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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1457E><colcolor=#FFF> 보헤미아 프르셰미슬 왕조 초대 공작 보르지보이 1세 Bořivoj I | ||
제호 | 체코어와 슬로바키아어 | 보르지보이 1세 (Bořivoj I) |
라틴어 | 보르지보기우스 (Borzivogius) | |
출생 | 857년 이전 | |
사망 | 888년 ~ 890년 (향년 30~33세) | |
재위 | 보헤미아 공국의 공작 | |
872년 이전 ~ 888년에서 890년 사이 | ||
자녀 | 스피티흐네프 1세, 브라티슬라프 1세 | |
아내 | 루드밀라 | |
아버지 | 호스티비트?, 라스티슬라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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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헤미아 공국 프르셰미슬 왕조의 역사상 초대 공작으로 간주되는 인물. 보헤미아에 기독교가 전파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알려졌다.2. 행적
기원은 분명하지 않다. 12세기 프라하 성 비투스 대성당 학장이자 연대기 작가이며 외교관으로도 활동했던 코스마스(Cosmas, 1045년경 ~ 1125년)가 집필한 <보헤미아 연대기>에 따르면, 전설상의 보헤미아 통치자 호스티비트의 아들이라고 한다. 현대의 대다수 학자들도 그가 보헤미아 출신이라는 점에 동의하지만, 호스티비트의 아들일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본다. 모라비아 지역 민족사 연구자인 페트르 시미크(Petr Šimík, 1948~)는 그가 모라비아 공국의 공작 라스티슬라프의 아들이라는 가설을 제시했지만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는다.출생년도 역시 기록이 미비해 분명하지 않다. <성 바츨라프와 할머니 루드밀라의 전설>(이하 '그리스도인의 전설')에 따르면, 보르지보이 1세는 36세에서 38세 사이에 사망했다고 한다. 16세기 보헤미아 성직자이자 연대기 작가 리보차니의 바츨라프 하예크(Václav Hájek z Libočan)에 따르면, 호스티비트는 아름다운 아내 밀로슬라바와 결혼한 뒤 874년에 아들 보르지보이 1세를 낳았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하예크의 기록은 신빙성이 없다고 간주하며, 블타바 전투가 벌어진 872년 당시 성인으로 간주되는 15세 이상이었을 가능성이 높으니 857년 이전에 출생했을 거라고 본다. 그가 언제 집권했는지도 불확실하나, 블타바 전투가 벌어진 872년 이전부터 집권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보르지보이 1세가 집권하던 9세기 후반, 보헤미아 일대는 여러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각지의 통치자들은 보헤미아를 사이에 두고 경쟁하고 있던 동프랑크 왕국과 대 모라비아 왕국 중 어느 한 쪽을 택해야 했다. 872년 5월, 마인츠 대주교 리우베르트(Liutbert)가 이끄는 프랑크군은 모라비아로 진격한 카를로만의 본대를 돕기 위해 모라비아 왕국을 돕는 보헤미아인들을 상대로 공세를 개시했다. 튀링겐인과 작센인으로 구성된 리우베르트의 군대는 블타바 강가에서 보헤미아인들을 격파해 많은 적병을 사살하거나 부상 입혔고, 일부 보헤미아인은 강에 빠져 익사했지만 탈출한 사람들은 요새로 피신했다.
이때 보헤미아군 사령관 스바토슬라프(Svatoslav), 비티슬라프(Vitislav), 헤리만(Heriman), 스피티미르(Spytimír), 모이슬라프(Mojslav) 등 5명의 보헤미아 통치자들이 도망칠 수 있었다고 한다. 일부 사료에는 '고리웨이(Goriwei)'이라는 이름이 여섯 번째로 명시되었는데, 현대 학자들은 보르지보이와 동일인물로 간주한다. 19세기의 체코 역사가 프란티셰크 팔라츠키(František Palacký, 1798 ~ 1876)는 그가 여섯 번째로 명시된 것은 블타바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부하들에게 리우베르트를 저지하는 임무를 맡겼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체코의 법학자이자 역사가 바츨라프 바네체크(Václav Vaněček, 1905 ~ 1985)에 따르면, 보르지보이 1세는 이 전투에 아예 관여하지 않았으며, 보헤미아 남부의 다른 통치자들이 동프랑크 왕국과의 전쟁에서 큰 손실을 입은 틈을 타 보헤미아 남부를 장악했을 거라고 추정했다.
보르지보이 1세는 874년 또는 875년에 슬라비보르(Slavibor)의 딸 루드밀라(Ludmila)와 결혼했다. 코스마스와 <성 바플라프와 할머니 루드밀리의 전설>에 따르면, 슬라비보르는 프쇼바니족의 지도자였다고 한다. 반면 러시아에 보존되어 있는 고대 슬라브어로 쓰여진 <성 루드밀라 서문>에 따르면, 어퍼 루사티아에 거주하는 서브 슬라브 부족 중 하나인 밀차니족의 지도자였다고 한다. 그리스도인의 전설에 따르면, 그는 루드밀라와의 사이에서 3명의 아들과 3명의 딸을 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사료에는 두 아들 스피티흐네프 1세와 브라티슬라프 1세만 알려졌다.
그리스도인의 전설에 따르면, 보르지보이 1세는 모라비아 국왕 스바토플루크 1세의 궁정에서 열린 연회에 참석했지만, 이교도들이 기독교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도였던 스바토플루크 1세가 탁자 위에서 식사하는 동안 자신은 땅바닥에 앉아서 식사했다. 당시 모라비아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메토디오스는 이 광경을 보고 그에게 "당신같이 훌륭한 분이 어째서 땅바닥에 앉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까?"라고 물었다. 이후 그는 메토디오스와 심도 높은 대화를 나눈 뒤 세례를 받기로 결심하고, 아내 루드밀라와 함께 메토디오스로부터 세례받았다고 한다. 프란티셰크 팔라츠키는 그가 세례받은 시기가 메토디오스가 바이에른 주교구에 억류되었다가 풀려난 직후인 874년이라고 추정했고, 고고학자 이반 보르코프스키는 스바토플루크 궁정에서 가톨릭 방식의 예배가 성행하기 시작한 880년 이전에 세례가 이뤄졌을 거라고 추정했다. 반면 체코 역사학자 바츨라프 로보트니(Václav Novotný, 1869 ~ 1932)는 스바토플루크가 보헤미아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게 된 시기인 882년 즈음일 거라 추정했다.
보르지보이 1세는 모라비아에서 돌아온 뒤 레비 흐라데츠에 교황 클레멘스 1세를 기리는 성당을 세웠다. 그러나 얼마 후, 불만 세력이 그의 친척인 스트로미르(Strojmír)를 공작에 추대하고자 반란을 일으켰고, 보르지보이는 모라비아로 도망쳤다. 일부 학자들은 스트로미르가 다른 통치자들과 함께 블타바에서 리우베르트와 맞서 싸웠던 스피티미르와 동일인물이라는 가설을 제기했지만 근거가 부족해 널리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전설에 따르면, 스트로미르는 독일인들과 함께 오래 살아서 슬라브어를 잊어버렸다. 이로 인해 보르지보이를 몰아내고 그를 추대한 사람들 사이에서 이 문제로 불만을 품은 이들이 늘어났다. 보르지보이의 지지자들은 이런 갈등을 조장하면서 반격할 기회를 엿봤다.
이후 보르지보이와 스트로미르는 한 곳에 만나서 협상하기로 했다. 스트로미르의 추종자들은 무기를 옷 아래에 숨긴 뒤, 그들 중 한 명이 "변화하자!"라고 외치면 무기를 들어 보르지보이 편에 있는 사람들을 죽이기로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내부의 배신자에 의해 보르지보이 추종자들에게 전해졌고, 보르지보이 추종자들 역시 무기를 숨겨두고 있다가 "변화하자!"라는 외침이 들리는 순간 무기를 곧바로 빼들어 스트로미르 지지자들을 선제 공격했다. 스트로미르 지지자들은 아무런 대응도 못하고 무너졌고, 스트로미르는 해외로 망명했다. 이후 보르지보이는 보헤미아로 돌아와 공작위를 되찾았다고 한다.
체코 고고학자이자 역사가 즈데네크 메르진스키(Zdeněk Měřínský, 1948 ~ 2016)는 이에 대해 다소 변형된 가설을 제기했다. 보르지보이 1세는 스트로미르의 반란으로 축출되어 모라비아로 도망친 뒤 스바토플루크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스바토플루크 1세는 884년 가을까지 판노니아에서 카란티아 변경백 아르눌프와 전쟁을 벌이고 있던 터라 그를 도와줄 여유가 없었고, 보르지보이 1세는 모라비아에 그대로 머물렀다. 그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3세의 중재로 아르눌프와의 전쟁이 마무리되자, 스바토플루크가 885년에 비로소 반란을 진압하고 그를 보헤미아 공작에 다시 앉혀줬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전설에 따르면, 보르지보이 1세는 모라비아에 망명 가 있는 동안 기독교 신앙이 더욱 투철해졌고, 모라비아 국왕 스바토플루크 1세에게 성당을 하나 더 세우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귀환한 그는 약속대로 프라하에 성모 마리아 성당을 건설했다.
보르지보이 1세가 언제 사망했는지는 불확실하다. 둘째 아들 브라티슬라프 1세가 태어난 888년에는 아직 살아있었다. 890년 3월 판노니아의 오문테스페르흐(Omuntesperch)에서 동프랑크 국왕 아르눌프와 스바토플루크 1세간의 회담이 열렸을 때, 아르눌프는 스바토플루크 1세에게 보헤미아를 다스릴 권한을 부여했다.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그가 888년에서 890년 사이에 사망했으며, 아들들은 너무 어려서 그를 계승할 수 없었기에 스바토플루크 1세가 보헤미아의 통치자로 군림하게 되었을 거라 추정한다. 894년 스바토플루크 1세가 사망한 뒤, 장남 스피티흐네프 1세가 비로소 보헤미아 공작으로 등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