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2-07-10 17:12:49

프랑스 침공/진행 과정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프랑스 침공
1. 황색 상황(Fall Gelb) - 1940년 5월
1.1. 아르덴 공세 전야1.2. 첫 술부터 삐그덕거린 아르덴 공세1.3. B집단군의 저지대 침공과 연합군의 대응1.4. 스당 돌파 - 전세를 결정짓다
1.4.1. 결전장: 19기갑군단의 스당 돌파1.4.2. 프랑스군의 느렸던, 너무도 느렸던 역습1.4.3. 41기갑군단과 15기갑군단의 마스 강 돌파1.4.4. 승패가 갈리다: 프랑스군 최후 역습 실패
1.5. 강철의 대격돌 - B집단군의 딜 방어선 공격1.6. 대서양을 향한 질주, 그리고 제동1.7. 연합군의 국지적 역습, 그리고 됭케르크
2. 적색 상황(Fall Rot) - 1940년 6월
파일:간단한 낫질 작전.gif
간단히 표현된 낫질 작전.



1. 황색 상황(Fall Gelb) - 1940년 5월

1.1. 아르덴 공세 전야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낫질(Sichelschhitt) 계획의 혁명적 사상은 오직 혁명적 방법을 통해 실현될 수 있었다. 구데리안의 끈질긴 요구끝에 창설된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은 휘하에 5개의 기갑사단과 3개의 차량화보병사단을 거느린 프랑스 전역에 있어 가장 강력한 기동전투부대였다.

그러나 그 위용에 비해 A집단군 사령부는 클라이스트 집단군을 결코 좋게 보지 않고 있었는데 그들이 보기에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은 기존의 군사교리와 너무나 어긋난 이단아였으며, 허술하게 조직된 골칫덩어리 부대였다. 룬트슈테트 상급대장은 그들이 성공적으로 적 깊숙이 돌파해 들어가야지만 독립적인 작전권을 허용하겠다고 밝혔는데 물론 돌파가 유야무야 돼 후속부대에 따라잡힌다면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은 바로 그 부대에 예속되어야 했다. 즉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의 가장 큰 장애물은 적이 아니라 아군부대에 따라잡히는 것이었다.이건 뭐 술래잡기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나 이러한 지시는 역으로 집단군의 엉덩이에 불을 붙이는 효과도 낳았다.

A집단군의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에 대한 차별은 기동로 배정에 있어서도 계속되었다. A집단의 사령관들과 참모진들은 끊임없이 기갑부대의 능력에 대한 의구심을 제기하였고, 결국 불안해진 룬트슈테트는 구데리안의 19군단은 스당 방면으로, 라인하르트의 41군단은 북쪽으로 25km 떨어진 몽테르메로 진격하는 원래 계획 대신 부대를 제대별로 나누어 일렬종대로 나란히 진격시키고자 했다. 거기다 보병사령관들이 도로의 우선권을 주장한 결과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은 170km에 달하는 진격로에서 단 4개의 도로4만여대의 차량을 통과시켜야 하는 끔찍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원래 나란히 진격해야 할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의 제41군단과 제19군단은 비엔나 소세지마냥 늘어서게 되었고 라인하르트 군단은 마스 강 도하 직전에나 몽테르메 쪽으로 우선회할 수 있었다. 따라서 대규모의 교통혼잡은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었고 오직 기동성만이 생명인 낫질 계획에서 이러한 교통혼잡은 작전전체를 분쇄해버릴 위험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 대한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의 개선 요구는 이 부대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A집단군 사령부에 의해 계속해서 묵살되었다.

그리고 5월 10일 새벽 05:35분 한 줄기의 호각소리와 함께 운명의 프랑스 침공이 시작되었다.

1.2. 첫 술부터 삐그덕거린 아르덴 공세

5월 10일 A집단군의 진격은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나 다름 없었다.당일 정오까지 선두의 구데리안의 군단은 벨기에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지만 뒤따르던 라인하르트의 41군단은 막 라인 강을 넘고 있었고 2제대는 이미 작전계획시간에서 10시간이나 지체하고 있던 제 1제대의 후미와 뒤섞이고 있었다.

5월 11일 독일군은 이제 수십킬로미터에 달하는 교통정체에 시달리고 있었다. 적의 역습에 대한 오보와 진격로상에 미리 프랑스와 벨기에가 부설한 지뢰를 비롯한 숱한 장애물은 진격을 더욱 지체시키고 있었다. 여기에 기갑사단에 뒤쳐지고 싶지 않은 보병사단들이 기갑사단의 예정된 진격로에 끼어들어 옴으로써 상황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의 난장판이 되버렸다. 라인하르트 군단은 진격은 커녕 이틀 동안이나 독일 국내에 갇혀 있었고 결국 13일 국경을 넘게 되었지만 양익대형으로 전환하려는 순간 6보병군단이 라인하르트 군단의 진격로에 차량들을 들이밀어 버리고 발끈한 라인하르트 군단이 무작정 부대를 밀어붙임으로써 끔찍한 혼란이 야기되었다. 공세를 취해야 할 사단 전체가 뿔뿔히 흩어지고 예하부대들의 위치도 파악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제 독일군의 정체는 마스 강에서부터 라인 강변에 이르기까지 250km에 달하는 장대한 구간으로 확대되었다. 그야말로 유럽 역사상 전무후무한 교통정체가 독일군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아이러니지만 이런 상황은 1944년 아르덴 대공세 때도 발생했으며, 여기서 독일군은 사실상 좌절하고 만다.[1]

소위 알려진 전격전에 걸맞지 않은 이런 비극적 지체는 어떻게 프랑스 침공이 성공으로 이어질 수 있었는지 의아하게 생각하게 만들 정도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한 것은 상부의 작전착오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자 했던 임무형 지휘체계에 근거한 중 하급 지휘관들의 분투 덕분이었다. 그리고 한가지 '기적'도 따라붙었다. 독일군이 스스로가 만든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던 동안 그들의 공세를 저지해야 할 연합군의 공군기들이 단 한 대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한 이유는 프랑스 공군 총사령관이 독일 공군의 능력을 과대평가하여 가용기들과 지원부대들을 전선 부근이 아니라 대서양 방면의 후방기지에 집중 배치한 것이 문제였다. 안 그래도 가뜩이나 짧은 항속거리를 가진 프랑스 군용기들이 독일 방면도 아니고 대서양으로 몰렸으니 제때에 전선의 육군을 지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당시 프랑스군은 전쟁을 최대한 장기화할 생각이었고, 이를 위해서는 항공기 생산과 조종사 교육에 많은 시간이 걸리는 정예 공군력은 최대한 아껴 둘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당시 프랑스는 독일 공군이 엄청난 생산력을 기반으로 하는 거대 공군이라고 생각했고[2], 때문에 프랑스 공군은 생산을 독려함과 동시에 많은 항공기를 미국 등에 주문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그러고도 모자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최대한 아끼고 아껴 보자는 생각에서 저런 조치를 취했다. 이런 사정은 영국 공군도 비슷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프랑스군은 전술적 목표에 대한 공군 지원 요청을 금지하고 있었던 덕분에, 설령 전면의 기지에 공군력이 집중배치되어 있었다 해도 문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1.3. B집단군의 저지대 침공과 연합군의 대응

기쁨에 겨워 울 것 같다.
-아돌프 히틀러, 연합군의 벨기에 진군 소식을 듣고

A집단군이 아르덴에서 공세를 펼치는 동시에 B집단군은 네덜란드와 벨기에에 이르는 저지대 일대에 강력한 조공을 가했다. B집단군 항목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독일군은 B집단군에게 단순한 조공 이상의 역할까지도 기대했기 때문에 B집단군은 조공 치고는 매우 강력한 공격을 가할 수 있었다. 네덜란드군과 벨기에군의 방어선은 그 공격 앞에 무너졌고, 결국 에리히 회프너가 이끄는 16기갑군단의 기동로가 활짝 열리게 되었다. 16기갑군단은 마스 강의 만곡부에 위치한 장불루 갭 (Gembloux gap)을 향해 기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장불루 갭은 딜 방어선이 정상적으로 가동하는 상황 하에서도 방어전의 수행에 큰 문제가 존재하는 지역이었다. 전면은 상당히 좁은 편이지만 자연 장애물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연합군에서도 매우 중시하는 지역이므로 프랑스군 사령관 가믈랭은 이러한 독일군의 기동을 보고 마침내 기획해 두었던 비장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딜 기동이 시작된 것이다.

딜 기동에 투입될 연합군의 좌익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편제되었다.

이 기획에 따라 연합군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특히 취약한 장불루 일대의 방어선을 방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프랑스 1군이 갖춘 최강의 창, 프리우 장군이 지휘하는 기병군단이 딜 방어선 너머 지역까지 기동했다. 기병군단은 티를러몽-안뉘-위(tirlemont-hannut-huy)를 잇는 저지진지를 구축, 후방에서 기동중인 보병사단들이 방어선을 온전히 갖추는 시점까지의 시간을 버는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르덴 일대는 프랑스군과 벨기에군 그 누구도 자리를 명확히 메우지 않고 있었다. 이 일대에 배치되어 있는 벨기에군은 총 22개 사단 중 2개 사단에 불과했으며, 이들 역시 전면적인 공세에 대응할 정도의 전력을 갖추고 있진 못했다. 가믈랭은 아르덴 일대에서의 전력 공백에 대해 "그들(벨기에군)은 싸우지도 않고 증발해 버렸다."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이는 프랑스와 벨기에 사이의 치명적 오해(grave malentendu franco-belge)에서 비롯된 것인데, 양국은 서로 상대방이 아르덴에서 각자의 책임 지역을 굳건히 방어해 줄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아르덴 일대에 배치된 프랑스군과 벨기에군은 어떠한 협조체제도 없이 각각의 독립 작전을 수행하고 있는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아르덴 돌파를 시도할 A집단군에게는 최적의 상황이었다.

1.4. 스당 돌파 - 전세를 결정짓다

1.4.1. 결전장: 19기갑군단의 스당 돌파

공세의 선봉이 된 것은 19기갑군단 소속 1기갑사단이었다. 이들은 말 그대로 주공 중의 주공이었고, 이러한 위상에 걸맞게 계획된 시간에 정확히 스당에 도달하기 위해 가장 양호한 기동로를 부여받았다. 19기갑군단장 구데리안은 1기갑사단에게 "필요시 본인은 귀관들에게 최소한 3일 정도는 취침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명령을 남길 정도였다. 1기갑사단 군수참모가 2만 정에 이르는 각성제를 직접 관리하고 있었을 정도로 1기갑사단의 임무는 중차대한 것이었다.

마르틀랑주(Martelange)를 신속하게 점령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보당주(Bodange)에서 여덟 시간이나 발목이 잡혔다. 이는 독일군의 니비 강습 작전에 이은 통신선의 절단으로 보당주 일대에서 잠시간의 지연전을 펼칠 예정이던 벨기에군 중대가 철수 명령을 수령하지 못한 게 컸다. 성공한 강습 작전이 오히려 기갑군단의 전진을 방해한 것이다. 심지어 벨기에 내부의 기동로가 체계적으로 파괴되면서 1기갑사단의 진격은 크게 늦춰졌다. 본래 목표대로라면 5월 10일 저녁 벨기에의 제 2 요새선이 구축되어 있는 뇌프샤토(Neufchâteau)를 공격해야 했지만 그 다음날 아침까지 공세가 미뤄졌고, 결국 지연전을 수행하기로 되어 있던 프랑스군 5경기병사단이 리브라몽(Libramont)과 뇌프샤토를 축으로 진지 편성을 완료하고 만 것이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사단장 키르히너 중장은 뇌프샤토를 직접 공격하지 않고 지연전을 수행하는 프랑스군의 간격 사이를 돌파하여 프랑스군 지연전 부대의 후방 깊숙히 진출해 프랑스군의 방어선을 붕괴시켰다. 이 신속한 돌파를 바탕으로 보당주에서 소요한 시간을 벌충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격으로 프랑스군은 세무아(semois) 강 차안으로 줄지어 퇴각하는데, 독일군은 이 틈을 타 스당 돌파에 있어 최후의 천연 장애물 지대로 꼽히던 부용(Bouillon)을 기습했다. 공세를 당한 이래 독일군의 속도 앞에 허우적대던 프랑스군은 이 공격을 지나치게 과대 평가해 부용을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말았다. 보병 하나 없는 1개 전차대대의 기습 공격 앞에.

이러한 양상은 무재브(mouzaive) 에서도 지속되었다. 부용 서쪽의 무재브에 대해 전투지경선을 넘으면서 독일군 1개 중대가 기습공격을 가했는데, 무재브의 교량을 방어하던 3스파히여단이 5경기병사단보다 좀 늦게 철수하면서 생긴 틈을 독일군 중대가 파고든 것. 문제는 3스파히여단장이 이런 사태가 발생하자 상급 지휘관에게 보고하지도 않은 채 철수해 버린 것이다. 결국 좌측방이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는 위기감을 느낀 5경기병사단 역시 철수하면서 세무아 강변의 프랑스 전선 전체가 연쇄적으로 붕괴되었다. 결국 스당(Sedan) 방어선이 독일군 앞에 고스란히 노출되게 되었다.

스당 일대는 프랑스 제2군의 좌익을 형성하고 있던 10군단이 방어를 책임지고 있는 지역이었다. 10군단은 예하에 55보병사단과 3북아프리카보병사단의 두 사단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스당 방어의 핵심이 되는 것은 55보병사단이었다. 프랑스군은 마스(불어로는 meuse 뫼즈) 강과 마르페 고지라는 천연의 방어물이 있는 스당 지역은 B급 사단에 불과한 55보병사단 하나로도 충분히 틀어막을 수 있다는 판단을 했으며, 상대적으로 스당의 동쪽인 무종(mouzon) 지역의 방어 강화에 역점을 두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스당 지구를 맡고 있는 55보병사단이 손가락만 빨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방어선의 구축에 나섰다. 문제는 무리할 정도의 진지 공사. 55보병사단은 30세 이상 예비역을 중심으로 구성된 사단이었고, 그 점을 감안할 때 교육훈련을 통해 사단의 전투력을 재고하는 것이 절실했건만 사단장 라퐁텐 장군은 부족한 훈련도를 감안할 때 더 많은 벙커를 지어서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 덕분에 진지 공사는 공사대로 완성되지 못하고, 병사들은 병사들대로 훈련을 받지 못해 구축된 방어선을 어떻게 지켜야 할 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이는 스당 돌파를 위해 스당과 유사한 지형에서 수 회에 걸친 훈련을 받은 독일군과는 정 반대의 양상이었다.

거기다가 방어선을 지켜야 하는 55보병사단 내부의 문제 때문에 스당 지구의 취약성은 더욱 증대되었다. 그나마 방어선의 구조를 아는, 초기에 방어선을 축성한 병력들이 교대 원칙에 따라 이동하면서 해당 방어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교대 병력들이 해당 방어선을 지켜야 하는 상황에 이른 것. 거기다가 부대 간의 지나친 교대 원칙으로 인해 부대 내부의 결속력은 심각하게 약화되어 있었다. 거기다 독일군의 공세 직전 예비대로 있던 71보병사단이 기존 55보병사단의 방어 구역 내로 진입하면서 작전지경선 문제로 혼란이 더해진 판이었다.

한편 독일군도 완벽한 상황은 아니었다.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의 부족한 교통로 문제로 뫼즈 강변에 전 부대가 집결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해진 것이다. 구데리안은 클라이스트에게 도하의 연기를 요청했으나 클라이스트는 공격 일정의 준수를 명령했다. 결국 구데리안은 당장 손에 쥔 패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했다. 그나마 그의 입장에서 다행인 것은 공군의 가용 전력 대부분을 투입할 수 있었다는 것 정도였을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공세의 날이 밝았다. 5월 13일 오전 8시부터 스당 지역에 독일 공군의 집중폭격이 감행되었다. 연이은 편대의 출격과 교대를 바탕으로 하는 롤러식 폭격이 스당을 뒤덮었다. 스당 지역에 독일 공군은 310대의 폭격기와 200대의 슈투카, 300여 대의 전투기/전폭기를 집중 투입했고, 기갑집단이 마스 강을 도하하기 직전의 90여분 동안에는 750여 대에 이르는 슈투카와 폭격기가 집중되었다. 구데리안이 큰 위협으로 평가한 55보병사단의 포병대는 이 폭격으로 사실상 무력화되면서 도하 작전에 영향을 제대로 미치지 못했다. 폭격이 입힌 물리적 피해 자체는 프랑스군이 입은 인명 피해가 56명에 불과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미미했지만, 거의 모든 야전 통신선이 절단된 데다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던 55보병사단 병력들이 공황상태에 빠지면서 지휘체계 자체가 거의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상술한 바와 같이 일단 방어선의 시설 자체는 건재한 상황이었으며, 독일군은 프랑스군의 반격에 직면했다. 이 상황에서 독일군 보병들이 말 그대로 대활약을 펼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임무형 지휘체계가 제대로 적용되는 경우 어떤 위력을 보여줄 수 있는지를 제대로 과시했다고 할 수 있다. 중대급 내지는 소대급 부대임에도 불구하고 도하 이후 능동적으로 공세를 진행, 실패 위기에 있는 도하 작전을 성공으로 이끌어낸 것이다. 특히 49공병대대 2중대의 일개 소대장이던 루바르트 중사가 이끄는 10여 명의 병력이 유일하게 도하에 성공해 7개의 벙커를 장악하며 10기갑사단의 공세를 위한 돌파구를 틀어쥘 수 있었던 사례는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비교적 수월하게 도하에 성공한 1기갑사단과 달리 2기갑사단과 10기갑사단은 상당한 악전고투를 겪어야 했다. 특히 2기갑사단의 경우 마스 강변까지의 기동로에 은/엄폐물이 거의 없는데다 프랑스군 포병의 위협에 사단의 좌익이 노출되어 있었다. 거기다 1기갑사단에 포병 전력을 집중시킨 터라 사용할 수 있는 포는 경포 뿐이었는데, 아르덴 어딘가에서 탄약 운반 차량들이 헤메고 있는 통에 그나마도 쓸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먼저 도하를 마친 1기갑사단 병력들이 그나마 돌파구를 형성한 덕에 2기갑사단은 도하를 성공할 수 있었는데, 이는 주공을 스당 서쪽의 개활지로 잡지 않는 선택이 옳았음을 입증하는 사례였고, 스당을 주공으로 지향하는 것을 반대했던 클라이스트도 주공 방향 문제에 있어서 구데리안이 옳았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리고 이 시각, 서부전선을 통틀어 가장 기이한 사건으로 알려진 55보병사단의 와해가 발생한다. 사단 사령부가 위치하고 있던 뷜송(bulson) 일대에 독일군 기갑부대가 출몰했다는 풍문이 돌면서 사단 전체가 사실상 붕괴되어 버린 것. 사실 그 시점에 뷜송 일대에는 기갑부대는 커녕 독일군 보병 하나 없었다. 뷜송 북쪽의 고지에서 포탄이 발사되는 모습을 우연히 목격한 프랑스군 포병 장교가 '혹시 전차포탄일수도?'라는 뉘앙스의 보고를 했고, 이 보고가 순식간에 확산되면서 '뷜송으로 독일군 기갑부대가 몰려오고 있다!'로 와전된 것. 순식간에 단 몇 시간만에 55보병사단은 산산조각나며 상당수의 병력이 방어선을 방기하고 말았다. 이후 이 사태의 원인 규명을 위한 조사위원회에서 당시 55보병사단에 복무한 장교와 병사들은 '우리가 전차를 보았다! 거짓말이 아니다!' 라며 팔딱댔지만... 독일군 기갑부대는 이러한 붕괴가 발생한 지 12시간 가까이가 지나서야 나타났음이 밝혀졌고, 보고서들은 이 사태를 집단환각 증상으로 평가했다.

각성제를 포함한 오만가지 약물을 빨아제끼면서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72시간동안 미친듯이 진격한 1기갑사단의 진격속도는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어마무시했는데 결과적으로 그 시간 안에 전차의 최대속도로 갈 수 있는 거리보다 더 멀리까지 초과해서 진격해 버린 것이다. 이 보고를 들은 히틀러가 '얘네 지금 뻥카치는 거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었을 정도였다.구데리안 장군님 축지법 쓰신다

1.4.2. 프랑스군의 느렸던, 너무도 느렸던 역습

한편 연합군 역시 이러한 사태에 대응해 역습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독일군이 형성한 돌파구는 아직 좁았고, 1기갑사단이 도하하며 설치한 골리에의 교량을 제외하면 중화기를 나를 수 있는 통로가 없었다. 이 교량에 연합군은 공군력을 집중시켰고, 10군단은 2군에서 2개 전차대대를 배속받아 증강된 2개 보병연대를 중심으로 한 역습을 지시했다. 더불어 2군 사령관 샤를 욍치제 장군은 총사령부에서 2군 지역으로 배속된 21군단에 군 예비대 상당수를 추가시켜 군 차원에서의 역습을 준비했다. 이 역습이 제대로 이루어지기만 했다면 독일군의 돌파는 아마 실패로 돌아갔을 것이다. 제대로 들어가기만 했다면 말이다.

우선 공군 차원에서의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독일군은 골리에 교량 일대에 조밀한 방공망을 구축했고, 가용한 공군력까지 총집결시켰다. 반면 연합군 공군은 제대로 집중되지 못했으며, 그나마도 축차적으로 투입하며 참혹한 피해를 입었을 뿐이다. 그 결과 결국 골리에 교량의 파괴에 실패했으며, 구데리안은 19기갑군단의 주력을 마스 강 너머로 도하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타이밍에 10군단의 역습이 성공했다면 어떻게든 저지할 수 있었겠지만...역습의 지휘를 맡은 55보병사단장 라퐁텐 장군은 '문서화된 명령의 서식'을 수령하기 전까지는 역습을 수행할 수 없다며 공식 명령을 받기 위해 사단 지휘소를 떠나기까지 했던 것이다. 결국 라퐁텐은 역습 명령을 수령한지 아홉 시간이 지난 5월 13일 오후 8시에 후에 역습을 지시했고, 역습이 시작된 것은 열한 시간 반이 지난 이후였다. 덤으로 역습 명령의 수령 자체도 늦었다. 군단장 그랑샤르 장군이 역습 명령을 최초로 발한 것은 16시. 라퐁텐은 이 최초의 명령으로부터 4시간이 지나서야 역습 명령을 수령한 것이다! 그나마도 우익의 역습 병력이 지체되고 있어 본래 계획보다 반 규모에 지나지 않는 병력으로 역습에 임하게 된 것이다.

55사단이 공황에 빠진 상황이긴 했지만 방어 거점의 상당수가 건재했다는 점, 예비대가 아직 남아 있었다는 점, 그리고 역습 명령 하달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전투 의지와 사기가 왕성했고 전세가 결코 불리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독일군을 밀어붙이기에 충분했고, 이 시점에 역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게 연합군 입장에서는 천추의 한이라 하겠다. 더 희극이 된 것은 우익을 맡은 역습 부대는 대규모 탈영병의 물결에 휘말려서 역습이 지체되다가 상급 부대의 명령을 수령하기 위해 사단 지휘소로 이동하던 연대장 모네 중령이 탈영 혐의로 체포되었다는 것. 근데 모네 중령은 레지옹 도뇌르 훈장 수훈 경험이 있는 전쟁영웅 출신이었다. 이런 양반이 탈영할 리가 없잖아 이 XX들아! 심지어 모네 중령은 이걸 빌미로 중령 계급을 박탈당하고 레지옹 도뇌르 훈장 수훈자 명단에서 제명되기까지 했다.

한편 플라비니 장군이 지휘하는 21군단은 2군 차원의 역습을 위해 2개 군단급의 부대를 동원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군단 직할로만 3흉갑기병사단과 5경기병사단, 3차량화보병사단에 1기병여단 등을 보유했고, 여기에 2군 예하의 예비대와 10군단의 잔여 병력 등을 배속받은 것이다. 문제는 이들 역시 턱없이 느리게 움직였다는 것. 5월 14일 6시에 르 쉔느에 대기하고 있던 3흉갑기병사단은 13시가 돼서야 기동을 시작했다. 플라비니 장군이 지휘하는 역습부대 전체는 무려 17시 30분이 되어서야 공격 준비를 완료했다. 이 시점에 구데리안이 측방 위협을 무시하고 돌격을 주도하고 있었음을 감안하면 프랑스군이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였다고까지 할 시점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다시금 연합군에게는 천추의 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더 큰 실책이 터지고 말았으니... 겁에 질려 후퇴한 병력들과 역습에 실패한 10군단 예비대를 확인한 플라비니 장군이 역습 자체를 취소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집중되어 있던 기갑부대를 산산조각으로 해체해 분산 방어에 투입하기까지 한 것.

그리고 이러한 프랑스군의 역습 좌절은 스당 역습에 있어 핵심 교두보가 될 수 있는 스톤(Stonne)을 공세적 방어의 일환으로 10기갑사단으로 공격한 구데리안의 공이 컸다고 할 수 있다. 와해되어 후퇴하는 프랑스군이 플라비니의 역습 포기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감안하면, 만슈타인이 제시한 개념을 구데리안이 현실로 옮긴 셈이다. 그리고 프랑스군과 독일군은 이 스톤 고지를 두고 피로 피를 씻는 치열한 접전을 벌이게 된다. 그로스도이칠란트연대를 배속받은 10기갑사단은 5월 15일 새벽에 스톤 고지 일대에 출현했고, 선형 방어 사상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는 프랑스군은 스톤 고지를 공격해 탈환해야 한다는 일념 하에 스당에의 역습까지도 포기하고 스톤 고지 일대에서 고착되어 버렸다. 그 사이 구데리안이 지휘하는 19기갑군단의 주력은 빠르게 서쪽으로 진격할 타이밍을 벌었던 것이다.

북동부전선을 총괄하는 조르주 장군은 샤를 욍치제 장군에게 분노를 터뜨리며 스당 일대에의 전면 역습을 재촉했다. 하지만 이미 분산되어 버린 병력을 재집결시키는 것은 매우 난해한 작업이 되어 버렸고, 5월 15일 14시에 예정되었던 스당 일대에 대한 역습은 18시 30분까지 늦춰지다 결국 취소되어 스당이 아닌 스톤 고지에 대한 반격을 준비하게 되었다. 더 웃기는 것은 취소 명령을 제 때 하달받지 못한 2개 전차중대가 국지적인 역습에 나섰고, 독일군을 유린할 했다는 것. 샤르 B1 bis 전차는 독일군의 37mm PaK 36 대전차포로는 거의 난공불락에 가까운 대상이었으나, 이 2개 중대는 자기들만 역습 중인 것을 알고 급히 후퇴했다. 결국 독일군을 스당 일대에서 저지할 수 있었던 유일한 기회는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사라졌다. 프랑스군은 9군과 신편된 6군을 바탕으로 독일군의 진격을 차단하려 했지만, 채 방어진형을 재구축하기도 전에 19기갑군단은 프랑스군이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의 가공할 속도로 기동하고 있었고, 5월 16일 아르덴 운하의 서쪽 구릉지대를 돌파하는 데까지 성공했다. 드디어 낫질이 대서양을 향해 뻗어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프랑스군의 이런 형편없는 대응은 프랑스군의 극도로 경직된 육군 교리에 큰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군은 1차대전의 교훈을 통해 화력 팩터가 기동 팩터를 충분히 압도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육군 교리를 정립했고, 화력 팩터의 집약적 운용을 위해 매우 정형화된 전투 개념을 도입했다. 그러나 이러한 군사 교리는 근본적으로는 1차대전 당시 프랑스군이 정립한 군사 교리와 다를 바가 없는 형태였고, 오히려 그 통제를 더욱 강화한 방식이었다. 이런 교리는 기동 팩터가 화력 팩터를 다시금 압도하기 시작한 2차대전과는 전혀 맞지 않는 방식이었다는 것이 프랑스군의 무력한 역습에서 드러난 것이다.

1.4.3. 41기갑군단과 15기갑군단의 마스 강 돌파

한편, 본래 구데리안의 19기갑군단과 병진하기로 되어 있었던 라인하르트의 41기갑군단 주력은 아르덴의 끔찍한 교통 정체 속에 갇혀 있다시피 하다가 병력의 진격이 매우 늦어지고 있었다. 2보병사단은 5월 14일에 이르러서야 도착할 수 있었고, 특히 8기갑사단은 구데리안이 이미 아르덴 운하 서쪽까지 진출한 5월 16일에야 마스 강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계획된 시간인 5월 13일 16시에 마스 강변에 도착한 것은 6기갑사단 예하의 1개 보병대대 뿐이었고, 어찌어찌 몽테르메(Monthermé)를 확보하여 작은 교두보를 만들기는 했지만 프랑스군의 방어 태세가 확고하여 위기를 겪고 있었다. 그리고 이 전선에서의 돌파를 성공하게 만든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기갑집단의 의미를 불신하는 보수적인 독일군 장군단이었다. 몽테르메에서의 정체를 핑계로 A집단군 사령부는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을 12군에 배속하려고 했고, 라인하르트의 41기갑군단을 12군 예비로 돌리면서 6기갑사단만 전선에 남기겠다고 협박명령했다.

지금까지 충직하게 야전군의 지시를 따라 왔던 클라이스트는 결국 참지 못하고 제대로 빡쳐서A집단군의 명령을 완전히 무시하고 예하 전 병력에게 공세를 지시했고, 6기갑사단은 고작 네시간 반만에 견고한 프랑스군의 방어선을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돌파에 성공한 6기갑사단장 베르너 켐프 장군은 도하를 완료한 가용 부대 전체를 묶어 프랑스군 후방 종심으로의 돌파를 감행했고, 결국 몽코르네(Montcornet)까지 성공적인 돌파를 이뤄낸 6기갑사단은 19기갑군단과 만나면서 프랑스 6군이 구축한 방어선을 무력화시켰다.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마스 강 중부 일대의 프랑스군 방어선은 사실상 완전히 붕괴되었다. 그리고 클라이스트 기갑집단 역시 존속할 수 있었다.

마스 강 북부에서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의 우측방 엄호를 담당하게 된 헤르만 호트의 15기갑군단은 프랑스 9군의 좌익 부대가 투입될 지역을 돌파하게 되었다. 15기갑군단은 벨기에군이 구축한 장애물과 아르덴 지역에서 지연전을 펼치는 프랑스군 경기병사단인 1경기병사단과 4경기병사단을 극복해야 했다. 15기갑군단 산하에 있는 2개 기갑사단 중 에르빈 롬멜이 지휘하는 7기갑사단은 5기갑사단보다 앞서 나가고 있었고, 5기갑사단 예하 31전차연대를 추가로 증원받아 마스 강 도하를 시도했다. 5월 12일 기준으로 기존의 목표였던 디낭의 교량은 도하 전에 폭파되었고, 폭파가 늦어진 이브와(Yvoir)의 교량도 독일군이 장악하기 직전 폭파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브와로부터 3km 남쪽에 위치한 우(Houx) 지역을 흐르는 마스 강에는 하중도가 있었고, 이 하중도와 강의 양안을 잇는 제방은 수위 조절 문제로 인해 폭파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 제방을 통해 5기갑사단이 도하를 시도하게 되었다. 7기갑사단은 우 남부와 디낭(Dinant) 북쪽에서 교두보를 형성하였고, 프랑스군의 격렬한 저항을 받으면서도 결국 우 남쪽의 교두보를 통해 마스 강을 도하했다.

도하 이후 7기갑사단은 5월 14일 옹에를 목표로 한 공세에서 롬멜이 전사할 뻔한 위기를 겪었다. 이 방향으로 7기갑사단 전체 전력이 투입되게 된 개요가 재미있는 게, 선봉 부대를 이끌던 비스마르크 대령에게서 옹에에서 포위되었다(eingeschlossen)라는 비보를 듣고 롬멜이 직접 진격한 데 이어 4군 사령관 귄터 폰 클루게 상급대장이 2군단 예하대까지 투입을 고려하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포위되었다는 게 아니라 옹에에 도착했다(eingetroffen)을 무선상의 발음 문제로 잘못 알아들은 것이었다. 결국 간신히 옹에(Onhaye)를 함락시키며 마스 강 서쪽 12km에 위치한 모르빌(Morville)까지 진출, 프랑스군의 방어선을 무너뜨렸다. 5기갑사단 역시 도하에 성공하며 오르바스티아(Haut-le-Wastia)를 함락시키는 등 맹활약을 펼쳤는데, 이 와중에 5기갑사단장 하르틀리프와 롬멜 사이에 교량 부설용 자재를 놓고 갈등이 벌어진다. 자세한 내용은 에르빈 롬멜 항목 참조.

1.4.4. 승패가 갈리다: 프랑스군 최후 역습 실패

한편 이 공세에 대해 프랑스군이 역습을 시도하지만... 이번에도 느렸다. 느린 정도를 넘어 스당 때보다 더 느리게 반응했다.

본래대로라면 4경기병사단의 일부를 배속받은 5차량화보병사단과 1경기병사단의 일부를 배속받은 18보병사단, 그리고 6전차대대를 바탕으로 역습을 감행해야 했지만... 우선 제일 먼저 독일군과 접촉한 18보병사단은 지엽적인 반격을 몇 차례 시도한 것을 제외하면 전혀 역습을 시도하지 않았다. 11군단장 마르탱 장군이 정오에 18보병사단 지휘소를 방문할 때까지 총 7시간 반 동안 2개의 교두보가 형성되고 있는 꼴을 그냥 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결국 마르탱의 불호령을 받아서야 상황인식을 한 지 8시간이나 지난 20시에 역습이 시행될 예정이었는데, 그나마도 21시로 늦춰졌다가 보병들이 지체되어 끝내 역습을 중단했다. 5차량화보병사단의 경우는 오전 2시에 독일군 보병들의 침투를 확인했는데, 5시간 반이 지난 이후에야 대응을 결심했고, 최종적으로는 오후 2시에 역습을 감행하기로 했는데 이나마도 1시간이 늦춰졌다. 거기다 루프트바페의 공습을 받아 역습에 나선 보병대대가 후퇴해야 했다. 재역습은 오후 8시 15분으로 잡혔지만, 보병의 이동이 지연되어 9시, 그리고 10시까지 연기되었다. 이러더니 역습을 지원하기로 한 포병대가 야간을 핑계로 작전 불가를 주장하며 아침까지 역습이 연기되었다. 그리고 다음날인 5월 14일 2군단이 역습에 나서 오르바스티아 일대를 잠시 탈환하긴 했지만, 이미 독일군은 옹에 남부까지 진출한 이후였다.

군단급 역습을 통한 대응에 실패한 프랑스군은 야전군 예비를 동원한 반격을 기도했다. 본래 1군 휘하에서 겜블루(Gembloux)의 간격을 메우기 위한 예비대로 대기하고 있던 1흉갑기병사단이 디낭 방면으로의 역습 준비명령을 하달받은 것이다. 하지만 5월 14일 오전 동안을 허비한 이후 오후 2시에 이르러서야 역습 명령을 전달받을 수 있었고, 2시간이 지난 이후에야 사단 선두 부대가 기동에 나섰다. 그리고 주둔지 35km 북쪽의 플라비용(Flavion) 북부까지 향하는 데 5시간이 지나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만약 1흉갑기병사단이 조금만 더 기동력을 발휘했다면 7기갑사단의 기갑부대를 모조리 쓸어버릴 수 있는 기회가 이 시점에 주어졌다. 1흉갑기병사단이 숙영지를 펼친 곳에서 고작 5km 떨어진 곳에 7기갑사단의 전차연대가 숙영지를 짰던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샤르 전차의 조루 수준인 항속거리였다. 연료 수송 부대가 하필 부대 후미에 처져 있다가 헤메는 통에 보급을 받지 못한 1흉갑기병사단은 절호의 호기를 놓치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 간신히 연료를 보급받나 했더니 공습으로 연료 수송 차량 상당수가 거덜나면서 보급이 더욱 늦어졌고, 간신히 연료를 보충하는 동안 독일군 기갑부대가 1흉갑기병사단을 기습했다. 선두에 선 것은 롬멜이 이끄는 7기갑사단. 다만 이 교전을 통해 롬멜이 1흉갑기병사단을 섬멸했다거나 1흉갑기병사단이 독일군 5기갑사단/7기갑사단의 협공에 당했다는 것은 잘못이다. 이유는 후술한다.

롬멜은 이후 5기갑사단 31전차연대가 전장에 도착하자 이들에게 전장을 인계하고 빠져나왔다. 한 마디로 말하면, 프랑스군 1흉갑기병사단이 상대한 것은 한 번에 1개 연대씩 총 2개 연대의 독일군 기갑부대였다. 결국 1개 기갑사단과 1개 전차연대의 대결이었는데... 프랑스군이 말 그대로 참패했다. 프랑스군 기갑부대는 무전기의 부재로 제대로 된 지휘통제를 받지 못하고 우왕좌왕했으며, 독일군 기갑부대의 협공 앞에 말 그대로 혼란스럽게 싸우다가 각개격파를 당했다. 전차의 개별 성능에서는 안드로메다급 차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연료의 부족과 지휘체제상의 혼란이 1흉갑기병사단에게 파멸을 부른 것이다. 결국 플라비용 전차전에서 독일군이 프랑스군 종심 깊숙이 진격할 기회를 얻고 제대로 활용하면서 9군이 펼치고 있던 방어선이 조각조각나고 말았다.

1.5. 강철의 대격돌 - B집단군의 딜 방어선 공격

A집단군이 진격하는 동안 관심에서 벗어나 있던 B집단군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다룰 필요가 있다. 상술한 바와 같이 B집단군은 주공 방향에 있어서의 혼선을 주기 위해서 A집단군의 우측면에서 강력한 조공을 가하고 있었고, 연합군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딜 계획을 발동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B집단군은 이 딜 계획을 통해 동원된 연합군 전력을 최대한 오래 붙들어 놓을 필요가 있었고, 그 선두에 선 것이 회프너가 지휘하는 16기갑군단이었다. 그리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출격한 것이 프리우 장군이 지휘하는 프랑스 1군 예하에 배속되어 있던 기병군단이었다. 시간을 살짝 거슬러 올라간 5월 12일, 연합군과 독일군의 가장 날카로운 창 끝인 기병군단과 16기갑군단은 안뉘(Hannut) 일대에서 대대적인 정면 충돌을 펼치게 되었다.

흔히들 이 전투에서 각기 415대와 623대라는 전차 수만 가지고 독일군이 월등히 우세한 전력을 바탕으로 싸움을 걸었다고들 평가한다. 하지만 이들 중 실질적인 전투력이 될 수 있는 전차의 수, 그리고 보조 전력의 수를 감안하지 않으면 곤란하다. 16기갑군단이 예하에 두고 있던 전차 623대 중 실질적으로 프랑스군의 전차와 맞대응할 수 있는 3호/4호 전차는 각기 73대/52대에 불과했다. 1호/2호 전차가 사실상 전력외나 다름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질적으로는 415대 VS 125대라고 봐도 무방할 상황이었던 것이다. 거기다 기병군단이 보유하고 있는 장갑차들은 1호/2호 전차에 필적할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당장 기병군단 예하에 있던 AMR-ZT-63은 1호/2호 전차와 비등한 수준이었고, 90여대의 파나르 178 장갑차는 4호 전차를 격파할 수 있는 25mm 주포를 장착하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프랑스군의 구태의연한 기갑전 교리/선형 방어전술에 있었다.

프랑스군이 전차 성능 면에선 월등히 앞서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5월 12일 오전 독일군 전차들이 안뉘에서 프랑스군 기갑부대와 정면 격돌을 펼쳤을 때, 독일군은 전차전에서 월등히 큰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기갑전에 있어서의 교리가 명확히 정립되지 않은 프랑스군은 무전기의 부족으로 인해 확실한 지휘 통제를 받지 못했으며, 제병협동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게다가 독일 공군의 맹폭을 받은 프랑스군 기갑부대는 전차전에서 벌어들인 이익을 다 까먹고 말았다. 더불어 구태의연한 선형 전술을 기갑부대에 적용하면서 기병군단은 상대적으로 분산되어 운영되어야 했고, 회프너는 이 약점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5월 13일, 16기갑군단은 선형으로 늘어선 기병군단 예하 부대 중 3경기계화사단의 책임 구역에 전체 전력을 집중시켜 돌파에 성공했다. 이 때에도 프랑스군이 전과는 더 뛰어났다. 프랑스군이 전차 105대를 잃는 동안 독일군은 160여 대의 전차를 잃었던 것이다. 하지만 기갑전에서 선형 방어전술을 고집한 탓에 3경기계화사단이 큰 피해를 입고 물러서자 2경기계화사단 역시 후퇴해야 했고, 프랑스 기병군단 전체가 전장에서 물러나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더군다나 기병군단은 후퇴하면서 제대로 된 지연전조차도 수행하지 못했는데, 지연전은 커녕 접적조차 유지하지 못했고, 일렬 종대 대형으로 신속한 철수에만 급급했다. 독일군 지휘관들은 이 상황을 노려 프랑스군의 전열에 끼어들었고, 포병은 피아식별조차 되지 않아 독일군을 제압하지 못했다. 이런 혼란 상황 속에서 회프너는 딜 방어선 일대까지 빠르게 육박하여 공세를 감행했다. 초기에는 보전합동이 되지 않아 4기갑사단이 큰 피해를 입고 회프너 역시 공세의 중단을 지시했지만, 명령을 수령하지 못한 3기갑사단이 프랑스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 성공하며 16기갑군단 전체가 겜블루 일대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한다. 이 와중에 프랑스군은 또 다른 실책을 범하는데, 후퇴한 기병군단을 대대급으로 분할하여 각 보병사단에 배속하는 선택을 한 것이다. 결국 집중된 화력으로 독일군에 대해 역습을 감행하는 선택지가 불가능해지면서 프랑스군은 독일군에 대해 작전술적 차원에서 역습을 감행할 수 있는 예비대를 상실하고 말았다.

요약하자면, A집단군의 측면을 위협할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세력인 기병군단이 B집단군의 강력한 조공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으면서 A집단군의 쾌속 진격이 이어질 수 있었다. 다만 전술적 차원에서는 16기갑군단이 큰 손실을 입었다. 당장 343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던 4기갑사단은 5월 16일 오전 기준으로 137대의 전차만이 가용한 상태였고, 이 중 4호 전차는 4대에 불과했다. 하지만 작전술적 차원에서는 독일의 공격이 제대로 먹혀든 것이다.

1.6. 대서양을 향한 질주, 그리고 제동

하지만 이러한 쾌속 진격에도 불구하고 독일군 장군단 내부는 심각한 노선 대립으로 곪아들어가고 있었다. 이는 전통주의자와 혁신주의자 사이의 갈등으로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문제는 과거의 선형 전술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였다. 전자의 경우 기갑부대가 고속으로 적 후방을 향해 진격하는 것은 측방을 그대로 노출하는 위험천만한 행위였다. 후자의 경우는 구데리안의 발언을 인용하는 것으로 설명을 대체할 수 있다. "기갑부대에게 측방 노출은 가장 유리한 상황을 의미한다. 그것이 길면 길수록 더 유리하다." 이 두 노선의 갈등이 결국 폭발한 것이 5월 17일 구데리안이 일시적으로 19기갑군단장 자리에서 해임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 사건을 보기 이전에,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가 어떤 위치에 있는 인물인지에 대해 먼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클라이스트는 구데리안으로 대표되는 혁신주의자와 보수적인 독일 장군단 사이에서 중간 조정자 역할을 맡고 있는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클라이스트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클라이스트는 귀족 가문 출신의 기병장교 출신 인물이다. 기병은 전통적인 프로이센 귀족 군인 계급의 자존심이라고 할 수 있는 병과였다. 그리고 이 기병으로 대표되는 구 프로이센 귀족 장교들은 독일군의 중추 파벌 중 하나였으며, 앞서 언급한 전통주의자를 대표하는 집단이었다. 실제로 1930년대 후반 즈음 기갑사단 대신 경사단(Leichte Division)이라고 하는 차량화된 기병사단 비슷한 것이 창설된 것 역시 보수적인 프로이센 귀족 장교들과의 정치적 타협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귀족 장교 출신인 클라이스트가 기존 귀족 장교층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와는 별개로, 클라이스트는 새로운 교리인 기동/기갑전에 대해 상당한 수준의 이해도를 가진 인물로 보인다. 구데리안은 클라이스트의 역량에 대해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유고슬라비아 침공/독소전쟁 등에서 보인 클라이스트의 역량과 전과는 그의 군사적 재능이 결코 범용한 장군 수준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이 부분에서 클라이스트는 보수적인 귀족 장교층과 새로이 등장한 소장파 기갑 장교들 사이를 조율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문제는 구데리안이 지나칠 정도로 혁신적이었다는 것. 보수적인 기성 장교층과 구데리안 사이에서 클라이스트는 필사적으로 양자 사이를 조율하려 노력했지만 구데리안의 급진적인 발상과 기동은 클라이스트가 조율할 수 있는 한계 너머까지 치닫고 있었다. 심지어 클라이스트가 하달한 전진 가능 범위 너머까지 구데리안이 이미 진격해 있는 경우가 발생하기까지 하면서 결국 클라이스트와 구데리안 사이의 갈등이 팽배하게 되었고, 또 빡쳐서 클라이스트가 일시적으로나마 구데리안를 직위해제시키는 과정까지 이르렀다. 이 갈등은 일단 일시적으로나마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을 배속받았던 12군 사령관 리스트가 직접 둘 사이를 조율해야 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클라이스트 기갑집단 산하의 기갑부대들은 5월 17일과 5월 18일 양일간을 사실상 제자리걸음으로 보내야 했다. 하지만 이 정지 사건은 보수적 독일 장교단에게서만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12군 사령관 리스트나 A집단군 사령관 룬트슈테트가 구데리안으로 대표되는 기갑부대의 고속 전진을 달갑게 여겼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궁극적인 정지의 책임은 바로 보수적인 독일 장군단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아돌프 히틀러에게 있었다. 도박사적 기질로 폴란드 침공과 프랑스 침공을 기획했던 히틀러는 작전이 최고의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순간 스스로 작전에 제동을 걸어 버렸던 것이다. 그는 1914년 마른 전투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당시 마른 강을 넘어 파리를 향해 돌격을 거듭하던 독일군 우익은 노출되어 있던 측방에 프랑스군의 강력한 역습을 얻어맞고 그대로 주저앉았으며, 그 결과는 결국 기나긴 참호전으로 이어졌다. 히틀러는 A집단군의 엄청난 고속 진격과 측방 차장을 신경쓰지 않는 기갑부대에게서 마른의 위기를 느꼈는지도 모를 것이다. 베니토 무솔리니에게 5월 18일 히틀러가 보낸 편지에서 이런 위기감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1914년의 마른 기적이 더 이상 반복되지는 않을 것이오!"

상황이 여기에 이르자 답답해진 것은 할더였다. 할더는 만슈타인 계획을 처음 보고받은 시점에서 보였던 우유부단해 보일 정도의 소극적 태도를 벗어던진 채 만슈타인보다 더 만슈타인다운 계획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정지 명령을 받은 상태에서 대서양 지역에 대한 포위망은 B집단군과 일부 기갑부대만으로 형성하고, A집단군의 정예부대를 투입하여 독일군이 정지한 동안 엔 강과 솜 강을 따라 방어선을 형성하려 하는 연합군을 포위, 대서양과 남측방 일대에서 동시에 거대한 포위망을 펼쳐 단 한 번의 승부로 연합군 지상군을 격멸한다는 것. 하지만 히틀러는 거의 신경쇠약 상태로 이 계획마저 강력하게 거부했다. 결국 남측방 일대를 공세적으로 방호한다는 만슈타인의 구상은 구데리안 기갑군단에게서 잠깐 꽃을 피우려 하다가 히틀러에 의해 채 피기도 전에 꺾여 버린 것이다.

결국 히틀러는 총참모부의 전권을 박탈, 최종적으로 남측방 일대에 2군과 4군, 거기에 12군을 투입하여 방어선을 형성한다는 계획을 지시했다. 하지만 이미 공황 상태에 빠지다시피 한 연합군이 남측방에서 역습을 당시 걸어올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당시 연합군 주요 인물들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북동부전선 사령관 조르주는 5월 14일 새벽 스당 돌파 소식을 듣고 울음을 터뜨렸으며, 그 날 저녁 프랑스 수상 레노는 윈스턴 처칠에게 스당 방면이 돌파되었으며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는 내용의 전문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처칠과의 통화에서 레노는 "우리가 당했습니다. 우리가 이 전쟁에서 패하고 말았습니다!"라고 선언했을 정도. 그리고 15일 저녁 프랑스군 총사령관 가믈랭은 공개적으로 전쟁에서의 패배와 더 이상의 희망이 없음을 선언했다. 유일한 전략적 예비대인 7군이 딜 방어선에 투입되면서 프랑스군은 투입할 수 있는 예비대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이 와중에 그 유명한 샤를 드 골의 역습이 감행되어 국지적인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후에 NATO 중부유럽군(AFCENT) 총사령관에 오른, 당시 대위였던 그라프 폰 킬만스에크는 드 골이 이끄는 4흉갑기병사단의 역습이 프랑스군의 유일한 "시간적, 공간적, 방향 면에서 완벽한 역습"이었다는 평가를 내렸다. 4흉갑기병사단이 받은 최초 임무는 엔 강 유역에서의 방어선 구축이었지만, 드 골은 과감한 역습을 지시했고, 독일군의 후위인 몽코르네 지점을 정확히 찌를 수 있었다. 4흉갑기병사단은 기존의 프랑스군이 보여 온 운용 방식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고속/집중된 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독일군의 기민한 대처와 항공우세, 그리고 완편되지 못한 전력 등의 한계로 인해 4흉갑기병사단의 역습은 국지적인 차원에 그쳤을 뿐이었다. 남측방으로부터의 위협에 대한 히틀러의 편집증적 우려가 연합군 전체의 작전술적 차원에서 현실화될 수 있을 가능성은 여전히 제로에 가까웠다.

한편 이러한 정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 명령을 사실상 무시하고 미친듯이 진격을 감행하던 독일군 부대가 있었으니...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에르빈 롬멜이 지휘하는 7기갑사단이 그들이었다. 정지명령이 떨어진 상태에서 전면적인 진격은 명령에 의해 금지되어 있었으나, 4군 사령관 클루게 상급대장은 역습 징후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보고받고 서쪽으로의 제한된 진격을 시도하기로 했다. 호트는 이 명령을 받고 7기갑사단에게 아벤 방면으로의 공세 명령-보다 엄밀히 따지자면 작전명령이라기보단 공세 준비 하달 명령이었지만-을 내렸다. 하지만 군단의 명령이 도착했을 때 이미 롬멜은 아벤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보다 엄밀히 따지면, 사단장과 전차부대만.

그리고 여기서 롬멜은 한바탕 대대적인 활극을 펼친다. 101요새사단의 방어선을 돌파한 7기갑사단은 그 후위의 2차 방어선까지 강력한 공세를 가해 돌파했고, 형성된 돌파구를 따라 종심 깊이 진격을 감행했다. 그리고 우연하게도, 롬멜의 진격로 일대에 프랑스군 5차량화보병사단의 주력과 18보병사단/1흉갑기병사단의 잔존 병력 일부가 숙영지를 잡고 있었다. 7기갑사단은 야간 숙영을 준비중이던 프랑스군을 완벽하게 유린하고 5월 17일 자정에 아벤에 입성하는 데 성공했다. 이 시점에 1흉갑기병사단 최후의 전차 16대가 독일군 기갑부대와 혈전을 펼쳐 큰 피해를 입혔지만, 결국 13대의 전차를 상실하고 급히 퇴각했다.

롬멜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서쪽으로 더욱 깊숙히 진격, 랑드르시(Landrecies)까지 진출해 상브르 강을 건널 수 있는 교량을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5월 17일 새벽 6시 30분, 롬멜은 단 2개 대대만 동반한 채 상브르 강을 건너 르카토 일대까지 진출한 상태에서 일단 진격을 멈추었다. 이 과감한 활극이 펼쳐지는 동안 후방에 남겨진 사단의 후방지휘소는 사단장과 전차연대가 사라졌다는 데 급분노한 군단에게 쪼인트를 까이고 서식명령을 수령해 사단장에게 전달하려 노력했지만, 기이하게도 롬멜이 멈춰야 할 타이밍에 롬멜의 무선 교신이 연이어 끊기면서 이 명령은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 결국 르카토(Le Cateau)에서 롬멜은 진격이 늦어지는 본대를 데려오기 위해 3호 전차 1대와 지휘장갑차만 동원해서 프랑스군 패잔병이 우글거리고 있을 동쪽으로 돌아가는 모험을 떠났다. 그나마 귀환 도중 3호 전차는 고장이 났으며, 이 와중에 롬멜은 지휘장갑차만 이끌고 퇴각하던 프랑스군들까지 포로로 잡아 아벤(Avesnes)으로 진격하고 있던 사단 본대와 합류하는 데 성공했다. 장대한 활극은 연장된 마지노 선으로 불리던 프랑스군 방어선을 돌파하며 돌파구를 형성하는 것으로 마무리지어졌다.

1.7. 연합군의 국지적 역습, 그리고 됭케르크

결국 5월 19일 할더는 끈질긴 설득 끝에 히틀러에게서 대서양 연안까지의 자유로운 진격을 마침내 승인받았다. 할더는 16기갑군단과 39군단의 지휘권을 헤르만 호트에게 넘겨 기갑군 규모의 기동부대를 편성했고, B집단군이 격렬한 공세를 통해 연합군을 붙들어 둔 사이 맹렬한 기세로 대서양 해안까지 진격하기 시작했다. 할더는 이 진격 당시를 회상하며 "당시 우리는, 혈통 좋은 명마가 기수에게 고삐를 잡혔다가 갑자기 입에 물린 재갈이 풀려 결승선으로 질주해 승리한 듯한 느낌이었다."라고까지 할 정도였다.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은 됭케르크로, 호트 기갑집단은 아라스로 격렬히 질주하며 연합군의 후방에 쐐기를 박아넣고 있었다.

그리고 이 과감한 진격으로 인해 기갑집단 중심의 선두부대와 후위부대 사이에 상당한 간격이 발생했고, 특히 아라스 일대에서는 폭 40km 정도의 회랑이 형성된 상태였다. 연합군이 이 일대를 찌른다면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 마지막 찬스에서조차 연합군이 제대로 그 찬스를 살려내지 못하고 말았다는 점에 있었다.

일단 5월 19일 가믈랭 장군이 작전명령 12호를 발령해 조르주 장군에게 독일군 선두부대 후방의 간격을 향해 "기동성을 갖춘 특수임무부대"의 진격을 명령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게 뭔가 구체적인 계획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명령문에 적힌 요구 사항은 ''모든 것은 1분, 1초에 달려 있다." 는 추상적인 문장 뿐이었다.
문제는 이 날 가믈랭이 보직에서 해임되고 74세의 노장 막심 베이강이 그 자리에 올랐다는 것. 베이강은 기본적으로 1차대전식 지휘 마인드를 가진 인물이었고, 직접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가믈랭의 즉각적인 역습작전 지시를 취소해 버렸다. 5월 20일 독일군이 이미 솜 강 하구의 아브빌(Abbeville)에 이르렀다는 걸 생각하면 이는 사실상의 미친 짓이었다. 명령이 취소되고 베이강이 한 일은 신임 내무장관 예방, 벨기에로 직접 날아가서 군 사령관/벨기에 국왕 예방이었다.

그리고 이 사이, 역습에 적극적이지 못한 프랑스군에게 실망의 끝에 결국 인내심의 한계에 이른 영국 원정군 총참모장 에드워드 아이언사이드 장군이 독자적으로 작전권을 행사해 아라스 일대에서의 역습을 감행하기로 했다. 아이언사이드는 영국 대륙원정군 사령관 고트 장군과 함께 1집단군 사령관 비요트 장군[4]을 방문해 역습 계획에 합의했다. 1개 기갑여단으로 증강된 영국군 2개 사단과 프랑스군 2개 사단, 거기에 1경기계화사단을 다시 배속받은 기병군단이 포함된 대대적인 계획이었고, 이 계획이 제대로 성과를 냈다면 독일군은 큰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기병군단과 1기갑군단이 맞붙은 안뉘 전차전에서 독일군이 입은 교환비에서 유추가 가능하다. 이 와중에 아이언사이드가 역습에 소극적인 비요트의 멱살을 잡기까지 했다.

문제는 사소한 부분에서 시작되었다. 사실상 절망에 빠져 있는 상태였던 비요트와 1군 사령관 블랑샤르는 작전의 전권을 5군단장 알트메어 장군에게 위임했다. 그런데 아이언사이드가 생각한 역습의 시점과 알트메어가 생각한 역습의 시점이 들어맞지 않았다. 아이언사이드는 무슨 일이 있어도 5월 21일 공세를 시작하는 것을 원했고, 그렇게 영국군을 움직였다. 하지만 블랑샤르는 알트메어에게 5월 21일부터 공세를 시작한다고 기재한 명령문을 보냈고, 알트메어는 5월 22일에나 준비가 완료된다고 보고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5월 21일의 아라스 역습은 사실상 영국군 단독으로 감행한 역습이 되어버렸다. 그 경과는 아라스 전차전 항목 참조.

결국 영국군의 아라스에서의 역습은 실패로 돌아갔다. 허망하게 3일이라는 시간을 허비해 버린 베이강은 5월 22일 발표된 베이강 계획에 따라 역습을 지시했다. 문제는 말은 베이강 계획이지만... 처칠의 표현을 빌리자면 베이강의 새로운 명령은 폐기된 가믈랭의 제 12호 명령과 비교했을 때 그만의 열정적인 어투 외에는 다른 점이 없었다는 것이며, 그나마 솜 강 남변의 3집단군이 제대로 된 역습을 실시하지 않으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5월 23일, 정말 최후의 역습을 감행할 수 있는 기회가 왔지만 아라스 역습에서 큰 피해를 입은 고트 장군은 프랑스군에 대한 신뢰를 접어버리고 전 부대를 대서양 해안으로 퇴각시킬 것을 명령했다. 더욱 심각해진 것은 1집단군 사령관 비요트 장군이 5월 21일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으면서 1집단군의 지휘 공백이 발생해 버린 것. 이 지휘공백으로 허둥지둥하던 프랑스군은 23일 예정된 역습을 계속 미루다가 결국 역습을 취소하기까지 했다. 프랑스군은 재앙을 막을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5월 24일, 독일군은 북프랑스 일대의 항구 대부분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유일하게 연합군이 통제할 수 있는 항구로 남아있는 곳은 됭케르크 뿐이었고, 대부분의 병력이 덩게르크 동쪽에서 독일군 B집단군과 접전을 벌이고 있는 상태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제 남은 것은 됭케르크 일대의 포위망을 향해 다가오는 독일군에 의한 포위 섬멸 뿐이었다. 그런데 이 시점에 바로 기적이 벌어지게 되었다. 됭케르크 일대에서 진격하고 있던 독일군이 정지해 버린 것.

자세한 사항은 됭케르크 철수작전 항목을 참조할 것. 할더와 브라우히치 등 독일군 참모부의 핵심 인사들은 어떻게든 히틀러를 설득하여 정지 명령을 취하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히틀러는 여기에 대해서만큼은 요지부동이었고, 결국 됭케르크 일대에 연합군이 방어선을 어느 정도 구축하고 됭케르크 철수작전으로 주력 병력을 철수시키기 시작한 5월 26일에야 정지 명령은 취소되었다. 3일 8시간에 이르는 제자리걸음은 연합군을 완벽한 몰락으로부터 구원한 것이었다.

이 사건에 대한 독일군의 입장은 한 문장으로 요약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늘이 주신 기회를 놓쳐버렸다. 이 말은 육군 총참모부 서방육군분석과장으로 재직하던 울리히 리스 소장(1944년 12월 기준. 침공 당시는 중령이었다)이 남긴 말이다.

2. 적색 상황(Fall Rot) - 1940년 6월

비록 한참 늦었지만, 덩게르크를 접수한 B집단군은 해안을 따라 남서쪽을 향한 공격에 나섰다. 프랑스군의 정예는 북동부전선에서 벌어진 교전을 통해 거의 붕괴되다시피 했다. 황색 상황에서 연합군이 상실한 가용 제대는 61개 사단에 이르는 숫자였다. 됭케르크 철수작전으로 영국군의 대부분이 철수하면서 연합군에게 남은 가용 제대는 고작 65개 사단에 불과했다. 예비대를 거의 상실한 연합군의 입장에서는 돌파된 전선을 메울 병력마저 사치에 불과했다. 적색 상황에 이른 시점에 연합군이 방어해야 하는 전선은 965km에 달했던 것이다. 이 시점에 독일군의 가용 제대는 142개 사단에 달했고, 독일은 영국 해협 일대의 제공권까지 틀어쥐고 있었다. 여기에 프랑스 내의 민간인들이 대거 피난에 나서면서 연합군은 기동로마저 상실한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군은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무너지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 이 시점에 독일군이 펼친 공세는 예상했던 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내선의 강점을 갖추고 있던 프랑스군은 강력한 저항을 펼쳤다. 됭케르크 철수작전으로 철수했던 10만 명에 이르는 프랑스군이 재차 상륙하여 방어선에 증원되며 프랑스군의 사기는 크게 올라 있었다. 이미 패전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는 프랑스군이었지만, 근 한 달에 이르는 교전으로 실전 경험을 쌓은 장교단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은 강력한 저항을 펼쳐 독일군을 저지했다. 5월 23일부터 28일 사이 프랑스군은 7군과 10군을 신편하는 데 성공했고, 베이강이 지휘한 고슴도치 전술을 통해 단단한 종심을 갖춘 프랑스군 방어선은 독일군에게 극심한 소모를 강요했다.

독일 B집단군이 파리를 공격하며 입은 극심한 손실은 이 시점에 프랑스군이 펼친 선전을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에리히 회프너가 지휘하는 16기갑군단은 재편된 이후 감행한 공세에서 거의 20%에 이르는 장갑차량을 손실했다. 1차대전에서 경험을 쌓은 베이강이 솜 강 일대에 펼친 단단한 방어선은 독일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던 것이다. 제공권을 사실상 장악한 독일 공군의 활약이 없었더라면 공세의 성공을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독일 공군은 손실을 감수하면서도 집중 운용되었고, 그 결과 프랑스군의 기동은 상당 부분 봉쇄되었다.

하지만 독일군이 승기를 잡았다는 사실 자체는 부인할 수 없는 판이었다. 프랑스 10군은 결국 심각한 손실을 입고 물러서야 했고, 손실에 비례해서 독일군의 진격 속도는 빠르게 상승했다. 6월 10일, 프랑스 정부는 파리를 무저항도시로 선언했고, 독일 18군은 프랑스군의 파리 방어선을 곳곳에서 돌파했다. 6월 13일 처칠은 영불 최고작전회의에 참석해 영불연방의 창설을 제안했지만 이 제안은 거부되었다. 6월 14일, 결국 파리는 함락되었다. 6월 18일에 이르면 롬멜이 지휘하는 7기갑사단은 셰르부르 항을 점령했고, 이 와중에 아직 철수하지 않았던 영국군 51보병사단의 항복을 받아냈다.

프랑스 본토에 남은 영국군은 6월 14일부터 25일까지 아리엘 작전(Operation Ariel)을 통해 위에 나오는 셰르부르 항 외에도 남은 프랑스 항구를 통해 자유 폴란드 군대나 프랑스 군대 및 수만 명의 민간인들과 함께 무사히 탈출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와중에 독일 C집단군은 A집단군의 마지노 전선 포위를 돕기 시작했다. 메츠(Metz) 일대의 요새망을 둘러싸 알자스 일대에서의 반격을 차단하는 게 작전의 목표였다. 구데리안은 이 공세에 참여해 베르됭(Verdun) 일대에 편성된 마지노 선을 강타했다. 6월 15일, 호랑이 작전(Unnternehmen Tiger)이 발동되었고, C집단군은 라인 강을 건너 마지노 선에 대한 정면 공세를 감행했다. 이 작전 자체는 사실 실패로 돌아갔다. 마지노 선의 방어력은 거의 무적이나 다름없었다. 일례로, 호랑이 작전 중 마지노 선의 북단에서 벌어진 8시간 동안의 전투에서 독일군은 297명의 사상자를 냈는데, 이 공세로 프랑스군에 발생한 사상자는 2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그럼에도 방어선을 방기하고 물러나야 했는데, 지금 마지노 선에 박혀 있는 부대가 사실상 프랑스군이 보유한 마지막 정예 부대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프랑스군의 현실을 잘 알고 있는 독일군은 공세를 통해 마지노 선에 프랑스군을 잡아 놓았고, 구데리안이 지휘하는 기갑집단[5]은 쾌속으로 진군했다. 6월 17일 구데리안은 프랑스-스위스 국경지대에 위치한 퐁타를리에(Pontarlier)에 도착했는데, 이 때 구데리안의 진격 속도가 어찌나 빨랐던지 독일군 사령부조차도 구데리안의 진격 속도를 믿지 못할 정도였다. 이런 진격을 통해 라인 강을 도하해 마지노 선을 돌파한 C집단군 예하의 7군과 연결되며 포위망이 완성되었고, 프랑스 2집단군은 50만 명에 육박하는 포로로 전락했다.

독일군 병사들은 한껏 흥분하여 사진을 찍고 승리를 자축했다. 독일군 병사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프랑스 정부기관에서 중요한 정보지들과 문서를 빼간 것이다. 프랑스의 스파이, 프랑스 안의 유대인들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서였고, 1919년 독일에게 치욕을 안겨 준 베르사유 조약의 원본을 즉시 히틀러에게 보내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수많은 아프리카 출신 흑인 병사들이 포로를 잡혔고 독일군이 이들에게 야만적 행동을 강요하며 선전활동을 한 후 전부 총살했다는 풍문이 있다.[6] 프랑스 작가 자크 타르디가 당시 프랑스군 전차병이었다가 전쟁포로가 된 아버지의 경험을 그린 포로수용소라는 만화를 보면 당시 프랑스 식민지였던 세네갈 출신 흑인 병사들이 독일군에게 잡힌 지 얼마 후 집단으로 총살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게다가 살아남은 흑인 포로들은 다른 프랑스군 포로들과는 달리 독일의 수용소로 이송하지 않고 프랑스에다가 따로 전용 수용소를 만들어 거기에 가두었다고 나온다. 작중에 아버지의 입을 빌린 작가의 말에 따르면 위대한 제국의 땅에 열등 인종을 들여놓고 싶지 않아했기 때문이었다고.



[1] 차이점이라면, 1940년 때는 차량이고 병력이고 너무 많아서 막혔던 것이고, 1944년엔 병력 수는 비교적 적당했지만 차량이 너무 무거워서 도로가 작살나고, 낮에는 연합군 전폭기들에게 사냥당하고, 결정적으로 연료가 없었다.[2] 실제 규모의 3배 이상으로 판단했다는 징후가 당시 항공기술 관련 언론 보도에서 종종 보인다. 독일 공군은 1만 대 이상의 전술기를 보유하고 있다 운운.[3] 쉽게 말해 강의 경로가 굽은 지역에서의 바깥쪽 하안선의 주변 일대를 뜻한다.[4] 참고로 스톤느 전투에서 B1 전차 1대를 이끌고 독일군 전차 13대를 격파한 피에르 비요트가 이 사람의 아들이다.[5] 이 시점에 구데리안이 지휘하던 19기갑군단이 기갑집단으로 재편되었다. 전격전의 전설에는 기갑군으로 승격되었다고 했지만 이는 책의 실수로, 독일군은 독소전쟁 이전에 기갑군을 창설한 바 없다.[6] 이 내용은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다큐멘터리 제 2차 세계대전, 2부 프랑스의 참패에서 나온 내용을 그대로 옮겨적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