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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4 08:58:35

토니 예보아

토니 예보아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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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93 · 199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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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레전드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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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레쿰 첼시 구단주
파일:Yeboah_Profile.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토니 예보아
Tony Yeboah
본명 안소니 예보아
Anthony Yeboah
출생 1966년 6월 6일 ([age(1966-06-06)]세) /
가나 쿠마시
국적 파일:가나 국기.svg 가나
신체 180cm
직업 축구 선수 (스트라이커 / 은퇴)
축구 경영인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아산테 코토코 SC (1981~1983)
코너스톤스 쿠마시 (1983~1985)
오콰우 유나이티드 FC (1986~1987)
1. FC 자르브뤼켄 (1988~1990)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1990~1995)
리즈 유나이티드 FC (1995~1997)
함부르크 SV (1997~2001)
알 이티하드 (2001~2002)
경영인 베레쿰 첼시[1] (2008~ )
국가대표 59경기 29골 (가나 / 1985~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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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eee,#191919><colcolor=#000> 가족 조카 켈빈 예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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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선수 경력
2.1. 클럽2.2. 국가대표 경력
3. 기록
3.1. 대회 기록3.2. 개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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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Yeboah_Frankfurt.jpg

가나의 前 축구 선수로 현재 가나 프리미어 리그 팀인 베레쿰 첼시의 구단주를 역임하고 있으며 호텔 사업과 스포츠 에이전시를 운영하고 있다.

예보아는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하는 아프리카 선수들의 선구자격인 선수로 한국의 차범근과 같은 위상의 인물이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1981년 15세의 어린 나이에 가나 명문팀 아산테 코토코에서 데뷔한 그는, 이후 팀을 여러번 옮기며 가나 리그에서 성장했다. 1986년과 1987년 가나 프리미어리그 득점왕에 2년 연속 오르며 국내리그를 확실히 평정했다.

1988년 2. 분데스리가1. FC 자르브뤼켄에 입단하며 최초의 독일 프로축구 흑인 선수로 기록되었고, 1988-89 시즌 적응기를 거쳐 1989-90 시즌 리그 37경기 17골로 대활약했다.

1990년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에 입단하며 1부 리그에 등장했다. 최초의 흑인 선수다 보니 온갖 인종차별을 당했지만, 1990-91 시즌 리그 26경기 8골로 연착륙에 성공한 뒤 프랑크푸르트에서 5년간 리그 123경기 68골, 도합 156경기 89골이라는 가공할만한 득점력으로 모든 차별을 잠재웠다. 또한 1992-93 시즌에는 27경기 20골, 1993-94 시즌에는 22경기 18골로 2시즌 연속 분데스리가 득점왕을 차지했다. 또한 프랑크푸르트 팀 역사상 최초로 외국인 주장에 올라 리더십도 발휘했다.

1995년 1월, 시즌 도중 PL의 리즈 유나이티드가 그를 340만 파운드에 영입해 잉글랜드로 건너갔다. 분데스리가에서 전반기 14경기 7골로 여전한 모습을 보여주던 예보아는, 리그 적응기가 필요없는 모습으로 후반기 리즈에서 18경기 12골로 잉글랜드를 폭격했다. 리즈의 주전 스트라이커를 꿰찬 예보아는 1995-96 시즌에도 부상으로 빠진 기간이 있지만 리그 22경기 12골로 위력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1996-97 시즌 새로 부임한 조지 그레이엄 감독과의 불화로 단 리그 7경기에만 출전했고, 시즌 종료 후 함부르크 SV로 이적해 다시 독일로 돌아갔다.

1년을 제대로 뛰지 못했던 탓도 있고, 부상도 완벽히 낫지 않아서 1997-98 시즌 함부르크에서 23경기 3골에 그친다 그러나 1998-99 시즌부터 다시 힘을 쓰기 시작해 리그 전 경기 출장과 함께 14골을 득점하며 30대의 나이에 다시 두자릿수 득점력을 회복했다. 1999-00 시즌 24경기 9골을 기록한 후 슬슬 백업 공격수로 자리를 내주었고, 2002년까지 함부르크에서 활약한 뒤 카타르로 건너가 1시즌을 더 소화하고 선수생활을 마무리했다.

2.2. 국가대표 경력

1990년대 가나 대표팀의 에이스 공격수였다. 하필 이 때의 가나가 다른 국제대회는 다 나와도 FIFA 월드컵 본선 무대만은 밟지 못하던 지지리도 운이 없던 시절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예보아의 국가대표 경력도 클럽 경력에 비해 많이 빈약하다.[2]

통산 A매치 59경기 29골을 기록해 그래도 이 당시까지 가나 A매치 최다 득점자였다. 세 차례의 네이션스컵에 나가 통산 4골을 득점했고, 1992년 네이션스컵 준우승을 기록했다. 이런 활약이 있어서 월드컵 출전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1993년 FIFA 올해의 선수 9위에 랭크될 정도였다.

이후 통산 최다골 기록은 아베디 펠레아사모아 기안이 연이어 깨트리지만, 90년대 가나를 대표하는 공격수이자 국가대표 레전드로 남은 선수다.

3. 기록

3.1. 대회 기록

3.2. 개인 수상



[1] 가나 프리미어 리그의 팀이다.[2] 1990년대 가나는 FIFA 주관 연령별 대회의 절대강자였다. FIFA U-17 월드컵에서 1991년, 1995년 대회 우승과 1993년, 1997년 대회 준우승, 그러니까 대회 4회 연속 결승진출이라는 어마어마한 성적을 내고 있었고, 이 선수들이 고스란히 U-20 대표팀으로 올라가 FIFA U-20 월드컵 1993년 대회 준우승과 1997년 대회 4강의 성적을 냈다. 추가로 이미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따며 아프리카 최초로 축구 종목 메달을 획득하는 성적도 냈다. 또한 국가대표팀도 1992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준우승을 포함해 1992년부터 1998년까지 4개 대회 연속 본선진출을 하는 등 경쟁력을 확실히 나타냈는데 유독 월드컵만 진출을 못하고 있었으니....[3] CAF 챔피언스 리그의 전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