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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cd116><colcolor=#0072c6> 파르마 공작 피에르 루이지 파르네세 Pier Luigi Farnese, Duca di Parm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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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피에르 루이지 파르네세 (Pier Luigi Farnese) |
출생 | 1503년 11월 19일 |
교황령 로마 | |
사망 | 1547년 9월 10일 (향년 43세) |
파르마 공국 피아첸차 | |
재위 | 파르마 피아첸차 공국의 공작 |
1545년 9월 16일 ~ 1547년 9월 10일 | |
배우자 | 제롤라마 오르시니 (1519년 결혼) |
자녀 | 비토리아, 알렉산드로, 오타비오, 라누초, 오라치오(사생아) |
아버지 | 바오로 3세 |
어머니 | 실비아 루피니 |
형제 | 콘스탄차, 파올로, 라누초 |
종교 | 가톨릭 |
1. 개요
파르마 공국의 초대 공작. 아버지인 교황 바오로 3세에 의해 교회군 총사령관 및 파르마 공작에 임명되었다.2. 생애
교황 바오로 3세가 추기경이었던 시절 실비아 루피니라는 귀족 여성과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다. 바오로 3세가 적법한 자식으로 인정했음에도 자신의 출생에 대해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는데, 공작이 된 후에도 귀족들은 그를 "교황의 사생아"라고 부르며 경멸했다.청년 시절 동생 라누초와 함께 용병으로 활동했다. 전술과 전투에 능했지만 특유의 잔인함 때문에 사람들은 피에르 루이지를 멀리했다. 1527년 사코 디 로마에 참여해 약탈을 자행했다. 이후에도 농가를 약탈하는 등 악명을 떨치다가 교황 클레멘스 7세에 의해 파문당했는데, 아버지의 지시 아래 용서를 빌어 간신히 파문이 철회되었다.
1534년 10월 13일 아버지 알렉산드로 파르네세가 교황 바오로 3세로 선출되었다. 바오로 3세는 자신의 가문을 통치 가문으로 만들고 권력을 세습하기 위해 아들 피에르 루이지를 교회군 총사령관에 임명한 뒤 교황령에 속해 있는 파르마와 피아첸차의 공작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거칠고 방종한 성격의 피에르 루이지는 무거운 세금을 무는 등 폭정을 일삼았고, 모두 그를 싫어했다.
양성애자 또는 동성애자였다. 기록에 의하면 궁에서 공무를 수행하는데 동성 애인과 동행해 아버지에게 야단을 맞은 적이 있다고 한다. 아버지가 교황이며 본인은 교회군 총사령관임에도 피에르 루이지는 자신의 성향을 숨기지 않고 방종한 성생활을 이어갔다. 1537년에 마르케 요새를 시찰하던 도중 파노의 주교인 24살의 코시모 게리로부터 환대를 받았는데, 피에르 루이지는 그를 결박하고 무참히 강간했다. 파노의 능욕(Oltraggio di Fano)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기존의 악명에 더해져 피에르 루이지는 악마처럼 여겨졌다. 또한 역사가 베네데토 바르키(Benedetto Varchi)에 의하면 피에르 루이지는 자신이 교황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처벌받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교황령의 소년들을 강간했다고 한다.
1537년,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를 뒷배로 둔 콘도티에로[1] 페란토 곤차가의 지원 아래 카스틸리오네 후작, 아고스티노 란디 백작 등의 귀족들이 피에르 루이지 파르네세를 암살하기 위해 공모했다.[2] 공모자들은 파르마 공작의 방으로 쳐들어가 그가 죽을 때까지 수차례 칼로 쩔렀다. 시신은 창문을 통해 광장의 모두에게 보여진 뒤 구덩이에 던져졌다. 곧이어 페란토 곤차가가 파르마 공국을 차지했지만 바오로 3세가 페란토를 살인 혐의로 고발하고 손자 오타비오를 새로운 공작으로 임명하면서 파르마 공국에는 파르네세 가문의 통치가 이어졌다.