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ff8c00> 지장사 팔상도[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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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석가모니의 생애를 여덟 장의 그림으로 그린 것으로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 부처의 생에서 극적인 사건을 골라 그린 불화이다.여덟 장이라고는 하지만 한 장의 그림 안에 시간차가 있는, 심지어 시간적으로 선후 차이가 있는 것도 모자라 발생한 무대가 서로 다른 에피소드가 같은 화면에 한꺼번에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2] 이런 식의 표현은 일본 학자들은 이시동도법(異時同圖法), 한국 학자들은 '다원적 구성 방식'이라고 해서 특히 주목하였는데, 시간의 흐름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그림이 선택할 수 있는 주목할 만한 서사적 표현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팔상도의 경우는 순차적인 장면의 연계성에 주안점을 두기보다 관련 장면을 상징적으로 집약하고자 했던 점에서 다원적 구성법의 존재 이유를 설명할 수가 있다. 전근대에는 드문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림의 목적이 어떠한 인물이나 사건을 묘사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에 대한 숭앙심을 고취시키는 데에 있었으므로.
한 종교의 창시자의 생 전체를 몇 장의 그림에 담아내기 위해서 팔상도는 텍스트의 중간 내용은 과감하게 생략하면서도 처음과 마지막 부분만큼은 온전히 살려서 전체 틀을 보여주는 방식을 택했고, 장면의 내용에 있어서는 실제 문헌의 세부적인 내용과 궤를 같이 하면서도 선택된 부분의 상징성을 두드러지게 부각시켜 거시적인 틀과 미시적인 장면 묘사라는 면에서 긍정적인 효과를 낼 수 있었다.
2. 역사
석가모니 부처와 관련된 불경고사에는 세 종류가 있는데, 첫 번째 석가모니 부처의 전생 이야기인 본생담(자타카), 두 번째는 석가모니 부처와 인연이 있는 제자나 신도들의 전생 이야기인 본연담(아파드나),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 본인의 생을 다룬 불전이고, 팔상도는 본생담이 가미된 불전을 그림으로 옮긴 것이라 할 수 있다.인도에서는 이미 기원전 2세기경 석가모니 부처의 생을 묘사한 불전도가 스투파의 평두 또는 탑문 등에 조각되었다. 다만 그 그림을 보면 주로 출생, 성도, 전법륜, 그리고 열반. 또는 입태, 출유, 출가, 항마 이렇게 네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4~5세기경의 키질 석굴도 출유, 고행, 항마, 열반 장면이나 출가, 수도, 항마, 전법륜 등의 장면이 확인되고 있다. 이는 불전도에 표현되던 석가모니 부처의 생에 있어 중요한 곳이라고 할 수 있는 네 곳의 성지 즉 룸비니(탄생), 부다가야(성도), 사르나트(초전법륜) 그리고 쿠시나가르(열반) 네 곳의 성지를 표현하고 드러내기 위한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여기에 네 곳이 더 추가되어 8대 성지가 되고, 각 성지와 관련된 설화들이 결합되어 팔상이라는 개념이 확립된 것으로 보인다.
인도의 팔상은 중국이나 한국의 팔상과는 달리 탄생-항마성도-초전법륜-대신변-도리천에서 내려옴(종도리천강하)-술에 취한 코끼리를 조복시킴(취상조복)-원숭이가 꿀을 바침(원후봉밀)-열반이고, 중국은 항도솔-입태-주태-출태-출가-항마-성도-전법륜-열반으로 확립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조선 전기부터 팔상도가 본격적으로 조성되기 시작했다. 1446년 소헌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1450년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팔상성도도를 제작하였다는 문종실록의 기록이 있어서 조선 초기에 '팔상도'로 석가모니 부처의 생애를 그려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447년의 석보상절에서 팔상을 도솔래의-비람강생-사문유관-유성출가-설산수도-수하항마-녹원전법-쌍림열반으로 밝힌 이후 모든 팔상도가 같은 화제 아래 제작되었다. 현재 일본에 전해지는 석가탄생도와 석가출가도 역시 팔상도의 구성으로 해석될 수 있다.
석가탄생도 | 석가출가도 |
한국의 팔상도는 주로 월인석보(1459)를 도상적인 근거로 삼고 있는데, 월인석보는 명대에 크게 유행했던 석씨원류응화사적[3]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같은 석씨원류를 저본으로 하면서도 중국의 경우는 고정화되지 않은 다양한 화면 구성을 가진 반면[4], 한국의 경우는 월인석보 이래로 정해진 여덟 장면만을 꾸준하게 계승해 왔다.
불전의 도상학적 근거는 불본행집경이다. 선종의 경우는 설산수도상과 수하항마상 사이에 설산출산상이란 걸 하나 더 끼워 넣어서 9상으로 만들었는데, 싯다르타가 고행을 포기하고 설산을 떠나는 것을 선종에서는 중요한 사건으로 보고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이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은 뒤에 다시 선사적인 방편을 갖추어서 중생들의 세계로 나아갔다고 보았다.
각 사찰에 남아 있는 팔상도는 대부분이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조선 전기에 제작된 팔상도는 대체로 일본에 넘어가 있다. 혼가쿠지 소장 석가탄생도, 오사카 시립미술관 소장 불전도, 곤고부지 소장 팔상도(1535), 센코지 소장 열반도 등 대부분 월인석보의 판화처럼 한 상에 1, 2장면만을 간단하게 그린 형식이다.
3. 구성
팔상도를 구성하는 여덟 그림은 다음과 같다. 해당 그림은 용문사 팔상도이다. 순서는 그림 아래쪽의 번호대로 ①‘비람강생상’과 ‘도솔래의상’ ②‘유성출가상’과 ‘사문유관상’ ③‘수하항마상’과 ‘설산수도상’ ④‘쌍림열반상’과 ‘녹원전법상’이다.
3.1.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
고양 흥국사 소장 도솔래의상. | 선암사 도솔래의상. [5] |
다만 도솔천에서의 호명보살의 모습만을 그리지는 않는다. 소구담 시절 도둑으로 몰려 말뚝에 묶인 채 활을 맞는 모습부터 흰 코끼리를 탄 호명보살이 도솔천에서 내려와 마야 부인의 태중으로 들어가는 모습도 모두 그려져 있다.
쌍계사 팔상도는 석씨원류응화사적의 구담귀성에 실려 있는 일화가 그려져 있어[6] 이를 참고하였음을 알 수 있다.
3.2.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
룸비니 정원에서 태어난 가비라국의 왕자 싯다르타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사실 비람이라는 말은 문제가 있는 번역인데, 원래 석가모니 부처 즉 싯다르타가 태어난 곳의 이름은 룸비니이고, 이를 한역해서 람비니원이라고 불렀는데, 세조가 왕자 시절 어머니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한 석보상절을 편찬하면서 팔상의 화제들을 모두 다섯 글자로 끼워 맞춰 통일시켰는데 그러다 그만'비람'으로 써버린 것이다. '비람'은 불교 용어로 철위산 바깥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라는 뜻이 버젓이 있다.
3.3.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사문유관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오른쪽 위에서부터 시계 방향으로 늙은이, 병자, 망자를 만나고 이어 왼쪽 위에서 출가한 사문을 만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3.4.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
맨 위에 구름 위에서 말을 타고 있는 것이 싯다르타 태자이다. 태자의 말 다리 부분을 보면 천인들이 손으로 들고 있는 것처럼 그려져 있는데, 싯다르타 태자가 성을 타넘을 때 천상의 역사들이 말을 통째로 들어올려서 태자가 들키지 않고 성을 넘어갈 수 있었다는 불전의 설명을 묘사한 것이다.
3.5.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설산수도는 출가한 뒤 싯다르타가 온갖 고행을 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3.6.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예수가 광야에서 기도하던 도중에 나타난 사탄의 유혹을 이겨내는 대목과 마찬가지로 성도를 앞둔 싯다르타에게 위협을 느낀 제육천마왕 파순이 그를 유혹하려 하고, 싯다르타는 그 유혹을 이겨내고 정각을 이룬다.
3.7. 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
깨달음을 얻고 정각을 이루어 붓다가 된 석가모니가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들에게 설법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조선 후기 팔상도의 경우 녹원전법과 화엄설법이 한 화면에 그려져 있고 특히 화엄설법이 더 비중있게 표현되어 있다. 통도사 팔상도의 경우 화엄설법도가 비로자나불 중심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점이 큰 특징인데, 이는 중국이나 일본의 불전도에서는 볼 수 없는 조선만의 고유함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 주화엄경이 유입된 것은 선종 4년(1087)이고, 조선 후기에는 특히 화엄 사상이 크게 유행하였는데, 숙종 12년(1686년)까지 판각되었던 화엄경소의 변상도가 조선 후기에는 화엄경의 설법 장면을 의미하는 하나의 도상으로 정착되었고 그것이 팔상도에까지 들어간 것이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석보상절이나 월인석보 같은 조선 전기 팔상도에서도 화엄대법이 크게 강조되고 있어 조선 후기의 화엄신앙과 결부시키기는 맞지 않다고 하는 반론도 있다.
쌍계사 녹원전법상에는 '녹왕본생'이라고 해서 석가모니 부처의 본생담 가운데 하나인 바라나시(범여국)의 녹왕 본생담이 그려져 있다. 또한 본 항목에 소개된 선암사 녹원전법상은 그림 아래쪽 좌우에 석가모니 부처와 관련된 전승이 하나씩 그려져 있는데, 왼쪽의 그림은 석가모니 부처 재세시 주요 승원이었던 사위국의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7]이 세워지게 된 연기담이다.
그림에서 한쪽 모퉁이부터 노란색으로 바닥이 채색되어 있는데 그것은 금을 묘사한 것으로, 빨간 옷을 입은 사람이 손에 똑같이 노랗게 표현된 금을 들고 있다. 금을 바닥에 깔고 있는 것을 그린 것이다. 기수급고독원은 원래 사위국의 태자 제타가 소유한 원림이었는데, 사위국의 부자로 아나따삔띠까[8]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던 수닷타 장자가 석가모니 부처님께 봉헌할 사찰을 이곳에 짓고 싶으니 자신에게 팔아달라고 태자에게 요청하자 제타 태자는 코웃음을 치면서 "그 땅바닥에 네가 가진 보물과 돈을 빈틈없이 깔아낼 수 있다면 기꺼이 너한테 팔아주마"라고 했다. 그리고 아나따삔띠까 장자는 태자의 말을 그대로 실현으로 옮겨버렸고 놀란 제타 태자는 그 땅을 약속대로 수닷타에게 팔았다. 이후 석가모니 부처에게 봉헌된 그 사원은 '제타 태자의 원림 터에 아나따삔띠까 장자가 세운 사원'이라는 뜻의 '제따와나 아나따삔다다샤 아라마'(jetavana-anāthapiṇḍadasya-ārāma)이라고 불렸고, 한역하면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 줄여서 기원정사(祇園精舎)로 불리게 되었다. 한국의 경주에 있는 기림사나 일본의 고전인 헤이케모노가타리 첫 구절에 나오는 기원정사도 모두 여기서 따왔다.
오른쪽은 석가모니 부처와 아난 존자가 길을 지나다가 어린아이들이 길에서 흙장난하던 것을 보게 된 장면인데, 그 흙장난하던 아이들 중 하나가 자신이 갖고 놀던 모래를 그릇에 담아서 석가모니 부처에게 공양이랍시고 바치는 시늉을 했고, 아난은 옆에서 "이녀석아, 아무리 장난이라도 부처님한테 흙을 바치면 안 되지."라고 타일렀지만 석가모니 부처는 놔두라고 하면서 아이가 바친 흙을 조용히 받아들었다. 석가모니 부처는 자신에게 흙을 바친 그 아이를 돌아보며 피식 웃었는데, 아난이 이유를 묻자 석가모니 부처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 아이는 나에게 이 모래를 보시한 공덕으로, 다음 생에 이 인도를 통일하는 위대한 제왕으로 태어날 것이다. 하지만 그 공덕이 이렇게 모래를 보시해서 얻은 공덕이니, 피부가 까칠하고 성격도 많이 거칠 게야.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는 아이가 바친 모래를 자신이 머무는 자리에 고루 뿌려 깔아 두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아이가 나중에 환생한 인물이 누구였느냐 하면...
3.8.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
쿠시나가르 성 니련선하 강변의 사라쌍수 아래에서 여든의 생애를 마치고 열반에 드는 장면을 그린다.
4. 팔상도와 사찰 건축
절에서 팔상도가 모셔지는 전각은 영산전(팔상전)이다. 한국에 현존하는 팔상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 예천 용문사 팔상도(1709년)인데, 옆에 사대천왕헌의, 구룡토수관목, 수하탄생, 지자연용출사지 등의 글을 써놔서 그게 무슨 장면인지를 볼 수 있게 했다.통도사 영산전 팔상도(1775년)는 여백을 거의 남기지 않고 건물과 나무, 구름 등의 배경으로 적절하게 구도를 나눠서 표현했는데, 경전의 내용을 가장 체계적으로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쌍계사 영산전 팔상도는 고성 운흥사 팔상도, 송광사 팔상도를 모본으로 했다고 여겨질 정도로 화면 구성과 도상에서 유사한 점이 많은데, 실제로 운흥사, 송광사, 쌍계사 팔상도 모두 의겸 또는 의겸의 영향을 받은 화승들이 제작한 것이기 때문이다. 1728년에 일선을 수화승으로 하는 후경, 명정, 최우, 원민, 처영, 신영, 영호 등의 승려들이 공동으로 일종의 '스튜디오' 형식으로 팀을 짜서 제작하였다. 지금 쌍계사에 가보면 영산전에 모셔진 그림은 복제본이고, 원본은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2] 이런 형식의 표현은 부산진순절도나 동래부순절도 같은 그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3] 1425년 중국 명나라의 사명 출신으로 대보은사의 승려였던 보성이 편찬, 간행한 것으로 명대에는 영락~가정 연간까지 네 차례에 걸쳐 간행되어 황실은 물론이고 민간에까지 널리 유포되었다.[4] 명대 불전도는 여덟 장면에서 그치지 않고 48장면, 84장면, 200장면, 205장면 등 석가모니 부처의 입태 이전부터 열반 이후까지 다양다채한 장면들을 사원 내부 벽면에 장황하게 도해하는 것이 특징이다[5] 팔상전에 모셔져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다른 팔상전 소장 팔상도들과 함께 도난되어 현재는 행방불명이다.[6] 석가모니 부처의 성인 고타마의 유래에 대해서, 옛날 겁초에 평등왕으로부터 대모초왕에 이르러 대모초왕의 아들인 의마왕이 동생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고타마'라는 바라문을 따라가 '작은 고타마'이라고 불리며 스승과도 떨어져 옥까까 정원(甘蔗園)에서 수행하는데, 당시 온 나라에 도둑이 창궐하여 병사를 풀어 도둑을 쫓는데, 관청의 물품을 훔쳐 도망치던 도둑들이 자신들이 훔친 것을 옥까까 정원에 뿌려 놓고 도망쳤고, 도둑을 쫓던 병사들이 도둑의 발자국을 뒤쫓아 따라왔다가 하필 그 자리에서 수행하고 있던 소 고타마를 도둑으로 오해하고 그를 산채로 나무에 꿰어서 도둑질한 죄인이 어떤 처벌을 받게 되는지 온 나라에 보이게 했다. 이걸 멀리서 보고 기겁한 고타마 바라문이 신족통으로 옥까까 정원까지 날아와 "내 제자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이렇게 참혹하게 대하느냐?"고 쫓아낸 뒤, 이미 죽은 소 고타마의 피가 스며든 흙을 두 그릇에 담아서 사당에 모시고 천신에게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축원하자, 열달 뒤에 그릇에서 한 쌍의 남녀가 태어나, 왼쪽 그릇에 담은 피는 남자, 오른쪽 그릇에 담은 피는 여자가 되어 이들의 성을 '고타마'라고 하였고 이들의 후손이 바로 정반 즉 석가모니의 아버지였다는 이야기이다.[7] 팔리어로는 '제따와나 아나따삔다다샤 아라마'(jetavana-anāthapiṇḍadasya-ārāma)라고 한다.[8] 한역하면 급고독(給孤獨), '고아와 과부, 독거노인을 위해 베푸는 자선가'라는 뜻이다. 수닷타의 이름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