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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0 09:38:52

파리 관현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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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주요 관현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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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주요 관현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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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연혁3. 역대 음악 감독4. 특징

1. 개요

프랑스의 수도인 파리를 거점으로 하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오케스트라.

2. 연혁

공식 창단 연도는 1967년으로, 유럽 유수의 악단들 중에는 뉴비에 속한다. 하지만 완전히 새로 만든 것은 아닌데, 원래 1828년부터 존재하고 있던 파리 음악원 관현악단[1](Orchestre de la Société des Concerts du Conservatoire)을 모체로 재조직한 악단이다. 그래서 해체 후 다시 만든 악단이기 때문에 창단 연도는 1967년으로 보고 있다.

명칭대로 파리 음악원 소속이었던 저 관현악단은 창단 당시 관현악 연주 분야가 빈약했던 프랑스에서 거의 유일한 연주회 전문 악단으로 활동하면서 두각을 나타냈고, 베를리오즈프랑크, 생상 같은 거장들의 숱한 관현악곡들을 초연하는 등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겨온 고참 관현악단이었다.

세계적인 대도시 파리라는 큰 우물 속에서 별 탈없이 잘 굴러왔지만, 1950년대 이후 음반 산업이 발전하면서 세계 유수 오케스트라의 음악을 원음에 가까운 음질로 접할 수 있게 되면서 파리 음악원 오케스트라에게 위기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독일, 미국, 영국의 명문 오케스트라들과의 실력 격차가 드러나게 된 것. 게다가 재정적으로도 그다지 좋지 않아서 1960년대에는 상임 지휘자도 제대로 못구하고 심각하게 비실대기 시작했다.[2] 한편 프랑스 문화 장관이 된 앙드레 말로베를린 필을 비롯해 세계적인 명문 악단이 즐비한 이웃 독일에 비해서, 자칭 문화 강국임에도 불구하고 변변하게 내세울 오케스트라가 없는 프랑스의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고, 이에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하에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를 창단할 계획을 세웠다. 이에 앙드레 말로는 파리 음악원 오케스트라를 해체해 버렸고, 그 대신 문화부의 음악 부서를 담당하던 작곡가 마르셀 란도프스키를 통해 파리 오케스트라(Orchestre de Paris)로 재창단했다.

초대 음악감독에는 노장 지휘자 샤를 뮌슈가 초빙되었다. 뮌슈는 독일어권 지역인 알자스 출신으로, 푸르트벵글러브루노 발터가 이끌던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에서 악장을 역임했기 때문에 독일 음악에 능했다. 뮌시는 프랑스 재벌인 네슬레 그룹 오너의 딸과 결혼하게 되면서 독일을 떠나 파리에 정착했고, 네슬레 그룹 회장인 장인 어른이 사준 오케스트라로 파리에서 지휘자로 데뷔했다. 이후 파리에서 지휘자로 활동하면서 파리 오케스트라의 전신인 파리 음악원 오케스트라를 오랫동안 이끌었다. 2차대전 이후에는 주로 미국에서 활동했지만 1962년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 임기가 끝나고 프랑스로 돌아와 프랑스 국립 관현악단을 이끌고 있었다. 1967년 파리 오케스트라 창단되자 프랑스 음악계의 원로 지휘자인 뮌슈가 파리 오케스트라의 첫 음악감독이 된 것. 뮌슈는 짧은 시간 동안 악단의 연주력을 다듬어내고 다시 연주회 전문 악단으로 재출발시키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창단 직후 EMI에서 베를리오즈환상교향곡, 브람스의 교향곡 제1번, 드뷔시라벨의 관현악곡들을 취입하는 등 맹활약 했지만, 이듬해인 1968년에 뮌슈가 악단과 창단 이후 첫 미국 연주 여행을 하는 동안 리치먼드에서 심장마비로 급서하면서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뮌슈의 후임으로는 놀랍게도 당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종신 예술 감독을 맡고 있던 오스트리아 출신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음악 고문' 이라는 직책으로 들어왔다. 카라얀이 파리 오케스트라를 맡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카라얀의 아내인 엘리에테가 프랑스 출신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는 얘기도 있다. 카라얀은 2년여 정도만 활동하고 사임했다.[3]

1972년에 카라얀의 후임으로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 게오르그 솔티가 제2대 음악 감독에 공식 취임했다. 초기에 매우 열정적으로 활동했으나 결국 3년만에 사임하고 말았다. 파리 오케스트라에서 매우 시달렸다고 토로한 바 있다. 정명훈이 바스티유 오페라에서 소란 끝에 물러나게 되었을 때, 솔티는 파리가 원래 그런 곳이라며 정명훈을 두둔한 바 있다.

솔티의 뒤를 이어 다니엘 바렌보임이 상임지휘자에 취임했다. 그동안의 경륜이 있던 지휘자들과 달리 바렌보임은 33세에 불과한 젊은이였고, 당시에는 피아니스트로서의 명성에 비해 지휘자로서의 경력은 일천한 편이었다. 하지만 젊은 바렌보임은 열정과 유연함, 카리스마를 고루 갖추고 있었고 단원들과의 궁합도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이런 덕택에 바렌보임은 1989년에 퇴임할 때까지 거의 15년 동안 음악 감독직을 장기 유임했고, 이 기록은 2010년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바렌보임 시기에 악단은 안정화되었다. 카라얀이나 솔티보다 네임 밸류와 경험이 떨어졌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장점도 있었는데, 카라얀과 솔티가 자신들의 본진인 베를린 필, 시카고 심포니와 주로 녹음을 남겼던 반면 바렌보임에게는 파리 오케스트라가 메인이었기 때문에 바렌보임의 전속사였던 도이체 그라모폰에서 여러 음반을 남기기도 했다. 바렌보임은 보수적인 이미지가 강하고 당시에도 주류인 정통 독일 오스트리아 레퍼토리를 집중적으로 연주했지만 한편으로 악단의 정체성이나 마찬가지인 프랑스 음악과 현대음악도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바렌보임은 당시 프랑스에서 거의 연주되지 않던 브루크너 교향곡을 파리에 소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파리 오케스트라 역시 브루크너를 파리에 소개하려는 바렌보임의 열의에 적극적으로 따라와 브루크너 교향곡 9번을 연주하기 위해 무려 15회의 리허설을 거치기도 했다. 또 바렌보임은 피아니스트로서 단원들과 실내악 활동도 하는 등 악단의 저변을 상당히 넓혀놓았다. 바렌보임은 파리 오케스트라에서 물러난 이후 일약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로 발탁되었는데, 지휘자들이 기피하기로 유명한 파리 오케스트라를 장기간 잡음없이 이끈 리더십이 높이 평가받았다는 후문이다.

바렌보임이 사임한 후에는 소련 출신의 젊은 지휘자 세묜 비쉬코프가 뒤를 이었다. 전임자인 바렌보임과 마찬가지로 파리 오케스트라를 맡을 당시 차세대 지휘자로 각광받던 비쉬코프는 전임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도가 큰 지휘자는 아니었지만 레퍼토리의 폭도 넓은 편이었고 균형감 있는 음색을 만드는데 일가견이 있는 다재다능한 지휘자였다. 당시 전속사였던 필립스를 중심으로 음반 녹음도 이어갔다. 비시코프 시기에 현재 파리 오케스트라의 사운드가 어느 정도 완성되었다.

비쉬코프가 1998년 사임한 후에는 잠시 후임 물색에 혼선이 있었고, 헝가리독일 지휘자인 크리스토프 폰 도흐나니가 카라얀과 마찬가지로 음악 고문 자격으로 잠시 악단을 이끌기도 했다. 2000년에는 독일 출신의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 크리스토프 에셴바흐가 제5대 음악 감독으로 부임했다. 에셴바흐도 전속사인 텔덱을 통해 프랑스 음악을 중심으로 근현대 작품을 적극적으로 녹음했다. 음반 녹음은 프랑스 음악이 많은 편이지만 이는 음반사의 정책에 기인한 바가 크고 실제로 에셴바흐가 주력하던 레퍼토리는 정통 독일-오스트리아 레퍼토리였다. 에셴바흐는 바렌보임처럼 이 오케스트라를 맡을 당시에는 피아니스트로서 유명했지만 지휘자로서는 경력이 풍부하지는 않았는데 파리 오케스트라를 거치면서 지휘자로서도 인정받으며 유수의 오케스트라의 초청을 받게 되었다. 에셴바흐는 10년 동안 파리 오케스트라를 이끌면서 두 번째로 장기 재임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에셴바흐가 09/10년 시즌을 끝으로 미국의 워싱턴 내셔널 교향악단에 이임하게 되자, 후임으로 에스토니아계 미국 지휘자인 파보 얘르비가 10/11년 시즌부터 음악 감독을 맡게 되었다. 얘르비 또한 파리 오케스트라를 맡는 동안 정상급 지휘자 중 한명으로 인지도를 굳혔다. 얘르비는 2016년 여름 시즌을 기하여 사임하였고, 다니엘 하딩이 그 뒤를 이었다. 2019년 하딩이 사임한 이후 음악 감독은 현재 공석이다.

3. 역대 음악 감독

음악 감독이 아닌 음악 고문으로 활동했던 지휘자는 기울임체로 표기했다.

4. 특징

파리 관현악단의 대표 녹음, 샤를 뮌슈 지휘의 브람스 교향곡 1번
연주회 전문 악단이 그리 많지는 않은 프랑스 음악계를 대표하는 오케스트라로 평가받고 있다. 프랑스 국립 관현악단이 파리 오케스트라의 뒤를 잇고 있다.

특히 관악기 주자들의 역량은 비단 프랑스에 국한하지 않고 세계구 급의 달인들이라고 칭송받을 정도로 뛰어난 편이라고 자화자찬하지만, 막상 음반 연주를 근거로 판단한다면 현실은 튜닝조차 제대로 안되어 있는 한심한 경우도 있다...

프랑스 악단인 만큼 본국의 관현악 작품 연주에 일가견이 있지만, 뮌슈, 카라얀, 솔티, 바렌보임 등을 연이어 거치면서 독일, 오스트리아의 표준 관현악 레퍼토리도 적극적으로 다뤄서 연주곡 편식 현상도 없는 편이다. 특히 창단 초기에 샤를 뮌쉬와 녹음한 브람스 교향곡 1번은 지금도 파리 오케스트라의 대표음반으로 꼽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독일의 기라성 같은 오케스트라들이 줄기차기 녹음한 동곡 음반들 가운데서도 최고의 명반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있다. 어떤 평론가는 독일 오케스트라보다 더 독일적인 연주라고 평하기도 했다. 현대음악도 바렌보임 시기부터 쭉 다뤄온 탓에 어느 정도 익숙한 듯 하다. 합창 붙는 작품을 공연할 때는 1976년 창단된 파리 관현악단 합창단(Chœur de l'Orchestre de Paris)이 흔히 따라붙는다.

대표적인 명연으로는 앞서 언급된 창단 직후 녹음된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과 브람스 교향곡 1번이 꼽히고 있다. 창단 직후라 앙상블적인 측면에서는 덜 다음어졌지만 지휘자 샤를 뮌슈와 일체감을 보이며 상당한 집중력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이후 더이상 이만한 명음반이 나오지 못해서 아쉬울 따름.

하지만 연주회 전문 악단이라고는 해도, 파리의 공연장 대부분이 주로 오페라발레 같은 무대 작품 공연을 전문으로 하는 극장들이라 연주회만을 상설 개최하는 상주 공연장 잡는 일이 늘 문제가 되어 왔다. 샹젤리제 극장이나 팔레 드 콩그레, 살르 플레옐, 샤틀레 극장, 모가도르 극장, 시테 드 라 뮈지크 등 상주 혹은 임시 상주 공연장으로 거쳐간 곳들이었다.

그나마 가장 괜찮았다고 하던 살르 플레옐도 1998년에 운영난 때문에 매물로 나왔고, 2002년에는 이마저도 폐관되어 한때 상주 공연장 자격을 잃은 시절도 있었다. 그나마 프랑스 정부에서 긴급 지원을 해서 폐관은 면했고, 지원 자금으로 리모델링도 대대적으로 해서 2006년에 다시 재개관했다. 이 직후 파리 관현악단도 다시 상주 악단이 되어 2010년 현재까지 공연 중이다. 다만 여기도 성이 안차는지, 프랑스 정부 주도로 시테 드 라 뮈지크 근처에 새로 짓고 있는 2400석 규모의 필아르모니 드 파리가 2014년에 완공되면 그 쪽으로 옮겨갈 예정이라고 한다.

자체 음반사는 두고있지 않지만, 구글을 통한 음원제공 등 여러가지 경로로 음원 및 음반을 내고 있다.

[1] 뮌슈가 1938년부터 1946년까지 지휘봉을 잡고 클뤼탕스가 1946년부터 1960년까지 지휘봉을 잡은 적이 있다. 1960년부터 1967년까지는 상임 지휘자 없이 돌아갔고 이 시기에도 클뤼탕스와 많은 녹음을 남겼다. 클뤼탕스는 1966년에 암투병을 위해 지휘를 그만뒀고 1967년에 사망하였다. 1960년대 후반에 악단이 안좋게 돌아가긴 했지만 1964년 클뤼탕스와 남긴 비제-아를의 여인, 카르멘 모음곡, 베를리오즈 환상 교향곡 실황 등의 좋은 녹음을 남기기도 하였다.[2] 삐에르 몽퇴는 프랑스 오케스트라의 들쭉날쭉한 실력에 실망한 나머지 런던 심포니로 자리를 옮길 정도였다.[3] 당시 카라얀은 DG와 전속 계약한 베를린필, 데카와 전속 계약한 빈필을 통해 음반을 출시하고 있었으며 DG와는 관현악곡 중심으로 음반을 출시하고 있었으나(데카와는 오페라) 그때 까지는 레퍼토리 중복 녹음을 허용하지 않는 DG의 정책 때문에 브루크너 - 당시 DG에서는 오이겐 요훔이 브루크너 사이클을 진행하고 있었다. - 교항곡을 녹음하지 못하자 EMI와의 계약을 다시 추진하게 되었고 그 목적으로 EMI와 계약된 파리오케스트라의 고문에 취임 한 것이라는 의견이 대세이다. 베를린필이 DG와의 독점 계약이 종료되자 카라얀은 바로 파리 오케스트라와의 관계를 청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