급업체에 비난의 화살이 돌아갔다. 하지만 업체는 수소 가스 라인은 사고가 일어난 구역과 두꺼운 벽으로 분리되어있는 일부 구역에만 설치되었기 때문에 아무 상관이 없으며, 오히려 당시 업체가 화재 위험이 거의 없는 수소 가스 램프를 제안했지만 교회가 양초와 파라핀 램프를 선택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후 앞서 설명한 파라핀 램프가 화재의 원인이였다는 설이 알려지면서 사고원인은 파라핀 램프와 교회측의 안전불감증으로 결론지어졌다.

안타까운 사실 중 하나는 이 사건이 사망률이 높았던 이유는 정문 외에 다른 문이 막혀 있었기 때문었지만, 사실 다른 출입구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는 것이다. 사고 몇십 년 후 연구과정에서 정문이 아닌 다른 출입구를 통해서 빠져나간 사람들은 생존률이 높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한 가족은 성구실을 통해 탈출했고 안뜰로 돌아와 벗겨진 샌들을 다시 가져올 여유까지 있었다고 한다. 다른 익명의 여성은 고해성사실에 있다가 문으로 빠져나가서 작은 화상만 입고 탈출했다.

3.3. 논란

성직자들은 모두 무사히 탈출했지만, 그와 동시에 산티아고 시민들의 분노를 한몸에 받았다.

우선 이날 화재 자체가 안전불감증의 종합 세트나 마찬가지였다. 교황의 충고도 무시하고 욕심만 앞세워 대부분 나무로 지어진 교회에 가연성 소재의 장식들과 수천 개나 되는 램프를 들였고, 사이드 도어도 닫아두었다. 여기에 화재 며칠 전에 이미 교회에서 조명화재사건이 발생했으나 초기 진압돼서 그냥 넘어갔었다는 사실까지 밝혀졌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문제였던 것은 성직자들이 화재가 일어난 후 또 다른 탈출구가 될 수 있는 성구실 문을 닫고 떠났다는 사실이였는데, 다름 아니라 교회의 귀중품들을 챙겨갈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특별히 종교적으로 굉장한 가치가 있는 성물 같은 게 있던 것도 아니고 그냥 좀 값비싼 교회 물건들, 그림, 조각상, 은촛대, 양탄자 같은 것들이였다고 한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성직자들이 해명한답시고 "그들은 성모 마리아에게 직접 간 것이기 때문에 행복한 죽음이다"라는 발언을 해서 더더욱 논란이 되었다고 한다. #

3.4. 의용소방대 창설

화재가 손쓸 수 없을 정도로 번진 데에는 당시 칠레야경국가주의 성향이 강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소방대나 소방차가 없었다는 점도 작용했다. [5] 몇 년 전 당시 대통령인 마누엘 몬트가 한 번 소방대 설립을 시도했다가 정치적인 반대로 무산되기도 했다.

그러다 이 사고 이후 칠레에 제대로 된 소방대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게 되었고, 12월 11일 당시 구조활동에 참여했던 시민 호세 루이스와 희생자들의 유족을 주축으로 의용소방대 모집이 시작되었고 약 200명이 모였다.

사고 12일 이후인 1863년 12월 20일 칠레의 첫 소방회사인 산티아고 소방서(CBS)가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현재까지도 모든 소방체계가, 소방 시스템이 자원봉사로 돌아가는 칠레만의 특이한 구조가 정착된 데에는 이 사건의 영향이 컸으며, 현재도 CBS는 칠레에서 가장 큰 소방조직이다.

4. 여파


[1] 정확히는 가톨릭에서 기념하는 성모 마리아와 관련된 축일은 여럿 있는데 이 날은 그 중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이다.[2] 상단의 그림을 포함해서 이 사건을 다룬 많은 예술 작품에서 이 광경이 묘사된 것을 확인할 수가 있다.[3] 그러니까 저 위의 그림에서 불타는 교회의 문쪽에 보이는 점들이 모두 탈출하려다가 죽은 시체들이라는 말이다.[4] 성녀 우르술라가 11명의 처녀들을 데리고 순례 여행을 하다가 훈족에게 붙잡혀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순교했다는 가톨릭 설화다. 원래는 11,000명의 동정 순교자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번역 도중 일어난 실수 때문이라고 한다.[5] 정확히는 1838년부터 몇 번의 시도가 있었지만 여러가지 사유로 무산되거나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