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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02 16:19:20

베드르지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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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1457E><colcolor=#FFF> 보헤미아 프르셰미슬 왕조 20대 공작
베드르지흐
Bedřich
파일:베드르지흐.jpg
제호 체코어와 슬로바키아어 베드르지흐
(Bedřich)
출생 1141년
사망 1189년 3월 25일
재위 보헤미아 공국의 공작
1172년 ~ 1173년
보헤미아 공국의 공작(복위)
1178년 ~ 1189년
자녀 브라티슬라프, 조피아, 엘레나, 올가, 마가레타, 루드밀라
아내 헝가리의 에르제베트
형제 아네즈카, 스바토플루크, 보이테흐, 오타카르 1세, 블라디슬라프 인드르지흐, 리치사 체스카
아버지 블라디슬라프 2세
어머니 바벤베르크의 게르트루드
1. 개요2. 행적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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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헤미아 공국 프르셰미슬 왕조 20대 공작.

2. 행적

1141년경 보헤미아 국왕 블라디슬라프 2세와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드 3세의 딸인 바벤베르크의 게르트루드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블라디슬라프 2세는 그의 이름을 독일 이름인 프리드리히의 보헤미아식 이름인 '베드르지흐'라 정함으로써,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호의를 사서 왕위 계승을 인정받기를 희망했다. 그는 1164년 올로모우츠 공작으로 선임되면서 통치 경험을 쌓았다. 또한 1161년, 1162년, 1167년에 프리드리히 1세가 이탈리아 원정을 감행했을 때 어김없이 군대를 이끌고 참여해 황제를 도왔다.

그러나 1167년 프라하 주교 다니엘이 사망한 후, 프리드리히 1세와 보헤미아 국왕 블라디슬라프 2세간의 관계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1168년 블라디슬라프 2세의 아들인 보이테흐가 잘츠부르크 대주교가 선임되자, 프리드리히 1세는 이러다가 보헤미아 공국의 영향력이 오스트리아까지 미칠까 염려했다. 그는 프리드리히 1세에게 보히테흐 선임을 인정받기 위해 상당량의 금액을 제공하겠다고 제의했지만, 프리드리히 1세는 1169년 밤베르크 제국 의회에서 보이테흐를 인정하길 거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이테흐는 잘츠부르크 주교구의 실질적인 주교로서 통치를 행사했다.

이렇듯 프리드리히 1세와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베드르지흐의 왕위 상속이 인정받을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블라디슬라프 2세는 생전에 장남에게 왕위를 넘겨줌으로써 기정사실로 만들기로 하고 1172년 말에 아들에게 보헤미아 왕위를 넘겨주고 스트라호프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로서 말년을 보내려 했다. 그러나 블라디슬라프 2세의 계획은 곧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전임 보헤미아 공작 소베슬라프 1세의 아들들인 올드르지흐, 바츨라프 2세 등은 1173년 9월 베드르지흐를 몰아내기 위해 프리드리히 1세를 찾아가 황제의 승인 없이 계승이 이뤄졌으니 조치를 내려달라고 요청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자신이 허락하지 않았는데 보헤미아 왕위 계승이 이뤄졌다는 소식에 진노해 베드르지흐에게 소환령을 내렸고, 베드르지흐는 감히 황제에 대적할 엄두를 못내고 이에 응했다. 이후 소베슬라프 2세가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되었고, 블라디슬라프 2세에게 내려졌던 국왕 칭호는 보헤미아 공국의 통치자들로부터 회수되었다. 그 후 블라디슬라프 2세는 두번째 아내 유디트의 고향인 튀링겐으로 이동한 뒤 1174년에 사망했고, 베드르지흐는 프리드리히 1세의 궁정에 억류되었다.

1178년, 프리드리히 1세는 소베슬라프 2세에 대한 총애를 거뒀다. 베드르지흐는 이 때를 틈타 보헤미아 공작위를 탈환하기로 마음먹고, 독일에서 용병대를 고용한 뒤 즈노이모 공작 콘라드 2세와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드 5세의 지원을 받고 보헤미아로 쳐들어갔다. 소베슬라프 2세는 로데니체 전투에서 이들에 맞서 싸워 승리를 거뒀지만, 뒤이은 프라하 성벽 인근의 노베메스토 전투에서 참패해 해외로 망명했다. 베드르지흐는 자신이 보헤미아 공작이 되는 데 큰 기여를 한 동생 오타카르 1세를 올로모우츠 공작에 선임해, 올로모우츠가 속한 모라비아 전역에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게 했다.

1179년, 소베슬라프 2세는 베드르지흐가 황제의 부름을 받고 슈바벤으로 간 틈을 타 군대를 끌어모아 프라하로 쳐들어갔지만 함락에 실패했다. 이 소식을 접한 베드르지흐는 독일에서 용병대를 모집하여 보헤미아로 돌아갔다. 도중에 소베슬라프 2세의 매복 공격을 받고 패배했지만 콘라드 2세의 구원군과 합세한 뒤 다시 공세를 개시해 프라하 인근에서 소베슬라프 2세를 격파했다. 소베슬라프 2세는 해외로 도망쳐 재기를 꾀했지만 1180년 1월 9일에 사망했다.

1182년, 콘라드 2세가 모라비아에서 반기를 일으켜 오타카르 1세를 올로모우츠에서 몰아내고 즈노이모, 브르노, 올로모우츠를 통합해 모라비아 전역을 통일시킨 뒤 프라하로 진격했다. 베드르지흐는 프리드리히 1세에게 달려간 뒤 도움을 호소했고, 황제는 베드르지흐가 보헤미아 공작을 계속 맡는 대신 콘라드 2세를 모라비아 변경백에 선임하고 보헤미아 공작으로부터 독립시키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1185년, 오타카르 1세가 이끄는 베드르지흐의 군대는 모라비아를 보헤미아의 지배하에 되돌리기 위해 공세를 개시했다. 이후 즈노이모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오타카르 1세와 콘라드 2세 모두 큰 손실을 입었고, 오타카르 1세는 철수해야 했다. 1186년, 양자는 크닌에서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콘라드 2세는 변경백 칭호를 유지하면서도 보헤미아 공작의 패권을 인정했으며, 베드르지흐의 후계자가 되었다.

1187년, 베드르지흐와 그의 사촌이자 프라하 주교인 인드르지흐 브르제티슬라프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인드르지흐는 베드르지흐가 관료들을 프라하 주교구에 파견해 감독들의 재산 관리에 자유롭게 간섭한 것에 반감을 품고 프리드리히 1세를 찾아가 중재를 요청했다. 황제는 레겐스부르크에서 제국 의회가 열릴 때까지 결정을 연기했다. 베드르지흐 본인은 의회에 참석하지 않았고, 인드르지흐가 공작을 상대로 불평할 권리가 없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1187년 3월 5일, 프리드리히 1세는 베드르지흐가 의회에 참석하지 않은 것은 황제에 대한 불경이라고 간주하고 인드르지흐 주교에게 황금 황소를 선물했으며, 보헤미아 공작과는 별개로 황제 직속의 공작으로 지명되었다. 이리하여 주교구의 재산은 보헤미아 공작의 권위에 속하지 않게 되면서, 주교구와 보헤미아 공국 사이에 분열이 발생했다.

1189년 3월 25일, 베드르지흐는 프리드리히 1세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제3차 십자군 원정을 떠나는 황제에 합류하려 하던 중 사망했다. 사후에 콘라드 2세가 크닌 협정에 따라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되었고, 보헤미아와 모라비아가 재통합되었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