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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더릭 윈즐로 테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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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Frederick_Winslow_Taylor.jpg
이름 프레더릭 윈즐로 테일러 (Frederick Winslow Taylor)
출생 1856년 3월 20일, 미합중국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
사망 1915년 3월 21일 (59세), 미합중국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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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기술자, 경영 컨설턴트, 테니스 선수[1]
학력 필립스 엑서터 아카데미
스티븐스 공과대학교[2]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명예박사
By 1930, Taylor's Scientific Management - despite resistance from unions and from intellectuals - had swept the developed world. As a result Marx's 'proletarian' became a 'bourgeois.' The blue-collar worker in manufacturing industry, the 'proletarian', rather than the 'capitalist,' became the true beneficiary of Capitalism and Industrial Revolution. This explains the total failure of Marxism in the highly developed countries for which Marx had predicted 'revolution' by 1900. It explains why, after 1918, there was no 'Proletarian Revolution' even in the defeated countries of Central Europe in which there was misery, hunger and unemployment. It explanes why the Great Depression did not lead to a Communist Revolution, as Lenin and Stalin - and practically all Marxists - had confidently expected. By that time, Marx's proletarians had not yet become 'affluent', but they had become middle class. They had become productive.
" 'Darwin, Marx, Freud' form the trinity often cited as the 'makers of the modern world.' Marx would be taken out and replaced by Taylor if there were any justice in the world. But that Taylor is not given his due is a minor matter. It is a serious matter, however, that far too few people realize that the application of knowledge to work created developed economies by setting off the productivity explosion of the last hundred years."

1930년까지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론노동조합들과 지식인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산업화된 세계를 휩쓸었다. 그 덕에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들은 '부르주아'가 되었다. '자본가'가 아닌 '프롤레타리아'였던 공장의 생산직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산업 혁명의 진정한 수혜자가 되었다. 이 것이 1900년까지 고도로 발전한 국가들에서 '혁명'이 일어나리라 예견했던 마르크스주의가 완전히 실패한 이유이다. 이 것이 1차 세계대전 이후 중부 유럽의 패전국들이 고난과 배고픔, 실업률에 시달렸음에도 '프롤레티리아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이다. 이 것이 세계 대공황레닌스탈린, 그리고 사실상 모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자신있게 예상했던 공산주의 혁명으로 이어지지 않은 이유이다. 그 때까지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들은 '부유'해지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중산층이 되었다. 그들의 생산성은 더욱 높아졌다.
다윈, 마르크스, 프로이트는 '현대 세계의 창조자'로 인용되는 세 사람이지만, 세상에 정의라는 것이 있다면 그 중 마르크스는 빠지고 대신 테일러가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테일러는 그가 받아야 할 것에 대해 사소한 것 하나 받지 못했다. 노동에 지식을 응용하여 촉발된 폭발적인 생산력이 경제 강국들을 만들었다는 것을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깨닫고 있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3]
피터 드러커,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 (1993)

1. 개요2. 명문가의 고졸(?) 아들3. 생산 현장에서 찾아낸 이론4. 과학적 관리론의 탄생5. 노동자와 기업가의 적이 되다6. 테일러주의와 테일러주의자7. 말년8. 평가9. 여담

1. 개요

프레더릭 윈즐로 테일러는 미국의 기술자이다. 세계 최초의 경영 컨설턴트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조직의 운영, 관리에 있어 처음으로 객관적 수치와 데이터를 도입하여 현대 경영학산업공학의 효시가 된 이론인 과학적 관리론을 정립한 사람이다. 대표 저서로는 1911년 발표한 '과학적 관리론'(The principles of Scientific Management)이 있다.

2. 명문가의 고졸(?) 아들

테일러는 1856년 3월 20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 북동쪽의 저먼타운(Germantown)에서 태어났다. 저먼타운은 독일계 퀘이커 교도들과 재세례파 신자들이 세운 마을이었다. 테일러의 집안 역시 퀘이커 집안이었는데, 아버지 프랭클린 테일러는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공부한 변호사로, 대부업을 겸업으로 하여 큰 돈을 벌었다. 어머니 에밀리 윈즐로는 1620년 메이플라워 호[4]를 타고 온 15명의 청교도중 한 명이었던 에드워드 윈즐로[5]의 후손으로, 노예제 폐지와 여성 인권을 위해 열정적으로 활동하던 인권운동가였다.

테일러의 어머니는 어려서부터 테일러에게 공부를 가르쳤고, 유복한 환경 속에서 테일러는 프랑스독일에서 2년간 유학을 하기도 하고, 1년 반 동안 유럽을 여행하기도 하였다.[6] 그 후 당시 여느 부잣집 도련님들과 마찬가지로, 테일러는 1872년 16살 때 뉴햄프셔에 있는 명문 사립 고등학교인 필립스 엑서터 아카데미에 입학한다. 테일러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변호사가 되기 위해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2년 후인 1874년 하버드 대학교의 입학 시험을 통과하지만, 갑작스럽게 시력이 악화되며 대학 진학을 포기한다.[7]

3. 생산 현장에서 찾아낸 이론

하버드에 입학하는 대신 테일러는 가족의 지인이 사주로 있던 '엔터프라이즈 유압 공작소'라는 펌프를 만드는 회사에 견습 생산직 기술자로 들어간다. 1879년에 4년간의 견습 생활을 끝마치고, 테일러는 '미드베일 철강'이라는 필라델피아의 한 철강 회사의 기계 공장에 노동자로 취직한다. 회사의 소유주 중 한 명이 테일러와 사돈지간이었던 데다가[8] 테일러 본인의 재능도 아주 뛰어났기 때문에, 테일러는 여러 차례의 승진을 거쳐 취직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기기 생산 공장을 총괄하는 관리직으로 승진했다.

공장에서 일하면서 테일러는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기계를 일부러 작동시키지 않거나, 가능하면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노동자들은 노동자가 생산한 물건이나 작업의 수만큼 수당을 받는 성과급 방식[9]으로 급여를 받고 있었는데. 노동자들이 일을 열심히 할수록 오히려 기업가는 작업당 수당을 줄여버렸고,[10] 노동자들은 일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손해를 보게 되니 가능한 일을 하지 않으려 드는 것이었다. 당연히 이는 기업가의 의도와는 다르게 원가의 엄청난 상승(...)을 불러왔고 테일러는 이런 비합리적인 급여 제도를 손보게 된다. 기존의 성과급 제도 대신 차등 임금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노동자 한 명이 하루에 생산할 수 있는 생산량을 결정해 급여로 계산하고, 열심히 일해 그 이상을 생산한 노동자는 급여의 50%에 해당하는 성과급을 주는 방식이었다.[11] 이 방식을 실행시키려면 노동자 한 명이 하루에 제품을 얼마나 생산할 수 있는지, 정확한 기준을 측정해야 했다. 그래서 테일러는 스톱 워치를 이용해 노동자의 일을 초단위로 계산하는 방식으로 계산하여 그 기준을 측정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테일러 시스템'이라고도 불리는 과학적 관리론의 시작이었다.

4. 과학적 관리론의 탄생

1890년부터 테일러는 세계최초로 경영 컨설턴트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제지업(製紙業)을 하는 '필라델피아 생산 투자 회사'라는 회사의 컨설턴트부터 시작하여 1893년에는 필라델피아에 독자적인 경영컨설팅 사무소를 차리게 된다. 그는 자신의 경영 체계를 완성하고 1895년 자신의 첫 논문인 '성과급 제도'(A piece-rate system)를 발표한다.

1898년 그는 '베들레헴 철강'이라는 철강 회사의 의 공장 생산 원가 절감을 위한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중 테일러는 선철을 운반하는 노동자들이 보통 정오까지 일하면 완전히 지쳐버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테일러는 '슈미트'[12]라는 노동자 한명을 선택해 스톱워치로 시간을 재며 일하도록 했다. 테일러는 슈미트에게 약 26분 동안은 운반 작업을 하다가 약 34분 동안은 앉아서 쉬게 하고, 다시 26분간 운반 작업을 하게 하고, 또 다시 34분간 휴식을 반복하는 방법으로 휴식과 노동을 반복하며 슈미트를 굴렸다일하게 했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다른 노동자들이 평균 12.5톤의 선철을 운반하는 동안 슈미트는 그 세 배가 넘는 47톤을 운반한 것이었다.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3년 뒤인 1901년, 테일러는 회사 간부들간의 갈등으로 '베들레헴 철강'에서 나오게 된다. 이후 테일러는 미국과 유럽 곳곳을 다니며 강연과 집필 활동에만 몰두했다. 놀라운 점은 테일러는 자신의 강연과 자문에서 한 푼의 돈도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13]

그러던 중 1910년, 미국 동부 지역 철도를 운영하던 '동부 철도 회사'가 운임 인상을 요구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당시 보스턴의 변호사인 루이스 브랜다이스라는 사람이 철도 회사를 비판하며 '철도 요금의 인상은 철도 회사들이 경영을 개판으로 하기 때문이며, 테일러의 방법을 쓰면 요금을 인상할 필요가 없다'라고 주장한다. 이 때, 루이스 브랜다이스가 테일러의 방법을 'Scientific Management', 즉 과학적 관리론이라고 불렀고, 이것이 테일러의 이론이 과학적 관리론이라는 이름을 갖게된 까닭이 되었다.

5. 노동자와 기업가의 적이 되다

동부 철도 회사 사건 덕분에 테일러는 순식간에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원가 절감에 관심이 많은 기업가들과 국부(國富)의 낭비를 걱정하던 많은 시민들에게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론은 매력적인 이론이었다. 1911년 테일러의 대표적 저서 '과학적 관리론'(The principles of scientific management)이 출간되었을 때 미국 내 스톱워치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도 했다.

반면 노동자들은 과학적 관리론에 상당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기업가들이 자신을 더 효율적으로 착취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스프링필드 조병창과 같은 국영 병기창이나 조선소의 노동조합의 반감이 심했다. 이들 노동조합에는 반드시 기존 회원의 자식이나 친척만 가입할 수 있었고, 자신들의 업무를 노조원이 아닌 노동자에게는 절대 알려주지 않았다. 이들이 당시 미국의 모든 무기를 만드는 노동자들이었기 때문에, 병기창이나 조선소의 경영자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이들 노동조합의 회원들만을 고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병기창과 조선소의 노동조합들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강력한 노동조합들이었다. 그런데 테일러는 이들의 업무조차도 과학적으로 연구, 분석하면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업무라고 주장했다. 자신들 지위가 약해질 것을 우려한 이들 노동조합이 테일러의 이론에 반감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사실 테일러는 노동자들이 그들이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힘들게 일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했으며 과학의 관리 아래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파업을 하지 않는다 같은 신화를 퍼뜨리고 다니기도 했다. 그는 The Principles of SCIENTIFIC MANAGEMENT에 의하면 일을 힘들게 하는 사람보다 의도적으로 일을 하지 않을 궁리를 하는 사람이 백 배나 더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생산성이 임금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서 생산성이 낮은 기업가들에게도 공공의 적이 되었다. 당시 기업가들은 무조건적으로 노동자들보다 높은 임금을 받았는데, 테일러는 생산성이 떨어지면 심지어 노동자들보다도 낮은 임금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6. 테일러주의와 테일러주의자

테일러가 노, 사 양측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과는 별개로 그의 과학적 관리론은 미국과 유럽을 거쳐 소련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그러나 테일러가 처음 주장했던 것과는 달리 기업가들은 '노사의 협조', '기업 이익의 공정한 분배', '기업에 대한 노동자와 경영자의 동등한 책임' 등 자신들에게 불리한 부분은 빼버리고 테일러의 이론을 받아들였다. '과학적으로' 노동자들을 착취하기 위함이었다. 왜곡된 테일러의 이론을 받아들인 경영자들은 과학적 관리론에 Taylorism, 테일러주의라는 이름을 붙이고 자신들 스스로를 Taylorist, 즉 테일러주의자라고 불렀다. 이 '테일러주의'라는 것은 테일러의 원래 이론과는 상당한 괴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과학적 관리론을 '비인간적 이론'이라며 매도하고, 테일러 역시 사람을 도구로 보는 비인간적인 학자라며 비판했다.

7. 말년

사람들의 오해섞인 비판에도 어쨌든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론은 이제까지의 산업 체계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으며, 이 공로로 테일러는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명예 과학 박사 학위를 받게 된다. 그리고 테일러는 교수로서 다트머스 대학교 경영대학원의 교편을 잡게 된다. 대학조차 제대로 나오지 못한 노동자 출신의 기술자가 아이비 리그 대학의 교수가 된 것이다. 다만 집안이 좋아서 순수 노동자 출신으로 보기는 어렵다. 당시 미국의 자본가 계층[14]은 학벌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JP 모건만 해도 대학을 6개월만 다녔는데, 그렇다고 노동자 출신으로 여기기는 어려울 것이다.[15] 프레더릭 윈즐로 테일러가 고속승진한 이유 중 하나는 좋은 배경 덕분이었다. 1915년 3월 21일, 테일러는 자신의 59번째 생일 바로 다음 날 폐렴으로 사망한다.

8. 평가

그 이전까지 기업의 경영은 사장의 직관이나, 경험과 같은 주관적인 요소들에 의해 경영 방침이 결정되곤 했다.[16] 당연히 기업의 생산성은 바닥을 기었고, 생산성이 낮으니 경제도 활발하게 굴러갈 리가 없었다. 비효율적으로 만들어진 제품들은 낮은 생산성과 높은 원가를 상쇄하기 위해 비싼 값으로 팔렸고, 부담은 모두 소비자에게 돌아왔다. 낮은 임금으로 하루하루 먹고사는 노동자들이 비싼 물건을 살 수가 없으니 기업의 이윤은 떨어지고, 노동자들은 더 헐값에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 하고, 빈부 격차는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져갔다. 악순환이 반복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공산주의와 같은 이론에 유혹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테일러의 과학적 방법론은 기업의 경영에 일대 혁신을 몰고왔다. 기업가들이 효율적으로 경영을 시작하니 기업의 생산성이 올라가고, 제품의 생산성이 올라가고 원가가 떨어지니 제품의 가격이 떨어져 노동자들도 쉽게 공장에서 만들어낸 제품을 구매할 수 있게 되었다. 공장의 매출이 올라가니 기업들이 성장하고, 기업들이 성장하니 경제가 활발하게 돌아가면서 대다수의 노동자들도 그 혜택을 받아 중산층에 진입하면서 이전보다 훨씬 윤택한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결국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론은 강한 경제력의 미국을 만들어 안으로는 미국의 경제적 황금기를, 밖으로는 제2차 세계 대전냉전의 승리를 견인해낸 이론이 된 것이다.

그러나 테일러의 이론을 왜곡하여 받아들인 사람들 때문에 테일러의 이론은 비인간적인 이론으로 매도되었다. 지금까지도 과학적 관리론에 대해 '아, 인간도 기계처럼 생산 수단으로 보는 그 천박한 이론?'이라고 생각하는 시각이 많다. 그러나 테일러는 현실적인 이론가였다. 그가 꿈꾸었던 이상적인 기업은 무조건 기업가들에게 유리한 기업이 아닌 생산성을 바탕으로 공정하게 기업의 이익을 분배하는 기업이었다.[17] 그래서 실질적인 일을 하는 노동자들에게도 생각처럼 불리하지는 않았다. 그는 펜대나 놀리는 인간들이 정말 쓸모가 있는지 의문을 가진 사람이었다.

비록 시대적인 한계는 있었으나 테일러와 과학적 관리론의 업적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었다. 프레더릭 테일러의 이론 덕분에 지금 우리는 인류 역사상 없었던 경제적 풍요를 누리고 살 수 있는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피터 드러커의 말마따나, 마르크스만큼이나 인류 역사상 큰 영향을 끼치진 않았을지 몰라도 그의 업적에 비하면 테일러는 확실히 과소평가되고 있다.

그는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노동에 대한 과학적, 객관적 접근을 통해 혁신을 이루어낸 혁신가이자, 현대 경영학의 토대를 닦은 최초의 경영학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9. 여담



[1] 1881년 US 오픈 남자 복식 부문에서 클라렌스 클락과 함께 우승을 차지했었다.[2] 원격 강의를 통한 2년제 학사[3] 다분히 정치적인 발언인지라 학계가 밝혀낸 사실관계와 달라 걸러들어야 하는 부분이 많다. 예를 들어 위에서 언급된 레닌 등 소련의 여러 사회주의자들은 모두 테일러주의를 대단히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포드 자동차 공장을 소련에 유치하고 아예 독자적인 연구소까지 차릴 정도였다. 그리고 마르크스 역시 전문화와 공정 효율화 등으로 인한 생산성의 확대와 노동자의 소득 증대에 대해 길게 서술하면서 테일러주의와 같은 방법론의 발전을 예측하고 그를 자본주의의 위대한 성취라면서 격찬했다. 마르크스가 '현대 세계의 창조자'로 언급되며 100년 넘게 최고의 학자로 추앙받는 이유 역시 이러한 현대 자본주의의 흐름들을 종합적으로 예측한 데 있다.[4] 1620년 '필그림'이라고 불리는 청교도들이 영국에서 박해를 피해 타고 온 배. 이 필그림들은 거친 항해 끝에 뉴잉글랜드 남부의 한 해안가에 간신히 도착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출항한 영국의 항구의 이름을 따 '플리머스'라는 도시를 건설했고, 플리머스는 훗날 13개 식민지 중 하나인 매사추세츠로 발전하여 결국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된다.[5] Plymouth 식민지 주지사다.[6] 당시 서구의 상류층 집안에서는 견문을 넓히고자 그란 투리스모라고 하여 자식들을 유럽으로 여행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7] 훗날 테일러는 1883년 27살의 나이로 스티븐스 공학대학교에서 기계공학 학위를 취득하긴 한다. 다만 학교에 다녔던 것은 아니고, 편지를 통해 공부했다고 한다.[8] 테일러의 여동생이 소유주의 아들과 부부였다.[9] 즉 노동자가 철강 하나를 생산할 때마다 얼마, 제품을 창고에 갖다 놓을 때 한 번당 얼마 이런 식으로 급여를 주는 식.[10] 가령 제품을 창고에 10번 갖다 놓으면 한 번당 1달러씩 주는데 일을 열심히 해서 20번씩 갖다 놓으니 한 번당 50센트씩만 주는 식. 당시 기업가들은 어떻게든 원가를 절감하려고 혈안이 되어있었고, 이 성과급 방식은 당시 기업가들이 보기엔 너무나 효율적인 방식이었다. 이론적으로는 노동자들이 일을 열심히 할수록 생산성은 좋아지고 원가는 절감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일을 열심히 할수록 손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최대한 일을 하지 않으려 했다. 지금 보면 말도 안되는 멍청한 경영 방식이지만, 당시의 기업의 경영은 대개 이런 식이었다.(...)[11] 쉽게 말하자면, 노동자 한명이 하루에 10개의 철강을 만들 수 있다고 치자. 하루에 10개의 철강을 생산한 노동자는 하루 10달러의 급여를 받지만, 만약 그 이상을 생산한다면 50%, 5달러의 성과급을 더 주어 총 15달러의 급여를 받을 수 있게 된다. 이번에는 노동자도 일을 열심히 할수록 돈을 더 받게 되는 것이다.[12] 슈미트는 나중에 테일러의 대표 서적인 ''과학적 방법론'에도 주인공 비슷한 역할로 나온다.[13] 이미 테일러는 태어날 때부터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재산도 많았던 데다가, 특허로 벌어들인 수입도 꽤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테일러는 베들레헴 철강에서 근무하는 동안 텅스텐을 효율적으로 잘라낼 수 있는 특수 철강을 발명하여 10만 달러,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약 250만 달러 가량의 큰 돈을 벌었다.[14] 학자들과도 사이가 별로 안 좋았다. 초기 미국은 자본가들에게 특권(투표도 일정 재산이 있어야 가능했고 군경도 자본가 밑에서 돈을 받고 일하는 게 합법인 수준이었다.)도 많았는데 학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확대하는 과정에서 이에 대항했기 때문이다.[15] 자수성가 문서 참조. 테일러도 기록을 살피면 확실히 듣보잡 집안들과는 달랐다.[16] 기존의 이런 전근대적인 경영 방식을 경영이 사장의 마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고 떠다닌다고 해서 '표류 경영'이라고 한다.[17] 그는 다른 자본가들과 달리 주주들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더 부정적인 편이었다.[18] 테니스 4대 대회인 그랜드슬램 중 하나로 꼽히는 대회이다.[19]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라는 뜻의 속어인 삽질이 아닌 정말 삽으로 땅을 파는 행위인 삽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