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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코 토티/AS 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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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코 토티
1992-2017
파일:C8ACUFOXUAE-I_8.png
▲ 1992년 데뷔 당시
소속팀 <colbgcolor=#ffffff,#191919>AS 로마 (세리에 A)
등번호 10
17 (1996-1997)
20 (1995-1996)
16 (1994-1995)
기록
파일:세리에 A 로고.svg
619경기
250득점 160도움
파일:UEFA 챔피언스 리그 로고(가로형 화이트).svg
57경기
17득점 12도움
파일:UEFA 유로파 리그 로고 화이트.svg
46경기
21득점 17도움
파일:코파 이탈리아.png
59경기
18득점 15도움
파일:Supercoppa_logo.png
5경기
1득점 3도움
합산 성적
786경기
307득점 207도움
1. 개요2. AS 로마 입단3. 1군 데뷔와 초창기 (1992-93 시즌 ~ 1996-97 시즌)4. 로마 10번의 시작 (1997-98 시즌 ~ 1998-99 시즌)5. 영광의 트레콰르티스타 시기 (1999-00 시즌 ~ 2004-05 시즌)6. 21세기 폴스 나인의 시작 (2005-06 시즌 ~ 2009-10 시즌)7. 격동의 시기 (2009-10 시즌 ~ 2012-13 시즌)8. 황혼기 (2013-14 시즌 ~ 2015-16 시즌)9. 은퇴 시즌 : 2016-17 시즌10. 총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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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란체스코 토티AS 로마 경력을 소개하는 문서.
원 클럽 플레이어로 은퇴한 토티의 클럽 경력 전체를 소개하는 문서이다.

2. AS 로마 입단

당초 13세 소년 토티에게 먼저 구애의 손길을 뻗친 건 다름 아닌 AC 밀란이었다. 그러나 태어날 때부터 모태 로마니스타였던 토티는 이 제안을 단칼에 거절, 1988년 AS 로마 유스팀에 입단한다. 이듬해 1군 팀과 정식계약을 맺었다.

3. 1군 데뷔와 초창기 (1992-93 시즌 ~ 1996-97 시즌)

토티가 16세가 되던 해인 1993년 3월 28일 브레시아 칼초원정에서 1군으로 콜업되어서 세리에 A 데뷔전을 가졌다. 이 시즌 토티의 경기 소화 시간을 보면 3분씩 2경기를 교체 출전하여 총 6분을 소화했다. 사실상 1군 무대를 밟아봤다 수준의 시즌 이었다.

1992-93 시즌: 2경기(선발 0경기)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2 0 2 0 0
합계 2 0 2 0 0

다음 시즌인 1993-94 시즌 부터 1군으로 완전히 등록되어 후보선수로서 조금씩 출전 기회를 부여받기 시작하며 1군에 정착하며 실력을 키워가고 있는 토티였다.

1993-94 시즌: 10경기(선발 3경기)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8 2 6 0 0
코파 이탈리아 2 1 1 0 0
합계 10 3 7 0 0

1994-95 시즌 출전시간이 대폭 늘어나며 완벽하게 1군이 된 토티의 시즌이었으며 무려 리그에서만 10개의 공격포인트를 기록할 정도로 교체 멤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공격포인트를 쌓았다.

1994-95 시즌: 25경기(선발 14경기) 7골 7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21 11 10 4 6
코파 이탈리아 4 3 1 3 1
합계 25 14 1 7 7

1995-96 시즌 선발 출전의 기회가 많이 늘어나며 거의 준주전의 입지를 가지게 된 토티는 착실하게 나오면 잘하게 되면서 점차 팀의 미래이자 에이스가 될 자질을 보여줬다.

1995-96 시즌: 36경기(선발 23경기) 4골 10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28 20 8 2 8
UEFA컵 7 3 4 2 2
코파 이탈리아 1 0 1 0 0
합계 36 23 13 4 10

1996-97 시즌 로마는 좋지못한 성적을 거두고 있었고 로마는 그 시즌 겨울에 UC 삼프도리아로 임대될 예정이었지만 임대를 시키려던 감독 카를로스 비안치와 경쟁팀으로의 토티의 임대를 허락하지 않던 그 당시 로마의 회장이었던 프랑코 센시가 서로 의견 충돌을 빚다가 결국 비안치가 감독직에서 물러나며 토티는 잔류하게 되었다.

1996-97 시즌: 30경기(선발 25경기) 5골 6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26 23 3 5 4
UEFA컵 3 1 2 0 2
코파 이탈리아 1 1 0 0 0
합계 30 25 5 5 6

4. 로마 10번의 시작 (1997-98 시즌 ~ 1998-99 시즌)

1997-98 시즌 토티는 그의 상징적인 번호가 될 등번호 10번을 부여받았다. 새로 부임된 즈데넥 제만 감독은 토티를 좀 더 넓은공간에서 활약하게 하기 위해서 좌측 윙으로 포지션을 변경하여 역할을 잘 수행했다. 그리고 그 다음 시즌에는 원래 주장을 맡을 예정이었던 아우다이르가 토티에게 주장직을 양보하면서 22세의 나이에 세리에 A 최연소 주장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그 시즌에는 세리에 A 올해의 영플레이어를 수상하면서 완벽한 전성기의 시작을 알렸다.

1997-98 시즌: 36경기(선발 36경기) 14골 8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30 30 0 13 7
코파 이탈리아 6 6 0 1 1
합계 36 36 0 14 8

1998-99 시즌: 42경기(선발 40경기) 16골 14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31 30 1 12 10
UEFA컵 8 8 0 3 4
코파 이탈리아 3 2 1 1 0
합계 42 40 2 16 14

5. 영광의 트레콰르티스타 시기 (1999-00 시즌 ~ 2004-05 시즌)

1999-00 시즌 제만 감독이 경질되고 우승 청부사 파비오 카펠로가 새로 부임하면서 다시금 팀 체제가 바뀌게 되었고 토티도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았는데 이 역할이 바로 3-4-1-2 에서 1 트레콰르티스타 역할이었다. 팀은 리그 6위를 기록했으나 토티는 세리에 A 올해의 선수에 선정되면서 개인으로는 최고의 한 시즌을 보냈다.

1999-00 시즌: 34경기(선발 32경기) 8골 12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27 27 0 7 12
UEFA컵 5 4 1 1 0
코파 이탈리아 2 1 1 0 0
합계 34 32 2 8 12
파일:57e930e2e4b06a4ab50e486f_57e930fae4b06a4ab50e6f65_p854x570.jpg
2000-01 시즌 세리에 A 최종전에서의 토티
2000-01 시즌 토티는 지난 시즌처럼 3-4-1-2 에서 1 트레콰르티스타 역할을 부여받으며 창의적인 공격의 중추이자 핵심 역할을 부여받았다. 이후 토티와 함께한 로마는 상승가도를 걸으며 본격적인 세리에 A의 강자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 당시까지 세리에 A는 북부 3강[1]이 번갈아 가며 우승하던 3강 고정 시대였는데, 7공주 시대를 거치며 슬슬 입질을 넣기 시작하더니만 2000-01 시즌 드디어 스쿠데토를 차지하며, 북부 3강이 거의 독식하다시피하던 세리에의 헤게모니를 부수는 데 성공한다. 특히 승리가 필요했던 최종전에서 선제 골을 넣으며 팀의 3대1 승리를 이끈 것이 백미였다. 물론 이 때 로마의 스쿼드가 현재와는 비교가 되지 않게 탄탄했다고는 하지만 바티스투타, 카푸, 몬텔라, 아우다이르, 에메르송, 토마시, 사무엘 등 그들을 한데 모으고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 건 다름 아닌 주장 토티였음을 간과해선 안된다. 이 시즌 활약을 통해 토티는 세리에 A 올해의 이탈리아 선수 상을 수상했고 2001 발롱도르에선 5위에 올랐다.

2000-01 시즌: 35경기(선발 34경기) 16골 4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30 30 0 13 3
UEFA컵 3 2 1 2 0
코파 이탈리아 2 2 0 1 1
합계 35 34 1 16 4

2001-02 시즌에는 피오렌티나와의 수페르 코파에서 1골 1어시를 기록하며 팀의 우승을 이끌었지만 리그에선 유벤투스에 승점 1점이 모자라 스쿠데토를 놓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하지만 전년도에 이룬 18년만의 우승과 이어서 기록한 준우승은 줄곧 중위권 정도로만 평가되었던 로마가 노는 물을 달리하게 된 전환점이 되었다.[2] 챔피언스 리그에선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2경기 2골을 기록하고 바르셀로나와의 경기에선 1골을 어시스트하고 1골의 기점이 되는 키패스를 기록하여 팀의 3대0 승리를 이끄는 등 최고의 활약을 보였으나 팀은 2차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3]

2001-02 시즌: 36경기(선발 35경기) 12골 6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24 23 1 8 4
챔피언스 리그 11 11 0 3 1
코파 이탈리아 0 0 0 0 0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1 1 0 1 1
합계 36 35 1 12 6

2002-03 시즌 10번 역할을 맡던 토티는 이 시즌에는 바티스투타, 몬텔라와 짝을 이루어 세컨드 스트라이커로도 출전했는데 실제로 아주 훌륭하게 잘 수행[4]하여 시즌 20골을 기록했으며 이는 나중에 스팔레티 감독이 토티를 펄스 나인으로 전환시키는 배경이 되기에 충분했다. 챔피언스리그에서 같은 조로 배정되었던 레알 마드리드와의 경기에서 결승골을 기록하여 팀을 승리로 이끌기도 했는데 이것은 세리에 A 클럽이 35년만의 마드리드 원정에서 승리한 기록이 되었다. 2차 조별리그 까지 진출했으나 거기서 4위를 기록하며 탈락했고 리그도 8위로 끝냈지만 팀은 코파 이탈리아 결승전에 진출했고 AC 밀란을 상대하게 되었다. 토티는 결승 1차전, 2차전에서 모두 골을 기록하며 분투했으나 합산 스코어 6:3으로 패배하며 준우승으로 마무리하게 되었다.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토티는 세리에 A 올해의 선수[5]를 수상했다.

2002-03 시즌: 35경기(선발 34경기) 20골 9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24 23 1 14 4
챔피언스 리그 6 6 0 3 2
코파 이탈리아 5 5 0 3 3
합계 35 34 1 20 9

2003-04 시즌 전반기에는 카사노, 몬텔라 투톱 밑에서 트레콰르티스타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중간에 몬텔라가 부상으로 시즌 아웃을 당하고 서브였던 욘 카류가 부진하자 후반기부터는 카사노와 투톱을 이뤘는데 둘이 최고의 콤비를 보여주며 그 유명한 '토티-카사노 듀오'가 나오게 됐다. 리그는 다시 한번 2위를 기록하면서 준우승으로 마무리했지만 토티는 전반기를 공격형 미드필더로 뛰었음에도 리그 20골을 기록하며 맹활약하며 리그 최고의 활약을 펼쳤고 세리에 A 올해의 이탈리아 선수에 선정됐다. 이 시기 세리에 A는 7공주 시절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세계 최고의 리그로 여겨졌으며 거기서 최고의 활약을 보인 토티는 당시 세계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로 여겨졌다.[6][7]

2003-04 시즌: 32경기(선발 32경기) 20골 7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31 31 0 20 6
UEFA컵 1 1 0 0 1
합계 32 32 0 20 7

2004-05 시즌 다시금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토티는 리그에서 12골 9어시를 기록하며 여전히 좋은 활약을 펼쳤지만 지난 시즌에 보였던 리그 역대급 폼은 보이지 못했고 팀은 다시 추락하여 리그를 8위로 마무리했다. 그래도 또 코파 이탈리아 결승전에 진출했으나 이번에는 인터 밀란에 합산스코어 3대0으로 패배하며 다시 또 준우승을 하게 되었다. 그래도 토티는 이 시즌 치렀던 12월 파르마 칼초 1913와의 경기에서 세리에 A 107호 골을 기록하며 로베르토 프루초가 가지고 있던 로마의 세리에 A 최다골을 갱신했다.

2004-05 시즌: 40경기(선발 39경기) 15골 13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29 29 0 12 9
챔피언스 리그 4 4 0 0 2
코파 이탈리아 7 6 1 3 2
합계 40 39 1 15 13

6. 21세기 폴스 나인의 시작 (2005-06 시즌 ~ 2009-10 시즌)

2005-06 시즌 새로 루치아노 스팔레티감독이 부임하면서 팀 체제가 4-2-3-1 전술로 바뀌면서 공격적인 전술로 바뀌었다. 초반에는 몬텔라가 최전방 공격수로 뛰고 토티가 공격형 미드필더로 뛰었으나 몬텔라가 최악의 폼을 보였다. 이에 스팔레티는 토티를 최전방 공격수로 뛰게 하는 도박수를 던졌고... 이 도박수는 매우 성공적으로 먹혔다. 토티는 4-2-3-1에서 최전방 공격수를 맡았는데 사실 토티는 페널티 박스에 머무르기 보다는 미드필더 진형으로 내려오면서 윙어와 공격형 미드필더의 공격을 지원해주는데 집중했고 동시에 페널티 박스에 진입해 득점을 노리는 역할도 맡았다. 이후 이 전술은 4-6-0으로 불렸으며 토티는 이 폴스 나인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였다. 특히 토티가 폴스 나인 역할을 맡은 이후 AS 로마는 무려 리그 11연승을 기록했고 그 시기동안 무려 토티는 9경기 8골 7어시를 기록하며 팀의 리그 11연승을 이끌었다. 그러나 2006년 엠폴리 와의 경기에서 왼쪽 종아리가 골절되는 부상을 당하며 시즌을 소화하지 못하게 되었다 토티의 부상으로 팀은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결국 또 준우승을 하게 되었다. 리그 최종 기록은 24경기 15골 9어시로 전반기를 공격형 미드필더로 뛰었음에도 폴스 나인으로 포지션 변경 후 맹활약을 보이며 경기당 1개의 공격포인트를 기록했다. 경기당 1개의 공격포인트를 기록했음에도 부상이 아니었다면 더 높은 공격포인트 기록을 쌓을 수도 있었을 정도로 이 시즌 토티의 활약은 정말 대단했다.
이 부상으로 인해 토티는 월드컵에도 진출하지 못할뻔 했지만 빠르게 재활훈련을 열심히 병행하며 시즌 마지막 경기중 하나 였던 코파 이탈리아 결승 2차전에 복귀했으나 또 팀은 패배하면서 또 준우승을 하게 되었다.

많은 축구팬들이 유러피언 골든슈를 수상한 06-07 시즌을 폴스나인으로서 토티의 최전성기로 보지만 실은 05-06 시즌이 폴스 나인으로서 토티의 최전성기였다. 리그 수준 자체도 칼치오폴리 이전인 05-06이 더 수준 높았으며 특히 부상 이전 토티는 기동력과 이를 활용한 드리블이 뛰어난 편이었는데 05-06 시즌 토티는 폴스 나인에서 이 같은 기동력과 드리블 능력을 활용한 볼운반을 자주 보여줬고 이 점이 06-07 시즌과 결정적인 차이점이었다. 폴스 나인으로서 최전성기의 모습을 보여줬지만 부상이 아쉬웠던 시즌.

2005-06 시즌: 29경기(선발 27경기) 17골 10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24 23 1 15 9
UEFA컵 3 3 0 2 0
코파 이탈리아 2 1 1 0 1
합계 29 27 2 17 10

2006-07 시즌 폴스 나인 체제에 완벽하게 적응한 토티는 리그에서 26골을 기록하며 세리에 A 득점왕을 차지했고 유러피언 골든슈까지 차지하며 유럽 리그에서 가장 많은 골을 넣은 선수가 되었으며 리그에서 최고의 활약을 보였지만 인터 밀란에게 리그 우승을 내주면서 또 준우승을 하게 되었다. 챔피언스리그 에서는 8강까지 올랐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패하면서 탈락하게 되었다. 그래도 다시금 코파 이탈리아 결승전에 진출했고 인터 밀란을 상대하여 이번에는 1차전 빠르게 선제골을 기록하며 홈에서 6대2 승리를 기록했고 2차전 2대1로 패배했으나 합산 스코어 6대3으로 우승을 기록했다.

2006-07 시즌: 50경기(선발 50경기) 32골 16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35 35 0 26 9
챔피언스 리그 9 9 0 4 3
코파 이탈리아 5 5 0 2 3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1 1 0 0 1
합계 50 50 0 32 16

2007-08 시즌 인터 밀란과의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에서 1대0으로 승리하며 시즌을 기분좋게 시작했다. 토티는 2008년 2월 24일 피오렌티나전을 출전하면서 팀 내 최다 세리에A 출전을 가지고 있던 자코모 로시의 386출장과 타이를 이루었고 바로 그 다음 리그 경기였던 2월 27일 인터 밀란과의 경기에 출전하면서 기록을 경신했다. 그리고 3월 9일 나폴리전을 출장하며 토티는 로마에서 출장기록 500전을 달성했다. 4월 19일 리보르노와의 경기에서 오른쪽 전방 십자인대 파열로 4개월 부상을 당하면서 시즌을 먼저 마무리하게 되었으나 팀이 코파 이탈리아 결승전에서 인터 밀란에게 2대1 승리를 기록하면서 우승을 하게 되었다. 비록 리그는 준우승을 기록했지만 그래도 코파 이탈리아에서 2연속 우승을 달성했다. 그리고 이것은 토티의 마지막 우승이 되었다.

2007-08 시즌: 35경기(선발 34경기) 18골 7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25 25 0 14 6
챔피언스 리그 6 6 0 1 1
코파 이탈리아 3 2 1 3 0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1 1 0 0 0
합계 35 34 3 18 7

2008-09 시즌 지난 시즌의 악연인지 인터 밀란과의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에서 이번은 승부차기 접전끝에 패배하며 준우승을 하게 되었다. 토티는 11월 8일 볼로냐와의 경기를 출전하며 리그 400전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하고, 또 2009년 4월 19일 레체와의 경기에서 골을 기록하면서 세리에 득점 10위였던 아메데오 아마데이의 174호 골을 175호 골로 제치며 세리에 A 역대 최다 득점자 10위가 되었다. 챔피언스 리그 16강에서 아스날한테 탈락했는데, 본인은 1어시를 기록했고 밥티스타한테 원터치로 좋은 패스를 했지만 밥티스타가 날려 버리며 승부차기로 패배했다.

2008-09 시즌: 32경기(선발 29경기) 15골 5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24 23 1 13 4
챔피언스 리그 7 6 1 2 1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1 0 1 0 0
합계 32 29 3 15 5

7. 격동의 시기 (2009-10 시즌 ~ 2012-13 시즌)

2009-10 시즌 보드진과의 갈등 끝에 시즌 2경기 만에 스팔레티 감독이 경질되며 새로 라니에리 감독이 부임했다. 라니에리 감독의 부임하에 로마는 이 시즌 좋은 퍼포먼스를 보이던 인터 밀란의 유일한 대항마가 되었고, 토티도 시즌 중에 잔 부상이 조금 있었으나 나왔을때 기본적으로 잘했다. 하지만 리그를 2위로 마무리하며 준우승을 하였고 코파 이탈리아 결승전에서도 인터 밀란과 만났으나 토티는 발로텔리를 걷어차고 퇴장을 당했고, 로마는 1대0으로 패배하며 준우승을 하게 되며 인터 밀란의 트레블을 지켜봐야 했다.

2009-10 시즌: 31경기(선발 28경기) 25골 8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23 21 2 14 6
유로파 리그 2 2 0 1 0
유로파 리그 예선 4 4 0 10 2
코파 이탈리아 2 1 1 0 0
합계 31 28 3 25 8

2010-11 시즌 토티는 또 다시 인터 밀란과의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에서 또 패배하며 준우승을 기록했다. 토티는 이 시즌 라니에리와 많은 갈등을 빚었는데 라니에리 감독이 팀 개편을 위해 젊은 선수들 위주로 쓰려는 모습을 보였고 실제로 2월달에는 토티는 벤치로 시작하여 교체 투입되어 10분 남짓 경기를 소화하는게 다였다. 토티는 리그에 21경기를 출전하여 3골을 기록하며 최악의 시즌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자 토티가 이번 시즌을 마지막으로 팀을 떠난다는 루머가 나오기 시작했고, 라니에리도 2월 20일 제노아전 패배로 성적 부진으로 사임했다. 새로이 이전 팀 동료였던 빈첸조 몬텔라가 감독 대행으로 부임했고 몬텔라는 기존의 스팔레티가 쓰던 4-2-3-1 체제를 다시금 가동하며 토티에게 다시 폴스 나인 역할을 맡겼는데 이 떄부터 다시 토티는 경기력을 되찾으며 남은 잔여 리그 경기에서 12골을 기록하며 리그 15골을 기록했다.

노쇠화가 진행되었다는 지금도 경기를 뒤집기에 충분한 저력과 한방을 지니고 있다. 2010-11 시즌 리그만 15골. 리그 7위에 해당한다.

2010-11 시즌 종료된 시점 로마에서만 467경기 206골. AS 로마 역대 최다출장 및 최다골 기록이자, 세리에A 역대 최다골 5위 기록이다. 10골만 더 넣으면 3위까지 치고 올라갈 수 있다.

2010-11 시즌: 40경기(선발 36경기) 17골 12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32 29 3 15 10
챔피언스 리그 7 6 1 2 1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1 1 0 0 1
합계 40 36 4 17 12

2011-12 시즌 지난 시즌이 마무리 된 후 로마의 구단주 였던 로젤라 센시가 구단을 매각하며 토마스 디베네베토가 이끌던 미국 컨소시엄으로 교체되면서 구단이 어수선했고 새로운 보드진들은 지난 시즌 대행으로 좋은 능력을 보였던 몬텔라에게 감독직을 제안하지 않았고 새 감독을 물색하며 루이스 엔리케 감독이 새로이 부임하게 되었다. 엔리케 감독은 토티가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맡기를 바랬고 다시 토티는 예전의 10번 역할을 맡았다. 토티도 마무리 보다는 찬스를 만들어내고 동료들에게 도움을 기록하는데에 주력했다. 그리고 한국시간 2012년 1월 21일 체세나와의 홈경기에서 통산 211호 골을 기록, 세리에 A 단일클럽 최다골 기록 보유자가 되었다! 2012년 5월 5일 카타니아 전에서는 개인 통산 세리에 500번째 경기를 치렀고, 멀티골을 기록했다. 하지만 리그 성적이 바닥을 치며 리그를 8위로 마무리했고 루이스 엔리케가 이끄는 로마는 15년만에 팀이 유럽대항전에 진출하지 못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2011-12 시즌: 31경기(선발 29경기) 8골 11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27 26 1 8 8
유로파 리그 예 2 1 1 0 1
코파 이탈리아 2 2 0 0 2
합계 31 29 2 8 11

2012-13 시즌 성적 부진으로 인해 루이스 엔리케가 자진 사임하였으며 지난 감독이자 토티를 주전으로 발돋움 시켰던 즈데넥 제만감독이 다시금 부임했다. 제만 감독은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다시 토티를 왼쪽윙으로 가용했고 토티는 지난번 역할에 그치지 아니하고 미드필더까지도 활동을 가져가며 동료들에게 기회를 창출시켜주었다. 하지만 제만 감독의 로마도 리그 7~8위를 왔다갔다하며 성적이 좋지 않았고 결국 2013년 2월 제만 감독은 경질된다. 2013년 3월 5일엔 통산 225호 골을 기록하면서 군나르 노르달과 함께 세리에A 통산 득점 공동 2위에 올랐으며 3월 20일, 226호 골을 기록하면서 단독 2위로 올라섰다. 이제 그의 앞에는 이탈리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공격수 중 하나로 추앙받는 실비오 피올라[8]가 보유한 274골만이 남아있게 되었다.[9] 그리고 코파 이탈리아 결승전에 진출했는데 팀의 최다 라이벌인 라치오를 만나게 되었다 근데 1대0으로 패배를 기록하며 준우승을 해버렸다.

2012-13 시즌: 37경기(선발 33경기) 12골 13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34 33 1 12 13
코파 이탈리아 3 3 0 0 0
합계 37 36 1 12 13

8. 황혼기 (2013-14 시즌 ~ 2015-16 시즌)

2013년 9월 20일, 로마와 재계약을 체결하면서 2016년까지 남게 되었다. 2014년 4월 2일, 파르마 전에서 득점을 기록하며 개인 통산 파르마 상대 20번째 골을 기록했다. 2013-14 시즌 종료 후, 로마에서만 561경기를 뛰었으며 235골을 기록중이다. 그랬지만 리그 1위를 유벤투스가 무려 승점 102점을 달성하며 우승을 해버렸기에 85점을 달성한 로마는 2위를 기록하며 또 준우승을 기록했다.

2013-14 시즌: 29경기(선발 22경기) 8골 11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26 20 6 8 10
코파 이탈리아 3 2 1 0 1
합계 29 22 7 8 11

2014-15 시즌 팀의 리그 준우승을 이끌며 팀의 4년 만에 UEFA 챔피언스 리그 복귀에 기여하였으며, 2014년 9월 30일 맨시티 원정에서 특유의 칩슛으로 UEFA 챔피언스 리그 역대 최고령 득점자[10]라는 새로운 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이 골로 개인 통산 300골을 달성하게 되었다. 이후 10월 25일에는 CSKA 모스크바 전에서 득점을 기록하며 챔스 역대 최고령 득점 기록을 만 38세 59일로 경신했다!

2014-15 시즌: 36경기(선발 33경기) 10골 7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27 24 3 8 6
챔피언스 리그 5 5 0 2 1
유로파 리그 2 2 0 0 0
코파 이탈리아 2 2 0 0 0
합계 36 33 3 10 7

2015-16 시즌 들어서는 급격히 팀내에서의 입지가 줄어들었는데 제코의 영입에 이어 겨울 이적시장에 제로톱으로 쓸 새로운 선수 아르헨티나의 디에고 페로티와 AS 모나코로부터 스테판 엘 샤라위도 영입되어 토티가 벤치를 지키는 일이 많아졌다. 하지만 토티는 이렇게 벤치 생활을 보내는 것에 대해 거부하면서 올여름 계약 만료 후 이적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다행히 시즌 막바지에는 스팔레티와 토티가 서로 화해를 하며 곧 로마와 1년 재계약을 맺을거라는 현지보도가 떴다. 그에 맞게 출전시간도 늘어나 비록 교체 출전이지만 매경기 꾸준히 출전하며 최근 5경기에서 4골 1도움을 기록, 슈퍼조커로서 절정의 폼을 보여주었다. 심지어 골들도 질 경기를 비기게, 비길 경기를 이기게 만드는 결정적인 골들이라서 팬들은 역시 토티라며 감탄하는 중.

이탈리아 일간지 '가제타 델로 스포르트'에서 토티가 1년간 선수, 6년간 디렉터로 총 7년 재계약을 맺을거라고 보도했다. 추가로 선수로서 남은 1년간 받을 연봉은 110만유로 (한화 약 14억 6000만원)라고 한다.

어쩌면 토티에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챔피언스리그에서 로마는 포르투와 플레이오프에서 맞붙었다. 토티는 두 경기 모두 벤치를 지켰고, 로마는 2차전 홈경기에서 데 로시에메르손이 연달아 살인태클로 퇴장당하는 추태를 보인 끝에 0:3으로 완패하며 탈락한다. 벤치에서 넋이 나간 채 경기를 보고 있는 토티의 표정이 압권.

2015-16 시즌: 15경기(선발 2경기) 2골 3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13 2 11 5 3
챔피언스 리그 2 0 2 0 0
합계 15 2 13 5 3

9. 은퇴 시즌 : 2016-17 시즌

그리고 한국시간 2016년 9월 11일 삼프도리아와의 경기에 1골 1도움을 기록했다. 토티가 원터치 패스로 제코에게 어시스트를 하는 장면은 가히 압권. 그리고 페널티킥으로 시즌 첫골을 기록했다. 놀라운 점은 이것을 45분만 뛰고 했다는 것. 토티가 들어온 후반 45분간은 확실히 로마의 공격이 트인 게 보일 정도였다. 경기는 3-2로 로마가 이겼다.

그리고, 2016년 9월 25일 토리노조 하트를 상대로 세리에 A 통산 250호골을 기록하면서 세리에A 역사상 두 번째로 250호골 고지를 넘어선 선수가 되었다. 이로서 세리에 A 최다 득점의 실비오 피올라의 기록까지 24골이 남았다.#

이어진 유로파리그 조별 리그 아스트라와의 경기에선 홀로 3어시스트를 기록하며 40세의 나이임에도 팀을 캐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2016년 10월 20일 유로파리그 조별 리그 아우스트리아 빈 전에서는 개인 통산 UEFA 주관 클럽 대항전 100번째 경기를 치렀다.

10월 말에 부상으로 인해 아웃되었고, 11월 말에 부상에서 복귀했다.

이후 현지시각으로 2017년 2월 1일에 열린 체세나와의 코파 이탈리아 8강전에 선발로 출전해 풀타임을 소화했고, 경기에선 경기종료 직전 97분에 케빈 스트로트만이 얻어낸 페널티킥을 성공시켜 팀의 2:1 승리를 이끌었다.

2017년 2월 1일까지 15경기에 출전해 3골 6어시스트를 기록하고 있다. 대부분의 경기가 교체출전인걸 감안하면 정말 알토란 같은 활약을 펼치고 있다.

4월 15일 아탈란타 전에서는 개인 커리어 세리에 615번째 경기를 치르면서, 역대 출전 부문 3위인 하비에르 사네티와 동률을 이뤘다.
파일:Francesco_Totti_Retire.jpg
Adiós Francesco Totti
38라운드 제노아와의 시즌 마지막 경기서 후반 9분 교체 투입되어 팀의 3:2 승리에 일조하며 본인의 9번째 리그 준우승을 확정지었다. 경기가 끝난 후 치러진 은퇴식에선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경기당 0.4개 공격 포인트, 심지어 대부분의 경기에서 풀타임을 소화하지 못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90분당 1.1개 공격 포인트를 기록할 정도로 은퇴 직전까지 웬만한 선수들을 상회하는 놀라운 기량을 보여줬다. 거기에 16-17 UEFA 유로파 리그에선 40세의 나이에 대회 도움 2위에 오르는 위엄을 보였다.

로마에서 은퇴 후 여러 이적설[11]들이 나오고 있었어서 AS 로마의 원클럽맨이라는 가치가 사라지게 될까 걱정인 팬들도 있는 한편, 선수로서의 토티를 더 보고 싶다는 팬들도 있어 의견이 갈리고 있었으나 2016-17 시즌을 끝으로 선수로서 완전히 은퇴했고 은퇴 후에는 로마에서 디렉터로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구단 내부 수뇌부와의 의견충돌로 인해 디렉터직에서 물러남으로써 결국 30년만에 AS 로마를 떠나게 되었다.

2016-17 시즌: 28경기(선발 6경기) 3골 8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세리에 A 18 1 17 2 3
유로파 리그 6 4 2 0 5
코파 이탈리아 4 1 3 1 0
합계 28 6 22 3 8

10. 총평

파일:18304-totti.png
내 등번호, 10번이 새겨진 레알 마드리드의 유니폼과 페레스 회장의 친필 편지를 받았을 때는 마음이 흔들렸다. 그들은 매해 크리스마스마다 유니폼을 보내 왔고 나는 레알 마드리드의 일원이 되기로 결심했었다. 하지만 이곳을 떠나자니 떠날 수가 없었다. 나는 로마를 위해 평생을 바쳤고 내가 없는 로마를 상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레알 마드리드로 갔더라면 나는 챔피언스 리그에서 우승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던 걸 후회하지 않는다.[12]
토티는 가히 로마의 황제라고 불릴 정도이며 AS 로마 역대 최고의 선수이다. 또한 위의 선수 경력을 보면 알 수 있듯이 AS 로마를 넘어 세리에 A 역대 최고의 선수 중 하나이다. 레알 마드리드의 구애를 뿌리치고 언제든지 우승을 원하면 우승을 원하는 클럽에 갈 수 있었을 실력과 위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로마에 남아 원클럽맨으로 남았으며 로마의 최다출장과 최다득점 기록을 토티가 가지고 있다. 로마에서 토티의 10번을 영구결번 시켜주려고 했으나 토티가 거절했다. 하지만 그이후로 어떠한 선수들도 10번을 쓰지 않고 있는걸 보면 그의 로마에서의 위상을 다시한번 상기시켜준다.


[1] 유벤투스와 양 밀란.[2] 하지만 이후 로마=준우승이라는 저주가 걸린 것인지 2000년대 들어 세리에 A 준우승만 9번이라는 결과를 낳게 되는데... 그런 팀에서 토티는 유스팀부터 시작해 41세에 은퇴할 때까지 뛰었다. 이쯤 되면 클럽에 대한 충성심이란 측면에서 보면 그냥 언터처블.[3] 이 당시 챔피언스리그는 조별리그를 두 라운드에 거쳐 진행했다.[4] 이 시즌 브레시아 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했다.[5] 파벨 네드베드와 공동 수상[6] 지네딘 지단이 노쇠화로 폼이 하락했다.[7] 다만 이후 유로 2004에서 히드라 사건으로 인한 퇴장 및 팀의 조별 탈락과 04-05 시즌 로마의 부진으로 인해 03-04시즌의 기세를 이어가지 못했고 세계 최고 지위는 호나우지뉴에게 넘어가게 된다.[8] 흥미롭게도 실비오 피올라는 라치오에서 전성기를 보낸 선수다![9] 15/16 시즌이 끝난 16년 5월 기준으로 248골로 26골이 남은 상황이다. 3경기당 한골을 넣는 감각을 유지한다면 72경기를 더 뛰어야 하는데, 이젠 2시즌이 더 필요하다.[10] 만 38세 3일, 종전기록은 라이언 긱스의 만 37세 289일[11] 특히 J2리그도쿄 베르디에서는 연봉 100만 유로가 넘는 조건으로 오퍼를 넣었다. 그러나 이 이적은 토티의 가족들을 설득하지 못해서 무산되었다.[12] 플로렌티노 페레스 레알 마드리드 회장이 지네딘 지단과 함께 점찍어놓은 선수로 유명했으며 페레스는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이름과 번호가 새겨진 레알 유니폼을 둘에게 보내왔다. 지단은 이에 응해 레알로 이적했고 토티 역시 흔들렸으나 "자신이 없는 AS 로마를 상상할 수 없다"는 이유로 끝내 로마를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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