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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29 22:26:56

쿼터스태프

Quarterstaff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Quarterstaff_line_drawing_-_Project_Gutenberg_eText_14315.jpg
출처 - 위키백과 한글 / 영어

1. 소개2. 영향?3. 대중 매체

1. 소개

물푸레나무, 참나무 등 단단한 나무를 깎아 만든 중세 유럽무기.

쉽게 말해 목봉으로, 길이는 대체로 6~9피트(약 182.88cm ~ 274.32cm)로, 그래서 한자육척봉(六尺棒)(약 180cm)이라고도 한다.

참고로 쿼터스태프라는 명칭은 16세기 영국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는데, 이 Quarter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쿼터스태프를 단단한 나무 줄기를 쪼개어(Quarter) 만들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고, 사용할 때 끝에서 4분의 1 지점(Quarter)를 잡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확실한 것은 밝혀지지 않았다. 당장 할버드의 머리를 떼어 놓은 목봉도 쿼터스태프로 불렸다.

단순히 나무로만 된 것이 많으나, 간혹 보강을 위해 금속테 등을 두르거나 스파이크를 박기도 했다. 재료 수급이나 제작이 다른 무기에 비해 월등히 쉽기 때문에 전 유럽에서 계층을 막론하고 사용되었다. 특히 , 같은 금속제의 고급 무기를 거의 손에 넣을 수 없었던 하층민들에게는 몽둥이, 블랙잭과 더불어 부담 없이 동원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무기였고, 영국 전설 로빈 후드에서도 리틀 존의 주무기는 바로 쿼터스태프로 전해진다.

또한 중세 유럽의 여러 검술가들도 쿼터스태프를 사용한 봉술을 가르치고는 했다. 장봉술은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영국을 가리지 않고 두루 등장하지만, 특히 영국이 쿼터스태프를 높이 샀기 때문에 현재도 상당히 '영국적인' 무기라는 인상이 강하다. 예를 들어 헨리 8세 시절에 설립된 일종의 소드마스터 길드인 'Company of Maisters of the Science of Defence'는 레이피어와 브로드소드 검법과 함께 쿼터스태프 전투법을 가르쳤다. 그만큼 당시 쿼터스태프가 어디에나 볼 수 있는 무기였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로빈 후드 설화에서도 근접전은 쿼터스태프라는 인상이 매우 강하다. 로빈 후드가 칼질을 한 사례는 얼마 없다. 어지간하면 무법자들끼리 일기토를 할 때도 쿼터스태프나 솜씨로 승부를 가렸다. 로빈이 칼질을 한 건 어쩔 수 없는 상황이거나 반드시 죽여야 할 상대[1]인 경우.

그리고 목봉이라서 화려하지 않고 다소 모양 빠지는 형태와는 달리 이 무기의 위력은 절대 약하지 않다. 결투에서 쿼터스태프를 지닌 수병이 검객 세 명을 순식간에 이겨버린 기록도 있다. 특별한 훈련을 받은 것도 아닌 평범한 영국의 수병이 스페인의 데스트레자 검술을 익힌 레이피어 검객 세 명을 제압한 일이다.[2][3] 길이가 길고, 양손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타격력이 상당하며, 창처럼 다룰 수도 있지만 양손검처럼 다룰 수도 있는 등 범용성이 뛰어나다.

중세 유럽의 다른 근접 무기들과 비교해보면 무기로서의 봉의 특성이 더 잘 드러난다.
이렇듯, 특출난 구석은 없고 다른 병장기에 비해 한 가지씩 모자란 점도 있었지만, 범용성은 그 어떤 병기보다도 매우 좋았고 거기에 지팡이처럼 갖고 다니기 편했으며[6] 가성비까지 매우 훌륭했기 때문에 쿼터스태프가 무기로 각광을 받은 것이다.

중국 송나라금나라의 중장갑기병을 상대하기 위해 나무에 금속테를 두른 봉으로 상대하여 금나라 중장갑기병을 전멸시키는 위력을 발휘했다. 즉, 봉은 갑옷을 입은 상대에게도 유효타를 날릴 수 있는 무기다. 칼로 자른다거나 하는 장면이 창작물에 나오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튼튼한 나무로 만든 물건이라 칼로 좀 찍어서는 흠집밖에 안 난다. 오히려 잘리더라도 잘린 두 부분을 양손무기로 사용할 수 있고, 잘린 면에 따라 오히려 살상력이 생길 수도 있다. 그리고 현대의 발달된 고탄소강 도검으로도 짚단 묶음을 베려면 상당한 수련을 해야 하는데, 현대의 검보다 재질이 열등한 검으로 바싹 말리고 마감재까지 바른 하드우드 몽둥이를 내리치면 분명히 검이 휘고 이가 나갈 터, 검으로 생계를 꾸려야 하는 검사의 입장에서는 이기더라도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다만 단순히 긴 몽둥이 수준으로 만들어 진 쿼터스태프는 범용성과 가성비야 참 좋아도, 결국 긴 나무 몽둥이에 불과했기에 위력에 한계가 있다는 단점도 있었다. 제대로 만든 투구나 갑옷 앞에서는 위력이 급감했다거나, 튼튼한 가죽 모자 정도만 써도 위력이 크게 줄어들었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 쿼터스태프 정도가 아니라 본격적으로 무게가 실리는 석제 둔기를 자주 사용한 아즈텍에서도 방어구는 가벼운 천 방어구로 만족해왔다는 점, 현대 아프리카 부족들이 봉술 대회[7]를 할 때에도 방어구는 대개 천이나 가죽투구가 전부인 점 등을 볼 때 근본적인 위력의 한계는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정말 쿼터스태프 정도만으로 충분한 위력이 보장되었다면 중세 서유럽의 무거운 둔기들은 필요가 없었을 테니...

장봉술과 봉술의 역사는 유럽 뿐만 아니라 동서양 여러 나라에 두루 퍼져있다. 나무위키의 지팡이술 문서에도 나왔듯이, 프랑스의 칸 드 콩바, 포르투갈의 조고 도 파우, 일본 검도아이키도조도(장도; 杖道), 중국 우슈 혹은 중국권법의 각종 봉술 및 곤술 등이 있고 한국 역시 조선시대 병서인 무예도보통지에도 서술되었다.

조선 후기의 학자인 성호 이익도 그의 책인 성호사설에서 "지금 향병(鄕兵)이 지니고 있는 칼은 모두 호미를 펴서 만든 것이어서 찍어도 베어지지 않고 몽둥이와 대항해도 반드시 꺾어지게 되니, 그 사용에 있어서는 도리어 나무 몽둥이만도 못하다. 옛날 이주영(爾朱榮)은 갈영(葛榮)과 싸울 때에 창과 칼을 사용하지 않고 나무 몽둥이로 승리를 거두었으니, 사람도 훈련한 사람이 아니고 병기도 날카로운 병기가 아닐 바에는 차라리 몽둥이를 사용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라면서 '싸울 때는 물렁한 쇠칼보다 단단한 나무 몽둥이가 더 낫다'고 주장했다. 전근대 기술로 만들어진 칼이 현대공법으로 만들어진 싸구려 식칼보다도 못한 경우가 많고, 그나마 잘 만들어진 칼이라 해도 그것을 날카롭게 갈 정교한 숫돌이 거의 없었던 당대 사람들의 상황으로는 확실히 현실성이 있는 주장이었다. 현대에 들어와 기술이 발달되었음에도, 이미 완성된 도구를 가져다가 칼로 가공하기란 내구성이 안 좋아져서 피해야 한다는 것이 상식이다. 하물며 저 시대에 농기구를 가져다가 칼로 재가공했다면 고철 수준 품질일 게 뻔했다.

다만 실학자들이 쓴 서적 상당수는 현실 비판을 위해 좀 과장된 국까 성향이 심심찮게 발견되는 것[8]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진짜 호미를 녹여서 칼 만든 일도 있겠지만 모든 지방군이 그랬을 가능성은 없고, 그냥 몽둥이가 이렇게 좋아! 정도일 가능성이 크다.

또한 중국 원나라 말기에는 기다랗고 큰 나무 몽둥이인 봉(棒)을 휘두르는 도적인 봉객(棒客)들이 나타나서 원나라에 맞서 싸웠다. 봉객들 중에서는 하남성의 봉호(棒胡)[9]가 유명했다. 그가 사용한 봉은 길이가 예닐곱 자 되는데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물러나며 치는 기술이 귀신 같아서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1백여 명이나 되었고 모두 몽둥이를 잘 사용했다고 한다.

2. 영향?

쿼터스태프를 개량하면서 짧은 봉을 쇠사슬로 긴 봉에 연결하고 휘두르게 되면서 플레일 철퇴가 나타났고, 이 플레일이 동양으로 전래되면서 다절편 같은 연병기(軟兵器), 그리고 도리깨와 결합하여 편곤이 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그다지 신빙성은 없다.

플레일과 편곤 모두 농기구인 도리깨에서 기원했으며, 동서양 공히 도리깨는 동서양의 만남이 있기 전부터 낱알 터는 농기구로 존재했다. 그리고 쿼터스태프는 애초에 농기구가 아니라 지팡이가 무기화한 것이므로, 굳이 쿼터스태프와 플레일을 연결할 이유가 없다.

동양 또한 편곤에서 알수 있듯 서양에게서 플레일 개념을 수입해올 정도로 무기관련 커리큘럼이 부족했던 게 결코 아니라 쌍절곤이나 삼절곤 등 분명히 동양이 원류인 절편무기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따라서 동서양 영향력 운운 하는 것은 단순한 억측에 불과하며 그저 각자의 환경에서 사용한 도구가 비슷하게 발전한 것에 불과하다.

3. 대중 매체

전사용 둔기지만 작품에 따라 스태프, 완드처럼 마법사용 둔기로 나오기도 한다.

[1] 대표적인 예가 로빈의 숙적인 기스본의 가이. 판본을 불문하고 가이 상대할 때는 일기토 끝에 검으로 죽이는 것으로 묘사하는 게 일반적이다.[2] 다만 지금과 달리 당시의 뱃사람들은 전문적인 군인이나 무인들에 꿀리지 않는 무력과 전투 경험을 쌓았음을 감안해야 한다. 당시에는 뱃일이 워낙 고됐고, 무엇보다 선원들이 각지에서 출몰하는 해적들과 자체적으로 전투를 벌여야했다. 그래서 선원들이 스스로 무술을 익히고 무장을 하고 다니는 경우가 매우 흔했다.[3] 위 이야기의 출처는 리처드 피크 자서전이다. 스페인과 벌인 전쟁 중에 피크 스스로가 해냈다는 말만 있을 뿐, 당시 영국이 스페인과 사이도 안 좋아서 전쟁선전물로 쓰인 것도 있다. 피크 스스로는 스페인 공작이 자신의 무예에 감탄해 자신을 살려주어서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를 알현하고 크게 치하를 받았다고 하였다. 문제는 이 정도 일이 영국과 스페인 양국 역사에 기록이 안 되었고 자서전에만 기록되어 민간 연극이나 극장터에서 소문이 났다는 것. 현 역사학자들은 가짜라고 여긴다.[4] 창은 찌르기에 특화되었고, 대규모 전투에서 떼거지로 들고 방진을 구성하는 데에 주로 쓰인다. 특히나 전장용 창은 지나치게 길이가 길어 양손으로 잡고 휘두르거나 개인 단위의 소규모 싸움에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물론 나기나타, 언월도, 할버드처럼 적당히 짧아서 찌르고 베기가 다 가능한 장병기도 있지만, 날을 신경 쓸 필요 자체가 없는 육척봉에 비해선 다루기가 힘들다.[5] 둔기류는 끝부분에 무게가 집중되어 대개 일정 길이를 넘지 못하고 짧게 만들어지는 편이다. 물론 대 기병용 양손 둔기폴암류 병장은 예외.[6] 통념과 달리 중세 유럽엔 도검 소지 관련 규제가 존재했다. 검을 패용할 땐 손잡이를 겉옷 안으로 넣어 감춰야 했고 검 손잡이를 빼고 돌아다니는 행위, 검 손잡이를 보여주며 위협하는 행위, 합당한 이유없이 검을 빼드는 행위, 경비병 등의 무장해제 지시에 불응하는 행위 등은 모두 벌금형을 받을 수 있는 죄가 되었다. 나중 가서는 벌금 액수만큼 돈을 보여주며 위협(너를 찌르고 벌금 내겠다!)하는 것도 벌금형을 받는 죄가 되었다.[7] 진짜 목제 장봉을 사용해서 대련함에도 풀컨택트(진짜로 때림)가 기본이라서 부상당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온다.[8] 박제가가 '조선은 바늘도 못 만든다'고 깠는데, 현실은 청나라보다 생산성이 떨어지기에 안 만든 것이었다. 사실 지금도 언론이든 학계든 자기 주장을 강조하기 위해 자주 쓰는 화법이다.[9] 몽둥이를 잘 사용하고 성이 호(胡)씨인 사람이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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