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당시 로고.
1907년부터 1961년까지 존재했던 대한민국의 기업 집단. 구한말 시전상인 출신 백윤수가 세운 '백윤수상점'이 모태이며 50년 뒤 설립된 내의 제조사 태창과는 다른 기업이다.[1]
2. 상세
2.1. 초창기
백윤수는 원래 종로 육의전에서 조상 대대로 견직물 시전을 경영해온 거상으로 일본의 전격적인 화폐 개혁의 고비를 힘겹게 넘어서며 1907년 전통적인 시전 상인의 모습에서 탈피한 기업 형태의 '백윤수상점'을 열게 된 것이 그룹의 시작이다. 이어 1916년에는 지금의 종로2가 종각 건물 바로 뒤쪽에 대창무역주식회사(大昌貿易株式會社)를 설립하면서 종로 육의전의 마지막 후예가 여전히 건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게 된다.이렇게 초창기에는 무역업으로 시작되었는데, 당시 자본금 50만원[2]에 불입자본금(拂入資本金) 50만원 규모였다. 다른 기업들보다 앞서 주식회사 체제를 갖췄던 데다가 같은 시기에 설립된 민족자본 기업들 가운데서도 보기 드문 대기업이었다. 백윤수의 대창무역보다 3년 늦게 설립된 김성수ㆍ김연수 형제의 경성방직(현 경방) 규모가 자본금 100만원[3]에 불입자본금 25만원[4]이었고, 백윤수와 함께 장안의 3대 상인 자본가로 불렸던 박승직상점(현 두산그룹)이 6만원[5] 수준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당시 백윤수의 재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대창무역을 통해 청나라에서 각종 견직물을 수입해 들여오게 되면서 전성기를 이루는 듯 했으나 1920년에 이르러 조선총독부에 의해 청나라에서 견직물을 수입해 들여오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조치를 내리게 되면서 경영난에 빠지게 되자 백윤수는 이를 타개하고자 1924년에 '대창직물'을 설립해 직접 견직물 생산에 들어갔다.
당시 청량리 공장에 설치된 직조기 대수는 모두 300대로, 당시 국내 최대 규모였던 일본 미쓰이물산의 조선방직 부산공장의 인견 견직기 대수 319대의 수준과 거의 맞먹는 대규모 공장이었다. 그만큼 백윤수는 정황 판단이 빨랐고 시류에 민첩하게 적응해 나가게 되었지만 같은 해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슬하에 낙원, 낙중, 낙삼, 낙승 모두 4형제를 두었는데 먼저 장남 백낙원이 승계했다. 하지만 그 역시 1939년 작고하면서 막내아들인 백낙승[6]이 경영을 물려받게 된다.
태평양전쟁 중에도 서슬 퍼런 일본 관동군 헌병대에 손을 뻗쳐 대창직물에서 사명을 바꾼 태창직물을 통해 만주로 포목을 밀수출할 수 있었고, 이 당시의 상표는 벚꽃 속에 '태(泰)' 자를 써넣은 것이었다. 일본의 마루베니나 이토추[7]와 같은 대기업들도 백낙승의 태창직물을 거쳐야 만이 비로소 만주에 직물을 수출할 수가 있을 정도였다.
말하자면 일본의 대규모 상사들이 태창직물에 포목을 공급하면 이 포목에다 벚꽃 속에 '태'자 상표를 눌러 찍어 일본 관동군 헌병대의 호송 아래 만주로 밀수출한 것이었다. 백낙승의 태창직물은 이런 간 큰 포목 밀수로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고 그 막대한 돈을 다시 일본 동양면화에 투자해 이 기업의 주식을 절반 가량이나 소유하게 된다.
2.2. 첫번째 위기
하지만 꼬리가 길면 언제인가는 반드시 밟히기 마련이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에 그동안 관동군 헌병대의 비호 아래 아이들 미끄럼타기 만큼이나 손쉬웠던 밀수출이 그만 일본군 감찰대에 적발당하면서 밀수 품목 전량이 법원에 압류당하는 위기를 맞게 되었고 재판을 받던 도중에 8.15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고 압류당한 밀수 품목은 현재 서울역 앞에 있던 조일창고 세 동에 나눠 고스란히 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압류된 물자는 밀수품인지 아닌지 미처 가릴 새도 없이 미군정 법무관의 해제 명령에 따라 물주인 태창직물에 즉각 반환됐다.2.3. 재기
이를 계기로 위기에서 벗어난 후 정크선 무역에 뛰어들게 되는데, 종전이 됐으나 중국에서 미처 가져가지 못한 일본 군수품이나 상가의 창고를 중국 상인들이 털어 정크선에 싣고 인천항으로 들어와서 다른 물자와 교환해가곤 했는데 사실상 허락될 수 없는 밀무역이었다. 백낙승은 초기부터 정크 무역에 뛰어들어 다시금 거대 무역상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오래 가지 못해 해방 후 1년간 자취를 감춰버리게 되자 그는 새로운 돈줄을 찾아 이번에는 정치에 눈을 돌렸다. 서슬 퍼런 일본 관동군 헌병대를 뚫었던 솜씨를 또다시 유감없이 발휘해 이번에는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승만에게 접근했다.당시 이승만은 돈암장에서 마포장으로 새로운 거처를 옮기면서 정치자금이 절실하게 필요하던 때였다. 이 때 백낙승은 정치자금으로 거액인 70만원[8]을 헌납한데 이어 이후에도 매달 빠짐없이 상당액을 헌납하면서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되었고 경무대[9]로 들어가게 된다.
그는 일본의 귀속 재산이었던 고려방직공사 영등포공장을 이승만의 도움으로 인수받을 수 있었음은 물론 식산은행[10]으로부터 무려 500만 달러까지 융자받고 대한문화선전이 전국의 홍삼 판매권을 인수받은데 이어 조선기계의 인수와 함께 일본에서 대량으로 기계를 들여와 기업을 확장했다.
1948년 전후에는 태창방직을 모기업으로 태창공업, 태창직물, 해전직물, 대한문화선전, 조선기계 등 계열기업을 즐비하게 거느리면서 '태창재벌'을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대한민국 최초의 재벌이 되었다.
2.4. 두번째 위기
그러나 1950년 한국 전쟁으로 파괴된 공장을 복구하면서 지나친 특혜를 받은 데다가 삼백 파동과 연계자금 등 크고 작은 사건을 일으키게 되면서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후 1956년 백낙승은 작고했지만 그의 장례식은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찾는 이가 없어 매우 쓸쓸하기만 했다. 500년 전통을 자랑하던 종로 육의전의 마지막 후예이자, 최초로 집단 기업과 거대 자본을 일궈낸 재벌 총수의 죽음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초라했다.이후 아들인 백남일[11]에게 경영권을 넘겼고 어떻게든 태창재벌을 다시 일으켜보려고 안간힘을 다했지만 결국 백약이 무효일 만큼 돌이킬 수 없게 되었고 거칠게 휘몰아친 정치권력의 폭풍 위에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2.5. 결말
이후 1961년 부정 축재 처리 과정에서 전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고 백남일 등은 일본으로 망명. 할아버지 대부터 꾸준히 투자해 놓은 일본 동양면화[12]의 주식이 그들 일가의 마지막 안식처를 제공했다. 이로써 태창그룹은 1961년 해체되어 54년의 역사를 마감했고 태창방직은 서갑호에 의해 인수되었는데, 이것이 지금의 방림이 된다.3. 계열사
[1] 다만 한자는 '泰昌'으로 같다.[2] 현재 가치로는 약 500억원[3] 현재 가치로는 약 1000억원[4] 현재 가치로는 약 250억원[5] 현재 가치로는 약 60억원[6] 세계적인 비디오 아트 작가 백남준의 부친.[7] 미즈호 파이낸셜 그룹 계열의 종합상사로 일본 최대의 종합상사. 돌 푸드 컴퍼니의 아시아 총판 등을 맡고 있다.[8] 현재 가치로 약 30억원[9] 현 청와대[10] 현 산업은행[11] 백남준한테는 형이다.[12] 1920년 설립. 그룹 해체 이후 1970년에 토멘 주식회사(トーメン株式会社)로 사명을 변경했으며 2006년 토요타자동차 계열의 종합 상사인 도요타통상(豊田通商)에 합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