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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1457E><colcolor=#FFF> 보헤미아 프르셰미슬 왕조 13대 공작 콘라드 1세 Konrád I | ||
제호 | 체코어와 슬로바키아어 | 콘라드 1세 (Konrád I) |
출생 | 1035년 | |
사망 | 1092년 9월 6일 | |
재위 | 보헤미아 공국의 공작 | |
1092년 | ||
자녀 | 올드르지흐, 리톨드 | |
아내 | 텡링의 비르피르카 | |
형제 | 스피티흐네프 2세, 브르제티슬라프 2세, 야로미르, 오타 1세 올로모우츠 | |
아버지 | 브르제티슬라프 1세 | |
어머니 | 슈바인푸르트의 유디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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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헤미아 공국 프르셰미슬 왕조 13대 공작.2. 행적
1035년경 보헤미아 공작 브르제티슬라프 1세와 노르트가우 변경백 하인리히의 딸인 슈바인푸르트의 유디트의 삼남으로 출생했다. 형으로 스피티흐네프 2세와 브르제티슬라프 2세가 있었고, 동생으로 야로미르, 오타 1세 올로모우츠가 있었다. 1054년경 죽음이 임박했음을 직감한 브르제티슬라프 1세는 자신의 다섯 아들과 귀족들을 불러다놓고 "장자가 항상 공국의 권력과 권위를 갖고, 모든 형제와 후손들은 그의 통치 아래 복종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보헤미아는 장남 스피티흐네프 2세가 온전히 갖고, 모라비아는 세 아들 브르제티슬라프 2세(올로모우츠 지방), 콘라드 1세(브르노 지방), 오타 1세(즈노이모 지방)에게 분할되도록 했으며, 막내 아들 야로미르는 수도사가 되도록 했다.1055년 1월 10일 브르제티슬라프 1세가 사망한 뒤 보헤미아 공작이 된 스피티흐네프 2세는 보헤미아 뿐만 아니라 모라비아 역시 온전히 독차지하기 위해 세 형제들을 프라하로 불러들이고 그들의 영지를 회수했다. 어머니 유디트가 이를 반대하자, 그는 어머니를 국외로 추방했다. 이에 브르제티슬라프 2세는 보헤미아에 계속 있다간 화를 입을 것을 우려해 헝가리로 망명했다. 반면 콘라드 1세는 프라하 궁정에 그대로 남았고, 수렵장으로 발탁되었다. 1061년 1월 28일 스피티흐네프 2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뒤 보헤미아 공작이 된 브르제티슬라프 2세는 두 형제 콘라드 1세와 오타 1세에게 본래 영지를 돌려줬다. 1063년, 콘라드 1세는 프라하 대주교구에 속한 올로모우츠 주교구 설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067년, 프라하 주교 세비르가 사망했다. 수도자로서 성직 생활을 하고 있던 브르제티슬라프 2세의 막내 동생 야로미르는 자신을 프라하 주교로 선임해달라고 요청했다. 브르제티슬라프 2세는 자신의 집사 렌크가 프라하 주교가 되기를 원했다. 이에 콘라드 1세는 오타 1세와 함께 야로미르를 지지했고, 브르제티슬라프 2세는 어쩔 수 없이 야로미르를 프라하 주교로 선임했다. 다만 야로미르의 권력이 강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올로모우츠에 주교구를 설립해 프라하 주교구를 견제하게 했다. 이에 콘라드 1세는 올로모우츠 주교구로부터 포디빈 성을 탈취해 프라하 주교구에 반환했고, 올로모우츠 주교 얀에게 매우 무례하게 행동했다. 이후 1075년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공의회에서 프라하 주교구와 올로모우츠 주교구가 재산을 균등하게 나눠야 한다는 결정을 내리면서, 분쟁이 일시적으로 해소되었다.
1077년부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와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간의 성직자 서임권 분쟁이 벌어졌을 때, 그는 두 형제 브르제티슬라프 2세, 오타 1세와 함께 하인리히 4세를 지지했다. 1082년, 브르제티슬라프 2세, 오타 1세와 함께 그레고리오 7세 지지를 천명한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침공해 그 해 5월 12일 오스트리아 대공 레오폴트 2세를 메일베르크 전투에서 격파했다.
1087년 오타 1세가 사망한 후, 브르제티슬라프 2세는 올로모우츠 공국을 오타 1세의 아들 오타 2세가 아닌 자신의 아들 볼레슬라프에게 넘겼다. 오타 1세의 아내 에우페미아는 이에 맞서 브르노 공작 콘라드 1세 등 자신을 지지하는 몇몇 귀족들과 함께 할거했고, 볼레슬라프는 그 와중에 사망했다. 그는 이를 응징하고자 1091년 모라비아를 침공해 브르노를 포위했지만, 도중에 그의 아들 브라티슬라프 2세가 보헤미아 본토에서 아버지를 축출하려고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장로들의 권고에 따라 콘라드와 화해하고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 후 브라티슬라프 2세는 아버지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뒤 헝가리로 망명했다.
1092년 1월 14일, 브르제티슬라프 2세가 낙마사고의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이후 보헤미아 공작위에 오른 콘라드 1세는 하인리히 4세에게 충성을 서약하는 사절을 보냈고, 프라하와 올로모우츠의 주교단을 재통합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1092년 9월 6일 재임 8개월 만에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브르제티슬라프 2세의 아들 브라티슬라프 2세가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되었다.
3. 가족
- 텡링의 비르피르카(? ~ ?): 바이에른 계열 보헤미아 귀족인 지게하르트의 딸.
- 올드르지흐(? ~ 1113): 브르노 공작(1092 ~ 1099, 1100 ~ 1113), 즈노이모 공작(1112 ~ 1113)
- 리톨드(? ~ 1112): 즈노이모 공작(1092 ~ 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