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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레/클럽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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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산투스 FC
2.1. 1956(2군)2.2. 19572.3. 19582.4. 19592.5. 19602.6. 19612.7. 19622.8. 19632.9. 19642.10. 19652.11. 19662.12. 19672.13. 19682.14. 19692.15. 19702.16. 19712.17. 19722.18. 19732.19. 19742.20. Pelé in Santos FC
3. 뉴욕 코스모스
3.1. 펠레가 뉴욕 코스모스로 이적한 일이 미국 축구계에 미친 영향
4. 기록

1. 개요

펠레의 클럽 경력에 대해 서술하는 문서이다.
읽기 전에 미리 알아두면 좋은 부분
*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Campeonato Paulista):
* 산투스가 속한 상파울루 주립 리그.
* 연마다 하반기에 개최.
* 1902년~현재

* 토르네이우 히우-상파울루(히우-상파울루 컵, Torneio Rio-São Paulo):
*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캄페오나투 카리우카의 상위 4~5 팀끼리 경쟁했던 대회.
* 연마다 상반기에 개최.
* 1952년~1966년

* 타사 브라지우(Taça Brasil):
* 브라질 전국의 주립 리그 우승팀끼리 맞붙는 컵대회.
* 연마다 하반기에 개최.
* 1959년~1964년의 우승팀은 다음 시즌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 진출.
* 1965년 대회는 확인이 불가능함.
* 1966년~1967년의 우승&준우승팀은 다음 시즌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 진출.
* 1968년 대회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출전 자격을 결정짓는 대회였는지 아니었는지 확인이 불가능함.
* 1959년~1968년

* 토르네이우 호베르투 고메스 페드로사(호베르투 고메스 페드로사 챔피언십or컵, Torneio Roberto Gomes Pedrosa):
* 토르네이우 히우-상파울루의 명맥을 이은 대회.
* 토르네이우 히우-상파울루와 마찬가지로 연마다 상반기에 개최.
* 1967년에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출전 자격을 결정짓는 대회가 아니었음.
* 1968년~1969년 대회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출전 자격을 결정짓는 대회였는지 아니었는지 확인이 불가능함.
* 1970년 우승팀은 다음 시즌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 진출했음.
* 1967년~1970년까지 브라질 전국 리그의 역할을 담당함

* 캄페오나투 브라질레이루 세리 A[1]:
* 현 브라질 전국 리그.
* 상반기에 개최하여 연말에 종료.
* 우승팀은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 참가.
* 상파울루 주립 리그에서 5위 이상이면 진출 가능.
* 1971년~현재

* 코파 리베르타도레스(1960~1965 Copa de Campeones de América, 1966~P Copa Libertadores):
* 남아메리카의 대륙 최상위 컵대회.
* 유럽의 유러피언컵과 대응하는 개념으로, 각 나라 전국 리그or컵대회의 우승팀 또는 준우승팀이 참가.
* 1948년 창설, 1948년 중단, 1960년 재개막~현재

* 인터컨티넨탈컵(1960~1979 Intercontinental Cup, 1980~2004 Toyota Cup):
* 대륙 컵 우승팀끼리 맞붙는 경기.
* 현대의 FIFA 클럽 월드컵과 비슷한 개념. 1960년 창설~2004년 폐지

2. 산투스 FC

2.1. 1956(2군)

펠레는 바우데마르 지브리투의 추천을 통해 1956년 산투스 FC에 입단했다. 입단하자마자 엄청난 성장세를 보이며 보통 선수들보다 훨씬 빠른 15살이라는 나이에 SC 코린치안스와의 경기에서 득점을 올렸다. 펠레라는 이름이 브라질 전체로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다만 공식 리그 기록에는 없는 경기이다. 일종의 친선 경기 또는 리저브 매치였다.
1956시즌: 0경기 0골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0경기 0골
토르네이우 히우-상파울루: 0경기 0골

2.2. 1957

1957년에는 상파울루 주립 리그가 두 시즌으로 나뉘어 열렸다. 세리 브랑쿠와 세리 아줄이 그것인데, 영어로 바꾸면 White Series와 Blue Series이다. 20개 팀 중 예선 리그에서 상위 10팀, 하위 10팀을 갈라 상위 10팀은 세리 아줄에 진출했고 하위 10팀은 세리 브랑쿠에 진출하는 방식이었다. 펠레는 예선 리그에서 14경기 19골을 집어넣으며 득점 선두에 올랐고, 산투스는 이런 펠레의 활약 덕에 13승 1무 5패를 기록하여 전체 2위를 기록했다. 당연히 세리 아줄에 나가게 되었다. 펠레는 세리 아줄에서 15경기 17골을 터뜨리며 득점왕을 차지했다. 산투스는 코린치안스에 밀려 우승을 놓쳤지만, 슈퍼 유망주 한 명을 건졌다. 당시 펠레의 나이는 만 17세가 된지도 얼마 안 된 상태였다. 펠레의 공식 리그 데뷔는 1957시즌이었는데, 데뷔 시즌에 최상위 리그의 득점왕을 차지하는 케이스는 펠레와 이탈리아의 펠리체 보렐 등 극소수에 불과하다. 또한 이런 미친 활약 덕에 1957년부터 셀레상의 유니폼을 입게 된다. 당연히, 대표팀 내 최연소 선수였다.
1957시즌: 38경기 41골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14+15경기 19+17골 (득점왕)
토르네이우 히우-상파울루: 9경기 5골

2.3. 1958

1958년 시즌에는 주립 리그 38경기에서 58골을 때려박았다. 압도적인 기록이었다. 득점왕은 당연지사였다. 산투스는 3년만에 주립 리그 트로피를 들어올렸으며, 펠레는 본인의 첫 클럽 트로피를 만져보았다. 1958년 주립 리그에서의 산투스는 정말 대단했다. 38경기에서 143득점을 기록했으며 40실점을 기록했다. 득실차는 무려 +103이었다. 펠레가 세운 58골 기록의 경우, 국가대표팀, 클럽팀, 공식경기, 비공식경기를 가리지 않고 엄청나게 뛰는 도중에 공식전에서만 58골을 만들어냈다는 의미이므로 더 값진 기록이다. 브라질 리그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더욱 선수들에 대한 복지가 좋지 않았으며 혹사가 아주 심했다.
1958시즌: 46경기 66골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38경기 58골 (득점왕)
토르네이우 히우-상파울루: 8경기 8골

2.4. 1959

산투스는 1959년 8월 2일 주립 리그에서 유벤투스를 4대 0으로 눌렀는데, 펠레는 이 경기에서 아주 아름다운 골을 득점했다. 이 골은 영상으로 남지 않았지만 너무 아름다운 득점 장면이었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의 증언을 토대로 이 골을 그래픽으로 다시 복원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1959년 시즌 주립리그에서 44골을 넣어 또 득점왕에 오르는 한편 정규 리그 공동 1위를 차지했다. 산투스의 성적을 보자. 득실차에서 2위 파우메이라스에 월등하게 앞섰으나 승점이 같았고, 당시의 상파울루 주립 리그는 득실차를 적용하여 우승자를 가리지 않았기 때문에 플레이오프를 따로 진행하여 우승자를 결정하게 되었다. 1차전에서 펠레는 한 골을 득점하며 1-1무승부에 공헌했다. 2차전에서는 산투스의 페페가 선제골을 터뜨렸으나 파우메이라스가 제툴리우와 치네시뉴의 골로 역전하여 2-1이 되었다. 경기 80분경 페페가 다시 동점을 만들며 2-2로 무승부가 나왔다. 3차전. 양팀은 이를 바득바득 갈고 나왔다. 펠레는 경기 14분만에 선제골을 터뜨렸다. 하지만 줄리뉴가 동점골을 터뜨렸고 호메이루가 48분 역전골을 넣었다. 경기는 그대로 끝났고, 산투스는 골득실이 1위 팀에 비해 20 이상 앞서는데도 준우승을 차지하고 말았다. 펠레의 심정은 정말 답답했을 것이다.

주립 리그의 우승팀들이 모여 브라질 최고의 축구팀을 가리는 타사 브라지우가 1959년에 개막했다. 브라질의 초기 전국 대회였던 이 대회에서도 펠레는 아주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다. 산투스가 속한 리그인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는 브라질에서 가장 강한 리그에 속했기 때문에 다른 리그 우승팀들과 달리 예선을 거치지 않고 준결승전에 곧장 진출했다. 주립 리그에 엄청나게 자주 출전하며 지칠 대로 지쳤던 펠레는 그레미우를 맞이한 준결승 1차전에서 휴식을 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투스는 4-1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준결승 2차전은 0-0으로 무승부였고 합산 스코어 4-1로 그레미우가 탈락했다. 산투스는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전은 세 차례에 걸쳐 열렸다. 결승 1차전에서 펠레는 앞서가는 한 골을 터뜨렸다. 그러나 3골이나 얻어맞으며 3-2로 패했다. 2차전은 산투스의 승리. 펠레는 2-0으로 앞서가는 추가골을 득점했다. 하지만 결승전 상대 EC바히아는 결코 만만한 팀이 아니었다. 1960년 3월에 진행된 3차전에서 펠레는 무득점을 기록했으며, 1-3으로 패하며 전국 리그 우승을 내주었다. 최종 성적 4경기 2골.

주립 리그와 전국 대회에서 모두 콩을 기록하며 트로피를 놓쳤지만, 히우-상파울루 컵에서는 우승을 차지했다. 펠레는 결승전에서 3:0으로 앞서가는 쐐기골을 득점하는 한편 7경기에서 6득점을 기록하며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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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959pelewithD.jpg
유럽의 제왕과 남미의 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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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투스는 1959년 친선 경기에서 레알 마드리드와 경기를 펼쳤고, 이 경기에서 당해 발롱도르 수상자이자 세계 최고의 선수였던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 펠레가 조우하기도 했다. 둘의 나이는 무려 14살 차이난다.
1959시즌: 43경기 53골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32경기 45골 (득점왕)
토르네이우 히우-상파울루: 7경기 6골
타사 브라지우: 4경기 2골

2.5. 1960

1960년에도 어김없이 골파티를 벌인 펠레. 30경기에서 33골을 때려넣으며 또다시 주립 리그 최다득점자가 되었다. 산투스는 주립 리그 타이틀을 파우메이라스에게서 탈환하는 데에 성공했고, 1961년 타사 브라지우 참가 자격을 얻어냈다.

히우-상파울루 컵에서는 3경기를 뛰었고 골은 넣지 못했다.

대륙 대회인 코파 리베르타도레스가 1960년 재개막했지만 산투스가 1959년의 전국대회에서 EC 바히아에 밀려 준우승에 그쳤기 때문에 참가할 수 없었다.
1960시즌: 33경기 33골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30경기 33골 (득점왕)
토르네이우 히우-상파울루: 3경기 0골
타사 브라지우: 0경기 0골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0경기 0골
인터컨티넨탈컵: 0경기 0골

2.6. 1961

1958년 월드컵 이후, 레알 마드리드, 유벤투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등 유럽의 강호들이 남미 최고의 스타인 펠레를 영입하겠다고 나섰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브라질 정부는 유럽 빅클럽들이 미리 움직이기 전에 손을 썼다. 1961년[2], 펠레는 그렇게 브라질의 국보가 되었다.

펠레와 산투스는 상파울루 주립 리그에서 파우메이라스를 제치고 또 우승을 차지했다. 펠레는 주립 리그에서만 26경기 47골을 터뜨리며 압도적인 차이로 득점왕에 올랐다. 경기당 득점 비율로 따지면 1961년이 펠레 커리어 최고의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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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립 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기뻐하는 1961년의 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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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우-상파울루 컵에서도 만점 활약을 펼쳤다. 특히 마라카낭 경기장에서 열린 플루미넨시와의 경기에서 100m가 넘는 거리를 홀로 드리블해 상대 선수를 전부 제치고 골을 만들어냈다. 이 골은 정말 역사에 남을 골장면이었지만 당시 경기장 내에서 영상 촬영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영상으로 남지 못했다. 그러나 이 장면이 워낙 인상적이었던지라 사람들의 뇌리에 깊게 박혔고, 마라카낭 구장 앞에 청동패를 만들어 이 골을 기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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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goldeplaca.jpg
Gol de Placa로 알려져 있는 펠레의 원더골

파일:GOL-DE-PLACA_ARQUIVO.jpg
Placa

라디오 중계로 남은 Gol de Pla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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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골이 바로 Gol de Placa(청동패의 골)라고 불리는 골이다. 청동패에는 '펠레가 마라카낭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골을 넣었다'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최종 리그에서 5위를 기록하며 히우-상파울루컵 결승전 진출에 실패했다. 펠레는 7경기 8골을 기록하며 9골을 기록한 페페, 코치뉴에 이어 득점 3위에 올랐다. 참고로 이 세 명은 모두 산투스 소속이었다. 최종 리그에서는 부진했지만, 산투스가 얼마나 압도적인 팀이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산투스는 1960년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에서 우승하며 참가하게 된 1961년의 타사 브라지우에서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며 우승을 차지했다. 이번에도 예선 없이 준결승에 바로 올랐으며, 산투스는 5경기 모두에서 어마어마한 활약을 펼쳤다. 아메리카를 상대로 맞은 준결승전에서는 1차전 6-2 대승을 거두었다. 2차전에서 1-0으로 패하는 바람에 3차전을 치렀지만, 펠레가 이끄는 산투스의 공격진은 다시 무시무시한 화력쇼를 선보이며 6-1로 승리를 거둔다. 결승 상대는 2년 전 같은 무대에서 산투스를 좌절시킨 EC 바히아. 펠레는 이를 악물고 뛰었으나 결승 1차전에서 무득점을 기록했다. 결과는 1대 1 무승부. 12월 27일에 열리는 결승 2차전에서 승부가 결정되게 되었다. 펠레는 이 경기에서 결승골 포함 세 골을 때려넣으며 해트트릭을 기록했고 결과는 5-1압승이었다. 말 그대로 통쾌한 승리였다. 1959 타사 브라지우 결승전에서 맛봤던 쓴맛을 2년 만에 그대로 돌려주었으니까 말이다. 그것도 5-1이라는 굴욕적인 스코어와 함께. 정말 무서운 점은, 펠레가 타사 브라지우에서 5경기만 뛰고도 9골을 터뜨리며 득점왕에 올랐다는 사실이다. 1차 리그를 거쳐 준결승전에 올라온 아메리카, 바히아 팀의 선수들은 최대 10경기를 뛸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 절반만 뛴 펠레가 득점왕을 차지했다는 사실은 정말 놀랍다.

산투스는 1960년의 타사 브라지우에서 우승하지 못했기 때문에 1961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출전 자격을 얻지 못했다. 1960년 타사 브라지우 우승팀인 파우메이라스만 1961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 참가했다.

1961년의 산투스는 히우-상파울루 컵에서는 우승을 놓쳤지만 나머지 국내 대회에서는 전부 우승을 차지했다. 펠레는 1961시즌의 공식전에서 총 38경기 64골을 기록했다.
1961시즌: 38경기 64골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26경기 47골 (득점왕)
토르네이우 히우-상파울루: 7경기 8골
타사 브라지우: 5경기 9골 (득점왕)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0경기 0골
인터컨티넨탈컵: 0경기 0골

2.7. 1962

산투스는 브라질 내에서 적수가 없는 팀이었다. 산투스는 2위 코린치안스와 승점 10점 차이로 우승을 거두었다. 당시에는 승리 시 승점 2점, 무승부 시 승점 1점, 패배 시 승점 0점이 주어지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지금의 기준으로 하면 승점 차이가 많이 늘어난다.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현대를 기준으로 하면 24승 5무 1패를 기록한 1962년의 산투스는 승점이 77일 것이고, 18승 7무 5패를 기록한 코린치안스는 61점일 것이다. 펠레는 주립 리그 26경기에 출전해 37골을 넣었고 또 득점왕을 차지했다. 벌써 6연속 득점왕 기록이었다.

산투스는 1962년에 열린 히우-상파울루 컵에 참가하지 않았다. 이 대회에서 늘 짖궂게 보타포구를 괴롭혔던 강팀 산투스가 불참을 선언하자 2연속으로 준우승을 차지했던 보타포구 FR이 이득을 보았고 마침내 우승을 차지했다.

펠레는 1961년 상파울루 주립 리그 우승팀 자격, 그리고 디펜딩 챔피언 자격으로 곧바로 4강부터 참여한 타사 브라지우에서도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다. 산투스는 준결승 상대로 페르남부쿠 주의 주립 리그인 캄페오나투 페르남부카누의 강팀 SC 스포르츠를 만났다. 그리고 1차전에서 무승부를 기록했으며 2차전에서 4-1대승을 거둔다. 펠레는 두 경기 모두 출전했지만 골은 넣지 못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FFFFFF 10%, #000000 10%, #000000 20%, #FFFFFF 20%, #FFFFFF 30%, #000000 30%, #000000 40%, #FFFFFF 40%, #FFFFFF 50%, #000000 50%, #000000 60%, #FFFFFF 60%, #FFFFFF 70%, #000000 70%, #000000 80%, #FFFFFF 80%, #FFFFFF 90%, #000000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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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사 브라지우 결승전에서 만난 가린샤와 펠레
}}} ||
결승전은 1963년 3월에 진행되었다. 상대는 가린샤니우통 산투스, 지지, 자갈루, 아마리우두 등 수많은 월드컵 스타를 보유한 보타포구 FR이었다. 월드컵 영웅들이 대거 맞붙은 이 경기는 브라질 전 국민의 관심을 모았다. 산투스의 연고지 상파울루에서 열린 1차전은 4-3으로 산투스가 승리를 거두었고 마라카낭에서 열린 2차전은 보타포구가 3-1승리를 거두었다. 1962 타사 브라지우 결승전은 승점제였다. 득실차 면에서는 보타포구가 1점을 앞섰지만 승점으로 치면 동점이었기 때문에 3차전으로 승부를 가리게 되었다. 펠레는 또다시 마라카낭에서 열린 3차전에서 아주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다. 보타포구 선수들은 지쳐 있었고 산투스 공격수 도르바우, 페페, 코치뉴가 연이어 골을 퍼부으며 3-0이 되었다. 보타포구는 힘을 내 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펠레는 경기 75분과 80분에 연이어 골을 득점하며 완전히 쐐기를 박아버렸다. 결국 5-0으로 산투스의 승리. 산투스가 1961년 대회에 이어 우승을 차지했다. 타사 브라지우 출범 이후 최초로 2연패를 달성한 팀이 되었으며, 펠레는 그 과정에서 핵심 선수로 활약하며 총 5경기 2골을 득점했다.

1961년 타사 브라지우 우승팀 자격으로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 참가한 산투스 FC. 산투스는 파라과이 1부 리그 우승팀 체로 포르테노, 볼리비아 1부 리그 우승팀 CD 무니시팔과 같은 조에 속했다. 산투스는 조별리그 4경기에서 3승 1무 0패를 기록하는 한편 20골이나 터뜨리며 골 파티를 벌였다. 체로 포르테노와의 2차전에서는 펠레도 두 골을 넣으며 일조하였다. 4강전 상대는 칠레 1부 리그 우승팀 유니베르시다드 카톨리카였는데, 1차전에는 막상막하의 경기를 펼쳤고 결국 1:1로 비겼다. 2차전에서는 산투스의 캡틴 지투가 골을 터뜨리며 승리했고 결승전에 진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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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962pelewithspencer.jpg
알베르토 스펜세르와 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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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승전 상대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디펜딩 챔피언이자 우루과이 리그 우승팀, CA 페냐롤이었다. 산투스가 유니베르시다드 카톨리카를 힘겹게 이기고 올라왔다면 페냐롤은 아르헨티나 1부 리그 우승팀 라싱 클루브를 힘겹게 이기고 올라온 상태였다. 산투스에 펠레가 있었다면 페냐롤에는 그에 버금가는 '마법의 머리' 알베르토 스펜세르가 있었다. 산투스와 페냐롤, 두 팀은 정말 용호상박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페냐롤은 주축 멤버 이탈이 전혀 없었으나 산투스는 공격의 핵심 중 핵심인 펠레가 부상당한 상태였고, 그래서 산투스의 전력은 약해져 있었다. 펠레가 없는 상태에서 페냐롤의 홈 에스타티오 센테나리오를 필드로 하여 결승 1차전이 열렸다. 산투스는 18분만에 스펜세르에게 선제골을 내주었지만 공격수 코치뉴가 혼자 만회골과 역전 결승골까지 터뜨렸고 산투스가 1-2승리를 거두었다. 역시나 펠레가 없는 상태에서 진행된 결승 2차전은 산투스의 홈인 에스타지우 빌라 베우미루에서 열렸다. 홈 경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알베르토 스펜세르에게 14분만에 선제골을 내주었다. 도르바우와 멘갈비우가 동점골, 역전골을 성공시켰지만 후반전이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 스펜세르가 또 골을 터뜨렸다. 그리고 2분 후 호세 사시아에게 역전골을 얻어맞으며 2-3으로 패배했다. 3차전은 제 3의 구장인 아르헨티나 에스타디오 모누멘탈에서 열렸다. 그리고 이 경기에서 펠레가 복귀했다. 펠레 말고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지만 마치 마법이라도 쓴 것처럼 기세가 오른 산투스는 시작부터 페냐롤을 몰아붙였고 이 때문에 페냐롤의 수비수 오마르 카에타노가 11분만에 자책골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펠레 타임이 왔다. 펠레는 48분, 89분에 득점을 기록했다. 결국 그대로 경기가 종료되었고 3-0 승리를 차지한 산투스는 팀 역사상 첫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을 차지했다. 1962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펠레의 출전&골 기록은 4경기 4골. 6골을 넣은 득점왕이 3명이었고, 펠레는 득점 공동 4위를 차지했다. 펠레가 아홉 경기 중 네 경기만 뛰고도 이 기록을 세웠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또한 1962년 펠레는 기권한 히우-상파울루 컵을 제외한 주립 리그, 전국 대회,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등 참가한 대회에서 모두 우승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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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컨티넨탈컵에서 만난 에우제비우와 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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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남미 챔피언과 유럽 챔피언이 대결하는 인터컨티넨탈컵에서의 활약이었다. 캡틴 마리우 콜루나가 이끄는 SL 벤피카가 그 상대였다. 벤피카는 1960-61시즌 레알 마드리드의 6연패를 저지하며 꾸역꾸역 올라온 FC 바르셀로나를 제압하며 빅 이어를 들어올렸고, 1961-62시즌에는 디 스테파노와 푸스카스가 이끄는 레알 마드리드를 꺾으며 빅 이어를 차지한 바 있었다. 레알 마드리드에 이어 두 번째로 최상위 클럽 대항전 2연패를 달성한, 그야말로 괴물 같은 팀이었다. 특히 1961-62시즌에는 에우제비우라는 유망주의 포텐이 대폭발해 모든 대회에서 임팩트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1962년의 인터컨티넨탈컵은 각 대륙을 대표하는 젊은 공격수 두 명이 맞붙은 경기였고, 이런 매치업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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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레 vs SL 벤피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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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싱거운 결과가 나왔다. 펠레는 벤피카를 상대로 홈에서 열린 1차전에서 2골을 넣으며 3:2 승리를 이끌었고, 벤피카의 홈인 리스본에서 열린 2차전에는 해트트릭을 달성하여 5:2 승리를 이끌었다. 게다가 세 골 모두 입이 떡 벌어질 만한 원더골이었다. 결국 총합 8:4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에우제비우는 후반 85분 1골을 넣는데 그쳤다. 2경기만 뛰고 5골이나 넣은 펠레는 당연히 득점왕이 되었다.

펠레는 결승전마다 쐐기를 박는 역할을 하며 우승에 크게 기여했고, 국가대표팀에서 들어올린 월드컵을 비롯해 1962년에만 총 5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인터컨티넨탈컵에서 우승을 추가하며 펠레는 만 21세[3]의 나이에 당시까지 들어올릴 수 있는 모든 클럽 트로피를 들어올린 선수가 되었다. 더 놀라운 건 한 해에 월드컵과 트레블, 전관왕[4]을 모두 달성했다는 점이다. 이후 한 해에 트레블과 월드컵 우승을 모두 이룬 선수는 2023년의 훌리안 알바레스가 유일하다.[5] 클럽 한정인 이유는 1959년에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코파 아메리카의 전신)에 참가해서 득점왕과 MVP를 수상했음에도 우승하지 못했고 이후에는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62시즌: 37경기 49골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26경기 37골 (득점왕)
토르네이우 히우-상파울루: 0경기 0골
타사 브라지우: 5경기 3골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4경기 4골
인터컨티넨탈컵: 2경기 5골 (득점왕)

2.8. 1963

산투스는 굳이 밝혀 적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엄청난 팀이었다. 위 사진은 1963년 5월 5일 서독과의 A매치에서 2-1로 승리한 브라질 선발 팀을 찍은 사진인데, 저 중 무려 8명이 산투스 소속이었다. 지우마르, 리마, 지투, 도르바우, 멩가우비우, 코치뉴, 펠레, 페페까지... 선수의 권한이 적은 보스만 룰 이전의 축구판에서 이런 형태의 국가대표팀 멤버 구성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1963년 6월 프리 시즌에 진행된 인테르와 산투스의 친선전에서는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하나 있었다. 이 경기는 인터 밀란이 산투스를 초청한 경기였고 밀란에서 경기가 열렸다. 인테르는 2-0으로 승리를 거두었는데, 펠레는 경기 내내 이어지는 인테르 선수들의 거친 플레이에 아주 화가 났다. 그리고 경기 종료 후 인테르의 미드필더 브루노 볼키에게 다가가 주먹을 휘둘렀다. 다행히 맞지는 않았지만, 이 날 성난 펠레를 저지하기 위해 경기장에 안전요원까지 투입되었을 정도로 크게 화를 냈다고 한다. 친선전이었기 때문에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펠레를 화 나게 만들면 어떻게 돌변하는지 보여 준 장면이었다. 사실 이 장면이 워낙 임펙트가 컸을 뿐, 펠레는 현역 시절 페어 플레이어로 유명했다. 동료들의 증언이 이를 뒷받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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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963분노의주먹.jpg
분노의 주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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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주립 리그에서 펠레는 부상 등의 이유로 꽤 많은 경기에서 결장하였고 19경기 22골을 기록하며 부진(?)한 성적을 기록했다. 산투스의 공격진은 여전히 막강했으나, 그럼에도 그 최고의 정점이었던 펠레가 빠진 것은 곧 순위 하락으로 이어졌다. 산투스는 1962년 주립 리그에서 30경기 105득점이라는 압도적인 득점 능력을 과시했던 팀이다. 하지만 1962년 리그 26경기에 나왔던 펠레가 1963년 들어 리그 19경기밖에 나오지 못하게 되자 산투스의 득점력은 눈에 띄게 떨어졌다. 105득점에서 69득점으로. 펠레의 영향력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결국 리그 2위도 아닌 3위로 떨어졌고 산투스가 앉던 왕좌에는 파우메이라스가 앉게 되었다. 산투스가 펠레 한 명 몇 번 빠졌다고 3위로 떨어진 것도 물론 놀랍지만, 제일 놀라운 건 19경기 뛰고 득점왕이 된 펠레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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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우-상파울루 컵에서 자주 대결했던 가린샤와 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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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우-상파울루 컵에서는 8경기 14골을 터뜨리며 개인 통산 최고의 활약을 보여주었고, 결국 코린치안스, 플루미넨시, 보타포구, 파우메이라스를 제치고 우승컵을 차지했다. 1963년 3월 27일에 열린 플라멩구와의 타이틀 매치에서 3-0으로 앞서가는 골을 득점하기도 했다. 펠레와 산투스에게는 이것이 두 번째 히우-상파울루 컵 우승이었다.

주립 리그에서 우승했고 디펜딩 챔피언이기도 했던 산투스는 타사 브라지우에 당연히 참가할 수 있었다. 펠레의 산투스와 가린샤의 보타포구는 지난 시즌 우승팀&준우승팀 자격으로 준결승전부터 참가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EC 바히아가 보타포구라는 거함을 4강전에서 꺾어버린 것이다. 산투스는 그레미우를 만났다. 1차전은 원정 경기였는데, 산투스의 1-3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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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키퍼 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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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후인 1964년 1월 19일, 산투스의 홈에서 열린 2차전에서는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있었다. 경기 86분경에 산투스의 골키퍼 지우마르가 퇴장을 당했던 것이다. 감독 룰라는 그 대책으로 펠레를 골키퍼 포지션에 기용했다. 펠레는 이 경기에서 이미 해트트릭을 기록했는데, 골키퍼 자리에서도 준수한 활약을 보여주며 경기를 잘 마무리지었다. 산투스의 4-3 승리였고, 합산 스코어 7-4로 그레미우를 완전히 누르고 다음 라운드 진출권을 획득했다.

결국 바히아와의 재대결이 성사되었다. 1961년 타사 브라지우 결승전에서 바히아를 꺾어 본 경험이 있는 펠레. 그러나 타사 브라지우 결승전에서 이미 두 번이나 마주쳤고 한번씩 승패를 주고받았던 만큼 결코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1964년 1월 25일. 1차전 날짜가 되었다. 상당히 많은 예측들이 있었지만 펠레는 모든 예측을 뛰어넘어 버렸다. 1차전부터 선제골 두 개를 몰아쳤다. 펠레의 두 골 덕에 산투스 선수들의 마음은 더욱 홀가분해졌고, 내리 4골을 퍼부으며 6-0승리를 거둔다. 2차전에서 무슨 일이 생기지 않고서야 바히아가 절대 우승할 수 없는 상황. 산투스 선수들은 기세등등하게 좋은 활약을 이어나갔다. 펠레는 3일 후에 펼쳐진 2차전에서도 선제 득점을 기록했다. 이미 합산 스코어 7-0이 된 만큼 바히아 선수들의 사기는 바닥까지 떨어졌다. 결국 펠레가 한 골을 더 집어넣었고 경기는 2-0으로 끝났다. 합산 스코어 8-0. 압도적인 우승이었다. 펠레는 4경기만 뛰고도 다섯 골을 득점하여 득점 2위에 이름을 올렸으며, 펠레의 소속팀 산투스 FC는 브라질 클럽 축구 역사상 최초로 전국 단위의 리그에서 2연패를 달성한 것에 이어 3연패까지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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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준결승전에서 만난 브라질 국가대표팀 멤버들
왼쪽부터 가린샤, 지투, 니우통 산투스, 펠레, 마리우 자갈루, 페페, 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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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파 리베르타도레스 디펜딩 챔피언이었던 산투스는 1963년 대회에서는 준결승부터 바로 참가했다. 준결승전 1차전에서 가린샤가 버티는 보타포구 FR을 만났다. 경기 60분, 당시 10대였던 자이르지뉴가 한 골을 넣으며 패배의 위기에 몰렸으나 펠레는 역시 펠레였다. 경기 90분에 버저비터 동점골을 집어넣음으로써 2차전을 유리한 분위기에서 진행할 수 있게 만들었다. 팀을 재정비하고 2차전에 나온 산투스는 아주 강했다. 펠레가 해트트릭을 기록했고 리마가 한 골을 추가하며 4-0대승을 거두었다. 가린샤는 또다시 펠레와 산투스라는 산을 넘지 못하며 고배를 마셨다. 결승전에서 만난 상대는 아르헨티나의 명문이자 아르헨티나 리그 챔피언인 CA 보카 주니어스였다. 안토니오 라틴, 실비오 마르솔리니, 호세 산필리포 등 대단한 선수들이 많이 있었던 보카 주니어스는 강력한 수비력과 공수 밸런스를 갖추고 있었고 어떤 강팀을 만나더라도 그 실력을 보여줄 수 있는 팀이었다. 마라카낭에서 열린 1차전에서 펠레는 1어시스트를 기록했고 산투스는 3-2 승리를 거두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카밀로 키케로 스타디움에서 펼쳐진 2차전에서는 1골 1도움으로 2-1승리를 이끌었다. 이로써 산투스 FC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역사상 최초의 2연패를 달성한 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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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컨티넨탈컵에서 만난 잔니 리베라와 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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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인터컨티넨탈컵에서 AC 밀란과 대결하는데, 첫 경기에서 2골을 넣었지만 팀은 4대2로 패한다. 결국 다음 경기에서 4대2로 산투스가 이겨서 똑같은 결과가 나왔기 때문에 최종전까지 치렀고 여기서 산투스가 1대0으로 이겨서 우승했다. 펠레가 첫 경기에는 나왔지만 다음 2경기에는 전부 결장했다. 아마 부상 때문에 빠진 것으로 추측된다.

1962년에는 히우-상파울루 컵 빼고 전부 우승했는데, 1963년에는 주립 리그 빼고 전부 우승했다. 물론 유럽 최강의 팀을 상대했던 인터컨티넨탈컵까지 포함해서. 1960년대 초중반의 산투스는 그 정도로 대단한 팀이었으며 펠레는 그런 팀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선수였다.
1963시즌: 36경기 48골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19경기 22골 (득점왕)
토르네이우 히우-상파울루: 8경기 14골 (득점왕)
타사 브라지우: 4경기 5골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4경기 5골
인터컨티넨탈컵: 1경기 2골 (득점왕)

2.9. 1964

펠레는 주립 리그 21경기 34골이라는 압도적인 득점능력으로 또다시 득점왕을 차지했다. 그 덕에, 산투스는 또다시 파우메이라스를 따돌리고 주립 리그에서 우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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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히우-상파울루 컵에서 또 만난 가린샤와 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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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우-상파울루 컵에서는 9경기동안 4경기에 나와 3골을 기록했다. 7승 0무 2패를 기록했고, 승점이 같은 보타포구와 우승컵을 공유했다. 1965년 1월 10일에 친선 경기 개념의 결승전을 치렀는데, 이 경기에서는 자이르지뉴 등이 맹활약하며 보타포구에 2-3 으로 패했다.

타사 브라지우에서도 활약은 이어졌다. 산투스는 1963년에 주립 리그 우승을 놓쳤으나 1963년 타사 브라지우에서는 우승했었다. 덕분에 디펜딩 챔피언 자격으로 8강에 자동 진출했고 펠레는 실력을 제대로 발휘했다. 8강에서는 힘겹게 이전 라운드들을 뚫고 올라온 아틀레치쿠 미네이루를 1, 2차전 합산 스코어 9-2로 눌러버리며 미나스제라이스 주립 리그의 실낱같은 희망을 없애버렸다. 4강전 상대는 상파울루 주립 리그 우승팀이었다... 그렇다. 같은 주립 리그에서 항상 만나는 파우메이라스였다. 산투스는 1차전에서 3-2로 승리했고, 2차전에서는 4-0 대승을 거두었다. 산투스가 빈틈을 보일 때마다 타이틀을 빼앗아가던 파우메이라스를 보기 좋게 꺾어버렸다. 기록이 정확하지 않기 때문에 8강과 4강을 지나는 동안 펠레가 어느 경기에서 얼마나 많은 골을 넣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나마 확실한 자료가 남아있는 것은 결승전인데, 펠레는 1차전에서 해트트릭을 달성하며 기선제압을 확실히 했다. 그리고 2차전이 무승부로 끝나며 펠레는 개인 통산 두 번째 타사 브라지우 득점왕 타이틀을 차지했다. 산투스는 이 우승으로 전국 대회 4연패를 달성했다.

1963년의 리베르타도레스에서 우승한 산투스는 1964년에도 자동 참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펠레는 부상을 당해 1964년의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한 경기도 뛰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코치뉴, 도르바우, 멘갈비우 등 주축 공격수들이 모조리 부상으로 빠져버렸다. 공격진에 남은 믿을만한 선수는 페페뿐이었는데 그 페페마저 준결승전 1차전을 뛰고 나서 부상으로 나오지 못했다. 결국 준결승전에서 아르헨티나의 인디펜디엔테에 패배하며 대륙대회 3연패의 꿈을 접어야 했다.
1964시즌: 31경기 44골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21경기 34골 (득점왕)
토르네이우 히우-상파울루: 4경기 3골
타사 브라지우: 6경기 7골 (득점왕)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0경기 0골
인터컨티넨탈컵: 0경기 0골

2.10. 1965

펠레가 전 경기[6]를 뛴 시즌은 단 두 시즌인데, 1958년과 1965년이 그 두 시즌이다. 1965년에도 만 24세의 나이에 불과했던 펠레는 전성기라는 말이 필요없을 정도로 언제나 꾸준한 득점력을 유지했다. 그래서 1965시즌 주립 리그 30경기에서 기록한 득점 수가 49득점. 결국에는 상파울루 주립 리그 9연속 득점왕 기록을 세웠다. 달성 당시 만 25세였다. 유럽의 리그가 발전을 거듭할 때 남미 리그가 제자리걸음을 반복하며 유럽과의 격차가 크게 벌어진 현재조차도 이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다. 여튼 이런 가공할 만한 득점 지원을 받고도 우승을 못한다면 정말 이상한 팀이다. 다행히 산투스는 이상한 팀은 아니었다. 괴물 같은 팀이었다. 끈질기게 따라붙는 파우메이라스를 승점 4점 차로 따돌리고 우승을 차지했다. 공격력은 여전했고 1965시즌에는 산투스의 유일한 약점으로 지적받던 수비력 문제까지 해결되었다. 1964시즌에 비해 실점 수가 20골 가까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히우-상파울루 토너먼트에서는 전에 없던 부진까지 겪으며 디펜딩 챔피언이라는 말이 무색한 수준의 성적을 기록한다. 그 성적이 어땠느냐 하면, 무려 1차 리그 최하위. 웃긴 건 경기 수 대비 득점력은 1위였다는 것이다. 8경기 20골을 터뜨렸으니 실로 대단한 공격력이었다. 문제는 수비였다. 24실점으로 경기당 3실점을 기록했다. 우승을 달성했던 작년과는 정말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펠레는 7경기에 나와 5골을 집어넣었다. 이 정도 기록이라면 제 값은 충분히 해 준 셈이다.[7] 이런 점을 봤을 때, 역시 축구는 수비가 중요하다.

명백한 브라질 최강팀이었던 산투스는 1961년부터 1964년까지 내리 전국 리그 타이틀을 방어하며 어느새 타사 브라지우 5연패에 도전하고 있었다. 디펜딩 챔피언이었기 때문에 바로 4강전에 진출했다. 4강 상대는 파우메이라스. 또 만났다. 서로가 지긋지긋한 사이였다. 1차전에서는 산투스가 4-2 승리를 거두었고, 2차전에서는 1-1로 무승부가 나왔다. 1승 1무로 앞선 산투스가 결승에 진출했다. 펠레가 득점은 언제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두 경기 중 한 경기에서 1득점을 올린 것은 확실하다. 결승전 상대는 캄페오나투 카리우카의 꾸준한 강호 CR 바스쿠 다 가마였다. 1차전에서 펠레는 무득점으로 침묵했으나 코치뉴가 한 골, 도르발이 두 골, 토니뉴가 두 골을 집어넣으며 5-1로 대승을 거두었다. 산투스의 5연패가 기정사실화된 상황에서 2차전이 진행되었고 펠레는 이 경기 67분에 골을 터뜨렸다. 그대로 경기가 1-0 종료되며 2승 0무 0패 승점 4-0으로 산투스가 최종 승리를 거두었다. 역사적인 5연패였다. 1959년에 개막한 이후로 산투스가 1962년 2연패를 달성하기 전까지는 두 번 우승한 팀조차도 없었는데, 어느덧 5연패를 달성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브라질의 전국 단위 대회를 5연패한 팀은 1961~1965년의 산투스 FC가 유일하다. 주립 리그도 아니고 전국 리그에서 달성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펠레는 4경기 2골을 기록했고 결승전 중 한 경기에서 결승골을 넣으며 제 몫을 해주었다.

그리고 펠레는 통산 네 번째로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 참가했다. 1964시즌의 대회에는 부상 때문에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했으니 펠레에게는 세 번째로 출전한 대회였다. 펠레는 지난 대회에서 그라운드를 밟아보지도 못하고 탈락한 것에 대한 한풀이를 실컷 했다. 오죽하면 첫 경기부터 해트트릭을 기록했을까... '펠레의 분노'는 생생했다. 애꿎은 유니베르시다드 데 칠레는 조별리그 3번째 경기에서도 펠레에게 결승골을 얻어맞고 패했다. 페루의 유니베르시타리오를 상대했던 조별리그 4차전에서도 펠레는 선제 득점을 기록하여 2-1승리에 기여했다. 조별리그에서만 4경기 5골을 넣었고 산투스는 4전 전승 10득점 3실점을 기록하며 압도적인 성적으로 조별리그를 통과한다. 그런데 다음 상대가 조금, 아니 너무나 강력했다. 펠레와 산투스의 상대는 다름 아닌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전통의 우승 후보 CA 페냐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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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슬라오 마수르키에비치와 펠레의 경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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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도 우루과이의 절대강자로 군림하고 있는 페냐롤은 60년대 남미 팀 중 우승 트로피를 산투스만큼 많이 들어올린 몇 안 되는 팀이다. 거기에,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전통적으로 강한 면모를 보여 왔다. 1962년 산투스가 우승했을 때의 결승전 상대 역시 이 팀이었다. 거기에 멤버들의 면면도 산투스에 밀리지 않았다. 알베르토 스펜세르라는 괴물 센터포워드가 있었고 측면에는 후안 호야가 있었으며 페드로 로차, 라디슬라오 마수르키에비치라는 슈퍼 클래스의 신인들이 있었다. 더구나 그들은 지난 대회에서 산투스에게 준우승을 당한 아픔을 되갚아주려는 동기부여마저 강력했다. 펠레는 산투스의 홈에서 펼쳐진 1차전에서 두 골을 득점하는 등 고군분투하여 팀의 5-4 진땀승을 이끌었다. 그리고 우루과이에서 진행된 2차전에서는 무득점에 그치며 팀의 3-2패배를 막지 못했다. 대망의 3차전은 정말 박빙의 승부였다. 펠레와 호야가 한 골씩 집어넣었다. 그리고 경기는 연장전으로 흘렀다. 그리고 페냐롤의 호세 사시아가 천금 같은 골을 터뜨렸다. 산투스는 우승의 꿈을 또 접어야 했다. 그래도 펠레 개인은 왜 자신이 세계 최고의 선수인지 증명했다. 기록만으로도 그것을 알 수 있다. 7경기 8골. 펠레는 처음으로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득점왕에 올랐다.

그러나 누가 알았겠는가? 이 경기 후로 펠레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단 한 경기도 뛰지 못했다. 요즘 사람들에게 익숙하게 비유하면, 리오넬 메시가 25살 이후로 챔피언스리그에 나오지 못했다는 것과 같다. 당시 사람들 중 이것을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물론, 그 후로도 산투스는 2번 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 참가 자격을 얻을 수 있는 성적을 냈다. 후술하겠지만 월드컵에 집중하기 위한 브라질 축구협회의 결정 때문에 그 천금 같은 기회가 날아가 버렸다.
1965시즌: 48경기 64골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30경기 49골 (득점왕)
토르네이우 히우-상파울루: 7경기 5골
타사 브라지우: 4경기 2골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7경기 8골 (득점왕)
인터컨티넨탈컵: 0경기 0골

2.11. 1966

히우-상파울루 컵은 원래 2월 즈음에 개최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1966년에는 1월과 3월 사이에 개최되었다. 조기 개최된 히우-상파울루 컵에서 펠레는 부상 때문에 한 경기도 뛰지 못했지만, 산투스의 나머지 동료들이 충분히 좋은 활약을 보여주며 펠레의 공백을 잘 메웠다. 결국 보타포구, 바스쿠 다 가마, 코린치안스와 함께 공동 1위를 기록해 우승을 달성했다. 히우-상파울루 컵은 1966년에 마지막으로 열린 뒤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펠레는 월드컵에서 처음으로 실패를 경험했다. 그리고 돌아오자마자 7월에 시작되는 주립 리그&전국 리그에 매진해야 했다. 잉글랜드에 갔다가 된통 태클만 잔뜩 당하고 온 펠레는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1959년과 1963년만 제외하고 주립리그 타이틀을 싹쓸이했던 산투스였지만 1966년에는 삐끗하며 떨어졌다. 펠레가 월드컵에서 부상을 당한 영향이 컸다. 펠레는 부상 때문에 14경기만 뛰었고, 골도 13골을 득점했다. 이 때문에 9년 연속으로 차지했던 득점왕 타이틀을 같은 팀 소속의 토니뉴 게헤이루에게 내주었다.

역시 월드컵 직후 열렸던 전국 대회. 주립 리그 우승에 실패한 산투스는 전국 리그 타이틀만은 방어해야 했다. 타사 브라지우에는 4강전부터 참여했다. 4강전 상대는 페르남부쿠 주 챔피언 나우치쿠를였다. 산투스는 예전같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며 진땀을 뺐다. 승부를 못 내고 경기를 3차전까지 끌고 갔다. 펠레는 1, 2, 3차전에 전부 출전하여 세 경기동안 한 골을 넣었다. 그래도 꾸역꾸역 승리를 거둔 산투스는 결국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 상대는 미나스제라이스 주 챔피언 크루제이루였다. 크루제이루에는 10대의 나이에 월드컵에서 골을 넣고도 실패를 맛보고 돌아와야 했던 또 다른 신예가 있었다. 바로 토스탕. 토스탕은 6년 늦게 태어나 활동한 펠레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월드컵을 제외하면 펠레와 정말 많이 닮은 커리어를 가지고 있었다. 플레이 스타일도 아주 비슷했다. 크루제이루는 토스탕 외에도 윌송 피아자[8] 등 유명한 선수들을 꽤 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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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투스의 펠레와 크루제이루의 토스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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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전은 싱거웠다. 그런데 평소였다면 산투스가 너무 압도적으로 이겨서 싱거웠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일 테지만 이번에는 그 반대였다. 산투스는 무려 6-2로 참패를 당했다. 경기 11분만에 제카를루스가 자책골을 넣으며 흔들렸으며 곧바로 토스탕에게 한 골을 허용했고 나타우에게 추가 실점을 허용했으며 지르세우 로페스에게는 해트트릭을 허용했다. 토니뉴 게헤이루가 두 골을 만회하긴 했지만 이미 점수는 4점 차로 벌어진 상태였다. 결승 2차전은 상파울루에 있는 파카앵부에서 열렸다. 경기 23분에 펠레가 한 골을 터뜨렸고 토니뉴 게헤이루가 한 골을 추가하며 2-0으로 앞서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크루제이루에는 토스탕이 있었다. 토스탕은 64분에 만회골 한 개를 터뜨렸고, 9분이 지나 나타우가 동점골을 넣었다. 그리고 지르세우 로페스가 경기 종료 직전에 골을 득점하며 산투스를 상대로 역전승을 기록했다. 산투스는 결승전 스코어 합계 9-4로 완패했다. 이것은 큰 충격이었다. 펠레 개인은 5경기 2골을 기록했지만 결국 우승하지 못했기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리고 스타덤에 오른 크루제이루의 토스탕은 전국적인 지지를 얻으며 펠레 브랑쿠(Pelé Branco), 즉 하얀 펠레라는 별명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산투스는 1965년 타사 브라지우 우승팀이었지만, 브라질 축구협회가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불참을 결정했다. 아무리 훌륭한 기량을 가졌더라도 결국 선수에 불과한 펠레는 어찌할 방도가 없었고, 1966년의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뛰지 못했다.

동료들 덕에 들어올린 히우-상파울루 컵이 아니었다면, 펠레는 9년 만에 무관을 기록할 뻔했다. 월드컵에서도 보여준 것이 별로 없었고, 1966년 국제 축구계의 스포트라이트는 월드컵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준 유럽 선수들이 전부 가져갔다. 바비 찰튼, 에우제비우, 프란츠 베켄바워, 바비 무어 등... 이로써 브라질&펠레의 시대는 1966년을 기점으로 완전히 끝난 것처럼 보였다.
1966시즌: 19경기 15골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14경기 13골
토르네이우 히우-상파울루: 0경기 0골
타사 브라지우: 5경기 2골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0경기 0골
인터컨티넨탈컵: 0경기 0골

2.12. 1967

시즌 개막 이전, 산투스의 최전성기를 이끈 감독 룰라가 타사 브라지우 우승을 놓친 것 때문에 팀을 떠나게 되었다.

펠레는 팀에 남았다. 그러나 계속해서 부상에 시달렸다. 1967시즌 상파울루 주립 리그에서는 18경기만 출전했다. 산투스는 정규리그 공동 1위를 차지했다. 득실차는 상파울루에 밀렸으나 승점이 같았고, 1959년에 파우메이라스를 상대로 그랬던 것처럼 플레이오프를 치르게 되었다. 이 플레이오프는 산투스가 승리했다. 에두와 토니뉴 게헤이루가 골을 터뜨렸고 상파울루의 바바[9]가 만회골을 득점했다. 그대로 경기가 끝나며 산투스가 2-1승리를 거두었고 우승을 차지했다. 펠레의 7번째 주립 리그 우승이었다. 펠레는 18경기 17골을 기록했으며 21골을 넣은 코린치아스의 플라비우에게 밀려 득점왕을 차지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그래도 경기당 1골에 준하는 기록을 세웠으며, 부상의 영향에서 슬슬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산투스는 1966년의 타사 브라지우에서 우승하지 못했고 주립 리그에서도 파우메이라스에 선두 자리를 내주었기 때문에 1967년의 타사 브라지우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시즌 개막한 전국 대회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호베르투 고메스 페드로사 챔피언십(토르네이우 호베르투 고메스 페드로사)이었다. 리그의 형식을 갖춘 최초의 전국대회였던 이 대회는 3월에 개최되어 6월에 끝나는 상반기 리그였다. 산투스는 이 대회에 참가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차 리그 8개 팀 중 4위를 기록하며 바로 탈락하고 말았다. 그래도 펠레 개인은 빛났는데, 산투스의 14경기에 전부 출전하여 팀 전체 21득점의 절반 가까이 되는 9득점을 터뜨렸다.

1966년에 타사 브라지우에서 준우승한 산투스는 1967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참가 조건을 충족했지만 산투스 구단이 국내 리그 집중을 위해 참가를 거부했다. 펠레의 대륙대회 출전은 또 불발되었다.

1967년을 마지막으로, 산투스와 수많은 영광을 함께한 위대한 캡틴 지투가 은퇴를 선언했다. 산투스의 황금세대 멤버들도 하나둘씩 바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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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전쟁 중이던 나이지리아에 가서 잠시 전쟁을 멈춘 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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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으로 1967년 나이지리아 비아프라 전쟁 당시, 양측 당사자들은 라고스에서 열린 펠레의 시범 경기를 관전하기 위해서 48시간의 휴전에 합의했다.
1967시즌: 32경기 26골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18경기 17골
토르네이우 호베르투 고메스 페드로사: 14경기 9골
타사 브라지우: 0경기 0골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0경기 0골
인터컨티넨탈컵: 0경기 0골

2.13. 1968

1968년 주립 리그에서는 22승 1무 3패를 기록하며 가히 압도적인 승점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산투스의 승점은 45점, 2위 코린치안스의 승점은 34점이었다. 펠레는 오랜만에 리그의 대부분인 21경기에 나왔고 17골을 넣었다. 득점왕에 도전해 볼 만 했지만, 페호비아리아의 텔라가 20골을 넣었기에 득점왕 탈환에는 실패했다. 펠레는 월드컵에서의 부상 이후로 벌써 3년째 주립 리그 득점왕에 못 오르고 있었다.

1967년의 주립 리그 우승 덕분에 전반기의 호베르투 고메스 페드로사 챔피언십과 후반기의 타사 브라지우 참가 자격을 얻었다. 호베르투 고메스 페드로사 챔피언십에서는 자신들의 발목을 자주 붙잡았던 지역 라이벌 파우메이라스가 최종 리그 최하위를 기록하는 것을 지켜보며 기분 좋게 우승을 달성했다. 펠레는 18경기 12골을 기록하며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산투스에게 좋지 않은 소식이 들려온다. 전국 단위의 리그에서 우승하며 3년 만에 얻게 된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참가 기회였지만, 브라질 축구협회가 1970년 월드컵 남아메리카 예선을 위해 브라질 팀들의 리베르타도레스 참가를 막은 것이다. 산투스는 원래 타사 브라지우에도 참가해야 했지만 이 소식을 듣고 나서 곧바로 타사 브라지우 출전을 거부했다. 이는 타사 브라지우의 디펜딩 챔피언이었던 파우메이라스도 마찬가지였다. 파우메이라스 역시 타사 브라지우 출전을 거부했다. 산투스와 파우메이라스라는 상파울루의 양대산맥이 빠져버리자 전국 리그 우승의 문턱에서 항상 물만 먹었던 히우지자네이루 챔피언 보타포구 FR의 숨통이 트였고, 보타포구는 1968년 타사 브라지우에서 자이르지뉴제르송 등의 선수를 주축으로 하여 그토록 염원하던 전국 대회 우승을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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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2세가 전달해 준 컵대회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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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11월 10일에 진행되었던 경기인데, 공식 기록에는 없는 대회이다. 멤버 구성을 보았을 때, 아마 연마다 주립 리그 올스타팀끼리 슈퍼컵 개념의 대회가 열렸던 것으로 보인다. 이 경기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참관했다. 영상 링크. 마라카낭에서 열린 이 경기에서 펠레는 상파울루 클럽 대표팀의 주장을 맡았고 히우지자네이루 클럽 대표팀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사진 오른쪽을 보면 이 경기에서 히우지자네이루 클럽 대표팀의 주장을 맡았던 제르송도 보인다.

역시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참가 자격을 충족하지 못해 참가하지 못했다. 그리고 대표팀 감독 아이모레 모레이라가 펠레에게 국가대표팀 복귀를 요청했고, 고민하던 펠레는 그 요청을 받아들여 국가대표팀에 복귀했다.

국가대표팀에 복귀하던 시점에 인터컨티넨탈 슈퍼컵이 열렸다. 이 대회는 1960년부터 1967년까지 인터컨티넨탈컵에서 우승했던 팀을 모두 초청하여 열렸다. 참가 팀은 레알 마드리드 CF(1960), CA 페냐롤(1961, 1966), 산투스 FC(1962, 1963),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1964, 1965), 라싱 클루브 데 아베야네다(1967)였다. 그야말로 60년대 최강팀들의 총집합이었다. 먼저 남미 팀끼리 최강자를 가렸다. 1968년 11월 19일에 열린 라싱 클루브와의 경기에서 펠레는 선제 결승골을 득점하며 2-0승리를 이끌었다. 펠레는 이후 경기들에서 골을 득점하지는 못했지만 승리에 적지 않게 기여하며 3승 0무 1패를 기록했고, 페냐롤을 1점 차로 따돌리며 산투스를 남미 대표팀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유럽 최강자전에서는 레알 마드리드 CF가 출전 취소를 선언하며 자동으로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가 결승전에 올라오게 되었다.

인터컨티넨탈 슈퍼컵 결승전은 1969년 6월 24일에 열렸다. 인테르의 홈인 스타디오 주세페 메아차에서. 인테르는 자친토 파케티가 결장했지만 산드로 마촐라, 마리오 코르소, 자이르, 안젤로 도멘기니, 타르치시오 부르그니치 등 쟁쟁한 스타들이 선발 출전했다. 산투스는 펠레를 필두로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클루두아우두, 히우두[10], 에두 등이 선발 출전했다. 경기는 역시 팽팽했다. 경기 57분, 산투스의 토니뉴 게헤이루가 골을 터뜨렸다. 이 득점이 그대로 유지되며 산투스가 1-0승리를 거두었고, 1960년대를 대표하는 팀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물론 이 대회에서 우승했다고 해서 산투스가 무조건 1960년대 세계 최고의 팀인 것은 아니다.
1968시즌: 39경기 29골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21경기 17골
토르네이우 호베르투 고메스 페드로사: 18경기 12골
타사 브라지우: 0경기 0골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0경기 0골
인터컨티넨탈컵: 0경기 0골
인터컨티넨탈 슈퍼컵: 3경기 1골#

2.14. 1969

산투스는 주립 리그에서 미친듯이 날아다녔다. 주장 카를루스 아우베르투와 펠레를 중심으로 똘똘 뭉친 산투스는 막강했다. 주립 리그 1차 리그 26경기에서 60골을 때려박으며 공격축구가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었고, 1차 리그에서 1위를 차지하며 진출한 결승 리그에서는 파우메이라스, 상파울루, 코린치안스를 상대로 3경기 6득점 1실점을 기록하며 2승 1무로 승점 5점을 쌓아올려 우승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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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립 리그 3연패를 기념하여 카를루스 아우베르투와 함께 인터뷰를 진행하는 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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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에 슬럼프에 빠졌지만 곧바로 일어나 또다시 주립 리그 3연패를 이뤄낸 것이다. 펠레는 25경기 26득점을 기록했다. 오랜만에 경기당 1골을 넘긴 것이었고, 득점왕을 차지했다. 열 번째 득점왕 타이틀이자 아홉 번째 주립 리그 우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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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호베르투 고메스 페드로사 챔피언십에 출전한 산투스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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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디펜딩 챔피언 산투스는 전국 리그에서 영 맥을 추지 못했다. 호베르투 고메스 페드로사 챔피언십 1차 리그에서 5승 5무 6패를 기록했고, 8개 팀 중 5위라는 평범한 성적으로 대회를 마감했다. 그럼에도 펠레는 12경기 12골을 기록하며 득점랭킹 2위에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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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레의 1,000번째 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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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11월 19일, 펠레는 통산 1000골 달성을 목전에 둔 상황이었다. 바스쿠 다 가마와의 경기였고, 상대 선수의 파울로 인해 펠레는 페널티킥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그것을 침착하게 마무리지어 득점을 기록했다. 이 때 브라질 전역은 난리가 났었다. 월드컵 예선에서 6경기 6골을 기록하며 출전한 6경기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었다. 펠레는 대표팀의 중심으로 돌아와 압도적인 성적으로 브라질을 통과시켰고 클럽에서도 이런 기념비적인 장면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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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산 1000번째 득점 이후 기뻐하는 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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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비공식 경기를 포함한 기록이었지만, 공식이든 비공식이든 1000골이라는 기록은 펠레의 꾸준함을 잘 증명해 주는 기록이다. 펠레의 1000골 달성에 브라질 전역에서 난리가 났으며, 언론에서는 각종 기사와 사진들을 쏟아냈다.

선술했듯 브라질 축구협회가 월드컵 예선에 집중하기 위해 펠레를 포함한 국가대표팀 선수들이 대거 속해 있는 산투스의 대륙 대회 참가를 막았고, 이로 인해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의 출전팀을 결정하는 타사 브라지우를 기권했다. 따라서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 참가하지 못했다.

1969년에도 인터컨티넨탈 슈퍼컵이 열렸고 산투스는 이번에도 참가했다. 그러나 유럽 팀들이 참가하지 않았다. 따라서 남아메리카 최강자전의 결과로 당해 챔피언이 결정되게 되었다. 펠레는 12월 11일 페냐롤과의 경기에서 결승골을 넣어 승리를 이끄는 등 좋은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나머지 경기에서 전패했고, 1승 4패로 4개 팀 중 최하위를 기록했다. 이번 우승팀은 CA페냐롤이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저조한 성적은 1969년에도 피터지게 열심히 친선경기 다니느라 혹사한 것도 영향이 있었다. 다음은 펠레의 1969년 경기 일정(장소기준)이다.

콩고 포인트노이레 1경기
콩고 브라자빌 1경기
콩고 킨샤사 2경기
나이지리아 라고스 1경기
모잠비크 1경기
베넹 1경기
가나 아크라 1경기
알제리 오랑 1경기
파울리스타 12경기
브라질 프레지덴테 두트라 2경기
파울리스타 1경기
브라질 포르투알레그리 1경기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1경기
파울리스타 11경기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1경기
파울리스타 2경기
이탈리아 밀란(인터컨티넨탈 슈퍼컵) 1경기
브라질 살바도르 1경기
브라질 아라카주 1경기
브라질 헤시페 1경기
콜롬비아 보고타 2경기
베네수엘라 카라카스 1경기
파라과이 아순시온 1경기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2경기
브라질 벨루오리존치 1경기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 1경기
유고슬라비아 자그레브 1경기
스페인 마드리드 1경기
잉글랜드 스토크온트렌트 1경기
이탈리아 제노바 1경기
브라질 리그 9경기
브라질 주앙페소아 1경기
브라질 리그 3경기
아르헨티나 마르델플라타(인터컨티넨탈슈퍼컵) 1경기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인터컨티넨탈 슈퍼컵) 1경기
아르헨티나 라플라타(인터컨티넨탈 슈퍼컵) 1경기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1경기
브라질 산토스(인터컨티넨탈 슈퍼컵) 1경기
브라질 상파울루(인터컨티넨탈 슈퍼컵) 1경기
브라질 살바도르 1경기
브라질 상파울루 2경기

1969시즌: 37경기 38골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25경기 26골 (득점왕)
토르네이우 호베르투 고메스 페드로사: 12경기 12골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0경기 0골
인터컨티넨탈컵: 0경기 0골
인터컨티넨탈 슈퍼컵: 5경기 2골#

2.15. 1970

1970년부터 상파울루 주립 리그는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열렸다. 1970년 상반기에는 상파울루의 빅 5(산투스, 파우메이라스, 코린치안스, 상파울루, 포르투게자)를 제외한 팀들끼리 리그를 진행했다. 그리고 하반기에는 전반기 리그 1, 2, 3위 팀, 4, 5, 6위 팀 중 플레이오프를 거쳐 선발된 두 팀과 상반기 리그에서 제외되었던 '빅 5'가 함께 리그를 진행했다. 산투스는 8승 5무 5패를 기록하며 최종 4위를 기록했다. 월드컵에서 최고의 플레이메이킹 능력을 보여준 펠레가 이끄는 공격진의 득점 수는 16경기 34득점으로 1970년 상파울루 주립 리그 하반기 리그에 참가한 모든 팀 중 1위였다. 펠레는 한 경기 빼고 전부 출전하여 7골을 터뜨렸다. 다소 부진한 성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나, 이 기록이 펠레가 1970년 월드컵에서 불꽃을 태우고 돌아와 만들어낸 기록이며, 펠레의 역할이 1970년 이후 미드필더에 더욱 가까워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 역시 대단한 기록이다. 주립 리그 타이틀은 제르송이 뛰고 있는 상파울루 FC가 가져갔다.

1969년 주립 리그 우승을 통해 전국 리그 진출 자격을 얻었다. 하지만 산투스는 전체적으로 지친 듯한 모습을 보여주며 1차 리그 16경기에서 5승 6무 5패를 기록했고, 브라질 최강의 주립 리그 챔피언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8개 팀 중 5위라는 성적을 받아들고 짐을 싸야 했다.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는 참가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며 참가하지 못했다. 사실 브라질 축구 협회에서 월드컵에 집중하기 위해 1970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 브라질 클럽을 보내주지 않았으므로 산투스가 만약 참가 조건을 충족했더라도 참가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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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본인이 선정한 '가장 상대하기 어려웠던 수비수'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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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투스는 언제나 세계 곳곳으로 친선 경기 투어를 다녔는데, 1970년 9월 22일에는 미국의 랜달스 앤드 워즈 제도에 있는 다우닝 스타디움에서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를 상대하게 되었다. 1970년 월드컵에서 역사에 남을 맞대결을 펼쳤던 무어와 펠레는 이 친선 경기에서도 2-2 무승부를 기록했다. 펠레는 이 경기에서 팀의 두 골을 자신이 전부 득점했다. 왼발로 한 골, 머리로 한 골을 넣었다.

펠레는 1970년에 클럽에서 아무런 트로피도 들어올리지 못하며 11시즌만에 무관을 기록했다. 그러나 1970년의 펠레는 당시 세계 어떤 축구대회와도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의 절대적인 위상을 가지고 있었던 FIFA 월드컵에서 뛰어난 활약으로 브라질에게 세 번째 우승을 안겼고, 그 결과 축구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렇기에 클럽에서 무관이었음에도 펠레 개인은 별로 아쉬움이 없었을 것이다.[11]

1970년 펠레의 경기 일정은 다음과 같다. (경기 장소 기준)

총 76경기

브라질 쿠리치바
아르헨티나 마르델플라타
아르헨티나 코르도바
칠레 산티아고
페루 리마
칠레 산티아고 (4경기)
브라질 국대 (19경기 브라질 포르투알레그리 1경기, 리우데자네이루 5경기, 상파울루 2경기, 마나우스 1경기, 벨루오리존치 1경기, 멕시코 9경기)
파울리스타 5경기
브라질 고이아니아
파울리스타 1경기
브라질 아라카주
파울리스타 9경기
브라질 에레침
파울리스타 1경기
베네수엘라 카라카스
베네수엘라 마라카이보
미국 시카고
미국 워싱턴DC
미국 LA
미국 뉴욕
콜롬비아
브라질리그 6경기
브라질 마세이오
브라질리그 7경기
페루 리마 1경기
브라질리그 3경기
홍콩 4경기

1970시즌: 28경기 11골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15경기 7골
토르네이우 호베르투 고메스 페드로사: 13경기 4골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0경기 0골
인터컨티넨탈컵: 0경기 0골

2.16. 1971

1971년의 상파울루 주립 리그는 1970년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하반기 리그부터 참가한 산투스는 10승 8무 4패로 또 4위에 올랐다. 펠레는 22경기 중 19경기에 나와 8골을 득점했다. 이번 시즌의 산투스는 지난 시즌만큼 많은 골을 넣지는 못했다.

그리고 드디어 브라질 세리 A가 개막했다. 전국 리그가 확대되며 참가팀이 많아졌고, 브라질 최고의 주립 리그였던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상파울루 주립 리그), 그리고 캄페오나투 카리우카(히우지자네이루 주립 리그)에서는 상위 5팀까지 전국 리그에 나갈 수 있었다. 물론 그때는 지금과 이름이 달랐다. 전국 리그는 1차 조별 리그부터, 2차 조별 리그, 그리고 3차 최종 리그까지 진행하여 우승자를 가리는 방식이었다. 산투스는 1차 조별 리그에서 19경기 7승 7무 5패를 기록하며 A조 10개 팀 중 4위를 기록했다. 펠레는 10월 30일에 펼쳐진 1차 리그 코린치안스전에서 골을 득점했다. 2차 리그에 간신히 진출한 산투스는 아틀레치쿠 미네이루, 인테르나시오나우, 바스쿠 다 가마와 같은 조에 속했다. 산투스는 아틀레치쿠 미네이루와 인테르나시오나우에 승점 1점 차로 밀리며 결승 리그 진출권을 내주었다. 펠레의 최종 성적은 21경기 1골. 그렇다. 펠레는 코린치안스전 골 이후 한 골도 기록하지 못했다. 엄청난 부진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펠레는 남아메리카 정상급 선수 중 한 명으로 인정받았다. 그 증거는 1971년에 처음 시상하기 시작한 남아메리카 올해의 축구 선수 투표 결과이다. 펠레는 지금까지 지내온 다른 시즌과 비교도 안 되는 초라한 득점력을 기록하고도 1971년 남아메리카 올해의 선수 투표에서 6위를 기록했다. 이는 라디슬라오 마수르키에비치, 자이르지뉴, 히벨리누, 엑토르 춤피타스보다 높은 순위였다. 펠레보다 높은 순위에 랭크된 선수는 토스탕, 오마르 파스토리사, 루이스 아르티메, 테오필로 쿠비야스, 제르송이었다. 물론 이 투표에 펠레의 인기가 크게 반영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무관과 저조한 득점력에도 불구하고 이런 선수들 사이에서 6위를 차지했다는 것은 펠레 개인의 클래스가 그다지 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립 리그 우승은 또다시 상파울루 FC가 차지했다.

1970년의 호베르투 고메스 페드로자 챔피언십에서 탈락했으므로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만 30세가 된 1971년의 펠레가 받아든 성적표는 무관이었다. 그것도 2년 연속 무관이었다. 특히 주립 리그에서 두 번 연속으로 우승을 놓친 것은 처음이었다.

많은 팬들이 배경을 모르고 1970년대 펠레의 스탯으로 까는 경우도 있으나 펠레는 산토스의 해외 친선투어에 지나치리만큼 혹사당했기에 리그에서는 이미 체력이 퍼진 것이 원인이다. 다음은 1971년 펠레의 경기 일정, 즉 장소와 경기 수이고 찐한 글이 이른바 공식경기인 리그 경기이다.

볼리비아 2경기
파나마 1경기
프랑스령 마르티니크 1경기
멕시코 1경기
수리남 1경기
자메이카 2경기
콜롬비아 3경기
엘살바도르 1경기
아이티 1경기
파울리스타 6경기
프랑스 파리 1경기
브라질 살바도르 2경기
파울리스타 10경기
볼리비아 2경기
파울리스타 6경기
캐나다 토론토 1경기
미국 뉴저지 1경기
캐나다 몬트리올 1경기
브라질 국대 2경기 (브라질 상파울루, 리우데자네이루)
멕시코 1경기
미국 LA 경기
캐나다 벤쿠버 1경기
미국 뉴욕 1경기
미국 시카고 1경기
브라질 리그 5경기
베네수엘라 1경기
콜롬비아 1경기
브라질리그 7경기
페루 리마 1경기
브라질 리그 12경기
브라질 나타우 1경기
브라질 알메이당 1경기

산토스는 펠레, 클로도알도, 카를로스 알베르토 등 스타선수들에 대한 인건비가 증가하고 펠레가 재계약을 거부하자 펠레가 나가기 전에 최대한 뽕을 뽑고자 이러한 친선 투어를 많이 다녔는데 위에서 봤듯이 현대 선수들조차 저렇게 다니면 엄청나게 퍼질 것이다. 2021-22 시즌 살라가 전반기 메시급 활약을 펼친다는 소리를 듣고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아프리카 월드컵예선 다녀온 뒤 매우 부진한 것이 비슷한 예일 것이다.
1971시즌: 40경기 9골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19경기 8골
캄페오나투 나시오나우 지 클루베스[12]: 21경기 1골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0경기 0골
인터컨티넨탈컵: 0경기 0골

2.17. 197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FFFFFF 10%, #000000 10%, #000000 20%, #FFFFFF 20%, #FFFFFF 30%, #000000 30%, #000000 40%, #FFFFFF 40%, #FFFFFF 50%, #000000 50%, #000000 60%, #FFFFFF 60%, #FFFFFF 70%, #000000 70%, #000000 80%, #FFFFFF 80%, #FFFFFF 90%, #000000 90%);"
산투스의 방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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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시즌 시작 전, 산투스 FC는 대한민국과 일본 등 아시아 여러 국가에 방문해 국가대표팀과 친선 경기를 하고 갔다. 펠레 역시 경기에서 뛰었다. 다음은 1972년의 펠레와 산토스의 경기 일정, 경기 장소이다. 일본 -> 홍콩 -> 한국 -> 홍콩 -> 태국 -> 시드니 -> 자카르타 -> 미국 뉴저지 -> 보스턴 -> 시카고 -> 토론토 -> 벤쿠버 -> 샌프란시스코 -> LA 보기만 해도 정신나간 스케쥴을 소화하며 이 시즌의 펠레와 산토스는 리그에서도 부진하는 모습을 보였다.

상파울루 1경기
리우데자네이루 1경기
상파울루 1경기
온두라스 1경기
코스타리카 1경기
콜롬비아 1경기
과테말라 1경기
온두라스 1경기
코스타리카 1경기
상파울루 1경기
영국 버밍엄 1경기
영국 셰필드 1경기
아일랜드 더블린 1경기
벨기에 1경기
이탈리아 로마 1경기
이탈리아 나폴리 1경기
파울리스타 5경기
브라질 알라구이냐스 1경기
브라질 쿠리치바 1경기
브라질 시아노르치 1경기
파울리스타 3경기
이탈리아 나폴리 1경기
이탈리아 칼리알리 1경기
터키 이스탄불 1경기
이란 테헤란 1경기
파울리스타 3경기
일본 도쿄 1경기
홍콩 2경기
한국 서울 1경기
홍콩 2경기
태국 2경기
호주 시드니 1경기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1경기
미국 뉴저지 1경기
미국 보스턴 1경기
미국 시카고 1경기
캐나다 토론토 1경기
캐나다 벤쿠버 1경기
미국 샌프란시스코 1경기
미국 LA 1경기
파울리스타 7경기
브라질 플로리아노 폴리스 1경기
파울리스타 4경기
트리니다드 토바고 1경기
브라질리그 28경기

1972년에도 상파울루 주립 리그는 같은 방식으로 치러졌다. 산투스는 하반기 리그부터 참가했고 22경기 14승 1무 7패를 기록하며 최종 3위를 차지했다. 이번 우승팀은 파우메이라스였다. 산투스는 3년 연속으로 주립 리그 타이틀을 날렸고, 펠레는 20경기 9골을 기록했다. 1969년에 상파울루로 이적한 전 산투스 동료 토니뉴 게헤이루가 17골을 집어넣으며 득점왕을 차지했기에 득점왕도 아니었다. 물론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하는 전성기 지난 선수가 득점왕 경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것이지만...

산투스는 1972년 전국 리그에도 참가했다. 전국 리그가 확대되며 참가팀이 많아졌고, 상파울루 주에서는 상위 5팀까지 전국 리그에 나갈 수 있었다. 그래서 1971년 주립 리그에서 4위를 기록했던 산투스도 전국 리그에 참가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1차 리그에서 1위를 달성하며 손쉽게 통과했다. 그러나 2차 리그에서 머릿칼이 풍성해진 자이르지뉴가 이끄는 보타포구 FR와 같은 조에 속하게 되었다. 풍성한 자이르지뉴는 강했다. 보타포구는 2차 리그에서 그레미우와 산투스, 산타 크루스를 모두 따돌리고 조 당 1개만 주어지는 준결승 진출 티켓을 따냈다. 펠레는 전국 리그의 문턱에서 또 고배를 마셔야 했다. 그래도 펠레 개인의 활약은 좋은 편이었다. 16경기에 나와 5골을 넣으며 공수에 크게 기여했다.

1971년의 전국 리그를 망친 만큼, 당연히 코파 리베르타도레스는 1972년에도 1973년에도 참가하지 못했다.

팀 성적은 점점 망해 갔지만, 펠레 개인은 여전히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72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득점왕을 차지하며 상을 받은 페루의 테오필로 쿠비야스에 이어 남아메리카 올해의 축구 선수 2위에 올랐다. 이번에도 펠레는 자이르지뉴, 토스탕, 아데미르 다 기아, 노르베르토 알론소, 엘리아스 피게로아 등 대단한 선수들을 제쳤다.
1972시즌: 36경기 14골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20경기 9골
캄페오나투 나시오나우 지 클루베스: 16경기 5골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0경기 0골
인터컨티넨탈컵: 0경기 0골

2.18. 1973

이빨 빠진 호랑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1970년대의 산투스 FC. 내리 3~4위를 기록하며 주립 리그 우승을 3연속으로 놓친 그들에게서 세계를 호령하던 60년대의 포스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1973년은 정말 비웃음을 사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승컵이 필요했다. 그런 인간들이 정신을 못차리고 1973년에도 해외 투어질에 정신이 없었다
다음은 1973년 펠레와 산토스의 경기 일정, 장소이다.

상파울루 2경기
호주 멜버른 1경기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 1경기
쿠웨이트 1경기
카타르 도하 1경기
바레인 1경기
이집트 카이로 1경기
수단 1경기
UAE 두바이 1경기
독일 뉘른베르크 1경기
프랑스 보르도 1경기
벨기에 1경기
영국 런던 1경기
영국 플리머스 1경기
파울리스타 11경기
미국 뉴저지 1경기
미국 시카고 1경기
미국 볼티모어 1경기
미국 오클랜드 1경기
미국 LA 1경기
미국 마이애미 1경기
미국 필라델피아 1경기
미국 워싱턴 DC 1경기
미국 로체스터 1경기
미국 볼티모어 1경기
브라질 이투이우타바 1경기
브라질 고이아니아 1경기
파울리스타 12경기
브라질리그 22경기
칠레 산티아고 1경기
브라질리그 3경기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1경기
브라질리그 3경기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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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의 산투스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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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30대 중반의 나이를 향해 가고 있던 펠레. 산투스는 세 명의 월드컵 영웅을 중심으로 똘똘 뭉쳤다. 이번 주립 리그에서도 빅 파이브를 제외한 팀들끼리 먼저 예선을 진행했다. 예선 결과 6팀이 선발되었고, 그 팀들은 '빅 5'와 함께 본선 1차, 2차 리그 경기를 진행하게 되었다. 미리 전력을 가다듬고 있었던 산투스는 본선 첫 번째 리그 11경기에서 23득점 5실점을 기록했고, 8승 3무 0패로 무패우승을 달성하며 결승전 진출 자격을 일찌감치 얻어 놓았다. 산투스는 본선 두 번째 리그에도 참가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1차 리그에서 8위를 기록했던 포르투게자가 치고 올라오며 1위를 차지했고 코린치안스, 주벤투스, 과라니가 산투스보다 높은 순위에 오르며 5위에 그쳤다. 결국 첫 번째 리그 우승팀인 산투스, 두 번째 리그 우승팀인 포르투게자의 결승전으로 승부를 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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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결승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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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는 드라마틱했다. 0-0스코어가 이어지며 엄청난 접전이 이어졌다. 연장전까지 진행되었음에도 승부는 정해지지 않았다. 결국 승부차기로 승자를 정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해프닝이 있었다. 양 팀의 첫 번째 키커들이 실축했고, 산투스의 두 번째 키커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는 킥을 성공시켰다. 산투스의 골키퍼 아구스팅 세하스는 포르투게자의 두 번째 키커 칼레가리의 슈팅을 또 막아냈다. 산투스의 세 번째 키커 에두가 킥을 성공시켰고, 포르투게자의 비우시뉴의 슈팅이 골대를 강타했다. 스코어 3:1. 산투스가 우세하지만 5번째 키커까지 찬다면 아직 뒤집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주심 아르만도 마르케스가 경기 종료 휘슬을 불었고, 포르투게자 선수들은 이미 진 줄 알고 상심한 채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뒤집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이 판정에 항의한 선수가 없었다. 산투스 선수들은 환호하며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주심은 포르투게자 선수들이 경기장에서 아예 빠져나가고 나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이미 우승 셀레브레이션까지 다 한 상황. 다시 불러와서 승부차기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주심의 실수 때문에 정말 애매한 상황이 되었고, 결국 브라질 축구협회는 다음날인 8월 27일에 두 팀의 공동 우승을 선언했다. 이로써 포르투게자는 큰 이득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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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우승 후 기뻐하는 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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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레는 주립 리그 23경기 중 19경기에 나와 11골을 기록했고, 4년만에 주립 리그 득점왕을 차지했다. 그리고 산투스는 마침내 3년간의 무관 행진을 끝냈다.

1973년의 전국 리그는 1972년 대회보다 규모가 훨씬 커졌다. 참가팀은 26팀에서 40팀으로 늘어났고, 산투스는 더 많은 상대와 경기를 해야 했다. 게다가 1차 리그가 두 번으로 나누어졌기 때문에 더 많은 경기를 해야 했다. 산투스는 1차 리그의 20팀제 리그에서 19경기 8승 6무 5패로 4위를 차지했다. 펠레는 20팀제 리그에서 7골을 터뜨렸다. 1차 리그의 10팀제 리그는 캄페오나투 가우슈의 상위 5팀과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의 상위 5팀이 같은 리그에 속하여 경기를 진행했다. 산투스는 이 리그에서 9경기 5승 3무 1패를 기록하며 파우메이라스를 따돌리고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 펠레는 10팀제 리그에서도 7골을 기록했다. 산투스는 이빨 빠진 호랑이치고 아주 강했다. 산투스가 1차 리그 28경기에서 기록한 성적은 13승 9무 6패 39득점 20실점으로 40팀 중 4위에 해당하는 성적이었고 특히 득점 부분에서는 모든 팀 중 1위였다. 펠레는 1차 리그에서만 총 14골을 득점했다.

부푼 마음으로 참가한 2차 리그. 그러나 2차 리그에서는 상파울루와 크루제이루가 1, 2위를 차지했고 결승 리그 진출권 역시 상파울루와 크루제이루가 가져갔다. 산투스는 9경기 4승 3무 2패로 5위에 그쳤다. 펠레는 다섯 골을 넣었지만 산투스를 우승으로 이끌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펠레가 1973년의 브라질 전국 리그에서 세운 최종 기록은 30경기 19골. 21골을 득점한 산타 크루스의 스트라이커 하몽에 이어 득점 2위에 올랐다.

1973년 브라질 전국 리그는 펠레가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 참가할 수 있는 사실상의 마지막 기회였지만 산투스는 아쉽게 우승에 실패했고, 결국 펠레도 꿈을 접어야 했다.

그럼에도 펠레와 산투스가 보여준 아름다운 도전은 많은 사람을 감동시켰다. 33세가 된 월드컵의 영웅이 다시 주립 리그에서 득점왕을 차지하며 팀의 우승을 이끌었고, 전국 리그에서도 엄청난 퍼포먼스를 보여주었으니 그 모습은 브라질 국민들에게 감동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펠레는 활약을 인정받아 CA 우라칸의 아르헨티나 1부 리그 우승을 이끈 미겔 앙헬 브린디시, 코린치안스의 에이스 히벨리누 등을 제치고 1973년 남아메리카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게 된다.
1973시즌: 49경기 30골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19경기 11골 (득점왕)
캄페오나투 나시오나우 지 클루베스: 30경기 19골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0경기 0골
인터컨티넨탈컵: 0경기 0골

2.19. 1974

1974년 산토스는 1973년 브라질리그 경기를 시작으로 일정이 있었다. 다음은 1974년의 산토스와 펠레의 경기 일정, 장소이다.

상파울루 1경기
1973년 브라질 리그 9경기
브라질 고이아니아 1경기
브라질 우베라바 1경기
브라질 포수스지카우다스 1경기
1974년 브라질리그 5경기
브라질 주아제이루 데 노르테 1경기
브라질리그 3경기
브라질 프랑카 1경기
1974년 브라질리그 11경기
--------------------------독일 월드컵으로 6/13~6/28 2주일 휴식
1974년 브라질리그 8경기
1974년 파울리스타 5경기
스페인 카디즈 2경기
스페인 사라고사 1경기
1974년 파울리스타 8경기
상파울루 1경기
1974년 파울리스타 13경기


1974년의 주립 리그에서 산투스는 확실히 힘이 빠진 듯한 모습을 보여주며 1차 리그 4위, 2차 리그 3위로 대회를 마감했다. 펠레는 10경기에 나와 1골을 넣었다.

그럼에도 산투스는 전국 리그에서 1973년보다 더 높은 위치에 올랐다. 1차 리그에서 20개 팀 중 5위를 기록하며 2차 리그에 진출했고, 2차 리그에서 5경기 4승 1무 0패로 6팀 중 1위를 차지하며 4강에 들었다. 결승 진출자는 3차 리그로 결정되었다. 네 팀이 서로 한 경기씩 치르는 3차 리그에서는 크루제이루와 바스쿠 다 가마가 좋은 성적을 냈고, 산투스는 조 3위가 되며 또 탈락하게 되었다. 산투스는 최종 3위에 올랐고, 펠레는 17경기에 나와 9골을 넣었다. 이 해 펠레는 남미 올해의 선수상 5위를 기록했다.

이제 나이가 많이 든 펠레는 산투스에서 떠나기로 했다. 펠레는 선수생활 은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은퇴하기 몇 년 전 대학에 들어가서 그동안 축구를 하느라 하지 못했던 공부를 하라는 권유를 받았던 것이 떠올랐고 그대로 했다. 펠레는 상파울루 대학에 들어갔다. 그리고 졸업장을 땄고, 산투스에 돌아가 마지막 경기를 치른다. 플라멩구와의 친선전이었는데, 펠레는 어김없이 골을 집어넣었고 이것이 결승골이 되며 산투스가 1-0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이 경기를 마지막으로, 정말 브라질 축구계에서 은퇴하게 된다.
1974시즌: 27경기 10골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10경기 1골
캄페오나투 나시오나우 지 클루베스: 17경기 9골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0경기 0골
인터컨티넨탈컵: 0경기 0골

2.20. Pelé in Santos FC

Pelé in Santos FC:
18시즌(1957~1974)
주립 리그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412경기 470골 (득점왕 11회)

주 간(州 間) 컵
토르네이우 히우-상파울루: 53경기 49골 (득점왕 1회)

전국 대회
타사 브라지우: 33경기 30골 (득점왕 3회)
토르네이우 호베르투 고메스 페드로자: 57경기 37골
캄페오나투 나시오나우 지 클루베스: 84경기 34골

대륙 대회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15경기 17골 (득점왕 1회)

대륙 간 컵
인터컨티넨탈컵: 3경기 7골 (득점왕 2회)
인터컨티넨탈 슈퍼컵: 8경기 3골

합계
665경기 647골
우승 기록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10회 우승: 1958, 1960, 1961, 1963, 1964, 1965, 1967, 1968, 1969, 1973
토르네이우 히우-상파울루 4회 우승: 1959, 1963, 1964, 1966
타사 브라지우 5회 우승: 1961, 1962, 1963, 1964, 1965
토르네이우 호베르투 고메스 페드로자 1회 우승: 1968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2회 우승: 1962, 1963
인터컨티넨탈 컵 2회 우승: 1962, 1963
인터컨티넨탈 슈퍼컵 1회 우승: 1968

3. 뉴욕 코스모스

펠레는 은퇴하고 브라질 축구의 발전을 위해 힘쓰고 있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펠레의 거액 투자가 제대로 망해버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펠레의 에이전트가 사기를 당하여 펠레에게까지 금전적 피해가 가게 되었다. 이 때를 놓치지 않고 금전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겠다며 펠레의 미국행을 설득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 유명한 미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였다. 키신저는 독일 출신이라 열혈 축빠였고 북미 최초의 프로 축구 리그 NASL 설립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가 첫 번째로 한 일이 펠레를 영입하는 것이었다. 펠레는 당시 브라질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었고, 따라서 다른 나라의 팀이 그를 영입할 수 없었다. 키신저는 펠레에게 접근함과 동시에 브라질 정부에도 펠레를 미국에서 뛸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며 국가 관계 면에서도 이득을 얻고자 했다.

얼떨결에 미국에 가게 된 펠레는 보스턴에서 공식 석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자신을 보러 수없이 모여든 팬들 때문에 부상을 당해(...) 들것에 실려 겨우 빠져나왔다. 이 사건으로 인해 자신의 인기가 얼마나 많은지 몸소 느낀 펠레는 이후 이 나라에 축구가 얼마나 아름다운 스포츠인지 알리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뉴욕 코스모스와 정식으로 계약을 맺는다. 펠레는 1975년 6월 15일 댈러스 토네이도와의 경기에서 NASL에 데뷔했다.

1975년의 펠레를 시작으로 1975년 에우제비우, 1976년 조지 베스트 등의 슈퍼스타들이 NASL로 이적해 왔다. 펠레의 존재 덕에 산투스 동료였던 카를루스 아우베르투가 뉴욕 코스모스로 이적해 왔으며, 펠레의 열렬한 팬인 프란츠 베켄바워가 1976-77시즌이 끝나자마자 뉴욕 코스모스로 이적해 왔다. 펠레는 1년 전만 해도 유럽 최고의 선수라는 평가를 받으며 발롱도르를 수상했던 주인공인 그와 함께 뛰며 팀에게 NASL 우승 트로피를 포함해 두 개의 트로피를 선사했다. 펠레는 자신이 선수생활을 그만둔 1977년 남아메리카 올해의 축구선수 4위에 올랐다.

펠레는 세 시즌 동안 활약하면서 3년 내내 NASL 올스타 팀에 선정되었다. 107경기 64골을 득점했다. 정규 시즌과 플레이오프만 따진다면 64경기 37골 30어시스트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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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레의 은퇴 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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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레의 은퇴 경기는 여타 축구선수들의 은퇴 경기와 마찬가지로 특별 친선전이었다. 1977년 10월 1일에 경기가 진행되었고, 무하마드 알리 등 유명인들이 축하해주러 오기도 했다. 상대는 다름아닌 산투스 FC였다. 코스모스 측에서 산투스 선수들을 초청하여 특별히 성사된 경기였다. 이 날 펠레는 전반전에는 코스모스의 유니폼을 입었고 후반전에는 산투스의 유니폼을 입었다. 전반전에 산투스의 헤이나우두가 먼저 골망을 갈랐다. 그리고 펠레는 멋진 프리킥으로 골망을 흔들며 동점골을 기록했다. 참고로, 영상 1분 22분경 펠레가 골을 넣고 뉴욕 코스모스 동료들이 축하하러 오는 장면에서 등번호 25번이 그 카를루스 아우베르투이고 6번이 프란츠 베켄바워이다. 베켄바워가 자신이 존경하는 펠레의 발을 잡고 흔들며 장난치는 유쾌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FFFFFF 10%, #000000 10%, #000000 20%, #FFFFFF 20%, #FFFFFF 30%, #000000 30%, #000000 40%, #FFFFFF 40%, #FFFFFF 50%, #000000 50%, #000000 60%, #FFFFFF 60%, #FFFFFF 70%, #000000 70%, #000000 80%, #FFFFFF 80%, #FFFFFF 90%, #000000 90%);"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66px-Pel%C3%A9_cosmos.jpg
웃으며 경기하려 애썼지만 결국 눈물을 흘린 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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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은퇴할 때까지 이렇게 넣은 골이 통산 1375경기에 1284골, 여기서 현재의 기준으로 리그 등의 공식 경기만 빼내 기록할 경우 클럽과 기타팀 합산기록 739경기 690골, 국대 경기는 91경기 77골[13]. 공식전 통산 830경기 767골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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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OREIDELFUTBOL.jpg
O Rei' del fútb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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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펠레가 뉴욕 코스모스로 이적한 일이 미국 축구계에 미친 영향

1975년 중순에 이적한 펠레를 시작으로 수많은 스타들이 NASL에 가서 축구 홍보에 힘썼다. 에우제비우가 뒤이어 NASL에 참가했고, 이후 조지 베스트, 바비 무어,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프란츠 베켄바워, 요한 크라위프, 게르트 뮐러 등 축구팬이라면 누구나 들어봤을 만한 전설적인 선수들이 은퇴하기 전 NASL에 와서 몇 년 혹은 한 시즌동안 축구를 하고 은퇴했다. 이들 스타를 보유했던 NASL은 미국에서 정말 붐을 일으켰다. 이 모든 것의 시발점었던 펠레는 말 그대로 불세출의 슈퍼스타였다. 펠레가 뛰기 직전 시즌 뉴욕 코스모스의 평균관중은 3,578명이었으나 펠레가 온 75시즌 평균관중 10,450명으로 3배 가까이 증가, 이후 76시즌 18,227명, 77시즌 34,142명으로 해당 거의 2배 가까이 증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77시즌 포트 로더데일과의 플레이오프 경기에서 77,691명의 관중이 입장하며 미국 프로축구 역사상 최다관중 기록을 세운다.

다만 펠레의 은퇴 이후 NASL은 스타 플레이어의 부재와 떨어지는 수익성으로 리그를 지탱할 수 없었고, 결국 84시즌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게 된다. 다만 이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 미국 축구리그인 MLS를 설립할 때 돈 가버 커머셔너는 리그의 자립성을 가장 우선시 했고, 이로인해 MLS는 높은 성장세와 잠재성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샐러리캡과 드래프트 등 독자적인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4. 기록

펠레의 골 기록은 특정 대회를 포함시키느냐 안시키느냐에 따라 다르다. 인터컨티넨탈 슈퍼컵, 브라질 주별 대항전[14] 등을 공식 대회로 보냐 마냐에 따라 골 기록이 달라지곤 한다.

* x표는 참가 자체가 불가능했던 경우
시즌 클럽 소속리그 주립 리그 히우
상파울루

[15]
전국 대회
[16]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인터컨티넨탈컵 총계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1956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0 0 x x x x x x x x 0 0
[17]
1957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29 36[18] 9 5 x x x x x x 38 41
1958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38 58 8 8 x x x x x x 46 66
1959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32 45 7 6 4 2 x x x x 43 53
1960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30 33 3 0 0 0 0 0
[19]
0 0 33 33
1961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26 47 7 8 5 9
[20]
0 0 0 0 38 64
1962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26 37 0 0 5 3
[21]
4 4 2 5 37 49
1963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19 22 8 14 4 5
[22]
4 5 1 2 36 48
1964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21 34 4 3 6 7 0 0 0 0 31 44
1965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30 49 7 5 4 2 7 8 0 0 48 64
1966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14 13 0 0 5 2 x x
[23]
0 0 19 15
1967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18 17 x x
[24]
14 9
[25]
0 0 0 0 32 26
1968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21 17 x x 18 12
[26]
0 0 0 0
[27]
39 29
1969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25 26 x x 12 12
[28]
x x
[29]
0 0
[30]
37 38
1970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15 7 x x 13 4
[31]
x x
[32]
0 0 28 11
1971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19 8 x x 21 1
[33]
0 0 0 0 40 9
1972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20 9 x x 16 5 0 0 0 0 36 14
1973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19 11 x x 30 19 0 0 0 0 49 30
1974 산투스 FC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10 1 x x 17 9 0 0 0 0 27 10
19시즌 합계 412 470 53 49 174
[34]
101 15 17 3 7 657 644
시즌 클럽 소속리그 리그 포스트 시즌 총계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1975 뉴욕 코스모스 북미 축구 리그 9 5 x x 9 5
1976 뉴욕 코스모스 북미 축구 리그 22 13 2 2 24 15
1977 뉴욕 코스모스 북미 축구 리그 25 13 6 4 31 17
3시즌 합계 56 31 8 6 64 37
[35]
22시즌 클럽 커리어 통산 - 721
[36]
681
[37]

[1] 공식 대회명 변천사:
1971~1974 Campeonato Nacional de Clubes
1975~1979 Copa Brasil
1980~1983 Taça de Ouro
1984 Copa Brasil
1985 Taça de Ouro
1986~1988 Copa Brasil
1989~1999 Campeonato Brasileiro de Futebol
2000 Copa João Havelange
2001~P Brasileirão Série A
[2] 출처:(영화)펠레, 버스 오브 어 레전드(2016)[3] 생일이 1940년 10월 23일이고 인터컨티넨탈컵은 10월 전에 끝나는 대회니까 21세 맞다.[4] 선술되어 있듯이 1962년 토르네이우 히우-상파울루에는 산투스가 불참하여 펠레가 뛸 기회 자체가 없었으므로, 산투스가 참가한 대회만 친다면 전관왕이다.[5] 유럽 같은 경우에는 로날트 쿠만, 한스 판브뢰켈런, 베리 판 아를레, 헤랄트 파넨뷔르흐, 빔 키프트 이렇게 다섯 명의 선수가 1987-88 시즌 PSV 에인트호벤트레블, 유로 1988에서의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유로 우승을 이끌면서 한 해에 트레블과 유로 우승을 모두 이룬 선수로 기록되었다.[6] 풀타임이라는 말은 필요가 없다. 당시에는 선수 교체가 없었으니까.[7] 펠레가 아무리 수비 가담을 열심히 한들 몸이 하나인지라 실점하는 것 까지 펠레가 막을수는 없는 노릇이다.[8] 당시 크루제이루의 주장이었으며, 1970년 월드컵에서 브라질의 주전 센터백 중 한 명으로 뛴 선수이다.[9] 1958년 월드컵, 1962년 월드컵에서 우승한 국가대표 센터 포워드 바바와는 다른 인물이다.[10] 참고로 앞에 소개한 산투스의 4인방은 모두 월드컵에서 골을 넣은 적이 있다. 물론 카를루스 아우베르투와 클루두아우두는 당시에는 아직 골을 기록하지 않은 상태였다.[11] 프랑스 풋볼이 재평가한 발롱도르 수상자 명단에도 1970년의 펠레가 들어가있다.[12] 1971년 출범한 브라질 전국 리그의 공식 명칭[13] 브라질 역대 A매치 골 수 2위. 1위는 네이마르다.[14] 정식 명칭은 Campeonato Brasileiro de Seleções Estaduais로 상파울루 주대표, 히우지자네이루 주대표 등 브라질 주들 끼리 대결하는 대회로 1922~1987년까지 열렸다. 이 대회는 펠레가 1959년에 산토스가 아닌 상파울루 주대표로 참가해 6골을 넣었다.[15] 1966년까지 개최하고 개최 중단[16] 1959년 개막. 1968년까지는 타사 브라지우라는 이름의 컵대회가 개최. 1967년~1968년은 호베르투 고메스 페드로사 챔피언십과 타사 브라지우를 병행. 브라질 세리 A가 출범한 것은 1971년. 타사 브라지우, 브라질 세리 A 모두 우승팀&준우승 팀에게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참가 자격이 주어진다는 점은 같음.[17] 영문 위키피디아 등 1경기 1골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곳도 많지만 공식 기록은 0경기 0골로 데뷔는 했으나 출전 기록 자체가 없다.[18] 1957년 상파울루 주립 리그는 세리 아줄과 세리 브랑쿠로 나뉘어 열렸다. 펠레는 세리 브랑쿠에서 14경기 19골, 세리 아줄에서 15경기 17골을 득점했다.[19]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개막[20] 출처:포르투갈어 위키피디아[21] 출처:포르투갈어 위키피디아[22] 출처:포르투갈어 위키피디아[23] 산투스는 1965년 타사 브라지우 챔피언이었고 원래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 참가해야 했지만 브라질 축구협회가 1966년 대회에 브라질 팀들을 보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24] 히우-상파울루 토너먼트 중단, 이후 호베르투 고메스 페드로사 챔피언십 개최[25] 호베르투 고메스 페드로사 챔피언십+타사 브라지우[26] 호베르투 고메스 페드로사 챔피언십과 타사 브라지우에 불참했다. 또한 대다수의 위키 및 신문에 17경기 11골로 잘못 기록되어 있다. #[27] 인터컨티넨탈 슈퍼컵 3경기 1골[28] 호베르투 고메스 페드로사 챔피언십[29] 1968년 타사 브라지우에서 우승한 산투스는 참가 자격을 충족했다. 그러나 브라질 축구협회에서 1970년 월드컵 예선전을 치르기 위해 브라질 팀들의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진출을 제한했다.[30] 인터컨티넨탈 슈퍼컵 5경기 2골[31] 호베르투 고메스 페드로사 챔피언십[32] 월드컵에 집중하기 위해 브라질 축구협회에서 브라질 팀들을 보내주지 않았다.[33] 캄페오나투 브라질레이루 세리 A 개막[34] 대다수의 위키 및 신문에 1968년 시즌의 통산 기록이 17경기 11골로 잘못 기록되어 있으나 18경기 12골이 공식 기록이다. 따라서 174경기 101골이 맞다.[35] 기타 경기(공식전이었는지 아니었는지 확인이 어려운 경기들) 포함시 107경기 64골[36] 불확실[37] 불확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