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10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008B, #fff 40%, #fff 60%, #00008B)""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0;" {{{#808080 {{{#!folding [ 전 멤버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 20%;" {{{#000,#000 {{{#!folding [ Studio Albums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tablewidth=100%> | ||||
My Generation 1965.12.03. | A Quick One 1966.12.03. | The Who Sell Out 1967.12.15. | Tommy 1969.05.23. | Who's Next 1971.08.14. | |
Quadrophenia 1973.10.26. | The Who By Numbers 1975.10.03. | Who Are You 1978.08.18. | Face Dances 1981.03.16. | It's Hard 1982.09.04. | |
Endless Wire 2006.10.30. | WHO 2019.12.06. | ||||
{{{#!folding [ Live / Compilation Albums ]
{{{#!folding [ 관련 문서 ]
}}}}}} ||
키스 문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 |||||||||||||||||||||||||||||||||||||||||||||||||||||||||||||||||||||||||||||||||||||||||||||||||||||||||||||||||||||||||||||||||||||||||||||||||||||||||||||||||||||||
|
키스 문 Keith Moon | |||
<colbgcolor=#CC0033><colcolor=#fff> 본명 | 키스 존 문 Keith John Moon | ||
출생 | 1946년 8월 23일 | ||
영국 잉글랜드 미들섹스 웸블리 (現 잉글랜드 그레이터 런던 브렌트 웸블리) | |||
사망 | 1978년 9월 7일 (향년 32세) | ||
영국 잉글랜드 런던 웨스트민스터 | |||
국적 | 영국 | ||
직업 | 음악가 | ||
소속 | 더 후 (1964 - 1978)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000000,#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color=#fff><colbgcolor=#CC0033> 부모 | 아버지 : 알프레드 찰스 문 어머니 : 캐슬린 위니프레드 문 | |
형제자매 | 린다 문, 레슬리 문 | ||
배우자 | 킴 케리건 (1966 - 1975, 이혼) | ||
자녀 | 만다 제인 문 드울프 | ||
학력 | 해로우 기술 대학교 (전기기술학 / 중퇴) | ||
신체 | 173cm | ||
활동 기간 | 1962년 – 1979년 | ||
사용 악기 | 보컬, 드럼 | ||
장르 | 팝 록, 록 |
[clearfix]
1. 개요
2. 특징
역사상 최고의 드러머 중 한 명으로, 더 후의 드러머로 유명하다. 역사상 최고의 드러머를 논할 때 존 본햄, 진저 베이커 등과 함께 절대 빠지지 않는 전설적인 드러머이다. 해외 팬들 사이에선 일명 '드럼 구타'로 통하는 과격한 드러밍이 특징이며, 라이브에서는 뭐든 다 때려부술 것만 같은 거칠고 광적인 퍼포먼스를 내뿜는다.[1]그의 과격한 스타일의 드럼 연주는 이후 70-80년대에 널리 유행하게 되는 하드록과 헤비메탈 음악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으며 사실상 키스 문에게 영향을 받지 않은 하드록 드러머는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헤비록 역사에서 엄청난 파급력을 지닌 뮤지션이다.[2]
3. 생애
3.1. 유년기
1946년 영국 런던 북서부 미들섹스 병원에서 기계 수리공 "알프레드 찰스 문"과 청소부 "캐서린 위니프레드 문" 사이에서 태어났다. 런던의 웸블리 지역에서 자랐으며 형제로 여동생 Linda, Lesely 두 명이 있었다. 지극히 평범하게 안정적인 유년 시절을 보냈다. 키스는 어릴적부터 자연스레 음악을 많이 들어왔는데 그 이유는 그의 아버지,어머니 모두 음악을 좋아하여 집에서 항상 레코드 플레이어를 틀어놓았기 때문이라고 한다.키스의 성격에 대해선 그의 부모님이 말하길, 아주 활동적인 아이였지만 가끔씩은 정도가 지나쳐, 홀로 있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지금 따져보면 ADHD 성향이 심했던걸로 추정하고 있다.
부모님께 음악인이 되고 싶다는 뜻을 밝혀, 부모님이 나팔과 트럼펫을 배우도록 해주었지만, 너무 어려워 포기하고 14살 때 어머니에게 선물 받은 드럼키트로 이 때부터 아무 교육없이 자기혼자 막 두드리면서 드럼을 익혔다고 한다. 단, 이것은 부모님의 증언이고 다른 전기를 보면 키스의 드럼 선생으로 여러명이 거론되는데, 키스가 부모님에게 알리지 않고 본인이 이리저리 다니면서 대충 어깨 너머로 배운게 아닌가하는 추측도 있다. 즉, 정식 선생은 없었다는 이야기.
3.2. 더 후 합류 이전
1962년 초, 키스는 드디어 첫 밴드인 에스코트에 합류했다. 에스코트는 본인들이 노래를 만들어 연주하는 그룹이 아니라 다른 노래를 커버해서 부르는 그룹으로, 수많은 야외 행사나, 클럽에 초청되어 백밴드 역할을 많이 했었다. 그렇게 이리저리 무대의 맛을 본 키스는 그 해 말, 커버밴드 에스코트를 탈퇴하고 '비치 콤보'라는 밴드로 옮긴다.키스는 밴드 활동을 하면서 기술학교를 졸업하여 아버지처럼 (잡다한 기술을 익힌)수리공이기도 했는데, 밴드에 좀 더 욕심을 가져 전념해보고 싶었으나, '비치 콤보'는 별다른 의욕이 없는 밴드라 밴드활동이 활발하지 않았고 이에 키스는 자신이 그냥 아버지처럼 수리공의 인생으로 평생 살게 될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비치 콤보'도 얼마 지나지 않아 곧 탈퇴한다.
'비치 콤보'에서 받은 무기력함으로 인해 자칫 드러머의 길을 영원히 포기할 뻔하기도 했는데 드럼에 대한 욕망이 충족되지 않고 별다른 진전없이 가볍게 넘어가는 것에 회의감을 느껴 음악을 관두고 수리공으로 정착할 생각이였다고 한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에는 아버지의 영향도 있는데 키스의 아버지가 수리공으로 하던 일 중, 전기공사의 돈벌이가 괜찮았고 아들에게 기술을 물려주기도 쉬웠기에 자연스럽게 일을 물려줄 생각이였다. 그래서 키스는 건축회사에 안정적으로 일찍 자리잡기도 했었다. 의외로 굉장히 충실하고 안정적인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키스의 미래는 곧 바뀐다. 1964년 17살의 나이로 더 후의 드러머로 영입이 된 것이다!
더 후에 어떻게 영입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해당 항목 참고. 꽤나 황당한 스토리이다.
3.3. 더 후
1964년, 키스는 더 후의 드러머로 영입되자마자, 바로 직장을 그만두고 밴드일에 전념한다. 키스뿐만 아니라 다른 멤버들도 밴드일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고 더 후는 다음해 1965년, "I Can't Explain." 싱글을 발표. 큰 인기를 끌면서 드디어 1집 My Generation을 발표한다. 이 1집의 결과는 대히트. 첫싱글을 발표하고 2년후인 1967년 두번때 싱글 "I Can See for Miles."는 미국 싱글 차트에 첫 진입하며 히트를 쳤다.
키스는 드럼 외에, 노래하는 것에도 엄청 열정적이였다. 노래를 잘하는 편은 아니고, 백보컬로 끼어 녹음하고 싶어했는데 자꾸 장난치고 멤버들을 웃겨서 녹음할 때마다 녹음실에서 쫒겨났다고 한다. 그래도 기죽지 않고 몰래 숨어있다가 튀어나와 녹음을 방해하고 장난을 쳐서 멤버들에게 큰 웃음을 주었다.
더 후는 무대에서 자신의 악기를 파괴하는 퍼포먼스로 유명한데 이러한 공격적인 스타일 역시도 키스와 잘맞았다.#
3.4. 사망
키스 문은 1970년대 들어 여러 사건에 직면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그의 운전기사였던 닐 볼랜드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순탄치 않았던 결혼 생활을 들 수 있다. 이런 일들 때문에 그는 점차 술과 약물에 중독되었고, 점점 미치광이(Moon the Loon) 취급을 받기 시작했으며, 급기야는 더 후의 투어 중에 무대에서 수 차례 실신하기도 했다. 멤버들의 약물 중단 권유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마약을 복용하였고, 1978년 더 후가 재결합했을 당시에는 건강이 매우 쇠약해져 드럼조차 제대로 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밴드에서는 키스의 해고까지 고려했으나, 키스의 투혼으로 이는 없던 일이 되었다.그러나 결국 1978년 더 후의 마지막 공연으로부터 몇 달이 지난 후 알콜중독 치료제였던 헤미네브린 과다복용으로 32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3]
4. 음악적 역량
드럼 솔로. |
I suppose as a drummer, I'm adequate. I've got no real aspirations to be a great drummer. I just want to play drums for the Who and that's it.
내 생각에 나는 드러머로서 적절하다. 나는 위대한 드러머가 되는 걸 바라지 않는다. 난 그냥 더 후를 위해 드럼을 치고 싶고 그게 다다.
본인의 드러밍에 대한 평
내 생각에 나는 드러머로서 적절하다. 나는 위대한 드러머가 되는 걸 바라지 않는다. 난 그냥 더 후를 위해 드럼을 치고 싶고 그게 다다.
본인의 드러밍에 대한 평
They seemed to have understood just how important was ... Moon's contribution.
그들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키스 문의 헌신 말이다.
존 앳킨스(John Atkins)[4]
그들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키스 문의 헌신 말이다.
존 앳킨스(John Atkins)[4]
드럼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도 중요한 드러머 중 한 명. 이 사람이 없었더라면 현대 드럼 주법의 정립이 한참 뒤에나 이뤄졌을 것이다.
사실 존 본햄이나 이안 페이스, 진저 베이커 등 동시대에 활동한 드러머들과 비교하자면 연주력 측면에서 약간 밀리는 감이 있다. 항상 술과 마약에 절어서 무대에 올랐으며, 박자를 놓치는 실수를 자주 했기 때문에 더 후 멤버들도 이를 지적하는 일이 잦았다.[5] 하지만 그의 드러밍은 여태까지의 드러머들과는 달리 순수한 힘이 있었다. 링고 스타나 찰리 와츠 같은 드러머들은 드럼을 어디까지나 밴드의 사운드를 뒷받침해주는 악기로 생각했고, 그렇기 때문에 드럼을 묵묵히 밴드의 사운드를 보완하는 악기로 규정하고 이에 적합한 드러밍을 했었다. 하지만 키스 문은 이러한 고정 관념에서 탈피해 드럼 또한 밴드의 중핵을 맡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이 기조를 이은 게 존 본햄이다.[6]
그의 드러밍은 대단히 강력한 힘을 지녔었다. 본인의 성격처럼 정제되지 않았고 매우 거친 사운드를 지녔는데, 이러한 면이 더 후가 지녔던 반항아적 기조[7]를 강조하면서 당대의 드러머들에게 엄청난 수준의 영향력을 투사했다. 당장 이 사람의 영향을 받은 드러머가 그 전설적인 존 본햄이었다는 걸 기억하라. 사실상 헤비 메탈과 하드 록의 드러밍은 현재 철저하게 키스 문의 영향력 하에 있는 셈이다. 또한 블루스의 영향력이 배제된 직선적 하드 록을 추구했던 더 후의 음악에도 키스 문의 드러밍은 적합했다.
또한 키스 문은 프로그레시브 록 내지는 프로그레시브 메탈 드러밍의 직접적인 조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프로그레시브 메탈의 선조 격이라고 할 수 있는 러시의 닐 피어트가 존경했던 드러머가 키스 문이었고, 그의 드럼 셋에 영향을 받아 더블 베이스를 갖추고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드럼 셋[8]을 갖췄었고 이후 마이크 포트노이 등의 후배들도 이런 대규모 드럼 셋을 갖추기 시작했기 때문.
5. 기행
내가 늘 사람들에게 말하는 게 있다. "여러분이 저에 대해서 들으신 이야기 중 사실인 내용은 30%에 불과합니다." 그건 사실 마릴린 맨슨도 그렇고, 오지 오스본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키스 문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진짜다. 심지어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들은 전체의 10%밖에 되지 않는다.
―앨리스 쿠퍼#
위에서 언급했든 ADHD끼가 다분했던 그는 좀체로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성격의 소유자로, 따분한 일을 못 참아했고 투어를 다닐 때면 호텔 방을 깨부수고 화장실 변기에 폭죽과 다이너마이트를 던져 넣는 일을 반복하곤 했다.[9] 미시간에서 벌인 그의 21번째 생일 파티[10]는 당시 록 음악가들이 벌였던 막장급 파티들 중에서도 최강으로 회자되곤 한다. 키스는 그날 술과 마약에 취해 차 한 대를 호텔 풀장으로 가라앉혔다 한다. # 다만 이러한 파격적인 행보에도 불구하고 사람으로서 됨됨이는 되어 있었기에 이후 피해를 끼쳤던 호텔 측에다 피해를 복구하고도 남을 만큼의 엄청난 돈을 팁으로 남겨줬다고. 이럼에도 더 후가 상업적으로 매우 성공해서 죽을때까지 부유한 삶을 즐길 수 있었다. 그는 이런 퍼포먼스를 가는 호텔마다 했기에 홀리데이 인과 쉐라톤, 힐튼 호텔 등에서 영구 거부를 당했고 죽을 때까지 이런 몇몇 호텔에 숙박할 수 없었다.―앨리스 쿠퍼#
연주한 곡은 그들의 60년대 대표곡 My generation이다.
또한 그는 과거 연주 도중 다이너마이트나 체리 폭탄을 드럼에 넣어서 폭파시키는 짓을 자주 했는데, 이로 인해 피트 타운젠드가 폭발에 휘말려 청력이 손상되는 사고가 일어난 적도 있다. 위 영상 4:30초 경에서의 폭발이 바로 그것. 물론 피트는 그런 거 상관없이 그냥 자기가 부수던 기타를 계속 부쉈고, 심지어 옆의 MC가 메고있던 통기타마저 박살내버렸다.
6. 보컬로서의 활동
보컬로 음반을 한 장 냈다. 음반이름은 Two Sides of the Moon[11]들리는 것과 같이 목소리가 매우 특이하다.
7. 여담
- 지미 페이지에게 레드 제플린이라는 밴드명을 제안한 장본인이다.
자세한 내용은 레드 제플린 문서의 밴드명 부분을참고하십시오. - 1977년 레드 제플린의 공연에 게스트로 참석하여 존 본햄과 함께 드럼을 연주했다.
- 어마어마한 술고래이다. 록 씬에서 술고래로 유명한, 아니 알코올 중독자였던 에릭 클랩튼이 자서전에서 "키스 문에 비하면 나는 라이트급이다."라고 했을 정도.
- 의외로 더 후 시절에는 로저 달트리보다 여성 팬들에게 더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 1960년대에는 훈훈한 외모의 소유자였으나, 1970년대에는 지속적인 마약 남용으로 인해 친구인 키스 리처즈 급으로 삭아버렸다. 그리고 이러한 마약 남용으로 결국 요절하게 된다.
- 사망하던 해인 1978년의 사진을 보면 토니 몬타나가 연상된다는 평이 많다. 재밌는 점은 키스 문은 토니 몬타나가 나온 1983년 스카페이스가 만들어지기 전에 죽었다. 1978년 영상[12]
* 1975년경 Baba O'Riley 공연 도중 너무 흥분해서 드럼 스틱을 관중석으로 던져버린 사건이 있다.[13] 영상을 자세히 보면 당황하지 않고 바로 여분의 드럼 스틱을 꺼내서 친 것으로 보인다. 아마 본인도 이런 상황에 익숙해져서 별 이상 없이 즉각적으로 행동한 것으로 보인다.
- 난폭하고 불안성 장애가 극심했던 것과는 별개로 인간적으로는 꽤나 사교성이 있어서 동시대에 활동했던 수많은 밴드들과 친분을 맺었다. 대표적으로 비틀즈, 롤링 스톤스, 지미 헨드릭스, 레드 제플린 등. 특히나 링고 스타의 아들인 잭 스타키에게 드럼을 처음으로 선물해준 사람이기도 하고 이때의 인연으로 잭 스타키는 더 후의 투어 멤버가 되었다.
- 영문 위키나 사이트에서 번역 기능을 활성화하면 문재인으로 번역된다.
[1] 기타 담당인 피트 타운젠드와 더불어, 실제로 악기를 자주 부쉈다고 한다.[2] 록 드럼의 신이라 불리는 존 본햄과 괴물같은 정확성을 자랑하는 닐 피어트 역시도 키스 문을 동경하고, 많이 좋아했다고 한다.[3] 공교롭게도 키스 문의 친구이자 마찬가지로 최고의 드러머인 존 본햄도 키스 문이 사망하고 2년 뒤인 1980년에 32세라는 나이로 요절한다.[4] 영국의 전기 작가.[5] 존 본햄이나 이안 페이스는 커리어 내내 박자를 틀린 적이 전무하다시피한 괴물들이다.[6] 상술했다시피 키스 문과 반대되는 스타일의 드러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드러머로는 찰리 와츠가 있다. 찰리 와츠는 화려한 필인과 파워풀한 드러밍을 최대한 자제하고 특유의 그루브를 중심으로 한 드러밍을 추구하였다. 즉 키스 문의 파워풀한 드러밍으로 인해 더 후의 음악이 한층 더 파워풀해졌다면, 찰리 와츠의 그루브있는 드러밍으로 인해 롤링 스톤스의 음악이 특유의 그루브를 가지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7] 록이 기본적으로 반항아적인 음악이긴 하지만 롤링 스톤스나 비틀즈는 히피 문화에 가까운 반항아들이었다. 즉, 요즘 사람들이 록 하면 떠오르는 과격한 반항아의 이미지는 더 후가 만든 것이라 봐야 한다.[8] 규모로 따지자면 키스 문보다 더해서 이 사람은 뒤에도 드럼이 있다. 그래서 360도가 전부 드럼으로 둘러싸여 있다.[9] 처음에는 체리 밤 500개를 변기에 처박더니 그 다음부터는 M60 크랙커를 처박기 시작했고 결국 화장실에 다이너마이트를 처넣고 문을 닫는 짓까지 했다.[10] 미국에서의 21번째 생일은 합법적으로 술을 먹을 수 있는 나이가 되기 때문에, 뻑적지근한 부어라마셔라 파티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11] 핑크 플로이드의 명작 The Dark Side of the Moon의 패러디로 보인다.[12] 일부 팬들은 그는 죽기 전까지도 상당히 천진난만하고, 밴드의 분위기를 살리며 행복하게 살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른 나이에 죽어버려서 안타깝다는 댓글을 달기도 했다. 영상에서 키스 문은 죽기 4달 전이지만, 상당히 활발한 모습으로 녹음에 임하고 있었다.[13] 해당 영상의 1:1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