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백 겸 태정대신 고노에 타네이에의 아들이다. 아버지 타네이에는 관백 겸 태정대신이면서도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를 따라 각지를 전전하며 돌아다닌 기묘한 인물이었다.[1] 1540년 4세의 나이로 원복하여 초명을 하루츠구라고 하였다.[2]
이후 내대신, 우대신을 거쳐 1554년 관백 겸 좌대신이 되었고, 1555년 태정대신까지 받으며 관백 겸 태정대신이 되었다. 그러며 이름을 사키츠구로 바꾸었다.
1559년우에스기 켄신이 상경했을 때 그와 친분을 쌓았고, 급기야는 켄신과 함께 하향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이름도 사키츠구에서 사키히사로 바꾼 그는 간토에서 머물렀으나 켄신의 간토 평정이 늦어지자 좌절하고 1562년 상경하였다.[3]
1565년에이로쿠의 변으로 요시테루 쇼군이 살해당했다. 사건 뒤 사키히사는 자신의 누이(쇼군의 정실)를 보호한 것을 이유로 하여 미요시 요시츠구를 지지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요시테루의 동생으로 당시 도피하여 쇼군위 정당성을 주장 중이던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적대하게 되었다. 오다 노부나가의 힘에 의하여 요시아키의 승리가 명확해지자, 그는 교토를 떠났고, 혼간지 켄뇨를 의지하여 이시야마 혼간지에 몸을 맡겼다.
요시아키와 노부나가의 사이는 상락 이후 점차 악화되었고, 결국 양자의 갈등은 전쟁으로까지 번졌다. 전쟁의 결과 요시아키는 노부나가에게 패하여 교토에서 추방되었고, 소식을 들은 사키히사는 혼간지를 떠나 교토로 돌아갔다. 그 뒤 그는 노부나가와 친분을 쌓았다. 그는 노부나가의 요청으로 규슈에 하향하여 시마즈, 오토모 등의 규슈 가문들을 중재하려 하기도 했고, 이시야마 전쟁의 종결을 부른 혼간지와의 평화 협정을 총괄 중재하기도 하였다. 1581년 우마조로에에 관여한 그는 1582년의 우마조로에에 직접 참석하였고, 1582년에는 노부나가의 카이 정벌에 종군하였다. 고셋케 출신으로 진참 공가중[4]에 속한 희귀한 사례였다. 이전 진참 공가중을 두었던 무로마치 막부의 전례를 살펴보아도 이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같은 해에 그는 태정대신이 되었지만, 사임하였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으로 죽자, 출가하여 호를 류잔이라 하였다. 그러나 아케치 군이 그의 저택에 침입하여 니조고쇼에 사격을 가한 일로 인하여 미츠히데와 협력했다는 오해를 사 하시바 히데요시와 오다 노부타카 등에게 적대되었고, 교토에서 쫒겨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의지하여 하향하였다. 그 뒤 오해가 풀리고 이에야스가 중재함에 따라 교토로 귀환하였고,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 뒤 관백상론이 일어나자 히데요시를 양자로 삼아 태정대신과 간파쿠에 오르게 하였다. 그 뒤에는 은거하여 편히 살다가 1612년 사망하였다.
사키히사는 와카, 서예에 능숙하여, 당대의 문화인으로도 이름을 널리 알렸다. 승마와 매사냥에도 능숙하여 매사냥에 대한 해설서를 쓰기도 하였고, 그것을 친분있는 자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역시 매사냥에 관심이 많던 노부나가와 친분을 깊게 한 수단도 매사냥이었다. 다도 관련으로도 그 행적이 남아있다. 츠다 소큐가 연 다회에 그는 참여하여, 노부나가와 함께 상석에 앉아 오다 관련인들과 다회를 함께하였다.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서는 키쿠테이 하루스에와 함께 공가를 대표한다. 주로 하는 일은 매관매직. 헌금을 받는대신 명성에 맞는 관위를 내려준다. 태합입지전 5에서는 등장하지 않고 대신 키쿠테이 하루스에만 공가의 얼굴마담으로 존재한다.
[1] 사실 요시하루와 고노에 가문은 관계가 있다. 타네이에의 누이, 즉 사키히사의 고모가 요시하루의 정실이었다.[2] 이름 자 하루는 고모부 요시하루에게서 받았다.[3] 사키히사의 하향은 오기마치 덴노나 사촌이자 매부인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의 책략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조정과 막부의 재흥을 위해 켄신을 끌어들이려 했다는 것.[4] 전쟁에 나설 의무를 지는 공가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