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red><colcolor=#fff> 페어차일드 반도체 Fairchild Semiconductor International Inc. | |
설립 | 1957년 10월 1일 |
해체 | 2016년 9월 19일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산업 | 반도체 |
[clearfix]
1. 개요
페어차일드 반도체는 세계최초로 집적회로를 상용화한 기업이다. 반도체로 대표되는 실리콘밸리의 2세대 대표 기업으로 반도체 산업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2. 역사
2.1. 창업초기
트랜지스터를 발명해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윌리엄 쇼클리는 쇼클리 반도체(Shockley Semiconductor Laboratory)를 1956년에 설립했다. 그리고 8명의 젊은 박사를 엔지니어로 고용해 PNPN형 4층 다이오드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은 얼마 안 가 윌리엄 쇼클리의 특유의 편집증에 가까운 경영 방식에 갈등을 겪게 됐다. 이듬해인 1957년 그 엔지니어들은 쇼클리 반도체를 떠나 셔먼 페어차일드의 페어차일드 카메라 & 인스트루먼트(Fairchild Camera and Instrument)로 이직해 페어차일드 반도체를 설립했다. 자신의 엔지니어들이 페어차일드로 이직하자 윌리엄 쇼클리는 그 8명을 배신자라 비난했다. IT 업계의 경영공부를 하면서 한번쯤 듣게 되는 유명한 이야기인 8명의 배신자(Traitrous eight)가 바로 이들이다. 8명의 배신자는 줄리우스 블랭크, 빅터 그리니치, 진 호어니, 유진 클라이너, 제이 래스트, 고든 무어, 로버트 노이스와, 셸던 로버츠이다. 그 당시 반도체에서 사용되는 일반적인 재료는 현대의 실리콘이 아닌 저마늄이었는데, 페어차일드 반도체는 처음부터 실리콘 트랜지스터를 목표로 개발했다.[1]진 호어니는 1959년 트랜지스터 생산을 기존의 P형 반도체와 N형 반도체를 접합하는 방식에서, 벨 연구소의 모하메드 아탈라 박사의 열 산화(Thermal Oxidation) 방식의 패시베이션(Surface Passivation) 방식을 도입해, 마치 사진 인화하는 것처럼 반도체에 불순물을 확산시켜 N, P형 반도체를 만들고 금속 박막을 증착하는 플래너 공정(Planar Process) 기술을 개발했다. 플래너 트랜지스터는 기존 방식의 트랜지스터에 비해 값도 싸고 내구성과 성능은 크게 향상해 단번에 주목을 받았다. 페어차일드 반도체 2N697 트랜지스터는 IBM에 개당 150 달러로 납품했다.
2년 후인 1961년 로버트 노이스는 플래너 공정으로 4개 트랜지스터 회로를 하나의 실리콘 웨이퍼에 집적한 반도체를 설계하였다. 그리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실리콘 집적 회로가 탄생했다. 그러나 집적 회로는 같은 해 텍사스 인스트루먼트의 잭 킬비도 9개월 전에 개발했고, 특허는 이쪽에서 취득하였다. 그러나 업계는 식각한 반도체에 설계된 전자 회로를 구현하기 위해 텍사스 인스트루먼트의 미세 전선으로 배선하는 방식 대신 페어차일드 반도체의 박막 증착(Thin-Film Deposition) 방식이 훨씬 효율적이었기 때문에 이쪽을 더 선호하였고, 결국 현대의 반도체 공정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1964년 페어차일드 반도체는 MOSFET를 최초로 상용화했다. MOSFET는 1959년 벨 연구소의 모하메드 아탈라 박사와 한국계 미국인 강대원 박사가 개발했으나, 벨 연구소보다 페어차일드 반도체에서 큰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페어차일드 반도체는 이를 사용하여 아날로그 연산 증폭기(Operational Amplifier)를 설계했고, 이것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아날로그 집적 회로 시장을 장악할 수 있었다. 1966년에는 매출액 상으로 텍사스 인스트루먼트에 이어 반도체 업계 2위를 달성하였다.
2.2. 잇다른 퇴사
아날로그 집적 회로 시장을 장악하는데는 성공했지만 디지털 집적 회로 시장에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1961년 디지털 집적 회로의 첫 번째 제품으로 저항 트랜지스터 논리(Resistor-Transistor Logic) 집적 회로를 개발했고, NASA에 납품해 아폴로 계획의 우주선 유도 컴퓨터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RTL 집적 회로는 매우 간단하다는 장점이 있으나 상업용으로는 이윤이 작았고, 노이즈에 취약해 방위 산업용으로도 적합하지 않았다. 1964년 텍사스 인스트루먼트에서 트랜지스터 트랜지스터 논리(Transistor-Transistor Logic) 집적 회로를 만들었고 수많은 반도체 회사들이 호환 소자를 만들면서 사실상 산업 표준이 되었지만, 페어차일드는 이듬해인 1965년에 다이오드 트랜지스터 논리(Diodes-Transistor Logic) 집적 회로를 개발하는데 그쳤다.그리고 페어차일드 반도체는 회사의 구조상 문제가 있었는데, 페어차일드 반도체는 캘리포니아 팔로 알토에 있었으나 뉴욕에 있는 페어차일드 카메라 & 인스트루먼트의 자회사였던 탓에 뉴욕에서 경영했다. 이로 인해 본사는 자회사간 의사소통도 원활하지 못했을 뿐더러 반도체 산업에 무지해 갈등을 겪을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는데, 1967년에 적자전환하면서 쌓였던 갈등이 터져버렸다. 1967년 이사회에서 비수익 사업을 정리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에 반발해 당시 CEO였던 존 카터는 사임하였다. 이후로 페어차일드 반도체를 만든 중추였던 '8명의 배신자'는 1969년까지 전부 회사를 떠났다. 제이 래스트, 진 호어니, 셸던 로버츠, 유진 클라이너는 전자 계측 장비 회사 텔레다인의 전신인 Amelco를 설립하기 위해 이미 1961년에 떠났지만[2], 로버트 노이스, 고든 무어, 빅터 그리니치는 1968년에 줄리우스 블랭크는 이듬해인 1969년에 떠났다.
페어차일드 반도체를 떠난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 무어는 페어차일드 반도체를 떠난 해였던 1968년에 인텔을 설립했다. 같은 페어차일드 반도체 출신이면서, 트랜지스터 게이트로 금속 박막을 증착시키는 방식이 아닌 다결정 실리콘으로 사용하는 기술이었던, 자기 정렬 게이트(Self-Aligned Gate)라는 혁신적인 공정 기술을 개발한 앤드류 그로브와 레슬리 배다스를 영입하였고, 그 외에도 여러 중역들이 인텔에 합류하였다. 같은 해인 1969년에 제리 샌더스는 7명의 이사와 같이 페어차일드 반도체를 떠나 5월 1일에 AMD를 만들었다. 이외에도 페어차일드 출신 직원들이 만든 반도체 회사는 약 30여개에 이른다. 다른 기업으로 창업을 하는 사람들을 "페어차일드 런"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그리고 페어차일드 반도체를 뛰쳐나온 이들은 오늘날까지도 IT 업계의 중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1971년 칼럼니스트 돈 호플러는 이 지역을 '실리콘밸리'라 불렀고, 이 때 이 이름이 탄생했다.
이렇듯 실리콘밸리의 자유로운 이직 문화와 연쇄 창업의 일반화는 페어차일드에서 비롯되었다.[3]
2.3. 이후 몰락의 길
1970년 대에는 벨 연구소 다음으로 상업용 CCD를 생산하였다. 디지털 영상 센서는 페어차일드 반도체의 자회사인 페어차일드 이미징에서 오랫동안 생산했다. 또한 이 시기에 특이하게도 페어차일드 채널 F라는 비디오 게임기를 출시했는데 이것은 세계 최초의 롬 카트리지 교환식 비디오 게임기였다.▲ 페어차일드 채널 F
하지만 이후로 연속되는 삽질과 경쟁업체들의 호조로 인해서 시장에서 점점 더 멀어졌고 1979년에 프랑스 석유 기업인 슐룸베르거에 인수되었다.
1987년 슐룸베르거는 일본의 후지쯔에 3억 달러에 매각할 뻔 했지만 당시 미국과 일본의 반도체 통상 마찰로 인한 미국 정부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결국 같은 해 내셔널 세미컨덕터에 매각했다. 이후 어느 정도 정리가 된 뒤 1997년도에 사모펀드 운영 회사의 도움을 받아 독립하였다.
2016년 9월 19일 온세미컨덕터가 26억 달러에 페어차일드 반도체를 인수 후 합병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3. 온세미컨덕터 코리아(구 페어차일드 코리아)
페어차일드의 한국에서의 역사는 의외로 길다. 1967년에 구로공단에서 처음 공장을 문을 연 것을 시작으로 1만 명의 직원이 한 달에 2천만 개의 반도체를 만들었다.[4] 수출액은 1973년에 2천만 달러를 기록했다. 참고로 당시 노동자의 월급이 2만2천 원이던 시대였다.[5] 하지만 본사의 매출감소와 2년 연속 적자, 당시 한국에서 불고 있는 노사문제가 불거지는 등 문제가 생긴데다 점차 한국의 인건비가 올라가면서 1989년에 철수했다.[6]하지만 1998년도에 삼성전자의 전력용 반도체 부문을 4억 5,000만 달러에 인수함으로써 다시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다. 현재 국내 최대 규모의 전력용 반도체 전문 회사이다. 당시 삼성에서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매각한 사업을 잽싸게 사들였는데 이것이 페어차일드의 부활을 촉발했다. 페어차일드는 이후 전력용 반도체 부문에서 2003년과 2004년에 각각 5억 5,000만 달러와 5억 8,100만 달러의 매출을 기록했다. 참고로 이는 전체 매출의 약 40%를 차지했으며 계열사 중 최대 규모에 속했다.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지역에 연구소와 생산 공장이 함께 있으며, 2012년 까지만 하더라도 약 1,800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었다. 하지만 장기적인 경영악화로, 많은 엔지니어들과 생산직들을 해고하면서 지금은 약 1,600 명 정도가 근무하고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서울특별시와 경상북도 구미시에 영업사무소, 경기도 화성시에 자동화 물류센터가 있다.
홍콩에도 물류창고가 있었으나(2005~2014) 이후 매각, 해외사이트는 반도체 후공정 사이트가 있으나 채용에서는 별개의 회사이다.
[1] 이 여덟명이 실리콘을 이용한 반도체를 만들 게 된 이유가 있다. 반도체에 전압을(순방향으로) 일정 수준 이상으로 걸어야 전압이 제대로 인가가 되어 회로가 작동할 수 있는데, 이 일정 수준의 전압을 전위장벽(문턱전압)이라고 한다. 저마늄은 그 전위장벽이 0.3V정도, 실리콘은 0.7V정도로, 딱 보면 저마늄을 사용하면 더 낮은 전압으로도 회로를 정상적으로 작동시키고 전압 강하도 0.4V가 적어 효율적인 것 같아 보이지만, 반도체는 본래 절대영도를 가정하고 만들었고 상온에서도 사용할 수 있게끔 발전시킨 것이기 때문에 절대영도가 아닌 상온에선 반도체에 원래 방향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역전류(역포화전류)가 흐르게된다.(이는 온도가 높아질수록 심해진다. 반도체가 열에 약한 이유가 이 때문) 실리콘은 전위장벽이 0.7V라 괜찮지만 저마늄은 전위장벽이 낮아 전압이 충분히 가해지지 않으면 원래 흘러야 할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전류가 너무 쉽게 흐르게되어 최근에 나오는 모든 반도체는 다 실리콘을 쓴다. 물론 실리콘도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는 않지만 적어도 상온에서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는다. 이런 이유에서 기존 저마늄 대신 실리콘을 통해 반도체(트렌지스터)를 만들게 됐고, 이게 오늘날까지 계속 발전돼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2] 진 호어니는 이후 1967년 텔레다인을 떠나 아날로그 반도체 전문 기업, 인터실도 설립했다.[3] 페어차일드가 기업 외부적 요소에 큰 영향을 미친 반면 오픈 플로어, 홈브루 파티, 복장 자율화 등 자유로운 사내 문화는 휴렛 팩커드의 영향이 컸다.[4] 지금과는 달리 당시에는 반도체는 많은 노동이 필요한 노동 집약적 산업 중 하나였다.[5] 1974년 10월 5일 경향신문 3페이지,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참고.[6] 이때 노동자들이 23.6% 임금인상을 요구했으니 사업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난감할 수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