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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6 18:28:26

아베디 펠레

아베디 펠레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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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파일:아프리카 축구 연맹 로고.svg
1991 · 1992 · 1993
베스트팀
}}} ||
가나의 前 축구선수
파일:Ex-Ghana-captain-Abedi-Pele.jpg
<colbgcolor=#eeeeee><colcolor=#000000> 이름 아베디 펠레
Abedi Pelé
본명 아베디 아유[1]
Abedi Ayew
출생 1964년 11월 5일 ([age(1964-11-05)]세) /
가나 이스트아킴시[2]
국적
[[가나|]][[틀:국기|]][[틀:국기|]]
|
[[프랑스|]][[틀:국기|]][[틀:국기|]]
직업 축구선수(공격형 미드필더 / 은퇴)
축구감독
축구행정가
소속 <colbgcolor=#eeeeee><colcolor=#000000> 선수 그레이트 팰컨스 (1970~1978 / 유스)
레알 타말레 유나이티드 (1980~1982)
알 사드 SC (1982~1983)
FC 취리히 (1983~1984)
AS 드라공 FC 드 루에메 (1984)
레알 타말레 유나이티드 (1985)
샤무아 니오르 FC (1986~1987)
FC 뮐루즈 (1987)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1988~1993)
LOSC 릴 (1988~1990 / 임대)
올랭피크 리옹 (1993~1994)
토리노 FC (1994~1996)
TSV 1860 뮌헨 (1996~1998)
알 아인 FC (1998~2000)
감독 FC 나니아 아크라 (2004~ )
행정가 FC 나니아 아크라 (2004~ / 회장)
국가대표 파일:가나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73경기 33골 (가나 / 1982~1998)
가족 동생 콰메 아이유
장남 이브라힘 아이유
차남 안드레 아이유
삼남 조던 아이유

1. 개요2. 클럽 경력3. 국가대표 경력4. 플레이 스타일5. 은퇴 이후6. 수상
6.1. 대회 기록6.2. 개인 수상
7. 여담

[clearfix]

1. 개요

가나 국적의 前 축구 선수로 90년대 가나 축구를 대표했던 스타 플레이어였다. 또한 소속팀에서 각광받는 스타였다.

또한 아들 3명이 대를 이어 가나 축구 국가대표팀로 활동하는 것[3]으로도 유명하다.

2. 클럽 경력

10대 시절부터 가나에서 공을 차던 아베디 펠레는 주목받는 선수도 아닌 그저 그런 선수에 불과했다. 여러 클럽은 전전했지만 딱히 활약을 한적이 없었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 2부리그인 샤무아 니오르로 이적하게 되고 이 곳에서 14골을 넣는 맹활약을 펼치면서 많은 주목을 받게 된다. 덕분에 당시 막강한 스쿼드를 구축중이던 마르세유에게 러브콜을 받아 아베디 펠레는 그 제안을 수락한다.

하지만 마르세유는 막강한 스쿼드로 인해 자리는 포화 상태였고, 1년 동안 겨우 9경기 출장 그리고 0득점에 그친다. 결국 펠레는 릴OSC에 임대되지만 아베디 펠레는 자기를 임대보낸 마르세유를 비웃으면서 보란듯이 거침없는 활약을 펼쳐나가기 시작한다. 37경기 9득점. 이 활약으로 다시 기대를 받은 그는 마르세유로 복귀하게 된다.

그리고 아베디 펠레를 품은 마르세유는 아베디 펠레와 장 피에르 파팽, 크리스 워들 이들의 삼각편대를 내세워 강력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마침내 이들의 고공폭격은 마르세유를 리그 우승과 유로피언 컵 결승전으로 인도하게 되지만 당시 동유럽의 강호였던 FK 츠르베나 즈베즈다에게 승부차기에서 패하는 바람에 준우승에 그친다. 그리고 파팽과 와들이 마르세유를 떠났지만 루디 푈러알렌 보크시치가 합류하였고, 아베디 펠레는 등번호 10번을 달며 마르세유의 에이스로 등극하게 된다.
파일:external/lapalabraesdeporte.files.wordpress.com/23.jpg
왼쪽 상단부터 시계 방향으로 파비앵 바르테즈, 프랑크 소제, 마르셀 드사이, 루디 푈러, 바질 볼리, 에릭 디 메코, 장자크 에들리, 알렌 복시치, 디디에 데샹, 아베디 펠레, 조슬랭 앙글로마.
파일:abedi-bigyear.jpg

그는 마르세유가 계속해서 리그 우승을 차지하게 하는 1등 공신이었으며, 1992-93 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진출하면서 마르세유의 통산 2회 결승 진출이라는 업적을 세운다. 그리고 그 결승전에서 코너킥으로 바질 볼리에게 헤더 골을 기록해주는 어시스트를 하였고, 이 결승골을 잘 지켜서 1-0으로 AC 밀란을 꺾으며 마르세유는 프랑스 클럽 최초로 빅 이어를 든다.

이렇게 뛰어난 활약을 펼친 펠레는 1991년, 1992년, 1993년 연속으로 아프리카 올해의 축구 선수를 석권한다.

그러나 마르세유가 승부조작 혐의로 1992-93 시즌 리그 우승을 박탈당하고[4] 아베디 펠레는 리옹으로 떠난다. 그후 토리노, 1860 뮌헨을 전전하다 중동에서 은퇴하게 된다.

3. 국가대표 경력

73경기를 출전하여 33득점을 기록하여 현역 당시 최다득점자였지만 아사모아 기안이 갱신하였다. 다만 월드컵과는 인연이 없었다.

4. 플레이 스타일



가나를 넘어 아프리카 역대 최고의 축구선수를 논할때 빠지지 않고 후보에 등장할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보유했던 선수. 당장 '펠레'라는 축구선수로서 최고로 영예스러운 별명을 갖고 있으니 그의 천재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장 피에르 파팽,크리스 워들 등 훌륭한 선수들을 보유했던 당시 마르세유 팀에서도 당당히 핵심 선수로 여겨질 정도로 독보적인 볼 컨트롤과 개인기의 귀재로 평가받았다. 공을 몸의 일부처럼 능숙하게 다루어 능수능란하게 수비수를 뚫고 기회를 창출할 수 있었으며, 파팽이라는 특급 골잡이, 워들이라는 특급 윙어를 보유했던 마르세유는 아베디 펠레라는 특급 공격형 미드필더와 함께 유럽 축구사에서도 회자될 전설의 공격 트리오를 구축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개인적 능력을 넘어 아베디 펠레 최고의 장점은 큰 대회에서 강한 모습으로 회자된다. 특히 1992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8강 콩고전에서 당시 평가로 '1986 월드컵의 디에고 마라도나와 버금갈 정도'의 버스기사나 다름없는 최고의 단일 대회 캐리능력을 보여준 바 있다. 또한 소속팀 마르세유에서도 TV 주간 축구 명장면에 밥먹듯이 들어갈 정도로 클러치 골을 화려하게, 많이 넣었다.

5. 은퇴 이후

6. 수상

6.1. 대회 기록

6.2. 개인 수상

7. 여담


[1] Ayew는 가나 아샨티족의 성이며 /ˈɑːjuː/'아유'로 발음된다. '아예우'는 '기타 언어 표기의 일반 원칙'에 따른 표기일 뿐 프랑스에서 쓰이는 발음이 아니다. 프랑스에서는 /ajəw/'아유우'로 발음한다.[2] 현 아부아콰사우스시 키비[3] 다만 장남 이브라힘 아유는 2010년 이후 국가대표팀에 소집되지 않았다.[4] 다행히 챔피언스리그는 승부조작과 관련이 없었기에 우승 타이틀은 그대로 유지[5] 아프리카 선수의 유럽 진출이 활발해지기 시작한 것은 2000년 6월에 맺어진 코토누 협정과 그 이후에 FIFA 공식 룰이 된 보스만 룰이 제정된 이후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