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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3 20:06:25

탄지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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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과정4. 연표5. 관련 문서


Tanzimat

1. 개요

1839년부터 1876년까지 압뒬메지트 1세압뒬아지즈 시대에 실시된 오스만 제국개혁 정책으로, 은혜 개혁으로도 불린다. 탄지마트(tanzimat)튀르키예어재구성을 의미한다. 중세 이슬람 제국의 형태를 띄고 있던 오스만 제국을 유럽식의 근대적 중앙집권 국가로 바꾸기 위해 행정, 의회 정치, 조세, 징병, 사법,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서유럽을 본딴 근대화를 추구하였다.

이런 급진적 개혁이 상당히 성과를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계가 있었는데, 일단 빠르게 성장하는 서구 열강들의 국력을 따라잡는데 실패했다. 또한 보수적인 무슬림들이 탄지마트 개혁에 반대했고, 어느정도 자치권을 누리던 제국의 다양한 피지배민족들은 중앙집권화에 부정적이었다. 게다가 탄지마트 시기에 파디샤들이 호화로운 돌마바흐체 궁전의 건축을 비롯한 사치를 벌이다가 제국의 재정을 파탄내면서 1875년에는 유럽 국가들에서 빌린 빚에 대해 모라토리엄을 선언할 지경에 이르렀다. 결과적으로 탄지마트는 1876년에 반동적인 전제 정치범이슬람주의를 표방한 압뒬하미트 2세가 등극하면서 막을 내리게 된다.

2. 배경

오스만 제국이 쇠락하는 징조는 18세기부터 여러 방면에서 가시화되고 있었다. 그래서 여러 파디샤들이 개혁, 특히 국방력 강화를 위한 개혁을 시도해왔지만 성과는 미미했다. 그러던 와중 1829년에 그리스는 독립을 선언했고, 1830년에는 알제리가 프랑스에 의해 정복당했으며, 1833년에는 중앙 정부보다 먼저 근대화 개혁에 성공한 이집트도 반란 끝에 사실상 독립해 나갔다. 이런 와중에 마흐무트 2세가 늦게나마 근대화를 어느정도 이룰 수 있었지만, 계속되는 재정난을 극복하기 위해 수도 없이 화폐 가치를 절하한 끝에 그의 국고에는 악화만 남았고, 1839년 이집트를 재정복하고자 보냈던 주력군이 대패하고 와해되는 동안 지병으로 사망했다. 이제 오스만 제국은 군대도 없고 돈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오스만 제국의 엘리트들과 지식인들은 유럽 열강들을 상대하고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보다 광범위한 정치/행정적, 기술적 현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시대에 문학적, 문화적 현대화 운동인 나흐다가 퍼지기 시작했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았다.

하지만 탄지마트의 원동력은 단순히 내부로부터만 오는 것은 아니었다. 오스만 제국의 오랜 라이벌이자 흑해의 주도권을 잡고자 했던 러시아 제국은 대략 1840년 경 쯤에는 오스만 제국의 분할을 원하고 있었으나, 대제국의 소멸이 권력의 공백과 유럽 열강들의 분쟁을 야기할 것이라 예측한 프랑스와 영국은 오스만 제국을 적당히 유약한 상태로 연명시키고 싶어했다. 이들은 오스만 제국의 파디샤에게 현대화 추진을 여러 차례 권장했다.

3. 과정

1839년 7월에 16세의 나이로 파디샤로 등극한 압뒬메지트 1세는 유럽 사회에 정통한 외무대신 무스타파 레쉬드의 자문을 받아 같은 해 11월 3일에 '장미의 방 칙령 (귤한네 하트 휴마이윤)'을 선포함으로써 탄지마트 개혁을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탄지마트 개혁의 기간으로 압뒬메지트 1세와 1861년부터 그 뒤를 이은 압뒬아지즈 파디샤의 통치 기간을 잡지만 (총 기간이 1839~1876), 학자에 따라 탄지마트는 1853년에 크림 전쟁이 발발할 때 끝났다고 보기도 한다.

기본적으로는 과거 18세기 말에 셀림 3세가 추진했다 실패했던 니자므 제디드 개혁과, 19세기 초에 마흐무트 2세가 추진하여 어느 정도 성과를 보았던 서구화 개혁을 계승한다. 이 두 개혁의 대상이었던 행정, 사법, 군제, 토지 부문 전반에서 과거보다 더 급진적인 개혁이 추진되었으며, 개혁의 방향은 서유럽 문화권의 모방이었다.

주된 내용으로는 중앙집권화, 세속화, 군대의 징집 방식과 복무 기간의 설정 등이 있었다. 또한 관리를 양성하기 위한 학교가 세워져서 적지 않은 수의 학생을 배출해 냈다. 탄지마트 개혁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꼽히는 것은 무슬림과 비무슬림을 차별하지 않고 적용되는 법치주의이다. 이에 따라 통치자가 더 이상 마음대로 신민을 죽이거나 재산을 몰수할 수 없게 되었고, 모든 백성이 동등한 법적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1] 대신에 각 종교 공동체별로 자신들만의 관습을 적용할 수 있던 자치권이 축소되었다.

탄지마트 개혁으로 오스만 제국이 유럽적인 통치 제도, 법과 관습, 심지어 유럽적인 관념마저 도입하자, 영국, 프랑스 등의 서유럽 국가들과의 관계가 크게 개선되었다. 덕분에 유럽 국가들로부터 차관을 빌릴 수가 있었고, 1853년 10월 발발한 크림 전쟁에서는 영국과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오랜 숙적인 러시아를 상대로 승리할 수 있었다.

크림 전쟁 이후 오스만 제국 중심부에서 변화의 속도는 더 빨라졌으며, 더 많은 유럽인들이 오스만 제국을 방문하면서 오스만 재국은 유럽과 더 가까워졌다. 심지어 1867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 박람회에 초청을 받은 압뒬아지즈 황제는 평화적 목적으로는 역대 최초로 비이슬람 국가들을 방문하여,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요제프 황제의 환대를 받고, 영국에서는 빅토리아 여왕과 함께 영국 해군 전함의 사열을 관람했을 정도였다. 또한 1856년부터 유럽의 자금과 기술 지원을 통해 철도 건설이 시작되고, 유럽의 주요 도시와 전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전신망도 만들어졌다.

그러나 동시에 1850년대부터 술탄들의 사치로 인해 제국의 재정에 구멍이 나다가, 결국 1875년에는 유럽에서 빌린 돈에 대해 파산을 선언할 수 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제국의 중심부가 국가 파산으로 인해 혼란에 빠진 사이 헤르체고비나불가리아의 기독교도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을 잔혹하게 진압하던 오스만 제국이 서유럽 열강의 개입에 굴복하자 외국에 무력한 정부에 대한 민중의 분노가 끓어오르고, 기독교도들의 폭동으로 인해 피해를 받은 무슬림들에 대한 동정론이 퍼지면서, 1876년 5월 수도에서 청년들의 반정부 봉기가 일어났다. 이러한 소란을 진정시키는데 실패한 압둘아지즈 황제는 결국 폐위되었다.

이후 제위를 이었던 심약한 무라트 5세도 제대로 국정을 운영하지 못하면서 고작 3개월 만에 폐위되고, 1876년 9월 압뒬하미트 2세가 이어서 등극하면서 탄지마트 개혁은 막을 내리게 된다. 처음에는 압뒬하미트 2세가 영국과 프랑스를 본딴 헌법을 제정하고[2] 의회를 만드는데 동의하기도 했으나, 후술하듯이 그는 결코 입헌군주제의 상징적인 존재로 남을 생각이 없었다.

한편 영토 확장 욕심이 있던 세르비아몬테네그로가 오스만 제국의 혼란을 틈타 1876년 6월 침공해 왔는데, 이들의 무장 수준이 낮았기에 오스만 제국을 당해내지 못해서 유럽 국가들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런 상황에서 “계속되는 발칸 반도의 위기를 해결해야 한다”며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에게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불가리아, 세르비아 등에서 튀르크의 악습을 폐지할 것을 요구해 왔고,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밀약을 맺은[3] 러시아는 1877년 4월 전격적으로 발칸 반도와 코카서스를 침공했다. 이 1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처음에는 더 우수한 무장을 갖추고 있던 오스만 제국군이 제법 잘 싸워서 러시아군의 진격을 늦출 수 있었지만, 러시아군이 루마니아와 세르비아의 지원군까지 받으며 훨씬 더 많은 병력을 투입했고, 그해 겨울부터 요새에서 방어전으로 일관하던 주요 오스만 제국군 부대가 보급 부족으로 붕괴되며, 1878년 1월에는 수도 코스탄티니예 코앞까지 털렸고 동유럽 영토를 거의 다 내주고 만다.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와 정전에 합의할 수 있었지만,[4] 1878년 2월 개회된 의회에서 의원들이 파디샤의 통치에 대한 불만을 쏟아내었다. 이에 대응하여 압뒬하미트 2세는 헌법을 정지하고 의회를 해산하며 전제정치를 부활시켰고, 통치를 위해 범이슬람주의를 제창했다. 결국 탄지마트 개혁은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이후 1908년 청년 튀르크당이 헌법의 부활을 요구하며 봉기해서 30년간 독재 정치를 펼치던 압뒬하미트 2세를 퇴위시키고 헌법과 의회를 부활시킨 뒤 개혁을 재추진하기는 했지만, 제국 내에 수많은 소수민족들에게 이미 퍼져 있던 민족주의와 충돌할 수 밖에 없는 극단적인 튀르크 민족주의로 인해 내외적인 반발을 샀고,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독일 편에 붙었다 패배하는 바람에 개혁은 결정적으로 실패, 결국 오스만 제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만다.

4. 연표

1839년장미 방 칙령
1840년재정 개혁
1842년지폐 도입
1850년상업 법전 개혁
1858년프랑스 형법을 모방한 유럽식 형법 도입
1868년유럽식 고등교육 기관 도입과 행정법원 창설
1868년부터 1876년까지민법 도입

5. 관련 문서


[1] 그러나 형법의 개혁은 서류상으로만 존재했을 뿐 이슬람 전통법인 샤리아에 막혀서 실질적인 효력이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2] 엘리트 관료 출신인 미드하트 파샤(Midhat Paşa)가 주도했으므로, '미드하트 헌법'이라고 불리기도 한다.[3] 밀약의 내용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중립을 지켜주는 대신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가지고, 러시아는 지난 크림 전쟁에서 잃은 흑해 연안의 영토를 회복하며, 불가리아는 자치국 또는 독립국으로 만든다는 것.[4] 일단 정전은 1878년 1월에 이루어졌으나, 완전한 전쟁의 뒷처리까지 끝난 것은 같은해 3월의 산 스테파노 조약과 역시 같은해 6월~7월에 열린 베를린 회의까지 기다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