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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03 12:22:46

브라티슬라프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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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1457E><colcolor=#FFF> 보헤미아 프르셰미슬 왕조 3대 공작
브라티슬라프 1세
Vratislav I
파일:브라티슬라프 1세.jpg
제호 체코어와 슬로바키아어 브라티슬라프 1세
(Vratislav I)
라틴어 브라티슬라우스
(Wratislaus)
출생 888년
사망 921년 2월 13일 (향년 33세)
재위 보헤미아 공국의 공작
915년 ~ 921년
자녀 바츨라프 1세, 볼레슬라프 1세, 스피티흐네프, 프리비슬라바 체스카, 딸 3명
아내 스토도르의 드라호미라
형제 스피티흐네프 1세
아버지 보르지보이 1세
어머니 루드밀라
1. 개요2. 행적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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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헤미아 공국 프르셰미슬 왕조 3대 공작.

2. 행적

888년 보헤미아 공작 보르지보이 1세와 프쇼바니족 또는 밀차니족의 지도자인 슬라비보르의 딸 루드밀라 사이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스피티흐네프 1세가 있었다. 888년에서 890년 사이에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스피티흐네프 1세와 브라티슬라프 1세 모두 어렸기 때문에, 대 모라비아 왕국의 국왕 스바토플루크 1세가 890년 3월에 판노니아의 오문테스페르흐(Omuntesperch)에서 동프랑크 국왕 아르눌프와 회담을 가진 끝에 보헤미아를 다스릴 권한을 인정받고 통치를 행사했다. 894년 스바토플루크 1세가 사망한 뒤 형 스파티흐네프 1세가 보헤미아 통치자가 되었다.

895년 7월, 스피티흐네프 1세는 보헤미아의 유력 귀족인 비티슬라프(Vitislav)와 함께 동프랑크 국왕 아르눌프가 개최한 총회가 열린 레겐스부르크에 방문해 아르눌프의 가신이 되는 대가로 동프랑크 왕국의 보호를 받기로 했다. 또한 보헤미아는 공식적으로 레겐스부르크 주교구에 포합되었다. 이로 인해 보르지보이 1세가 보헤미아로 데려왔던 슬라브 성직자들이 추방되었다. 일부 학자들은 비티슬라프가 브라티슬라프 1세와 동일인물이라고 주장했지만,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906년경, 브라티슬라프 1세는 하벨 강 중류 주변에 정착한 슬라브 부족인 스토도르 족의 공주 드라호미라와 결혼했다. 일부 학자들은 이 결혼이 보헤미아로의 세력 확장을 꾀하는 작센의 움직임에 대응하기 위한 결혼 동맹이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915년 형이 자식을 두지 못한 채 사망한 뒤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되었다. 그는 즉위 직후 장남 바츨라프의 머리를 자르는 의식을 프라하의 성모 마리아 교회에서 거행하면서, 베로나의 주교 노테리우스 2세를 초빙했다. 체코 역사가 두샨 트르제스티크(Dušan Třeštík, 1933 ~ 2007)는 노테리우스가 동프랑크 국왕 콘라트 1세에 맞서 싸우던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가 보헤미아인들의 지원을 받기 위해 파견된 외교 사절이었을 것이라 추정했다. 또다른 학자들은 브라티슬라프 1세가 노테리우스의 축복을 받고 보헤미아 통치자로 선포되기를 원했거나, 크로아티아 일대를 지배하던 트르피미르(Trpimir) 가문간의 결혼 동맹을 노테리우스의 중재하에 성사시키려 했을 수도 있다고 추정한다.

바츨라프 찰루페츠키(Václav Chaloupecký, 1882 ~ 1951)는 14세기에 쓰여진 비엔나 그림 연대기를 바탕으로 브라티슬라프 1세가 모라비아에서도 통치를 행사했으며, 작센과 손잡고 마자르족에 대항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두샨 트르제스티크는 브라티슬라프 1세는 보헤미아 중부 지역만을 효과적으로 통제했으며, 형의 정책을 그대로 받들어 마자르족과 싸우기보다는 동맹을 맺었다고 주장했다. 11세기 후반의 연대기 작가 브레멘의 아담 역시 보헤미아인들이 마자르족의 915년 작센 원정에 따라갔다고 밝혔다. 현대 학계는 두샨의 주장 대로 브라티슬라프 1세가 마자르족에게 협력했을 거라고 본다.

그는 902년경 프라하 성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 조지 대성당을 건설했다. 이 대성당은 이후 프르셰미슬 가문의 묘지로 각광받았으며, 베네딕토회 수도자들의 거점으로도 활용되었다. 또한 2층 짜리 왕궁과 파벨 신부의 목조 거주지도 건설되었으며, 형이 시작한 프라하 인근 언덕에서의 요새 건설 사업을 이어갔다. 그리고 '브라티슬라비아 언덕 요새'로 명명된 목조 요새를 건설했는데, 이곳은 훗날 브로츠와프 시로 발전했다.

921년 2월 13일, 브라티슬라프 1세는 3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3세기 연대기 작가인 케자의 시몬에 따르면, 마자르족이 판노니아를 정복했을 때 브라티슬라프 1세가 부상을 입었고 곧 사망했다고 한다. 하지만 두샨 트르제스티크는 시몬이 후대의 보헤미아 공작이자 국왕 브라티슬라프 2세와 착각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그가 사망했을 때 아들들은 아직 성년에 도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브라티슬라프 1세의 어머니 루드밀라와 아내 드라호미라가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두 여인이 곧 분쟁을 벌이면서, 보헤미아 공국은 혼란에 휩싸였다.

브라티슬라프 1세의 유해는 프라하의 성 베드로 교회에 안장되었다. 카를 4세 통치 말기인 1379년 7월 1일에 그의 무덤이 증축되었고 그 안에 그의 뼈가 담긴 납 상자가 넣어졌다. 이때 세워진 묘비에는 다음의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HIC IACET BEATUS
VRATISLAUS•
PATER •S• VENCESLAI
FUNDATOR HUJUS ECCLESIE

이 교회의 건설자인 성 바츨라프의 아버지, 복된 브라티슬라프가 여기에 누워 있다.

체코 인류학자 에마누엘 블체크(Emanuel Vlček, 1925 ~ 2006)는 그의 유골을 조사한 결과 95% 확률로 40~52세까지 살았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가 33세까지 살았다는 문헌 기록은 잘못되었으며, 실제로는 888년부터 921년까지 33년간 통치했을 거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이 주장의 신빙성이 별로 없다고 본다. 이후 유골 연구 결과에 따르면, 키는 175cm였고, 혈액형은 B형이었으며, 치하는 온전하고 건강하게 유지되었지만 윗니는 앞으로 밀려났고 아래 앞니는 뒤로 밀려나 틈이 생겼다고 한다. 또한 특별한 질환은 발견되지 않았기에 그가 사망한 이유를 밝혀내지 못했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